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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933책 (탈초본 51책) 영조 17년 7월 15일 정축 17/20 기사 1741년 乾隆(淸/高宗) 6년
○ 辛酉七月十五日午時, 上御資政殿。晝講, 咸鏡監司閔亨洙留待, 同爲入侍時, 知事閔應洙, 特進官尹得和, 參贊官申思建, 侍讀官李宗迪, 檢討官曺命敬, 假注書李箕彦, 記事官全命肇, 記注官李胤沆, 宗臣慶興君栴, 武臣安允文, 入侍進伏訖。上讀前受音, 春秋第三十七編, 自八年春王正月, 宋公入曹, 止亦有不得已焉耳矣。宗迪, 讀心經序, 自西山先生眞文忠公, 嘗摭取聖賢格言, 止新安程敏政謹序。上讀新受音一遍訖。宗迪曰, 大凡心經一篇, 首之以大禹謨人心道心章, 終之以朱子尊德性齋銘, 而其要則不過敬之一字。匹庶之學, 亦不可捨敬而下工, 況人君涵養本源, 代天理物之道, 可不以敬爲主耶? 程子曰, 天德王道, 只在謹獨。又曰, 學者須敬而直內, 一敬字, 專爲此書之主宰, 留神體認, 好矣。上曰, 所達, 是矣。應洙曰, 心者, 操則存, 捨則亡, 操心之要, 莫過於敬矣。上曰, 操捨之間, 聖·狂舜·跖分焉, 此言誠是矣。舜·跖之間, 相去不遠。雖以唐玄宗事言之, 天寶之治, 開元之治, 判若二人, 此可見舜·跖相去之不遠也。宗迪曰, 敬固爲主, 而若其悠久之道, 則非誠不能, 故先儒云敬也, 誠在其中, 非誠則便非敬, 此不可闕一也。上曰, 敬之如神明, 尊之如父母, 人皆有一太極, 不點檢身心, 而徒講心經, 則是書自書我自我也。心經一部, 宜在我心中耳, 至於誠敬, 則如鳥兩翼, 如車兩輪, 不可相離矣。講罷, 思建曰, 明日晝講, 取稟。上曰, 只晝講。上曰, 北伯進來。閔亨洙進伏, 上曰, 北道, 正是豐沛之鄕, 王業肇基之地。卿下去後, 民事戮力爲之。卿活我北民然後, 有見予之面矣。亨洙曰, 聖敎及此, 臣敢不一倍惕念乎? 雖以臣私情言之, 臣之從祖曾爲北伯, 宣布儒化, 且多設施, 北道婦孺, 至今傳誦。臣若不善奉職, 則是不但負殿下也, 乃忝先也。上曰, 北人每稱卿之從祖及南九萬云, 卿不須求他。但如卿之從祖, 可也。亨洙曰, 敢不搜訪故事, 而修擧乎? 但小臣愚鈍疎迂, 國之大事, 無擔當之望。且當北路荐飢之餘, 無路措手, 以是爲悶。雖以舊伯狀啓見之, 作一赤地, 且僻在一隅, 無移粟之路, 豈不可悶乎? 臣以此意, 議于廟堂, 而廟堂亦無別樣設施之道, 故臣於頃日, 不得已請對而陳達矣。趁臣在京時, 貸得某處銀錢, 必於秋前, 貿穀於嶺南, 得船運去, 然後可爲來春之賑資。頃日筵奏, 旣有稟處之命, 臣累見大臣言之, 而尙無區劃之事。雖使卽爲行會, 主管之臣, 卽爲出給, 亦未可知, 臣以是爲鬱。上曰, 卿言雖如此, 此則便是已得之物也。備局雖或緩忽, 予豈忘北民哉? 亨洙曰, 聖意, 臣曾已知之, 而每有不可恃之憂矣。嶺南伯, 聞頃日柔弱之敎, 以爲朝家雖許於北道, 吾當狀聞而防塞云, 臣以是爲慮矣。上曰, 其在共濟國事之道, 嶺伯, 豈不送之耶? 此則過怯之言也。應洙曰, 臣頃見嶺伯, 亦以不可以他道而恝視, 須以兼活北民爲心之意, 言之矣。上曰, 北伯有手執下去之意, 而此則予當助之, 與入手, 何異乎? 須勿動心, 而先爲下去, 若聞道臣動心, 則民間尤當如何道? 逢北民之流離, 則率去, 可也。亨洙曰, 卽今京中, 亦多上來之民云矣。上曰, 此則承旨, 招致賑恤郞廳, 使各該部, 査問以啓。承旨讀別諭訖。上曰, 但如卿之從祖, 可也。北道亦多有怪鬼輩, 有尊慕卿之從祖者, 有尊慕南九萬者, 卿須體予苦心, 無或偏重。亨洙曰, 北道, 崇尙武藝, 別無儒風, 而聖敎及此, 敢不惕念? 尹得和曰, 爲一道道臣, 當一視之, 豈可與道內人, 爲黨論乎? 上曰, 道臣, 亦有扶抑之弊矣,
