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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24살에 돌아가신 장인 제양(諸讓) 제문
2020년 11월 2일
왕양명이 사춘기 시절에 달래주었던 사람 몇이 있습니다. 첫째는 어머니, 둘째는 할머니, 셋째는 장인 제양(諸讓, 1439-1495, 1475년 진사) 부부이었습니다. 어머니는 13살 때 일찍 돌아가셨고 18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4살에는 장인이 제상을 떠났습니다. 할머니와 장모 두 분은 오래 사시면서 왕양명을 걱정하였습니다. 장인은 왕양명 사춘기 시절의 질풍노도를 이해하고 포용하고 왕양명의 아버지에게 아이를 너무 닦달하지 말라고 타이르기도 하였습니다.
왕양명이 어렸을 때 가난하였습니다. 아버지 과외교사를 하는 곳마다 따라다녔고 10살에 아버지가 정시(廷試)에서 1등 합격하여 이듬해 할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제일 번화한 장안가(長安街)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이때부터 왕양명은 사춘기에 들어서 각종 놀이(도박, 닭싸움 등등)에 빠졌고 아버지 속을 많이 썩였습니다. 어머니는 과거시험 공부에서 아들을 풀어주자고 주장하고 아버지는 더욱 열심히 공부시켜야 한다고 다투었습니다. 13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아버지는 계실과 측실을 얻었습니다. 왕양명의 질풍노도는 끝이 없어 심지어 만리장성 밖에 나가서 말을 타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 왕화와 아들 왕양명 둘 사이에는 소위 세대 차이가 있겠지만 서로 살아온 습관이 달라 다투었습니다. 왕화는 가난하게 살면서 돈과 권력이 없으면 곧 죽는다고 생각하였고 어떻게든지 각종 수단을 이용하여 출세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심지어 뇌물 사건에도 휘말려 사직서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왕양명은 아버지의 강한 삶 의욕을 싫어하였습니다. 왕양명은 도시에서 출세하려고 사람들과 어울려 비위를 맞추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기도 싫고 시골에서 가난하더라도 한가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결국에 왕화는 북경 같은 도시생활을 좋아하였고 왕양명은 사람 적은 시골생활을 좋아하였습니다. 아무튼지 서로 생활습관과 출세욕이 달랐습니다. 이러한 왕양명을 달래주었던 사람이 장인 제양이었고 어느 정도는 부자지간에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왕양명은 21살 북경 국자감에 다닐 때 몇 달 동안 장인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장인과 헤어질 때는 사위 왕양명에게 과거시험에 떨어졌으나 혼란한 세상에서 명예와 절조(節操)를 지키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왕양명이 이때 정서적 안정을 많이 찾았고 어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제양이 왕양명에게 당부한 명예와 절조는 왕양명 인생에서 중요한 생활 태도가 되었습니다.
장인 제양이 세상을 떠났을 때 왕양명은 부인 제씨와 함께 제물을 올리고 제문을 지었습니다. 왕양명이 장인을 많이 의지하였다는 깊은 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왕양명 49살에는 장모 장씨 80살 생신을 축하하였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제문을 올렸습니다.
왕양명은 부인 제씨가 자식을 두지 못하여 양자를 들였습니다. 나중에 부인 제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 첩 몇 명을 들여 친자식을 낳았습니다. 아무튼지 부인 제씨에게 잘하였습니다.
* 장모 장씨 자료 :
「왕양명이 49살 장모 장씨 80살 생신 축하 글과 이듬해 제문」
하곡학연구원, 2019년 3월 30일
* 장인 제문에 있는 몇 사람 인명이 누구인지 속경남 선생이 많은 자료를 찾아서 고증하였습니다. 덕분에 제문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 자료 :
속경남, 『왕양명 연보 장편』, 48쪽, 9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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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장인 개암(介庵) 선생 제문」(『姚江諸氏宗譜』, 권6):
홍치 8년 을묘해(1495, 왕양명 24살) 여름 4월 갑인 초하루에 북경(金臺)에서 국자감에 다니는 사위 왕수인은 처 제씨(諸氏)를 데리고 남쪽을 향하여 울면서 절을 올리고 돌아가신 산동포정사(山東布政司) 좌참정 장인 제공(諸讓, 1439-1495, 1475년 진사) 영전에 제물을 올리며 말씀드립니다.
