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34.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35. 예수께서 앉으신 뒤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36.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뒤에, 그를 껴안으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막9:33-37)
33 They came to Capernaum. When he was in the house, he asked them, “What were you arguing about on the road?” 34 But they kept quiet because on the way they had argued about who was the greatest.
35 Sitting down, Jesus called the Twelve and said, “Anyone who wants to be first must be the very last, and the servant of all.”
36 He took a little child whom he placed among them. Taking the child in his arms, he said to them, 37 “Whoever welcomes one of these little children in my name welcomes me; and whoever welcomes me does not welcome me but the one who sent me.”
*그리스도 고백
히브리 백성들의 생활은 고달팠습니다.
애급군인의 군화발에 갈비가 부러지고, 성폭행당하고.......
그것이 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그들 내부에 있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자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큰일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잖아!’
그러다가 바로 왕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 때는 달랐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도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 명령이 얼마나 잔인했던지 애급 백성들조차 슬그머니 히브리인들을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애급 산파들이 제 나라 왕의 엄한 명령을 어기고 히브리 갓난아이들을 몰래 살려주었습니다.
제가 신인 줄로 착각하는 바로가 나타나면 그런 일은 언제가 일어나는 법입니다.
바로는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했지만 일본 바로는 우리에게 처녀를 요구했습니다.
그들을 데려다가 군인들의 위안부로 삼았던 것입니다.
또 총을 들고 제 민족을 죽인 한국의 바로도 있었습니다.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가르고.......
그 막다른 골목에서 히브리 백성들이 발견한 몇 가지 사실입니다.
첫째 그들은 짓밟히면서 대충 수용하며 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안 것입니다.
둘째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아무리 정신을 차려도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셋째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미련합니다.
회초리질 당하고, 굶주려 죽어가면서야 그것을 깨달을까!
갈비 부러지고, 팔목 부러지고, 딸이 강간당하고.......
제 아들을 제 손을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 때문에 제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그렇게 400년을 보내고서야 하나님께 입을 연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음성을 들으시고 비로소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드러나신 것입니다.
출애급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인하는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 한 마디 고백으로 애급의 종들이 일대 전환점을 맞은 것입니다.
그 고백을 중심으로 그들은 애급이라는 나라를 등지고 약속의 딴 나라를 향하게 된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도 바로 그 고백을 한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한 마디의 신앙고백은 전 인류의 일대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10번의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더니 바로의 항복을 받아낸 것입니다.
그들이 애급에서 비로소 해방된 것입니다.
*예기치 못한 사건
그런데 그들은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해방 되었다며 좋아라고 도망 나오는 뒤에서는 애급군대가 창을 들고 말 타고 달려오고 있었고 앞에는 홍해가 시퍼렇게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대로 서 있다가는 쫓아오는 애급 군대의 창에 맞아죽을 것이고 앞으로 나아가다가 물에 빠져죽을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런 난감한 일이 있을 줄 누가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그 60만이 이번에도 용케 홍해를 건넌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홍해를 건넌 후에 좌우를 살펴보았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거기는 사람 살 곳이 아니었습니다.
10. 바로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개를 들고 보니,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크게 두려워하며, 주께 부르짖었다. 11.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말하였다.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이냐?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느냐? 12. 이집트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더냐 ?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출14:10-12)
*해방의 뜻
그 때에 히브리인들은 아주 큰 착각을 한 것입니다.
애급을 떠났으니 이제 제 마음대로 다 해도 되는 줄로 안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일들만 일어나고 제 원하는 일들을 다 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릴 줄로 안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더 심한 고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애급에서는 아침에 일어나면 일하러갈 직장이 있었습니다.
비록 애급 군인들에게 걷어차이며 회초리질을 당했지만 그 일을 하면 일단 먹고 사는 보장이 눈에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너고보니 사막이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해가 떴는데 거기 사막에는 막상 가야할 직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막에는 최소한의 먹을 것을 보장받을 직장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다가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이런 요구를 하셨습니다.
