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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9장 1-30절
1.『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17:6 및 18:1과 유사한 구절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 때에'라고 한 것은 본장의 배경이 17, 18장과 동일한 시대임을 암시해 준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레위인이란 점을나타내는 것은 당시 극도로 타락한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여실히 증거해 준다. 한편 여기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이란 에브라임 산지의 북쪽 끝 실로의 인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레위인이 그곳에 가류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레위인도 게르손의 아들인 요나단처럼 에브라임 산지를 떠도는 나그네였음이 틀림없다.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17:7에 나오는 레위 소년도 유다 베들레헴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그곳에는 레위인들의 거주지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이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했는데, 고대 사회에서 첩을 취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첩 때문에 기드온의 가정이 파멸된 것처럼 이 레위인이 첩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을 보여 주고 있다.
2.『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행음하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자나'는 주로 창기와 같은 직업적인 음란 행위나 또는 그와 같은 성향의 행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히브리 어에는 '자나'뒤에 '그에게 대항하여'라는 전치사 '알라이우'가 있어서 이 여인이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그 같은 행음을 하였음을 보여 준다. 이 레위인이 먼저 동일한 행음을 범하므로서 자기 첩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음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남편을 떠나'라는 말은 그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양자 간에 불화하여 서로 헤어진 것을 가리킨다. 레위기 21:7에 따르면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는 모든 레위인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못하도록 엄격하케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 레위인이 이같이 행한 것은 당시의 성직자들이 윤리적으로 얼마나 타락했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3.『그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맡하고” 히브리어 원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녀의 마음에 말하고”이다. 이것은 레위인이 진정으로 그녀와 다시 화해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율법상으로 살인죄, 간음죄, 부모를 치는 죄 등은 어떠한 제물로도 속할 수 없다. 그런데도 본문의 레위인은 자기 첩이 넉 달 동안이나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오히려 그녀를 연모하므로 다시 그녀를 데려오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거의 무시되고 있어 사회의 기강이 많이 흐트러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나귀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는 그의 첩을 태워 데리고 오기 위한 것임이다. 따라서 그 여자가 다시금 남편을 따라 나서게 된 것도 그 같은 남편의 세심한 배려에 마음이 동해서였을 것이다.
4.『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머물게 하매 그가 삼 일 동안 그와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머물게 하매'에 해당하는 '하자크'는 붙잡다', 제지하다'는 뜻으로 강권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레위인의 장인은 금방 그를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강권하여 몇 일 처가댁에 머물도록 종용한 것이다. 이렇게 자기 집에 머물도록 권하는 것은 대단한 예우이며 친절의 표시이다. 레위인은 처와 화해하는 일 뿐만 아니라 장인의 사랑을 얻는 데도 성공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삼일 동안 그녀와 함께 먹고 마시며 편히 쉴 수 있었다.
5.『넷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의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고 그대의 기력을 돋운 후에 그대의 길을 가라 하니라』
“그대의 기력을 돋운 후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의 마음을 쾌활하게 한 후에”가 된다. 여기서 `쾌활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세아드'는 `(마음을) 신선케 하다'라는 뜻의 동사 `사아드'의 명령형으로서, 여기에는 강한 권고의 뜻이 담겨 있다. 신부를 데려올 때 일정 기간 동안 처가댁에서 머문 후에 데려오는 풍습이 있었다. 따라서 레위인의 장인이 어떻게든 레위인을 그의 집에서 하루라도 더 유숙케 하려한 것은 아마 이 같은 풍습에서였을 것이다.
6.『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하니』
레위인의 장인이 그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연일 잔치를 베푸는 이면에는 사위에게 자기 딸을 부탁하는 당부의 마음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레위인의 첩은 행음하고서 남편과 헤어진 상태였으니 그 아비의 심정이 어떠했겠는 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장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사위가 자기 딸을 버리지 아니하고잘 살아주기만을 바랬을 것이다.
