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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 감수재 박여량의 두류산일록I(도천~군자사)
▣ 일 시 : 1610년(광해 2) 09월 02일~09월 08일
▣ 대상산 : 두류산
▣ 동 행 : 박여량[57세](전世子侍講院文學), 정경운[55세](남계서원임), 박명부[40세](합천군수), 박명계(박명부 동생), 신광선, 박명익, 이윤적, 노륜, 안국사 승려(처암, 운일), 악공(윤걸), 종[박여승의 종(혜금연주), 신광선의 종(피리연주), (박여량의 종(옥로, 손득)]등외(15명외)
▣ 일정&코스
• 9/2 : 함양 병곡면 도천리-어은정-목동 박춘수의 집
• 9/3 : 목동(함양군 휴천면 목현리)-탄감촌(휴천면 문정리)-용유담-군자사(마천면 군자리)
• 9/4 : 군자사-백모당-하동암(우리동)-옛제석당터-제석당
• 9/5 : 제석당-향적사(서천당)-중봉(제석봉)-천왕봉-천왕당
• 9/6 : 천왕봉-증봉(甑峰)-마암(중봉샘)-소년대(하봉)-행랑굴(현 마암)-두류암과 상류암 갈림길(쑥밭재)-상류암
• 9/7 : 상류암-초령(?)-방곡촌(方谷村)-신광선(愼光先)의 정자-최함씨의 계당
• 9/8 : 최함씨의 계당-엄뢰대(嚴瀨臺)-상사(上舍) 정여계(鄭汝啓)의 집-뇌계(㵢溪)-도천 감수재(感樹齋)
감수재(感樹齋) 박여량(朴汝樑)의 「두류산일록(頭流山日錄)」은 1610년 9월 2일부터 8일까지 7일 동안의 지리산 유람을 날짜별로 기록한 일기체 형식의 유산기이다. 형식의 구성은 지리산 유람을 하게 된 배경을 서술한 도입부, 날짜별로 이동한 장소와 견문 및 감상을 서술한 여정부, 여정을 마친 후 유람의 전체적인 감회를 서술한 마무리로 구성되어 있다. <感樹齋 朴汝樑의 지리산 유람과 그 인식(전병철)> 그동안 박여량의 「두류산일록(頭流山日錄)」 관련 논문은 다수 있었지만, 유람길 노정의 전 구간을 실제 답사한 기록은 없는 듯하다. 필자는 본고(本稿)에서 감수재 길 답사를 통해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옛 지명을 고증하고, 유람길의 노정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감수재 박여량과 고대 정경운(字 德顒덕옹)은 20대에 함께 함양의 탁영서실(濯纓書室)에서 『주자대전』을 읽었고 내암 정인홍의 문인이다. 지족당 박명부(字 汝昇여승)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합천군수를 지냈다. 이 세 사람은 함양이라는 지역의 공통점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국난극복을 위해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다.