北道亦多書院乎? 此書院之儒, 或有不往彼書院之事矣。亨洙曰, 有一書院, 臣之從祖及南相, 同爲配享, 臣下去後, 欲一體瞻拜矣。閔亨洙所啓, 臣下去後, 當卽發北巡矣, 自前監司巡歷時, 試射將士, 施以賞格, 已成規例。且大科當前, 若以箭竹等物, 參給於賞格中, 則渠輩想必喜幸矣。備局所捧湖南竹一百浮, 欲爲覓去, 以爲施賞之資, 特令備局, 依數擇給, 何如? 湖南竹, 則不堪造箭云矣。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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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7년 신유(1741) 7월 15일(정축) 맑음
17-07-15[16] 주강을 행하여 《심경》을 강하고, 함경 감사 민형수에게 기근이 든 함경도를 잘 구휼하라고 유시하였다
오시(午時)에 상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갔다. 주강에 신하들이 입시하고 함경 감사 민형수(閔亨洙)가 머물러 대령하였다가 함께 입시한 자리이다. 지경연사 민응수(閔應洙), 특진관 윤득화(尹得和), 참찬관 신사건(申思建), 시독관 이종적(李宗迪), 검토관 조명경(曺命敬), 가주서 이기언(李箕彦), 기사관 전명조(全命肇), 기주관 이윤항(李胤沆), 종신(宗臣) 경흥군(慶興君) 이전(李栴), 무신 안윤문(安允文)이 입시하여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전에 배운 대목을 읽었는데, 《춘추(春秋)》 제37편 ‘팔년춘왕정월 송공입조(八年春王正月宋公入曹)’부터 ‘역유부득이언이의(亦有不得已焉耳矣)’까지였다. 이종적이 읽었는데, 《심경(心經)》 서문 ‘서산선생진문충공상척취성현격언(西山先生眞文忠公嘗摭取聖賢格言)’부터 ‘신안정민정근서(新安程敏政謹序)’까지였다. 상이 새로 배운 대목을 한 번 읽었다. 이종적이 아뢰기를,
“대저 《심경》 1편은 대우모인심도심장(大禹謨人心道心章)으로 시작하고 주자존덕성재명(朱子尊德性齋銘)으로 마쳤는데, 그 요체는 ‘경(敬)’ 1자에 불과합니다. 필서(匹庶)의 학문도 경을 버리고서는 공부를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인군이 본원을 함양하고 하늘을 대신하여 사물을 다스리는 방도로 볼 때 경을 주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그 요체는 단지 근독(謹獨)에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고, 또 ‘학자는 모름지기 경하여 안을 곧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경’ 1자는 전적으로 이 책의 주재(主宰)가 되니, 유념하시어 체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바가 옳다.”