7.『그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하되 그의 장인의 간청으로 거기서 다시 유숙하더니』
레위인 장인의 과민한 마음과 레위인의 우유 부단한 성격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레위인의 장인은 아직도 자신이 사위의 환심을 살 정도로 충분히 대접치 못하였다고 생각하였기에 계속 사위를 집에 머물게 하려 했을 것이다. 반면 레위인은 장인의 호의틀 떨쳐 버릴 정도로 심지가 굳지 못하였기 때문예 계속 장인에게 이끌림 당했을 것이다.
8.『다섯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이르되 청하노니 그대의 기력을 돋우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 하므로 두 사람이 함께 먹고』
`해가 기울도록'이란 말은 `한낮이 지나도록'이라는 뜻이다. 대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한낮의 더위를 피하려고 아침 일찍이 떠나는 법이다. 그런데도 레위인의 장인은 낮 동안 층분히 휴식한 후 오후에 길을 떠나라고 말한다. 추측컨대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베들레헴에서 래위인이 거주하는 에브라임 산지 까지는 반나절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에 늦게 출발해도 괜찮았기 때문일 것이다.
9.『그 사람이 첩과 하인과 더불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보라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청하건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찍이 그대의 길을 가서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
오후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레위인은 그의 장인과 먹고 마시는 동안 그만 너무 시간이 지체되어 밤이 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라” 문자적 뜻은 `장막으로 돌아가라'이다. 한편 `장막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였다..
10.『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일어나서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 안장 지운 나귀 두 마리와 첩이 그와 함께 하였더라』
레위인이 밤중에라도 집으로 돌아가려 한 것은 아마 그 다음날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종교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자였으므로 안식일에는 성소에서 봉사하여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 맞은편은 예루살렘의 서쪽을 가리킨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 까지는걸어서 약 1시간 반 거리이다.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세겜 쪽의 에브라임 산지로 가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의 서쪽에 있는 도로틀 반드시 지나야 한다. 한편 여부스라는 이름은 여부스 족이 다욋 시대까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11.『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이 갔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십시다 하니』
레위인 일행이 예루살렘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이미 날이 어둑어둑 해졌다. 그러자 레위인의 종은 이처럼 레위인에게 여부스 사람의 성읍에 들어가 밤을 지내자고 간청한다. 왜냐하면 밤 에는 들짐승이나 도적때의 공격을 받기가 쉬우므로 더이상 여행을 계속하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인은 이방인의 성읍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부터 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종의 청을 거부했다.
12.『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가나안을 정복하였지만 아직 미 정복지가 남아 있었둣이 예루살렘 역시 다윗시대까지 가나안 후기 원주민인 여부스족의 성읍으로 남아 있었던 것을 일컫는 말이다. 기브아는 예루살렴 북쪽 약6.4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베냐민 지파의 지경이다. 또한 이곳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고향이기도 하다.
13.『또 그 종에게 이르되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가서 거기서 유숙하자 하고』
라마는 기브아에서 북쪽으로 약 3.2km 가량 떨어진 곳이다. 현재의 엘람으로서, 과거 여사사 드보라의 고향이자 사무엘의 활동 중심지이기도 했다.
14.『모두 앞으로 나아가더니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러 해가 진지라』
레위인 일행이 기브아에 도착했을 때 해가 완전히 져버려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라마까지 가지 못하고 베냐민 땅 기브아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15.『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
레위인 일행이 앉아 있던 거리는 성문 안쪽에 있는 넓은 광장으로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공회를 열거나 재판을 행하기도 하며 장사도 하는 그런 곳이었다. 레위인 일행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들을 환대하는 기본적인 예절을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기브아 사람들의 성품이 얼마나 악했는가를 보여준다. 즉 나그네를 사랑하고 대접하라는 것이 율법의 가르침 이었는데도 그들은 이를 철저히 무시하였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레위인과 그의 첩과 하인은 이방인의 성읍인 여부스에서 머물기를 마다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성읍까지 오면서 가졌던 기대를 한꺼번에 잊어버리고 낙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6.『저녁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레위인 일행에게 친절을 베푼 에브라임 출신의 노인 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기브아 성읍에는 타지에서 온 이 한 사람 외에는 정직한 사람이 없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거류하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르'는 '나그네(손님)로서 체류(거주)하다'는 뜻의 '구르'에서 온 말로, 타지에서 온 사람을 가리킨다.
