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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감의 문학론·4
프롤로그 시
빛과 어둠
빛은
자신을 가리는 어둠이
그림자이다
어둠은
자신을 밝히는 빛이
그림자이다
기쁨 슬픔
선과 악이
서로 그림자이듯
눈과 귀도
서로 그림자다
보이는 것은 눈이 맡고
안 보이는 것은
귀가 맡고
전등불을 켜듯
눈을 감아 분명
어둠도 켜는 것인데
나는
아직도 어둠에는 없는
안 열리는
생각의 반쪽 저곳을
열고 싶다
1. 세계와의 살풀이
흉살을 미리 막기 위해서 우리는 살풀이굿을 한다. 이때 음악적 장단은 필수이다. 모든 주술적 연희나 살풀이에는 이 화해의 신비한 신(神)인 음악이 반드시 개입한다. 음악이란 무엇을 차별하고 분리하는 경계의 틈새를 없애주는 신비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음악은 이런 힘을 가졌고 우리는 어찌하여 음악의 이런 힘을 깨달은 것인가.
음악은 보이지 않는 어둠의 소리 미학이다. 소리는 우리가 볼 수가 없다. 눈을 감고는 사물을 소리로 인식한다. 눈을 감으면 아무리 힘센 태양 빛도 금방 전등불 스위치 누르듯 꺼져 버려 모든 사물의 형태는 어둠으로 잃는다. 이 후의 모든 인식은 소리를 듣는 귀가 담당한다. 보는 예술이 시각 예술이고 안 보이는 예술, 즉 듣는 예술이 음악이다. 그럼으로 해서 음악은 아무리 들어도 인간이 생각하는 언어로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베토벤의 월광곡을 만일 표제인 〈월광곡〉이란 말을 제거하고 나면 그 뜻을 객관적으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우리가 서로의 맺힘을 푼다는 풀이는 그 대상이 신이든 같은 사람이든 그 맺힌 감정의 골을 눈으로 볼 수가 없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그래서 안 보이는 것은 서로가 대화(소리)로서 밖에는 문제를 풀 수가 없다. 특히 사람에게 스며든 나쁜 귀신은 이 사람 말이 아닌 감동의 음악적 소리만이 전달되는 말이 되어 서로가 소통할 수 있다.
시문학의 힘이 왜 감정 전달의 힘이 센가는 자명하다. 운율이나 율격의 음악성 때문이다. 특히 글자란 위대한 놈은 소리와 시각을 같이 동반하여 수륙양용이다. 인간이 발명한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은 글자라고 나는 단언한다. 시청각을, 즉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을 두루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이 글자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둠을 대표하는 예술이 음악이다. 그래서 음악은 영혼의 예술이고 만인은 물론이고 천지 만물의 공통어이다. 그래서 신음이란 말이 나왔다. 뱀과의 공감도 음악으로 이루어지고 심지어 식물들도 음악은 듣는다고 한다. 신과 대화도 이 음악이 개입해야만 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언어적 주술이 그 자체의 음성적 소리만으로도 소통이 가능하지만 적당한 음악을 대동하는 이유가 서로의 소통을 통한 맺힘의 풀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종교의식에서 음악이 개입하는 것도 신과의 소통을 위해서이다.