예고 없이 서고 예고 없이 가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인도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사람들은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기적들로 홍해를 건너는 순간 종에서 주인이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거기에서 발견한 것은 더 철저한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가이사랴 빌립보의 이 신앙고백의 뜻은 새 주인의 철저한 종이 되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제 주인만 바뀐 것입니다.
전에 주인은 애급의 바로였는데 새 주인은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자 예수님은 우리도 고백해야할 종의 고백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31.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뒤에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막9:31)
그 고백이 얼마나 중요하든지 예수님은 그 고난을 세 번 반복해서 예고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두 번째의 고난의 고백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과 바로
우리는 그 때나 지금이나 종일 뿐입니다.
바로의 독재 밑에서 신음했을 때도 바로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때도 종일 뿐입니다.
오직 주인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도무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같은 종인데 달라진게 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자유란 신분이 바뀌어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은 철저히 종속될 때에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모순으로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애초에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7.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2:7)
생명의 기운이라고 했는데 이 하나님의 영이 작동해서 그에 순종해야 정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그랬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철저히 구속할 때에 에덴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말씀의 구속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다가 인류가 죽음의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구속에서 벗어나야 자유하다고 생각하게 된 연유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400년 동안 하나님이 아닌 바로를 통해서 종의 개념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 애급에서의 종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치를 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는 사람들에게 종이란 바로 자신의 철저한 수단이라는 뜻음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다시 이르지만 본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출애급에 비교했으니 모세를 생각해 봅시다.
옛 주인 바로는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걸고 감히 바로에게 저항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님들은 모세를 숨긴 것입니다.
그 때에 모세의 부모님들은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는 간난 아기 모세에게 울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집 앞을 지나가던 애급군인이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말을 들어야 모세가 사는 것입니다.
바로 모세의 부모는 새 주인이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부모이신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도 그 분을 따르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신앙 고백의 순간 우리의 주인이 바로에서 하나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새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종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 예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는데 주님은 우리가 어디까지 성부 하나님을 복종해야하는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31.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뒤에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막9:31)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으로 순종하기까지 종이 되어야한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신앙고백을 한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 십자가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탱자와 귤
하지만 신앙을 시작하는 죄인들이 십자가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어떻게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그들을 죽음으로까지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하겠습니까?
죄인들은 모조리 질겁하고 도망하고 말 것입니다.
혹시 탱자나무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식물 중에서도 아마 가장 왕성한 번식력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을이 되면 엄청나게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물론 탱자는 써서 먹을 수 없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는 귤을 먹기 위해 탱자를 심습니다.
그것이 한 뼘 정도 자라면 가지 한쪽을 자르는 것이 아닙니다.
뿌리 바로 위 밑둥을 자르고 거기에 귤나무의 눈을 접붙입니다.
이 눈이 자라서 가지를 내고 그것이 귤나무가 되어 거기에 귤이 열리는 것입니다.
탱자에 접을 붙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귤나무 뿌리는 그 많은 귤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할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탱자뿌리여야 귤열매들에 영양을 공급할 만큼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 줄기가 잘려 가버린 탱자나무에서 달콤한 귤이 풍성하게 열리는 것입니다.
가을이 되어서 수확한 귤에 그 쓴 탱자 맛이 남아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농부는 망한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사 먹는다는 말입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그리스도시니 그 분은 귀신도 쫓아내며 병도 치유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의 뿌리가 내리고 한 10cm 정도 자라면 이제 눈접을 붙일 시기가 온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신앙고백을 하는 순간입니다.
탱자의 밑둥이가 칼로 싹뚝 잘리고 전혀 다른 귤나무 눈이 거기에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기적인 세상 성취가 아닌 십자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탱자를 심어서 귤을 따먹게 된 것입니다.
귀신도 몰려가고 병 나음을 입고 자란 가지는 뿌리를 남기고 여지없이 싹뚝 가위질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전혀 다른 십자가의 희생의 접이 붙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완전한 전환을 부인하는 것이 바로 사탄인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문 앞에 신앙의 눈접이 제대로 붙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7:22,23)
탱자를 열매 맺은 그들은 천국문에서 쫓겨 가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병치료 하시고 귀신을 몰아내시면서도 그 일을 비밀에 붙이기를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엄격하게 그러셨습니다.