17-18.『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넓은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본지라 노인이 묻되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 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노인이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을 때 레위인은 이처럼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대답을 했다. 당시 `여호와의 집` 회막은 실로에 있었다. 그런데 실로는 레위인의 집이 있던 에브라임 산지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레위인이 그의 첩과 화해하였기 때문에 화목제를 드리러 실제로 `여호와의 집으로 가고 있었을 것이다. 반면, 또 다른 사람은 이 레위인이 단지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고 말함으로써 그 노인에게 좋은 대우를 받기를 원했을 것이다. 실제로 레위인 일행은 그 노인으로부터 크게 환대를 받았다.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영접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사프'는 `받아들이다'는 뜻으로. 가벼운 선심을 쓰거나 계산에 의거하여 일정한 혜택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뜨거운 마음으로 열렬히 환영하는 것을 가리키는 `카라와는 엄연히 구별된다. 이로 보아 레위인 일행은 기브아에서 숙박비를 제공하려 해도 유숙할 장소를 얻지 못했던 것 같다.
19.『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여물이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인 우리들과 함께 한 청년에게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 하는지라』
레위인은 노인이 마음에 부담을 갖지 않도륵 하기 위하여 나귀 두 마리와 자신과 자기 첩과 종이 먹을 양식과 짚은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말 속에는 기브아 사람들에게 단지 하룻밤 묵고 갈 숙소만을 요구했는데도 그들이 받아주지 않았다는 탄식이 내포되어 있다.
20.『그 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이 노인은 레위인의 염려를 이해하고 안심시켰다. 여기서 `안심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솰롬으로서, 평안을 기원하는 히브리인의 인사이다. 이러한 히브리 인사에서 지난날 애굽의 종살이나 광야의 방황생활 중에서 히브리인이 얼마나 평안을 희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옛부터 거리에 앉아 있는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가 후히 대접하는 것이 히브리인의 관습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을 때는 공회 앞에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노인은 전통적 관습대로 나그네가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 상관없이 자기양식으로 그들을 대접하려고 했던 것이다.
21.『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이 노인은 레위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귀도 잘 먹였다. 이는 곧 그가 진정한 마음으로 나그네들을 사랑하고 대접하였음을 잘 드러내준다. 고대 근동에서는 여행자들이 주로 샌달을 신고 흙먼지 길을 다녔다. 그러므로 손님을 영접하는 주인은 반드시 발씻을 물을 내어놓는 것이 예의였다.
22.『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레위인과 노인의 만남을 다룬 이야기는 롯이 소돔 성에서 천사를 만난 이야기와 유사하다. “그 성읍의 불량배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네 벨리알”로서 `벨리알의 자손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벨리알은 `”무익한, `무가치한'이라는 뜻의 형용사로서 주로 사람과 결합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두들기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미테두페킴'은 강조형 동사로 `스스로 흥분하여 매우 세게 문을 두드리는 모습를 묘사한 말이다. 기브아 비류들이 온건한 태도로서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레위인을 끌어내리려 했기 때문에 집주인은 문을 열고 그들을 설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를 듣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후에 기브아와 통치자들에 의해 어떠한 정죄함이나 책벌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기브아 성읍 백성들 전체가 암묵적으로 이 일에 동참했음이 분명하다.
