▲'장애인 유권자 참정권 보장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가 9일 늦은 2시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국가인권위원회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의 주최로 열렸다. |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의 정당한 투표 접근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어 온 사전투표소의 문제점이 오는 7월 30일 재보궐선거에서 또다시 재현될 것으로 보여, 장애인계와 선거관리위원회의 갈등이 예상된다.
6월 초 치른 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처음으로 사전투표제도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각 주민센터에 설치된 사전투표소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 속출해 장애인들의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실제로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아래 중앙선관위)에 요구해 받은 자료를 보면, 전국에 설치된 총 3508개의 사전투표소 중 1층에 투표소가 설치된 곳은 330곳, 1층은 아니지만 승강기가 설치된 곳은 772곳으로 전체의 68%를 넘는 2406개의 투표소가 장애인 접근이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선관위는 장애인 접근이 어려운 투표소에 대해서는 1층에 임시기표소를 마련하고, 투표 참관인 등이 신분확인 절차와 투표지 수령 등을 대신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했지만, 이는 ‘비밀투표 원칙’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투표하러 온 장애인 유권자가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에 장추련과 국가인권위원회는 9일 늦은 2시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장애인 유권자 참정권 보장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를 열고, 지난 지방선거 당시 드러났던 문제점에 대한 해법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나온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차차 개선해 보도록 하겠다”라고만 답하고 구체적인 대책 마련에 대해서는 확답을 피했다.
토론에 나선 중앙선관위 선거1과 이재만 사무관은 “우리가 꼭 장애인을 차별하려고 선거 제도를 운용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하지만 당장 이번 7.30재보선에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밝혔다. 사전투표소는 국가정보통신망에 있는 통합선거인명부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주민센터에 설치할 수밖에 없고, 다른 곳에 설치하기에는 장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계는 선관위가 장소 물색의 어려움을 핑계로 장애인의 온전한 참정권 보장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형숙 상임대표는 “지난 6.4지방선거에서 승강기 없는 2층에 투표소를 마련해 문제가 되었던 수원시 팔달구 매산로 주민센터의 경우 이번에도 장소 변경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지역 선관위로부터 들었다”라면서 “지역 선관위는 선거법상 국가정보통신망에 연결하기 위한 선 두 개를 설치할 수 없기 때문에 1층에도 투표소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법을 개정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라고 밝혔다.
이어 이 상임대표는 “직접 장소를 확인해 본 결과 1층에서도 충분히 투표소를 설치할만한 공간이 있었음에도, 주민센터와 선관위 측에서는 당일 민원 처리 때문에 1층 설치는 불가하다는 답변만 했다”라며 “결국 하루 민원 처리를 위해서 장애인의 투표권은 무시당한 것 아니냐”라고 비판했다.
장추련 장호동 활동가는 주민센터 이외의 장소에는 사전투표소 설치가 힘들다는 선관위의 입장에 조목조목 반박했다.
장 활동가는 “사전투표소 설치는 국가정보통신망의 통신장애를 대비해 (별도의) 선거전용통신망을 이용하거나, 무선 통신망을 암호화 구성하는 방식으로 다른 공간에도 설치가 가능했다”라며 “서울만 하더라도 상공회의소, 종합사회복지관, 문화체육센터, 구의회, 자원봉사센터 등 주민센터 이외의 장소에도 설치가 되어 있다”라고 지적했다.
장 활동가는 또 “선관위가 대안으로 제시한 임시기표소는 복잡한 투표진행절차를 만들어냈고, 임시기표소 설치 구역도 임의적이었다”라면서 “그저 접근이 불가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밀투표와 같은 선거의 대원칙들이 훼손되었다”라고 비판했다.
▲선관위의 장애인 투표권 침해에 대해 지적하는 장추련 장호동 활동가(가운데). |
장애인이 이용하기 힘든 ‘장애인 기표대’, “대책 마련해야”
이날 토론회에서는 사전투표소 문제뿐만 아니라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해 개선해야 할 부분이 다양하게 지적됐다.
장호동 활동가는 “이번에 새로 도입된 장애인용 기표대는 전동스쿠터를 이용하는 장애인만을 고려한 디자인이어서 오른손을 쓸 수 없거나 몸을 돌리기 힘든 장애인의 경우 이용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라며 “또한, 장애인용 기표대를 이용한 장애인 다수가 기표대 폭이 너무 좁다고 지적했다”라고 밝혔다.
또한 장 활동가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투표보조용구에는 교육감 후보를 제외하고는 후보자의 기호와 그 기호에 해당하는 점자만 찍혀 있어, 후보의 이름만 알고 기호를 모르는 경우에는 표를 찍을 수 없었다”라며 “투표 과정에서 자신의 기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지적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 장애차별조사1과 이보람 조사관도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이 조사관은 장애인용 기표대에 대해 “장애인이 혼자서 투표할 수 있도록 장애유형 및 특성에 맞는 기표방안을 마련해야 하며, 기표대 내에 보조인이 함께 들어가 보조할 수 있도록 기표대의 규격을 개선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시각장애인용 투표보조용구에 대해서도 이 조사관은 “기표 내용 확인은 투표의 필수적 과정의 하나이므로, 이를 수행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선거인과 동등한 참정권 행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라며 “시각장애인 본인이 기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인권위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권고안을 지난 5월 중순 중앙선관위 측에 제시한 상태이다. 이에 따라 중앙선관위는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라 권고 후 90일 이내인 8월 중순 전까지 이행 여부에 대해 답변해야 한다.
한편, 이러한 장애인 투표권 침해에 대한 법적 제재가 소송 대상이 될 정도로 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조한진 교수는 “장애인의 선거권을 확보하기 위한 현행 조항들은 대부분 임의조항이어서 법의 실효성을 약화시킨다”라면서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선거접근법’을 통해 실질적인 투표권을 보장하고, 주나 정당이 선거권을 침해한 경우 개인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미국의 경우처럼 공직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라고 제기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청중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