그것은 잘려나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관성
그렇게 주님은 제자들의 방향을 트신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제 가던 방향으로 관성을 가지고 그대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이한 일입니다.
그들이 주님과 물리적으로 예루살렘을 향하는 동행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증언은 그 제자들이 주님과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하는 말과 행동을 모조리 관찰하고 계셨습니다.
그러시더니 가버나움에서 잠시 집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입을 열어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33.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33 They came to Capernaum. When he was in the house, he asked them, “What were you arguing about on the road?”
*동상이몽
사람들은 속기 쉬운데 같은 길을 함께 걸으면 동행하는 줄로 압니다.
예배 전에 드럼을 치면서 좌우로 몸을 함께 흔들면 그 사람들이 모조리 주님과 동행하는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의 정체성은 길을 갈 때 무슨 말을 했느냐를 통해 제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상스러운 말과 다툼이 그들의 신앙의 정체입니다.
드럼을 두들기며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는 곳에 그들의 신앙의 정체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멱살을 잡고 욕을 해대는 거기에 그의 신앙의 주소지가 있는 것입니다.
살그머니 거짓말하고 부정하는 데에 그들의 정체성이 있는 것입니다.
예배 전에 마이크 들고 두 손도 들고 율동을 하는 거기에 그 사람의 신앙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점심 누가 했는지 이렇게 짜냐고 봉사하신 집사님을 공격하는 말에 그 사람의 신앙의 주소지가 있는 것입니다.
제주에 있을 때입니다.
주일이면 교회 문 앞에서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연신 웃으며 인사하던 권사님이 문제였습니다.
교인들을 불러 제 귤밭에서 일을 시키고 임금을 제 때에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한 소문을 다 퍼뜨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의 정체성은 교회 문 앞에 아니라 귤밭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시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 유대 성전에 가신 것입니다.
특별히 성전은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을 위해 최선의 배려를 하고 있었습니다.
소 전문가가 있습니다.
양 전문가가 있습니다.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위해 비둘기를 준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이를 검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사에 합당한 소나 양들을 예비한 것입니다.
그들이 없으면 제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 수고의 대가로 경제적 보장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들의 협력으로 성전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그 자리에 오시더니
14. 성전 뜰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16. 비둘기 파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거둬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요2:15,16)
주님의 눈에 그것은 잘 돌아가는 시장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종교적인 방식으로 시장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성전이 시장바닥과 다른 것이 있었다면 성물을 거래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자기 잇속을 잘 챙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길은 주님과 동행하지 않은 주님과의 동행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34.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34 But they kept quiet because on the way they had argued about who was the greatest.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길 오다가 뭐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이 왜 창피한 일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이 말 안하셔도 내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잠잠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부끄러움들을 들키고만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지금 주님은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 자리에서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일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도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브는 그 동산에서 그 녀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녀는 자신의 입으로 이 말을 했습니다.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창3:2,3)
그래서 그 녀는 그 일을 하면서도 이 말을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을 것입니다.
이 일을 하면 안 되는데.......
그것을 남편에게 가져다주면서 그 말을 되뇌었습니다.
이것을 남편에게 주면 안 되는데.......
그 일은 이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조차 자신 안에 자신을 반역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롬7:15)
죄인은 이런 모순적인 존재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자기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이 나의 주인이 되고 내가 철저히 그 분의 종이 되지 않으면 이런 갈등은 극복될 수 없습니다.
자신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겠다는 사람은 철저히 죽음의 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즉 자유를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상
그런데 제자들로 하여금 이런 부끄러운 일을 하게 만든 우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우상에 철저히 지배를 당하면서도 그것이 우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수나 양적 비교 우위라는 우상입니다.
바울은 정확히 이 우상을 반대했습니다.