모든 사람이 그 집을 에워싼 것은 모든 사람이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관계한다”(웨네데아 וְנֵדְעָ֖ה , 기본형은 야다)는 말을 동성애로 연결시키면 안된다. 롯이 사는 소돔성에 있는 사람들도 자기가 믿는 신이 있는데, 자기가 믿는 신이 참 신인데, 롯이 하나님의 천사가 왔다고 하니, 따져서 확인해보려는 행동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천사라고 하는 자들을 만나서 자기들의 신을 말해주겠다는 것이다.
롯의 집을 찾아온 사람들은 그 성 사람들이다. 늙은이나 어린 아이나 할 것 없이 다 모였다. 그들이 롯에게 와서 정말 천사들인지 확인해보겠다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자 할 때, 듣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정말 하늘의 말씀인지를 확인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기들이 믿는 신을 참신이라고 오히려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게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참 진리를 말하면 아단시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도의 심령 속으로 재림하실 때는 교회 사람들이 다 확인하려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단순히 세상이 끝나는 날 심판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종말 때는 말씀이 없는 기갈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23.『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망령된 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하네발라는 수치스러운 일이나 어리석은 행위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주로 영적 간음을 지칭한다.
24.『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표면적으로 살펴보면, 노인은 기브아의 비류들이 워낙 완악하여 말로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레위인을 보호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자기 딸과 그 레위인의 첩올 그들에게 내어 주겠다고 말했다. 이는 이스라엘 사회의 가부장적 권위를 잘 반영해 주는 실례이다. 당시에는 남성의 권위로 말미암아 여성이 학대받거나 능욕을 당한다 해도 여성은 말없이 순종하여야 했다. 그러나 노인이 취한 방책은 최선의 것이 아니었다. 즉 하나의 악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악을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롯의 이야기를 통해서 볼수 있듯이, 영적 간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혼인관계로 설명한다. 남자와 여자로 그리고 있다. 남자는 그리스도, 여자를 교회로 비유한다. 이게 순리(진리)이다. 그런데, 남자와 남자. 여자가 여자와 결혼하면, 비진리가 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6장 14-16절에서『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교회 안에서 비진리를 선포하는 자들은 하나님도 믿고 우상도 섬기는 영적 간음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경의 십계명은 비진리를 선포하고 믿는 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이다. 소돔이 심판받는 것은 마치 동성애로 불심판을 받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 비진리를 선포하는 자에 대한 불 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롯이 소돔 사람들에게 지적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교회에 비진리에 있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영적 간음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을 하면 그들은 네가 하나님 재판관이냐 라고 반박할 것이다.
25.『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딸을 내어 놓겠다는 노인의 제안은 무리들에 의해 거절되었다. `그 사람이란 `그 레위인을 가리킨다. 그 레위인은 노인의 제안이 거절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자신과 자기의 첩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일단은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 주었다. 즉 비록 사랑을 고백하며 설득하여 장인에게 데려온 아내 였지만 이 레위인은 자기의 안전을 위하여 아내를 비류들에게 내어주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들의 극한적인 이기주의 성향을 보게된다. 기브아 무리들이 요구한 것은 레위인의 첩이 아니라 레위인이었다.
창세기 19장 8절에서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라고 한다.
우리는 롯의 이야기를 표면적으로 보면 안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 간음으로 이해되어야만 그 분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 롯의 두 딸은 남편이 있는 여자들이다. 왜냐하면 심판 때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남자(이쉬)를 알지 못하는 두 딸』에서 남자는 아담에게서 지체를 꺼집어내고 남은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두 딸은 여전히 남자(이쉬)와 하나가 되지 못한 자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다. 그런데, 롯이 소돔 사람들에게 여기 천사가 왔으니, 너희들이 말하는 신을 여기에서 확인해보라는 것이다. 소돔사람들이 참 신에게 자기 신을 말하고 있으니 무조건 악이 되는 것이다.