문학의 힘 역시 언어의 힘을 빌린 살풀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영혼과 소통하는 원천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어둠의 위대한 청각 예술, 음악과 빛의 예술인 시각예술, 이 둘을 동시에 아우르는 문자예술로 그 크기를 3분할 때 우리는 저간의 생각 반쪽을 다시 챙겨야 한다. 어둠은 빛에 억압되어 그 위대한 값을 잃어 왔다. 불은 켠다고 하면서 어둠은 켠다는 말을 안 하고 빛의 종속으로 생각해 왔다. 어둠은 불을 끈다는 것으로 대신해 버렸다. 빛은 저와 동일한 무게의 어둠을 억압해 군림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감으면 순간 어둠을 켜고 인간 본래의 위대한 영적 존재로 깊은 사고의 영성을 발휘한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혼의 소리를 귀로 듣기 시작한다. 어쩌면 인간의 진면목은 이 어둠의 관리에 있다 할 것이다. 이 어둠은 어둠 아니라 오히려 참다운 영혼과 지혜의 밝음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지식, 감정, 의지의 3대 영역으로 모든 의식작용을 한다. 이 중 문학은 감정을 통한 인간의 의식작용 문제를 담당한다. 음악이 만인의 공통어이고 만물의 공통어이듯 인간의 감정 또한 이와 유사한 만인의 공통어이고 역시 만물의 공통어이고 어둠의 소리 예술 영역이다. 주지해온 바처럼 문학은 사실 그 기본은 모든 존재에 감정을 이입시키는데서 출발한다. 시심의 근원을 동심이라고 하는 이유와 같다. 모든 사물들은 물활성 내지 물신성을 가지고 있다 보아 사람과 똑같은 대화 대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다. 의인화(擬人化)를 전제하지 않고는 꽃과 대화할 수가 없고 달과 구름, 산과 대화할 수가 없다. 돌에 부딪혀서 넘어 지면서 돌을 향해 원망하는 말을 하는 것은 바로 이 의인화하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전제돼 있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감정적 의식행위는 일상적 실생활에서의 실용적 의식들 즉, 지식이나 어떤 윤리적 의지와는 아주 다른 지극히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실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감정 작용은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매우 자유로워서 삶의 모든 것들에 깃들여 어떤 정서적 가치를 가진다. 문학이나 예술의 대상에 제한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에 대해 왜 이런 긴 도언(導言)을 했느냐 하면 문학의 기본 바탕이 되는 이 인간의 감정이 아니면 저 음악의 아름다운 풀이처럼 사물 간의 화해가 불가능하며 가장 바람직한 삶의 빛을 받을 수가 없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서였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일체유심조라는 가르침처럼 시시비비를 따지는 분별심으로는 절대로 사물 간의 차별 경계를 지워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 정신적 의식 행위를 지, 정, 의로 나누어 주지적, 주정적, 주의적이라 하는데, 주지적이나 주의적인 사고는 그 사고방식의 바탕이 지극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일 때 쓸모가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한 치의 오차가 없을수록 훌륭하다. 가령 인간은 삼강오륜을 지켜야 옳은 인간이라는 인륜적 당위는 꼭 지켜져야 하기에 이런 주의적 문제를 지키지 못할 경우 질책을 받는다. 돈이 많으면 매우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입증되는 사실이기에 그렇게 돈을 만족하게 벌 수 없을 경우 불편하게 살 수밖에 없다.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주지적이나 주의적인 것은 틀리거나 맞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냉정한 차이의 가름이라서 즉 직선적이라서 반드시 어느 한 편은 그림자를 만든다. 직진의 빛은 용서를 하지 않고 등지는 자에게 그림자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빛과 그림자 관계를 다시 파고들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빛이란 어둠의 가치에서 빛을 발한다. 잠을 자야 하는 밤은 빛을 필요로 하지 않고 차단해야 한다. 그림자란 빛의 반대가 아니라 빛의 매우 유의할 결점이라고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따라서 주지적, 주의적인 양날의 칼 같은 차이 가름이 인생에는 문제라는 것을 삶의 필요 논리로 바꿀 수 있는 사고의 경직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진정한 가치문제에는 많은 지식이나 의지 문제를 아는 것은 필요 조건은 돼도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쉽게 말해서 삶의 행복은 돈으로만 해결되는 지극히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지적 빈틈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편리한 생활만으로 행복을 동일시할 수 없음은 절감하는 사실이 아닌가.
이렇게 주지적, 주의적 삶의 문제로 곤란에 처할 경우 이를 모두 화해하고 용서하고 생각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주정적 힘이다. 단칸방에서 몇 식구가 불편하게 비집고 살아도 개인의 주관인 주정적 사고로 이를 해소할 수가 있다. 주지와 주의의 사이에 주정이 끼어서 양쪽을 다 감싸는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좀 유치한 비유지만 주의적인 것이 할아버지이고 주지적인 것이 아버지고 주정적인 것이 어머니라 가정할 때 가족의 화목과 평화는 이 주정적 조화 기능에 있다.