아! 가슴 아픕니다. 누구인들 우리 장인께서 이렇게 가실 것이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장인 어른과 우리 아버지는 우정이 깊으십니다. 장인께서 이부(吏部) 낭중(郎中)에 계시면서 북경 순천부(順天府) 향시를 주관하셨던 성화 19년(1483, 왕양명 12살)에 우리 아버지를 찾아오셨고 저는 어린이 놀이에 빠져있었습니다. 장인께서 아버지에게 “당신 아들에게 내 딸을 시집보내겠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인께서는 제가 놀이에 빠졌으나 못났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어린 저를 이해해주셨습니다. 장인의 은덕에 감사드리고 장인의 아껴주심에 감격합니다. 제가 13살(1484)에 어머니(鄭氏, 1443-1484, 향년 41살)를 여위었을 때 아버지에게 위문 서신을 보내시고 저를 어린 나이에 맞게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홍치 기유년(1489년 왕양명 18살, 실제로는 1488년 왕양명 17살)에 장인께서 강서성(江西省) 좌참의(左參議)에 계실 때 서신을 보내 저를 부르셨습니다. 아버지는 “얘야, 너의 장인이 너에게 오라고 하시니 지체하지 말고 얼른 가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강서성 남창에 가서 7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이듬해 12월 아내를 데리고 여요현에 돌아왔습니다. 이듬해(1490) 정월에 할아버지(王倫)께서 돌아가셨고 처가 외할아버지께서도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고향 여요현에 돌아오셨고 장인께서도 고향 여요현에 돌아오셨습니다. 장인께서 삼년상을 마친 뒤 홍치 5년(1492, 왕양명 21살)에 북경에 올라가셨고 저는 절강성 향시에 합격하여 북경에 올라가셨습니다. 제가 여관으로 찾아가서 뵈었을 때 장인께서는 기뻐하시면서 “사위야, 너는 타고난 재질이 좋으니 절대로 자만하지 말아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이듬해 2월 회시에 낙방하였을 때 저는 가볍게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장인께서는 “잘되고 못 되는 것은 때를 만나야 한다. 막혀서 굴욕스럽더라도 너의 재능을 이루어야 한다.”고 달래주셨습니다. 가르침에 따라 늦은 밤에도 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몇 달 동안 장인 곁에 있을 때 저의 어리석고 고집스러움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장인께서 저를 포용해주시고 따듯한 정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시기에 저에게 마음 써주시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고 저는 결혼한 성인이었습니다. 저는 “훌륭한지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 나타난다고 합니다.”고 말씀드렸더니 장인께서는 장인께서 수긍하시고 제가 해야할 것을 일러주셨습니다. 장인께서 “장난삼아 말하였는데 네 말을 들어보니 정말로 그렇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북경에서 떠나실 때 저에게 명예와 절조를 지키라고 간절하게 일러주시고 성문에서도 한참 머뭇거리시면서 격려해주신 뒤에 떠나셨습니다. 누구인들 이렇게 헤어진 것이 영원히 이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아! 가슴 아픕니다. 장인과 헤어진 뒤 반년이 지나 장인의 행정 고과는 날로 좋아지고 사대부 여론도 환영한다는 소문을 듣고 저도 기뻐하였습니다. 지난해 서신에서는 남경에 일을 보러가신다고 말씀하시더니 5-6개월 동안 소식이 갑자기 끊어졌습니다. 오랜 뒤에 돌아가시는 길에 고향 여요현에 들르신다는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숙부(王袞)에게 보내신 서신에서는 아직 출발하지 않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오신다는 시간이 꽤 흘러 이상하게 여겼으나 아마도 해결하실 일이 있기에 늦으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누구인들 장인께서 갑자기 질병 때문에 쓰러지실 줄 알았겠습니까! 강서성 포정사를 퇴직하시고 여요현에 계신 위한(魏瀚) 선생께서는 갑작스런 장인의 부고를 받으시고 놀라서 쓰러지셔서 정신이 없으십니다. 위한 선생께서는 장인께서 평소에 잔병이 없으셨다면서 반드시 헛소문이라고 여기시고 아마도 장인을 누가 질투하였거나, 또는 반드시 잘못된 소문이라고 여기시고 잘못된 소문은 자주 일어난다고 여기셨습니다. 위한 선생의 서신은 2월 6일에 받았는데 숙부 서신을 받은지 17일이 지난 뒤이었습니다. 서신이 오가는 길이 1천리이니까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누구 소식을 믿겠습니까? 꿈인지? 생시인지? 만에 하나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한방문(韓邦問) 선생께서 여요현에서 북경에 오셨기에 찾아뵙고 조심스럽게 여쭈었습니다. 한방문 선생께서 “사실이다. 나도 가서 조문하였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가슴 아픕니다. 얼마 전까지 거짓 소문이라고 여겼는데 지금은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누구인들 장인께서 이렇게 되실 줄 알았겠습니까! 하늘이 장인을 이렇게 하셨단 말입니까? 장인께서 이러신데 더구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장인께서 돌아가셨으니 저는 앞으로 누구를 바라보겠습니까?