롯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감동이 되어서 말을 하고 있다. 이 분들은 하나님인데, 너희들이 주장하는 그런 의를 전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너희들이 말하는 그런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통하지 이 분들은 하나님이므로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는 교회 사람들이 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심령 속으로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을 참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말로는 성도의 심령 속으로 성전이 세워지고 성령이 함께 한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는 믿지 않는 것과 같다. 오늘날 롯으로 상징되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해도 그들이 믿는 신을 참 신이라고 말을 하고,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이다.
26.『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표면적으로는 밤새도록 비류들에게 욕을 당한 그 첩은 거의 초죽음이 된 자신의 육신을 끌고 가까스로 자신의 남편이 있는 집 문 앞에까지 기어와서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비록 이 여인이 남편에 대한 분노 때문에 행음하였으나, 그녀가 그 레위인보다 더 진실한 사랑을 소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비록 자신을 내어버린 남편이지만 그 여인은 자기 주인에게로 돌아오기 위해 이같이 사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여자는 영적 간음에 물든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지만, 결국 주인이 있는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집 문 앞에 쓰러진 모습이다. 성전 뜰에서 왔다갔다 하는 죄인의 모습을 하는 것이다.
27.『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표면적으로 말씀을 읽어보면, 자신의 아내를 죽음으로 내어 몰았던 이 비정한 레위인은 간밤에 당한 공포스런 일을 생각하며 일찌기 그 성읍을 떠나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아내의 행방이나 생사여부를 확인해 보려는 최소한의 관심 조차도 기울이지 않았다. 이로 볼 때 이 레위인에게는 그의 첩에 대한 육적인 사랑은 있었을지 모르나 진정한 사랑은 전혀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앞서 그의 장인이 계속해서 떠나려는 이 레위인 사위로 하여금 자기 집에 하루라도 더 묵도록 한 것도 아마 자기 딸에 대한 이 레위인 사위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새벽 미명에 홀로 도주하려고 허겁지겁 하던 레위인은 그의 아내가 엎드러져 그 두 손을 문지방에 올려 놓은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문지방에 손을 올려 놓는 행위는 당시 고대 근동의 미신적 풍습을 반영한 것이다. 즉 당시 가나안 인들은 문지방 밑에 그 집안 사람들을 보호하는 여러 종류의 귀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었다. 따라서 이런 미신을 잘 알고 있던 레위인의 첩은 거의 초죽음이 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두 손을 문지방 위에 올려놓으면서 자신이 소생하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읽어보면 이는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고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상숭배와 미신에 만연되어 있는 첨과 같은 이스라엘이 결국 하나님을 찾지 않고 미신을 쫒아가는 죽음 직전의 상태를 보여준다.
28-29.『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
각을 뜬다는 것은 제사 용어인데, 레위인의 첩이 여전히 죽지 않고 거의 죽음 상태에 있는 것을 열두 덩이로 각을 떠서 인신제사를 드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각을 떤 덩어리를 열 두 지파에게 보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어지러운 상태인지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부패함의 중심에는 레위인에게 있었다. 그런데, 레위인은 자신의 악한 행위를 감추고 잘못을 기브아 사람들에게 돌리며,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고발하는 것이다. 이같이 각을 떠서 지파들에게 보내는 것은 일종의 상징적 행위로서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온 이스라엘 앞에 공개하며 응당한 징벌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레위인은 첩을 열두 등분하여 각 지파에게 보내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비류들의 죄상을 강력히 고발하고 전 민족적 차원의 징계를 호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레위인의 이같은 끔찍스러운 행동은 자가당착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을 저버리는 죄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허물에 대한 적개심에만 불타 있었기 때문이다.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 시체를 열두등분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분열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그 시체를 각 지파에 보낸 것은 모든 지파가 이렇게 영적 간음으로 썩어가고 있음을 고발하는 것이다.