하였다. 민응수가 아뢰기를,
“심(心)이라는 것은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없어지니, 마음을 잡는 요체는 경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음을 잡느냐 놓느냐에 따라 성인과 광인(狂人), 순(舜) 임금과 도척(盜跖)으로 나누어지니, 이 말은 참으로 옳다. 순 임금과 도척의 사이는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다. 비록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천보(天寶) 연간의 다스림과 개원(開元) 연간의 다스림은 판이하게 두 사람인 듯하다. 여기에서 순 임금과 도척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이종적이 아뢰기를,
“경이 실로 주가 되지만 오래 하는 방도는 성(誠)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경이란 성이 그 가운데 있으니, 성이 아니면 곧 경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공경하고 어버이와 같이 존중해야 한다. 사람은 모두 하나의 태극(太極)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점검하지 않고 한갓 《심경》만 강론한다면 책은 책대로이고 나는 나대로일 것이다. 《심경》 한 책은 마땅히 내 마음 가운데 있어야 한다. 성과 경으로 말하면 새의 양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 서로 떨어질 수 없다.”
하였다. 강(講)을 파하자, 신사건이 아뢰기를,
“내일 주강을 어떻게 할지 여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강만 행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함경도 관찰사는 나아오라.”
하니, 민형수가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함경도는 바로 풍패지향(豐沛之鄕)이니, 왕업(王業)의 기초를 다진 곳이다. 경이 내려간 뒤에 백성의 일을 있는 힘을 다하여 행하라. 경이 우리 함경도 백성을 살린 뒤에 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민형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하교하시니, 신이 감히 배로 명심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신의 사적인 감정으로 말하더라도 신의 종조(從祖)가 일찍이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유학의 교화를 선포하고 또 시행한 것이 많습니다. 함경도의 부인과 아이들이 지금까지도 전송(傳誦)합니다. 신이 만약 직무를 잘 수행하지 못한다면 전하를 저버릴 뿐만 아니라 바로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함경도 사람들은 매양 경의 종조와 남구만(南九萬)을 칭송한다고 하니, 경은 다른 곳에서 찾지 말고 다만 경의 종조부같이 하라.”
하니, 민형수가 아뢰기를,
“감히 고사(故事)를 찾아서 거행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소신은 우둔하고 오활하여 나라의 대사를 담당할 가망이 없습니다. 게다가 북로(北路)에 거듭 기근이 든 때 손쓸 길이 없으니 이것이 근심스럽습니다. 비록 이전 감사의 장계를 보더라도 가뭄으로 검붉게 타 버린 땅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한 모퉁이 외진 곳에 있어 곡식을 옮길 길이 없으니, 어찌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러한 뜻으로 묘당에 의논하였지만 묘당에서도 달리 조치를 취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지난번에 부득이 청대하여 아뢰었습니다. 마침 신이 서울에 있을 때라 모처의 은전(銀錢)을 빌려 반드시 추수하기 전에 영남에서 곡식을 사서 선박을 구해 운반한 뒤에라야 내년 봄에 진휼하는 재원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연석에서 아뢰어 이미 상께 여쭈어 처리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신이 여러 번 대신(大臣)을 보고 말하였지만 아직 구획(區劃)한 일이 없으니, 비록 즉시 공문을 보내 알리더라도 주관하는 신하가 즉시 내줄지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신이 이 때문에 답답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비록 이와 같지만 이는 곧 이미 획득한 물건이다. 비변사에서 혹 지연시키더라도 내가 어찌 함경도 백성을 잊겠는가.”
하니, 민형수가 아뢰기를,
“성상의 마음은 신이 이미 알고 있지만 매양 믿을 수 없다는 근심이 있습니다. 영남 감사가 지난번에 유약하다는 하교를 듣고 ‘조정에서 비록 함경도에 허락하였지만 내 마땅히 장계로 보고하여 막겠다.’라고 한다고 합니다. 신은 이것이 염려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함께 나랏일을 구제하는 방도로 볼 때 영남 감사가 어찌 보내지 않겠는가. 이것은 지나칠 만큼 겁이 많은 말이다.”