조정의 많은 신하는 장인의 진급을 논의하였습니다. 상소문을 올리려던 중에 부고를 갑자기 받았습니다. 아! 오늘에야 저는 장인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장인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다른 무엇을 말씀드리겠습니까? 장인의 여러 아드님(아들이 紘, 絃, 緝, 經 4명이고 장녀는 왕양명에게, 막내딸은 謝丕에게 시집 보냄)은 모두 성장한 성인이고 현명합니다. 장인께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무엇을 걱정하시겠습니까? 다만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은 어린 서자 2명(측실 周氏가 아들 2명을 낳았고 아들 繡는 당시에 9살이고 나중에 양자로 보냄)입니다. 현명한 형님 넷이 있으니 반드시 안전하게 돌봐줄 것입니다. 장인께서 예전에 저에게 “우리 형님(諸正. 형님 넷은 諤, 正, 詠, 諫이고 아우는 謐임)께서 자손이 없으시니 서자(諸繡)를 양자로 보내드리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는 서자 1명이었고 지금은 서자 2명입니다. 2명 모두 서자로 보내시려는 것은 장인의 뜻이 아니겠지요? 효성스런 형님들이 장인의 뜻을 따르는데 장인의 뜻을 차마 지키지 않겠습니까?
장인의 부고 소식에 저는 슬퍼서 목청껏 울다가 기절하였다 깨어났습니다. 멀리멀리 만리 밖에 하늘과 땅 끝에 있기에 저는 반쪽 아들(사위)이지만 돌아가셨는데도 수의를 입혀드릴 수 없습니다. 영구를 끌지 못하여 길에서 울지도 못합니다. 고향을 생각하며 가슴 아프고 마음은 칼로 찢는 것처럼 아픕니다. 저는 사실상 장인의 뜻을 어긴 적이 있으니 살아있는 동안에 부끄럽습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한스러움이 어찌 사라지겠습니까! 우리 아버지도 우시면서 “너는 그 분의 사위이니 얼른 영전에 제물을 올리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얼른 제물을 차릴 수 없었는데 슬픈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로 일어났기 때문에 제물을 모두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돌아가신 장인을 불러보았으나 바람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애통합니다. 영혼께서는 흠향하소서!
王陽明,「祭外舅介庵先生文」(『姚江諸氏宗譜』,卷6):
維弘治八年,歲次乙卯(1495,王陽明24歲),夏四月甲寅朔,寓金臺甥王守仁帥妻諸氏南向泣拜,馳奠於故山東布政司左參政嶽父諸公之靈,曰:
嗚呼痛哉!孰謂我公,而止於斯!公與我父,金石相期。公爲吏部,主考京師,來視我父,我方兒嬉。公曰:“爾子,我女妻之。”公不我鄙,識我於兒。服公之德,感公之私。憫我中年,而失其慈,慰書我父,教我以時。弘治己酉(1489,王陽明18歲),公參江西,書來召我,我父曰:“咨,爾舅有命,爾則敢遲。”甫畢婣好,重艱外罹,公與我父,相繼以歸。公既服闋,朝請於京。我濫鄉舉,尋亦北行。見公旅次,公喜曰:“甥,爾質則美,勿小自盈。”南宮下第,我弗我輕。曰“利不利,適時之迎。屯蹇屈辱,玉汝於成。”拜公之教,夙夜匪寧。從公數月,啟我愚盲。我公是任,語我以情,此職良苦,而我適丁。予謂“利器,當難則呈”。公才雖屈,亦命所令。公曰:“戲耳,爾言則誠。”臨行懇懇,教我名節,躑躅都門,撫勵而別。孰謂斯行,遽成永訣!
嗚呼痛哉!別公半載,政譽日徹,士論歡騰,我心則悅。昨歲書云:有事建業。五六月餘,音問忽絕。久乃有傳,便道歸越。繼得叔(王袞)問,云未起轍。竊怪許時,必值冗結。孰知一疾,而已頹折!西江魏公,訃音來忽,倉劇聞之,驚仆崩裂。以公爲人,且素無疾。謂必讒言,公則誰嫉;謂必訛言,訛言易出。魏公之書,二月六日,後我叔問,一旬又七。往返千里,信否叵必。是耶非耶?曷從而悉。醒耶夢耶?萬折或一。韓公南來,匐匍往質,韓曰:“其然,我吊其室”。嗚呼痛哉!向也或虛,今也則實。孰謂我公,而果然也!天於我公,而乃爾耶?公而且然,況其他耶?公今逝矣,我曷望耶?
廷臣僉議,方欲加遷。奏疏將上,而訃忽傳。嗚呼痛載!今也則然。公身且逝,外物奚言?公之諸子,既壯且賢。諒公之逝,復亦何懸?所不瞑者,二庶髫年。有賢四兄,必克安全。公曾謂予:“我兄無嗣,欲遣庶兒,以承其祀。”昔也庶一,今遺其二。並以繼絕,豈非公意?有孝元兄,能繼公志,忍使公心,而有不遂?
令人悲號,蘇而復躓。迢迢萬里,涯天角地。生爲半子,死不能襚。不見其柩,不哭於次。痛絕關山,中心若剌。我實負公,生有餘愧,天長地久,其恨曷既!我父泣曰:“爾爲公婿,宜先馳奠。”我未可遽,哀緒萬千。實弗能備,臨風一號,不知所自。嗚呼哀哉!嗚呼痛哉!尚饗!
(原文載『姚江諸氏宗譜』,卷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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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왕양명은 철학자라기보다는 어려서부터 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장인이 돌아가시자 쓴 제문인데 왕양명 젊을 때 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