30.『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레위인이 전한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는 전 이스라엘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아마도 이런 엄청난 죄악은 소돔성에서 일어난 사건과 유사 하였기에 더욱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일에 보다 신중하고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의 총회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상의한 후에 말하자” 레위인의 사자들에게서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말로 '말하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베루'는 복수 명령형으로서 권고의 뜻이 있다. 그리고 이것의 원형 동사 '다바르'의 기본 의미는 '말하다'이지만 파생적인 의미로 종종 '파괴하다, 인도하다'라는, 심판의 뜻도 가진다. 따라서 여기서의 '말하자'는 베냐민 사람에 대한 거국적 차원의 대처 방안을 강구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기브아 사람들의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적 차원에서의 영적 회개 운동을 일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훗날 선지자 호세아가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타락의 극치로 까지 들고 있는 것을 볼 때(호9:9;10:9) 기브아 사람들의 행악의 여파가 얼마나 컸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19장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죄악이 만연한지를 어떤 레위인의 타락을 통해 보여주며, 그로 인해 열두지파가 큰 위협에 빠지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아래에 살아가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시기를 가리킨다.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이 표현은 레위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된 이들이다. 그로 인해 사회생활과 가정생활 특별히, 결혼생활에 있어서 엄격한 규정들이 적용되었다. 레위기 21장에 따르면, 창녀나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할 수 없었다. 더 끔직한 사실은 행음까지 한 첩이 집으로 돌아가자, 4개월이 지난 뒤 찾으러 갔다는 사실이다.
레위인은 그의 장인에 집에 머물며 먹고 유숙하며 5일을 보낸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장인은 그 레위인으로 하여금 더 머물기를 계속 권한다. 정식 결혼식을 하는 것처럼 일주일을 채우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딸이 돌아가면, 율법대로 처벌될까봐 불안해서 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다섯째 날이 되자 장인의 계속되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은 에브라임으로 떠난다.
예루살렘에 첩과 함께 간 레위인은 밤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인 여부스 사람의 집이 아닌 기브아로 가 유숙하고자 한다. 결국 기브아에 도착한 그들은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 기브아에 거류하는 한 노인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 노인은 기브아에서 동향사람을 만나서인지, 레위인 일행을 환대한다. 즐겁게 저녁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긴다.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이는 소돔과 고모라에서와 동일한 장면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은 영적 간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 자기의 소견대로 믿는 자들에 대한 영적인 모습을 그린 것이다.
집주인인 그 노인은 소돔과 고모라의 롯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한다. 자신의 처녀인 딸이든 이 레위사람의 첩이든 데리고 가서 행음하라고 넘기려고 한다. 그러자 베냐민의 젊은 남자들은 레위인의 첩을 붙잡아 밤새 능욕했다. 결국 그 레위인의 첩은 집 문 앞에 엎드려진 채 버려진다. 결국, 레위인이 불러도 대답하지 못한다. 그녀는 문지방에 손만 올려두고 시체로 변해 버렸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그 시체와 같이 죽어있는 모습이다.
너무나도 끔찍한 밤을 보낸 레위인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첩을 열두덩이로 나누고, 한 덩이씩 이스라엘 온 지파에 보냈다. 온 지파가 영적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열두지파를 통해 이스라엘을 온전케 세우시기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분리되고, 타락하고, 패역한 백성이 된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악이 이스라엘 온 전역에 팽배해지자, 가나안인의 풍습을 쫓아 첩을 두고 살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살아가던 레위인이 능욕당한 자신의 첩을 열두개의 토막으로 내어 보낸 사건으로 인해 열두지파 중 한 지파가 거의 몰살당할 뻔한 상황까지 몰고 갈 뻔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파멸을 보여준다.
바로 야곱이 그토록 아끼던 베냐민 지파였지만, 그의 후손들은 소돔과 고모라를 닮은 패역한 인생들이 되어 버렸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다. 이 끔찍한 시대를 성경은 가장 부패한 시대인, 기브아의 시대라고 칭한다. 이러한 영적 파멸은 오늘날에도 상존한다. 교회에서 진리를 말하면, 이단시하고 오히려 비진리를 진리인양 받아드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