감수재 박여량은 본래 9월 1일에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 字 여승汝昇), 등과 두류산 유람을 약속하였으나, 고대孤臺) 정경운(鄭慶雲, 字 덕옹德顒)에게 사정이 생겨 9월 2일 출발한다. 박여량은 어은대(漁隱臺)에서 정경운을 만나 팥두재를 넘어 목동마을을 향한다. 어은대(漁隱臺)의 위치는 불분명하다. 백연리 돌뿍(席卜) 마을 소고대 앞에 이은대(吏隱臺)가 있는데, 어은대(漁隱臺)는 유람길의 동선으로 보아 이 근처인 듯하다. 9월 1일 먼저 출발한 지족당 박명부는 아우 박명계와 사위 노륜과 함께 목동(현 휴천면 목현리 목동 마을) 이수의 집에서 묵는다. 다음날 지곡(현 유림면 손곡리 지곡 마을)에 사는 신광선과 합류하기 위해 지곡을 향해 출발한다. 하루 늦게 목동에 도착한 박여량은 비가 올 것 같자, 선군(先君, 돌아가신 아버지)의 옛 친구인 첨지(僉知) 박춘수(朴春壽)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박여량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그를 좇아가려 하였으나 이수 씨가 술을 가져와 마시고, 비도 올 것 같아 출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첨지(僉知) 박춘수(朴春壽) 씨의 집에서 묵었다. 첨지는 나의 선군(先君)과 동갑으로 76세나 된 노인인데도 귀와 눈이 밝고 기력이 강건하여, 젋은이처럼 우스갯소리를 곧잘 했다. 내가 옛 친구의 아들이라고 매우 정성껏 대접해주었으며, 하룻밤 묵어가라고 붙잡았다. 나 또한 아버지의 옛 친구이기 때문에 매우 공손히 대하였다. |
注 첨지(僉知)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준말. 조선시대 중추원에 속하는 정삼품 무관
다음날(9월 3日) 감수재 박여량과 고대 정경운(字 덕옹)은 용유담에서 지족당 박명부(字 여승) 일행을 만나기로 하고, 첨지 박춘수의 아들 박대주의 안내를 받아 지름길로 탄감촌을 향한다. 휴천면 목현리에서 휴천면 태관리를 지나 잔닥재를 넘으면 바로 탄감촌(炭坎村, 숯꾸지)이다. 이 길은 현재의 지적도에 지목이 도로로 나와있다. 탄감촌은 현재 휴천면 문정리이다. 1489년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는 탄감촌을 탄촌(炭村)으로 기록하고 있다. 탄감촌에 먼저 도착한 박여량은 정경운과 박대주(첨지 박춘수의 아들)가 박명부 일행을 기다리자고 하였으나, “먼저 가서 용유담에 자리를 잡고 주인으로서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고 용유담으로 향한다. 용유담에 도착한 얼마 후에 박명부와 동생 박명계, 사위 노륜, 지곡에 사는 신광선, 박명익 등이 피리꾼을 앞세우고 피리를 불며 도착한다.
용유담에 이르러 얼마쯤 지난 뒤에 박여승(박명부)이 동생과 사위 및 신광선(愼光先)∙박명익(朴明益) 등과 함께 왔다. 우리들은 먼저 왔다는 이유로 자못 뽐내는 기분이 들어 그들에게 우쭐댔다. 피리꾼 두 사람이 말머리에서 피리를 불었는데, 한 사람의 박여승의 종으로 혜금도 함께 탔고 한 사람은 신광선의 종으로 또한 피리를 잘 불었다. |
용유담에서 박명부 일행과 합류한 박여량은 이곳에서 한동안 머문다. 마천 유향소 별감 박대일이 노래 부르는 기생과 악공을 용유담으로 데려오기로 했기 때문인 듯하다. 박여량의 용유담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다. 용유당과 외나무다리인 略彴(약작)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略彴(약작)의 사전적인 의미는 한 개의 통나무로 놓은 다리, 독량(獨梁), 독목교(獨木橋)로 외나무다리'를 의미한다. 용유담에 통나무를 걸치기 위해 바위에 깊게 파 놓은 홈이 있다. 바위 홈을 보면 略彴(약작)은 서너 개의 통나무를 엮어서 만든 편목교(編木橋)로 이해가 된다. 편목교의 흔적은 지리산 골짜기 곳곳에 남아 있다.
용유담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외나무다리를 설치해 왕래하는데, 박여승과 그의 사위는 그 다리를 건너 가장 높은 바위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발을 뗄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아찔하였다. 또 따라가는 종들에게 위험한 곳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시켰다. 나는 늘그막에 이르러 지세가 험한 곳에 이르면 천천히 지나도 두려운 마음이 항상 마음속에 가득하다. 그러나 박여승은 40세의 한창 때인지라 기운이 왕성하고 의지가 강해 나갈 줄만 알고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바위 위로 올라간 것이다. |
일행 중 한 사람이 “이곳은 용이 놀던 곳이라서 이런 기이한 자취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지가 개벽한 뒤에 물과 돌이 서로 부딪치고 깎여 돌출되거나 구멍이 뚫리거나 우뚝 솟거나 움푹 파여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자, 박여량이 “다만 세상에서 전하는 대로 보는 것이 옳지, 굳이 다른 의견을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여 일행들에게 박수를 받는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박여량은 군자사의 유래도 전해오는 기록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이다. 마천 유향소 좌수(?) 박대주가 술자리를 마련해놓고 기생과 악공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결국 오지 않았다.