문학은 모든 사물 간의 매우 경직된 경계를 지워버린다. 모든 종류의 차이나 차별을, 계급적 낙차를 녹여주고 지워준다.
그래서 실로 문학은 의사(擬似)놀이기도 하다. 실제로 밥을 짓는 것에 대해 소꿉놀이는 의사놀이이다. 이 의사놀이에는 일의 고통이 없고 재미가 있다. 같은 또래 친구가 한 쪽은 아버지 한 쪽은 어머니로 역을 바꾸어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체험한다. 이런 가짜 모방놀이는 실용적인 실제 밥 짓는 고통을 와해시키고 즐겁게 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일련의 감정적 놀이가 고뇌를 풀어주고 장차에 닥칠 노동의 고통을 와해해 준다. 사람을 잡아먹는 무서운 호랑이를 산신령이라고 하는 말도 가짜인 의사말놀이다. 요즈음 개그맨의 개그도 대표적인 말장난이고 의사놀이이다. 만화도 같은 범주에 든다. 모두 그 이면에는 아픔의 해소와 화해와 살풀이 기능을 가졌다.
사람이 살아가는 많은 과정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고통과 두려움과 분노와 슬픔 등등이 행복한 삶의 틈새를 마구 찢어 놓을 때 이 감정적 풀이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밝은 빛을 찾는다. 이렇기 때문에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의 기능은 실로 위대하다.
2. 문학의 진실
─언어적 모방
이 의사 놀이문제를 특히 문학에서는 보다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일찍이 철학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모방론을 주창했다. 모방이란 어떤 기존의 것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도 모방이지만 비슷하게 닮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모방의 본질이라 본다. 그래서 특히 플라톤의 예술 추방론은 유명하다. 플라톤은 화가가 산을 모방한 그림을 그릴 경우 있는 대로 다 그릴 수가 없고 부득이 그릴 것만 선택해서 구도를 잡고 어차피 물감도 인간이 만든 재료로 그려야 하니 실제 산의 진실에서 멀어진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림을 보고 산을 이해할 경우 산의 진실은 숨고 산의 가짜의식을 전달받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미술가는 시민들에게 진실을 왜곡시키는 위험한 자라는 요지이다. 물론 이는 사물의 이데아를 사물과 분리시켜서 우리들 눈앞의 현상들은 이미 이데아의 모방임으로 그림이 다시 또 모방함으로써 진정한 이데아로부터 한층 더 멀어진다는 이원론적 관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수정하여 카타르시스 문제를 들어서 예술의 옹호론을 폈다.
어쨌든 모방론은 그 성격의 가치문제에 관계없이 예술의 본질을 잘 간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방이란 이데아에 대해 이 현상계도 진정한 모방이라 할 수가 없지만 산을 그린 화가의 작품은 더더욱 눈앞의 현상인 산의 실체와는 거리가 먼 가짜 작품이다. 더구나 물감으로 종이 위에 그렸으니 산의 실체와는 가짜인 모방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화가는 산의 실체를 그리려고 한 것이 애초부터 아니라는 것이다. 가짜인 소꿉놀이처럼 가짜 유희였다. 산을 종이 위로 비슷하게 옮겨 놓고 보는 재미, 이를 방 안에 붙여놓고 산을 방 안에 불러들이는 재미, 산의 아름다움을 지극히 주관적이긴 해도 소유하는 재미 등등 전혀 실용성을 떠난 미적의식을 고양시키는 즐거운 의사 모방놀이다.
철학이 진전되면서 사물 밖의 이데아를 인간의 내부에서 찾게 되는데, 화가의 그림이 진정한 이데아에 접근하는 것이라는 근대 예술 미학으로 발전하여도 그 모방의 본질이 변한 것은 없다.