하였다. 민응수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영남 감사를 보니, 또한 다른 도라고 하여 무심히 볼 수 없고, 모름지기 함경도의 백성을 함께 살리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다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함경도 관찰사가 직접 손에 잡고 내려가려는 마음이 있는데 이는 내가 마땅히 도울 것이니 손에 넣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부디 동요하지 말고 먼저 내려가라. 만약 도신이 동요한다는 말을 들으면 민간에서 마땅히 어떻게 하겠는가. 길에서 유랑하여 떠돌아다니는 함경도 백성이 있다면 데리고 가라.”
하자, 민형수가 아뢰기를,
“지금 서울에도 올라오는 백성이 많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승지가 진휼청 낭청을 불러 각 해당 부(部)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승지가 별유(別諭)를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다만 경의 종조가 한 것과 같이 하라. 북도에도 괴귀(怪鬼)한 무리가 많지만 경의 종조를 존경하는 자도 있고 남구만을 존경하는 자도 있으니, 경은 부디 나의 고심을 체득하여 혹시라도 편중되게 하지 말라.”
하니, 민형수가 아뢰기를,
“북도는 무예를 숭상하여 별도로 유풍(儒風)이 없는데 성상께서 이렇게 하교하시니 감히 유념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윤득화가 아뢰기를,
“한 도의 도신이 되면 차별이 없어야 하니, 어찌 도내 사람과 당론을 펼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신도 자기편을 치켜세우고 상대편을 억누르는 폐단이 있다. 북도도 서원이 많은가? 이쪽 서원의 유현이 혹 저쪽 서원으로 가지 못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하자, 민형수가 아뢰기를,
“한 서원이 있는데 신의 종조와 상신 남구만을 함께 배향하였습니다. 신이 내려간 뒤에 똑같이 첨배(瞻拜)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민형수가 아뢰기를,
“신이 내려간 뒤에 바로 북쪽을 순시해야 합니다. 전 감사가 순력(巡歷)할 때부터 장사(將士)들에게 시사(試射)하여 상격(賞格)을 시행한 것이 이미 규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대과(大科)가 눈앞에 다가왔으니, 만약 화살대〔箭竹〕 등의 물건을 상격 가운데 함께 지급한다면 그들이 반드시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비변사에서 받아들이는 호남죽(湖南竹) 100부(浮)를 가져가서 상을 내리는 물자로 삼고자 하니, 비변사로 하여금 수량대로 가려 지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호남죽은 화살을 만들 수 없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군기시에서 사용하는 낙복지(落幅紙)는 가장 긴요하고 절실합니다. 그런데 북로(北路)는 본래 종이가 생산되는 곳이 아니니 늘 계속 잇대기 어려운 근심이 있다고 합니다. 감시(監試)의 낙복지 50축(軸)도 비변사로 하여금 지급하여 당장 필요한 곳에 사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 모두 거조(擧條)를 내었다. - 또 아뢰기를,
“과거의 일이 머지않았으니 북평사를 속히 차출하여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득화가 아뢰기를,
“날짜가 너무 촉박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관(次官)을 차출하는 규례는 없는가?”
하자, 신사건이 아뢰기를,
“이전의 규례에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병조 판서를 패초하기를 청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조 판서 윤양래(尹陽來)를 즉시 패초하라.”
하였다. - 탑교(榻敎)를 내었다. - 민형수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올린 《세종헌황제주비유지(世宗憲皇帝硃批諭旨)》는 이미 예람하셨을 텐데 그 가운데 볼 만한 글이 있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금 펼쳐 보았다.”
하였다. 민형수가 아뢰기를,
“그 책은 신도 내용을 대략 보았습니다. 그 사이에 비록 긴요하지 않은 것이 있고, 또한 상고할 곳이 없지 않았지만 책 분량이 많아 펴 보기 어려웠습니다. 비변사에 도로 내려 별일이 없는 당상으로 하여금 긴요한 곳을 뽑아내어 한 질을 만들어 열람하는 데 편리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도 비변사에 내리고자 하였다.”