박여량은 일행들보다 먼저 길을 떠나 금대암 아래에 이르러 지난 일들을 회고한다. '고대 정경운과 금대암∙안국암(安國庵)∙군자사∙무주암 등에서 글을 읽었고, 1577(정축, 23세) 가을 9월부터 1584년(갑신, 29세) 여름 4월 사이에 금대암과 영신사에 한 번, 천왕봉에 두 번 올라갔다.' '산을 유람하는 것은 글을 읽는 것과 같다.'라는 선현들의 말씀은 거짓이 없다며 이렇게 자신의 소회를 이렇게 기술한다.
옛날 유람했던 바위∙봉우리∙시내∙계곡 등이 30년이 지난 지금에는 까마득히 잊혀져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다시 이 길을 지나게 됨에, 처음에는 긴가민가 하더니 중간에 생각이 되살아났고 나중에는 기억이 또렷해졌다. 내가 이를 풀이하여 옛 사람이 산을 유람하는 것은 글을 읽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인가 보다. 글을 읽을 적에 처음에는 다 기억할 수 없고, 거듭해서 여러 번 읽은 뒤에야 앞에서 잊었던 것이 떠오르고 전에 기억했던 것이 확실해지며 오래도록 읽은 뒤에야 본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되니, 산을 유람하는 것과 글을 읽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은 같은 이치이다. 옛 사람의 말은 참으로 거짓이 없다." |
박여량은 산골 백성 중에 건장한 자들을 불러다 임천을 업고 건너게 한다. 한참 후에 박명부와 정경운이 기생과 피리 부는 악공을 앞세우고 도착한다. 저녁을 먹고 이윤적(李允迪)과 박대주가 술자리를 베푼다. 박여량의 기록은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군자사에서 '박명부가 술이 너무 취해 기생의 치마 속에 손도 넣지 못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박여량의 시각에서 일행들의 몰상식한 행동에 촌철살인을 한 것이다. 군자사에 대한 기록은 10여 편의 유람록에 나오는데, 지리산을 유람하는 관리와 유생들의 숙소 역할을 하였다. 승병을 일으켜 임진왜란 때에 나라를 구했음에도, 조일전쟁이 끝난 후에 관리와 사족들의 적폐가 극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윤적(李允迪)과 박대주는 저녁밥을 먹은 뒤에 술자리를 베풀었다. 악공들의 연주와 기생들의 노래가 어우러져 한창 즐거울 무렵 나는 먼저 승방(僧房)으로 갔다. 취해서 자고 있을 때 웃고 즐기며 노래하고 북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이 되도록 아무도 자러 오지 않았다. 정덕옹 이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춤추고 놀았기 때문이다. 술자리가 파한 뒤에 박여승이 내 방으로 와서 청원향(淸遠香) 두 개를 가져갔다. 박여승의 오늘밤 계획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며 끝내 손도 집어넣지 못했다.(終不入手) 청원향 두 개도 자신이 사르지 못하고 두 기생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니, 웃을 만한 일이다. |
박여량은 군자사의 유래에 대하여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긍정적인 입장이다. 1783년 이덕무 청장관전서 군자사 사적(君子寺事蹟)에 이덕무는 '동사(東史)에 진평왕이 후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군자사라고 명명한 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라고 부정하고 있다. 이렇듯 영정사와 군자사에 대한 문헌의 기록은 俗傳(속전)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의문을 가질 이유는 있지만 진위를 고증할 수는 없다. 없는 답을 찾다 보면 지식의 함정에 빠진다. 선인들의 유람록에서 1807년 남주헌의 지리산행기에 군자사가 마지막으로 보이고, 1833년경 편찬된 「경상도읍지」에 '지금은 폐지되었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폐사된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군자사는 옛 이름이 영정사(靈淨寺)이다. 신라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에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이 절에 와 거처하였다. 그때 아들을 낳게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안국사(安國寺)도 이때에 그 이름을 얻은 듯하다. 전란을 겪은 뒤에 중창한 것은 법당∙선당(禪堂)∙남쪽 누각 뿐이다. |
「古諺傳 眞平王入此山時 聼封次占此而 其后居人皆以噤地云(옛날 이야기에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이 이산에 들어왔을 때에 봉지(封地)를 허락한 다음에 이곳을 차지하였다. 그 후 주민들이 모두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라고 한다.」 마천면 가흥리 당흥 부락에 구전으로 전해지는 진평왕 왕자 태실지가 있는데, 마천면 마애석각 명문에서 자세하게 소개하겠다.