모방의 수단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다양하다. 앞에서 다룬 미술은 물감이 주된 모방수단이다. 음악은 악기의 소리가 모방수단이고 조각은 목재나 돌, 철 등등이 모방수단이다. 문학은 언어가 모방 수단이다. 본래는 청자들에게 전달하는 말소리가 모방수단이었지만 점차 문자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낭송은 아직도 말소리가 모방수단으로 쓰인다. 물감으로 그림이 의사 모방 놀이듯이 문학 역시 의사 말놀이다.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란 문장은 실제 황소가 그런 모양으로 우는 것으로 느끼고 본 현장을 문자로 옮겨 모방해 낸 것이다. 만일 이를 그림으로 모방수단을 바꾸어서 그려낼 수도 있을 것이다. 만화가는 만화 그림에 문자를 곁들여 모방해 냈을 것이다. 판소리계 소설인 심청전이나 춘향전은 실제로 그런 소설적 사실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종이 위에 문자로 실제처럼 모방한 것이다. 물론 판소리로 노래 불렀다면 직접 말소리로 모방한 것이다.
“나는 서울에 가서 경복궁을 구경하고 왔다”라는 문장은 이 문장 이전에 실제로 갔다 온 행동이 먼저 있었고 그 후 집에 와서 문자로 한 번 더 서울 갔다 온 것을 모방해낸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기록해 놓았다고도 할 것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그림으로 서울 갔다 온 행동을 모방해 놓을 수도 있을 것이고 말소리로 녹음하는 방식의 모방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누가 그림이나 글을 읽는 것은 그림으로 서울 갔다 오는 것이고 글로 서울 갔다 오는 것이다.
돌을 쪼아서 부처를 만든 불상조각가는 돌이라는 수단으로 부처의 실체를 모방해 낸 것이다. 실제 서울 갔다 온 행동을 다 보여주려면 수없이 많은 영상 촬영으로 그 길이가 어마어마하겠지만 문자의 문장으로는 “나는 서울에 갔다 왔다”란 큰 기번 주제 문장 하나면 거칠게나마 일단 모방은 된 셈이다. 좀 더 자세히 모방하려면 이 큰 주제 문장 안에 수없이 많은 문장이 계속 안으로 삽입되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서울 갈 때 타고 갈 교통수단, 서울 어디에, 누구를 만났고 등등 다 옮겨 놓으려면 무한정일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는 실제로 행동한 사실이나 비록 행동으로 직접 겪은 것이 아니더라도 기존의 학습된 지식들을 동원해서 상상으로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보고 이를 문장으로 다시 모방해 기록해 놓는 행위를 한다. 문학 작품은 문장으로 실제 현장의 사실과 진실을 모방해 낸 의사 놀이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의사 모방놀이를 우리는 왜 해야 하는가이다. 왜 산수화를 그려 가짜 풍경 놀이를 하는가, 왜 나무를 깎아서 가짜 동물 모양의 조각품을 만들어 모방놀이를 하는가이다. 이런 질문에 파고들어 가야 그 바닥에 이르러서 진실을 알게 된다.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그 모방놀이 가치를, 미학적 가치 측면에서, 지성적 가치 면에서, 윤리적 가치 면에서, 인간 심리학 측면에서 등등 다 답하려면 한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답해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에 대한 깊은 생각을 며칠 했다면 이를 문자로 다시 모방해 기록해 놓을 수가 있을 것이고 이 또한 생각을 다시 문자로 모방 놀이를 한 셈이 된다. 모방론을 이렇게 파고들면 이런 모방 행위를 인간은 왜하는가 하는 근본 문제로 다시 환원하게 된다. 더 넓혀 생각을 바꾸어 들어가 보면 인간의 문화란 모두 인간의 경험을 다시 여러 종류의 재료로 모두 모방놀이 해 놓은 것이 아니냐는 대답에 이르게 된다. 문학 원론 입문 초기에 문학의 특성을 다루면서 예술의 모방본능 문제를 다룬다. 아예 본능설로 얘기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 문화 일반을 모방론으로 접근해 보면 짐작이 될 것이다. 인간 본능이라고까지 주장하는 근본 이유를 충분히 알 만하기도 하다.