30. 꼭 자랑을 해야 하면, 나는 내 약점들을 자랑하겠습니다. (고후11:30)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도 그 분의 약하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4. 사실 그는 약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우리도 그의 안에서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아나서, 여러분을 대할 것입니다.(고후13:4)
그런데 사람들의 상식을 깨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강함이 아니라 그의 약하심이 세상을 살리신 것입니다.
주님의 대전제가 되시는 하나님은 약한 곳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작심을 하시고 당신의 가장 약함을 드러내실 장소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거기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그들은 상대 우위에 서는 일로 다툰 것입니다.
그들의 다툼은 사람에게 체화되어있는 수와 양에 대한 우상숭배 행위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북은 핵으로 또한 남 역시 무기의 수적인 우세로 이 땅의 평화를 보장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파멸을 의미할 뿐입니다.
이 세상은 물량주의를 통해서 파멸로 향하는 중입니다.
과연 누가 크냐는 키재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는 세상 나라의 가치와 완전히 상반되는 것입니다.
과감하게 그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을 적용하지 못하면 죽음이 기다릴 것입니다.
구체적인 힘의 과시행위가 실은 세계 대전입니다.
그리고 이런 물량주의적인 경쟁은 탱크대신 다른 무기 즉 자동차 컴퓨터 세탁기.......로 파멸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
35. 예수께서 앉으신 뒤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35 Sitting down, Jesus called the Twelve and said, “Anyone who wants to be first must be the very last, and the servant of all.”
예수님은 12 명의 제자들을 남김없이 불러 앉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일반화하신 것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이 말씀이 특수한 경우에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열두 제자조차 남김없이 모든 사람들이 수나 양이라는 우상숭배를 그만 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도 수긍할 수 없는 말씀을 그들에게 진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꼴등이 되라.
꼴등이 꼴등이지 왜 꼴등이 일등인가?
꼴찌를 추구하는데 어떻게 첫째가 보장될 수 있는가?
하지만 이 죄인이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입증한다는 말입니까?
저에게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주님의 절대적인 말씀으로 인정하게 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가 제주의 중산간에서 목회를 할 때입니다.
교인 중 저와 띠동갑의 손윗분이 계셨습니다.
그 가족들이 수재였습니다.
그 빈곤한 시절 한라산 중산간에서 그 분이 서울대에 합격했습니다.
어머니는 밭을 팔아서 서울대생인 형에게 돈을 붙여주었습니다.
동생 입학금을 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형이 동생의 그 입학금으로 술을 마셔버린 것입니다.
동생은 형에 대한 분노로 정신병이 걸려 일생을 불행하게 살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 교회에 나오셔서 나는 그 분에게 성경을 선물했더니 그 분이 성경을 아마 7독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성경 말씀 중에서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그 분이 믿고 실천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 기적이 일어나지 못했고 그는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지 못해서 형이 아닌 자신이 파괴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당치 않는 말씀이었지만 그 말씀이 진리임을 나는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 나라는 이 땅의 나라와 유비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살길은 그 말씀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그 말씀에 대한 신뢰행위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첫째가 되려면 눈에 불을 켜고 꼴찌가 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이렇게 180도 정확히 다른 반대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 죄인들에게는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
그래서 하나님 나라 말씀의 실천을 위해서는 우리의 기존 사고를 뒤집어버릴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필수적인 것입니다.
*실례
36.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뒤에, 그를 껴안으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6 He took a little child whom he placed among them. Taking the child in his arms, he said to them,
그 말씀을 하시더니 주님께서 어떻게 꼴찌가 되어야하는지 사람들에게 실천 예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한 아이를 데리고 오시더니 그 아기를 껴안아주신 것입니다.
혹시 사람들 중에는 말로 해도 잘 알아먹을 쉬운 일을 사람들의 눈앞에 그렇게까지 보이실 필요 있느냐고 할지 모릅니다.