영정사에 대한 기록은 1610년 박여량은 영정사(靈淨寺)로, 1611년 유몽인, 1643년 박장원, 1680년 송광연은 영정사(靈井寺)로 기록하고 있다. 1601년에서 1604년까지 함양군수를 지낸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태촌집(泰村集)에 '군자사 앞에 우물이 있는데 미나리 밭에 개구리가 없다.'라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군자마을에 본래 5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현재 2개는 남아있고 3개는 매립했다고 한다. 미나리꽝에 개구리가 없는 이유는 수온이 너무 낮아 개구리가 산란과 서식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군자마을 앞에 작은 소류지가 있는 것도 수온이 낮아 물을 데우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닐는지...
군자사(君子寺)는 함성(含城) 치소 남쪽에 있다. 곧 두류산 서북쪽의 기슭이다. 절 아래 우물이 있고 우물 가에 미나리밭이 있다. 옛날부터 개구리가 없다. 어떤 이는 우물의 발원처에 웅황(雄黃:광물, 살충제)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옳은지 여부는 모르겠다. 대체로 사물의 이치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영가(永嘉:안동) 성안에 모기가 없는 것이나 상주(尙州) 사불산(四佛山)에 칡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泰村集 제5권》 :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
2편에서 계속...
구송대 공원의 九松은 천연기념물 제358호(1983년 4월)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소나무 한 그루에 아홉 가지가 있어 구송이라 한다. 화산공 정대영(鄭大永, 진양인, 1838~1903, 당곡 정희보 선생의 10세손, 고대 정경운 선생의 8세손) 선생께서 이 소나무를 보살펴 키우며 그밑에 축대를 쌓아 호연지기의 장으로 구송대라고 하였는바, 오늘날 휴천면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목현리 구송은 소나무의 한 품종인 반송으로, 가지가 밑 부분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져 우산이나 쟁반처럼 옆으로 퍼진 나무이다. 이 구송은 1730년경 진양정씨 학산공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가지가 아홉 갈래로 갈라진 모양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구송이라고 불렀다. 현재 2가지가 죽고 7가지만 남았으나 나무 모양에 큰 변화가 없으며 나무 기세도 건강한 상태이다. 가슴 높이 기준 직경 1.6m의 크기로 나무의 나이는 300년으로 추정된다.
▶ 1610년 감수재 박여량의 두류산일록(도천~군자사)
경술년(1610) 8월 중순이 지난 뒤에 합천(陜川)의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 字 여승 汝昇), 고대孤臺) 정경운(鄭慶雲, 字 덕옹德顒)과 함께 9월 초하루에 두류산 유람을 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이 날 정고대(정경운)에게 일이 생겨 다시 다음날로 약속하였다.
○ 9월 2일(계묘).
도천(桃川)을 출발하여 어은정(漁隱亭)에 도착했다. 정덕옹(정경운)이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말머리르 나란히 하고 앞으로 나아가 목동(木洞) 이수(李秀)씨 집 앞에 있는 오래된 정자에 닿았다. 목동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박여승은 전에 초하룻날 떠나자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어제 그의 아우 박명계(朴明桂), 사위 노륜(盧腀)과 함께 와서 이수 씨의 집에서 자고 지곡(池谷)을 향해 출발한 지 한 식경쯤 지났다고 하였다.