한편의 시 작품도, 소설도 , 수필도, 다 인간이 생각한 행위를 언어로 다시 구성해놓은 재모방물이다. 조각 작품이 많은 소재(돌, 나무, 철, 흙 플라스틱 등등)들로 가짜를 제작해서 모방한 것이다. 이 모방놀이를 우리는 예술행위라고 하는 것이다. 실제를 다 가장한 의사 행위가 아닌가?
이래서 예술은 다 실용적 도구성을 벗어나 있다. 고무신을 찰흙으로 만들면 신을 수가 없다. 실제 고무신은 예술품이 아닌 실용적 신발 도구이지만 흙으로 만든 고무신은 가짜 신이기에 예술품이 된다. 이 고무신을 아주 크게 만들거나 작게 만들어 실용적 도구성이 제거되면 그것의 미적 외형과 고무신이 가진 인간과의 오묘한 내면적 관계만을 생각하는 차원 높은 존재로 변한다. 거창하게 말해서 철학적 대상으로 부상한다. 예술은 철학적 이론이 아니지만 모두 철학적 대상이 된다. 이런 점에서 철학보다도 더 깊고 넓고 철학적이다. 철학적 사고는 이런 예술 작품에서 일어난다. 반 고흐의 작품 〈농부의 구두〉를 통해서 하이데거는 예술의 근원이란 유명한 철학 논문을 내 놓았다.
문학 작품을 미적 언어로 표현한 의미 있는 구성물이라 할 때 〈표현〉이란 말은 곧 실제를 대신해서 무엇을 겉으로 나타내기란 뜻이다. 표현(表現)이란 한자말의 뜻글자 본성인 철학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부처의 실제 몸을 대신해서 돌로 표현했다는 것은 부처를 돌로 대신 나타낸 것이다. 서양에서 시의 최초의 근대적 정의는 언어의 그림이라는 정의이다. 그림이란 실제를 대신한다는 뜻이다. 결론하면 표현이란 무엇을 대신한 나타내기다. 모방이란 뜻과 같다. 따라서 모방이나 표현은 반드시 그 이면에 숨은 뜻을 담아내기 위한 수단이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부처를 왜 돌로 대신 모방해서 영구적으로 두고 보는 것인가? 비록 돌로 표현은 했지만 진실은 본래의 부처의 불심을 놓치지 않고자 한 것 아닌가. 문학 작품에서 수단인 언어적 모방은 무엇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숨은 의미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보이지 않는 거기에 있다. 특히 시의 언어가 이미지를 구성해야 하는 이유도 고도의 표현기술 때문이다. 시를 기존의 언어의 의미로 쓰려고 형용사어, 부사어, 고상한 말 찾기, 아름다운 말 찾기를 한다면 모방이나 표현 대신 나타내기 본질을 전혀 모른다는 자기 무식 폭로다.
이래서 문학작품이 인간의 감정을 기반으로 한 언어적 모방 행위란 말은 그 숨은 뜻이 깊다. 정작 인간을 감동시키거나 신을 감동시키는 것은 언어 표현이 붙잡아내는 삶의 진실에 있다. 진실은 표현된 언어를 수단으로 재구성해낸 문장 행간에 존재하고 거기서 찾아낸 의미이다.
모방은 바로 이 진실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에 생기는 행위이다. 그래서 모방이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모방 행위를 통한 사물의 진실 찾기가 인간의 본능인 것이다.
결론하면 우리들의 문학적 행위는 인간이 삶의 진실을 찾기 위해 끝없이 언어적 모방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본능 행위이라 할 것이다. 문학을 넘어 인간의 문화 모든 것은 다 인생의 진실 찾기를 끝없이 하는 인간 본능 행위 소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의사 모방놀이가 단순한 재미 놀이가 아니라 위대한 창조 작업인 것이다. 실은 모든 창조 작업 그 이상 즐거운 재미가 어디에 더 있겠는 가. 이런 것을 지적 쾌락이라고 할 때 진짜 쾌락이 가짜 의사 모방놀이라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다음 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