캐나다의 한 원주민 기숙학교 부지에서 어린이 215명의 유해가 발견됐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세 살짜리 어린아이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곳은 과거 인디언과 이뉴이트족, 유럽인과 캐나다 원주민 혼혈인 메티스 등을 격리해 기숙학교에 집단 수용해서 교육기관이었다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백인 사회 동화를 위해 언어 및 문화 교육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기숙사는 캐나다 정부를 대신해 가톨릭교회가 1890년부터 1969년까지 운영했다는 것입니다.(연합뉴스2021.5.29.)
거기에는 신부님 수녀님이 계셨을 텐데 성경의 오늘 본문을 몰랐겠습니까?
그들은 이 본문을 헬라어로 읽고, 영어로 읽고, 또 라틴어로 읽고 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그들 눈에 어린이가 파리새끼 모기떼로 보인 것입니다.
이론과 실천의 사이의 괴리가 이렇게 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명의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어린이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껴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친히 보이신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안하면 엉뚱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은 특별하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사람을 물어 죽인 개를 입양하겠다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아마 이 시대는 사람 생명의 가치와 개의 생명의 가치를 혼돈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나는 사람을 살벌하게 죽인 독재자들이 제 집 애완견을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 기사를 말하니 제가 카톨릭을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개신교는 더 했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까지 원정을 나가서 흑인 잡아 배에 태워오다가 죽으면 바다에 내다버렸습니다.
살아 남은 사람은 쇠고랑을 채워두고 오일장에 상품으로 전시한 후에 팔고 샀습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면 교회 가서 예배드렸습니다.
기독교 국가 미국도 흑인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물론 아메리카 인디언에게도 그 짓을 했습니다.
*관계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37 “Whoever welcomes one of these little children in my name welcomes me; and whoever welcomes me does not welcome me but the one who sent me.”
성경은 마지막으로 성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섬기는 방법이 좀 복잡합니다.
그 분 삼길 때에 교회당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두 손을 들고 율동하고, 찬양과 경배로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 약자를 섬길 때 곧 성자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을 섬길 때 곧 성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관계의 과정이 생략되고 직접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흑인을 장마당에서 팔아먹고 와서 경배와 찬양을 할 때 하나님은 섬김을 받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관계를 통해서 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처음 오실 때부터 그러셨습니다.
똥냄새 나는 마굿간에서 섬김을 받으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지옥 간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 등장하는 부자가 나쁜 짓을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그의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너는 병자 거지이니 우리 집 문 앞에서 얻어먹으면 되는 것이고, 나는 부자이니 내 돈으로 잔치를 베풀 것이다.
나는 너를 쫓아내지는 않는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렇게 어린이와 상관이 없고 성자와 상관이 없는 행동은 결국 성부 하나님과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몰라가지고 부자가 그만 지옥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일이 관계의 일일 줄이야!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는 천국 문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냐 아니냐를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네 눈에 네 집 문 앞에 거지가 예수님으로 보였느냐를 물으신 것입니다.
40.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41. 그 때에 그는 또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부하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거라.
42.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마25:40-43)
주님의 나라의 회복은 관계의 회복입니다.
다시 이르지만 모두 가난해도 콩 한 쪽을 나누어 먹는 관계가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GNP가 수만 불을 넘어서 제 부모님이 늙으면 요양원으로 모셔가고 거기서 요양사들이 월급을 받고 보필해 주도록 하는 곳이 아닙니다.
돈 없는 사람들은 덜 보장을 받고.......
모든 것이 돈으로 해결되고 관계가 무너진 곳은 지옥입니다.
세상의 복은 돈이 결정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은 관계가 결정합니다.
200여명의 아이를 미사를 마치고 죽였는지
혹은 그 전에 죽였는지
누가 죽였는지
광주 민주화 항쟁에서처럼 각목으로 뒤통수를 쳐서 죽였는지
음식에 독약을 타서 단체로 죽였는지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성부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백인들이 아프리카까지 가서 총 들고 흑인을 몰이해서 잡힌 분이 성부 하나님이셨습니다.
쇠고랑에 채워져서 배타고 오는 도중에 죽으면 바다에 집어던져져 물고기 밥이 되신 분이 바로 성부 하나님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