우리가 그를 좇아가려 하였으나 이수 씨가 술을 가져와 마시고, 비도 올 것 같아 출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첨지(僉知) 박춘수(朴春壽) 씨의 집에서 묵었다. 첨지는 나의 선군(先君)과 동갑으로 76세나 된 노인인데도 귀와 눈이 밝고 기력이 강건하여, 젊은이처럼 우스갯소리를 곧잘 했다. 내가 옛 친구의 아들이라고 매우 정성껏 대접해주었으며, 하룻밤 묵어가라고 붙잡았다. 나 또한 아버지의 옛 친구이기 때문에 매우 공손히 대하였다.
○ 9월 3일(갑진) : 용유담에서 박명부 박명계, 신광선, 박명익, 이윤적 노륜 등이 합류함.
맑음. 이수 씨가 동생과 조카를 데리고 아침 일찍 와서 인사를 시켰다.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그들과 함께 먹었다. 이수 씨가 두 아들이 지은 부(賻)를 꺼내 보였는데, 형식미를 추구하는 취향이 많이 있었다. 식사를 한 뒤 곧바로 출발하여 박대주(朴大柱)로 하여금 앞장서게 하였다. 박첨지 집 뒤의 고개를 넘어 곧장 용유담(龍遊潭)으로 향했다. 박대주는 박첨지의 아들이다. 탄감촌(炭坎村) 앞에 이르러 정덕옹과 박대주가 거기서 박여승을 기다리려 하였다. 나는 허락하지 않고 “먼저 가서 용유담에 자리를 잡고 주인으로서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였다.
* 박대주 : 첨지 박춘수의 아들. 첨지는 첨지중추부사의 준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는 조선시대 중추원에 속하는 정삼품 무관이다.
용유담에 이르러 얼마쯤 지난 뒤에 박여승(박명부)이 동생과 사위 및 신광선(愼光先)∙박명익(朴明益) 등과 함께 왔다. 우리들은 먼저 왔다는 이유로 자못 뽐내는 기분이 들어 그들에게 우쭐댔다. 피리꾼 두 사람이 말머리에서 피리를 불었는데, 한 사람의 박여승의 종으로 혜금도 함께 탔고 한 사람은 신광선의 종으로 또한 피리를 잘 불었다.
* 박여승의 종(혜금), 신광선의 종(피리)
우리는 바위에 오르기도 하고, 냇물을 굽어보기도 하고, 서성이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앉아서 휘파람을 불기도 하였다. 동쪽으로 보나 서쪽으로 보나 그 장엄한 경관이 빼어났고 수석도 기괴하였다. 내가 둘러앉아 신군이 가져온 술을 마시자고 하였다. 좌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곳은 용이 놀던 곳이라서 이런 기이한 자취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지가 개벽한 뒤에 물과 돌이 서로 부딪치고 깎여 돌출되거나 구멍이 뚫리거나 우뚝 솟거나 움푹 패여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대꾸하기를 “다만 세상에서 전하는 대로 보는 것이 옳지, 굳이 다른 의견을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용유담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외나무다리를 설치해 왕래하는데, 박여승과 그의 사위는 그 다리를 건너 가장 높은 바위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발을 뗄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아찔하였다. 또 따라가는 종들에게 위험한 곳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시켰다. 나는 늘그막에 이르러 지세가 험한 곳에 이르면 천천히 지나도 두려운 마음이 항상 마음속에 가득하다. 그러나 박여승은 40세의 한창때인지라 기운이 왕성하고 의지가 강해 나갈 줄만 알고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바위 위로 올라간 것이다.
이곳에서 군자사(君子寺)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별감(別監) 박대일(朴大一)에게 노래 부르는 기생과 악공을 데려오라고 했는데, 제때에 오지 않았다. 박대주가 술자리를 마련해놓고 기생과 악공이 오기를 기다리려 하였다. 나는 날이 저물어 출발하면 산길이 험해서 반드시 곤경에 처하거나 넘어지는 걱정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먼저 길을 떠나 금대사(金臺寺) 밑에 이르러 절구 한 수를 읊조렸다.(시는 문집에 있음) 나는 타고난 자질이 시를 잘 짓지 못하는 데다 또 게을러서 시를 읊조리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이는 여러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다.