하였다. 민형수가 아뢰기를,
“이 책은 저들에게는 일반적인 문서와 차이가 있으므로 내각(內閣)에 소장하여 특히 더 비밀에 부치지만, 신이 역관들을 시켜 다방면으로 구입하여 비싼 값을 지불하고 사 왔습니다. 역관들은 비록 공을 바라고 상을 넘볼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이렇게 긴절한 문서를 구입한 것에 대해서 마땅히 본원으로 하여금 상께 여쭈어 처리해서 시상하게 하여 후일 격려하고 권면하는 방도로 삼아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일은 규례대로 논상하는 거조가 있어야 할 듯하다.”
하자, 민형수가 아뢰기를,
“전부터 문서를 구입한 부류에게 본원으로 하여금 상께 여쭈어 처리하게 한 뒤에 거행한 일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원으로 하여금 내게 물어 처리하게 하여 시상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이종적이 아뢰기를,
“새로 제수한 부교리 윤득경(尹得敬)이 현재 경기 장단(長湍)에 있다고 합니다. 경연에 입번하는 일이 긴급하니 속히 역마를 타고 올라오도록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말을 마치고 물러 나갔다.
[주-D001] 당(唐)나라 …… 듯하다 : 개원은 당 현종(唐玄宗)의 초기 연호이고, 천보는 후기 연호이다. 현종은 개원 연간에는 잘 다스려서 개원지치(開元之治)라고 칭송을 받았으나, 천보 연간에는 안녹산(安祿山) 등의 난리가 나서 어지러웠다. 《新唐書 玄宗本紀》[주-D002] 풍패지향(豐沛之鄕) : 풍패는 패현(沛縣)의 풍읍(豐邑)을 말한다. 한(漢)나라를 개국한 유방(劉邦)이 원래 패현 풍읍의 양리(陽里) 사람이었으므로, 이후로 풍패는 제왕의 고향을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漢書 高帝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선조가 함경도 함흥 등지에 살았기 때문에 함흥과 그 일대 지방을 ‘풍패지향’이라 일컬었다.[주-D003] 신의 종조(從祖)가 …… 많습니다 : 함경 감사 민형수의 종조는 민정중(閔鼎重)이다. 민정중은 함경 감사로 재직 당시에 관서(關西)의 양곡으로 함경도의 기근을 구제하는 등 진휼에 많은 공이 있었다. 《陶谷集 議政府右議政閔公諡狀》[주-D004]
한 서원이 있는데 : 함경북도 종성군 용계면 부계동에 있는 종산서원(鍾山書院)은 민정중과 남구만을 배향하는데, 종성서원(鍾城書院)이라고도 한다. 1667년(현종8)에 창건되었으며, 1686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주-D005] 세종헌황제주비유지(世宗憲皇帝硃批諭旨) :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 때부터 사용된 주접은 관료가 상주문을 써서 밀봉하여 직접 황제에게 보내면 황제가 이를 보고 주필(朱筆)로 지시 사항을 적어 넣고 다시 밀봉하여 관료에게 반환하였다. 옹정(雍正) 10년에는 궁정에 반환, 보관되어 있던 주접 중에서 지방 통치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추려 정리하게 하였고, 건륭제(乾隆帝) 때에 가서 《세종헌황제주비유지》를 펴냈다. 《鈴木眞, 雍正帝の政治, 淸朝とは何か, 岡田英弘 편, 藤原書店, 2009, 201~202쪽》
ⓒ 한국고전번역원 | 손왕호 (역) |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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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성(鍾城)의 …… 받드니 : 함경북도 종성군 용계면 부계동에 있던 종산서원(鍾山書院)을 말한다. 종성서원(鍾城書院)이라고도 한다. 1667년(현종8)에 창건되었으며, 기준(奇遵)ㆍ유희춘(柳希春)ㆍ정엽(鄭曄)ㆍ조석윤(趙錫胤)ㆍ유계(兪棨)의 위패를 모셨다. 1669년에 정여창(鄭汝昌)을, 1684년(숙종10)에 정홍익(鄭弘翼)을 추가 배향했다. 1686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회령서원(會寧書院)을 통합하면서 그곳에 봉안했던 김상헌(金尙憲)ㆍ정온(鄭蘊)을 추가 배향했다. 그 뒤 민정중(閔鼎重)ㆍ남구만(南九萬)을 추가 배향했다.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