* 별감(別監) 박대일(朴大一) 조선시대 유향소(留鄕所)에 소속된 관직. 박대주는 고을 수령(마천 유향소 좌수?), 박대일은 마천 유향소의 관리인 듯하다. 유향소는 조선 초기에 악질 향리(鄕吏)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기 위해 지방의 품관(品官)들이 조직한 자치기구.
예전에 나는 정덕옹과 금대암∙안국암(安國庵)∙군자사∙무주암 등의 여러 절에서 글을 읽었는데, 그때 금대암을 구경한 것이 한 번, 영신사(靈神寺)에 오른 것이 한 번, 천왕봉에 오른 것이 두 번이었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기억해보니 대체로 정축년(1577) [23세] 가을 9월부터 갑신년(1584)[29세] 여름 4월 사이였다. 옛날 유람했던 바위∙봉우리∙시내∙계곡 등이 30년이 지난 지금에는 까마득히 잊혀져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다시 이 길을 지나게 됨에, 처음에는 긴가민가 하더니 중간에 생각이 되살아났고 나중에는 기억이 또렷해졌다. 내가 이를 풀이하여 “옛사람이 산을 유람하는 것은 글을 읽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인가 보다. 글을 읽을 적에 처음에는 다 기억할 수 없고, 거듭해서 여러 번 읽은 뒤에야 앞에서 잊었던 것이 떠오르고 전에 기억했던 것이 확실해지며 오래도록 읽은 뒤에야 본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되니, 산을 유람하는 것과 글을 읽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은 같은 이치이다. 옛사람의 말은 참으로 거짓이 없다”라고 하였다.
군자사 앞에 있는 시내는 험악하여 말을 타고 건너기에는 넘어질까 염려스러웠다. 산골 백성 중에 건장한 자들을 불러다 업고 건너게 하여, 먼저 절 앞의 남쪽 누각에 올랐다. 한참 뒤에 박여승과 정덕옹 등이 노래하는 기생과 피리 부는 악공을 앞세우고 도착하였다. 절의 승려가 산에서 나는 과일과 오미자차를 내왔다.
* 기생 2명, 악공 윤걸
이윤적(李允迪)과 박대주는 저녁밥을 먹은 뒤에 술자리를 베풀었다. 악공들의 연주와 기생들의 노래가 어우러져 한창 즐거울 무렵 나는 먼저 승방(僧房)으로 갔다. 취해서 자고 있을 때 웃고 즐기며 노래하고 북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이 되도록 아무도 자러 오지 않았다. 정덕옹 이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춤추고 놀았기 때문이다. 술자리가 파한 뒤에 박여승이 내 방으로 와서 청원향(淸遠香) 두 개를 가져갔다. 박여승의 오늘밤 계획(?)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며[終不入手 : 끝내 손도 집어넣지 못했다] 청원향 두 개도 자신이 사르지 못하고 두 기생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니, 웃을 만한 일이다.
군자사는 옛 이름이 영정사(靈淨寺)이다. 신라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에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이 절에 와 거처하였다. 그때 아들을 낳게 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안국사(安國寺)도 이때에 그 이름을 얻은 듯하다. 전란을 겪은 뒤에 중창한 것은 법당∙선당(禪堂)∙남쪽 누각뿐이다.
# 고을의 수령이 기생을 불러서 접대를 했는데 술이 너무 취해 오늘 밤 계획을 끝내 이루지 못했다는 군자사에서 해프닝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출처 : 박여량의 두류산일록(한국콘텐츠진흥원)
▶ 박여량(朴汝樑, 1554∼1611) 본관은 삼척(三陟). 자는 공간(公幹), 호는 감수재(感樹齋). 함양 출신. 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郎) 박현좌(朴賢佐)이며,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로 충순위(忠順衛) 이숙(李淑)의 딸이다. 노상(盧祥)의 문인이다.
1600년(선조 3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예조·병조·형조의 낭관과 북청판관에 이어 1608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가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격문을 돌려 많은 지원을 하였고, 정유재란에는 의병으로 황석(黃石)에 들어가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 군량을 조달하였다.
평생을 성리학과 『대학(大學)』의 무자기(毋自欺: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 것)에 심혈을 기울였고, 정온(鄭蘊)·오장(吳長)·박이장(朴而章)·박성인(朴成仁) 등과 교유하였다. 16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감수재문집(感樹齋文集)』이 있다. 출처 : 다음 백과
▶ 정경운[鄭慶雲, 1556~1610(?)]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 의병장이다.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덕옹(德顒), 호는 고대(孤臺)이다. 그는 함양읍 백연리(栢淵里) 돌뿍[席卜]에서 살았으며 주변에 위치한 위천수(渭川水)의 뇌계(㵢溪) 냇가에 고송반석(古松盤石)으로 경승(景勝)을 이룬 소고대(小孤臺)가 있었으므로 자신의 호를 '고대'라고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함양(咸陽)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도와 왜병과 싸웠으며, 초유사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왜란 당시의 의병 활동을 기록한 일기 《고대일록》(孤臺日錄)을 남겼다.
그의 몰년(沒年)에 관해서는 『晋陽鄭氏世譜』(517∼518쪽)에 1610년 정월 15일에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는 『고대일록』의 기록과는 다소간 차이가 나므로 정확한 몰년의 확인은 곤란하다고 할 수 있으며, 내암의 「문인록」에 네 번째의 문인으로 등재되어 있다.(編)
▶ 박명부(朴明榑, 1571~1639)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여승(汝昇), 호는 지족당(知足堂), 아버지는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박영(朴榮)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문화유씨(文化柳氏)로 판관(判官) 유희필(柳希畢)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급제,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에 보직되었다가 이듬해에는 저작(著作)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김성일(金誠一)·곽재우(郭再佑) 군막에 왕래하면서 군무(軍務)에 많이 협찬했으며, 1593년에는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였다가 환도(還都) 후 박사(博士)를 제수받았다. 그 뒤에 호조좌랑(戶曹佐郞)·해주판관(海州判官)·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나갔는데, 당시 합천에 정인홍(鄭仁弘)이 있었으나 그의 집에는 출입하지 않았다. 1614년(광해군 6)에 이이첨(李爾瞻)·정인홍 등이 광해군을 종용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도 유폐시키자, 그는 직언으로 항소하다가 관직을 삭탈당하고 축출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부수찬(副修撰)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자 그해 여름에는 대구부사(大邱府使)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죽산부사(竹山府使)·형조참의(形曹參議)·좌부승지(左副承旨)·공청도관찰사(公淸道觀察使) 등을 역임하다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재임 중에 병자호란을 당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강화(講和)를 반대하였다. 끝내 성하지맹(城下之盟)이 맺어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농월정(弄月亭)을 짓고 은거(隱居)하다가, 1638년(인조 16)에 예조참판(禮曹參判)·한성좌윤(漢城左尹)·도승지(都承旨) 등에 연이어 제수되었다. 저서로는 『지족당문집(知足堂文集)』 3책이 있다.
출처 : 다음 백과
첫댓글 작고 외로운 소고대, 이은대, 어은대가 비슷한 위치에 있겠지요?
시간이 갈수록 퍼즐의 조각들이 하나씩 맞아가고
다음 편에선 뭐가 나올지 기대 됩니다.
토욜 백무동에 문회장님을 뵙고
선생님이 다녀가셨단 이야길 들었습니다
우중에도 답사를 하셨다니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점필재길 15년, 감수재길 6년, 어우당길 3년...
도움을 주신 분들 덕분에 초벌 답사기를 왕성했습니다.
아홉모롱이길과 초령길의 벽에 막혀 진척이 없었을 때
칠성님과 산영님을 만나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두 분께 감사한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