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라면 놓쳐선 안될
[사찰성보문화재 50選]
<26>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사리장엄구
중국과 문물교류
…보살상 조성시기 가늠 중요 정보
탑신부 사리공 중심 신사리와
법사리·불상 함께 봉안 형식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 꾸준히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
보협인다라니 오월국 때 유통
‘팔각구층석탑 사리장엄구’는
고려초기 금속공예·문화교류
불교사상사 연구에 귀한 성보
+++++++++++++++++++++++++
탑은
석가여래의 열반 후
부처님의 무덤으로 만들어졌다.
부처님의 형상을 만든 불상은
석가여래 열반 후
500년이 지나서야 조성되므로,
불교미술은
탑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석가여래의 열반 직후
말라(Malla)족을 비롯한 여덟 부족들이
부처님의 사리를 독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불사했던 것처럼,
탑은 불교도들에게
불교의 구체적인 진리에
한층 더 다가설 수 있다는
믿음의 실감나는 실체였을 것이다.
부처님의 사리는
그냥 탑에 납입하는 것이 아니라
예법에 따라 봉안했다.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
즉, 사리를 장엄하거나
공양하는 모든 것들을 사리장엄구라 부른다.
사리는 몇 겹의 그릇을 중첩하여
가장 안쪽에 봉안됐다.
사리장엄구의 봉안 절차가
시대를 불문하고 통일성이 있는 것은
그만큼 사리신앙을 중요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찰에는 대부분 탑을 모시고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사리장엄구는
고려 초기 금속공예·문화교류
·불교사상사 연구에 중요한 문화재이다.
사진은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국보).
➲ 고려 대표하는 아름다운 탑
월정사 경내에도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 있다.
월정사는 6·25전쟁 당시
후퇴하던 국군의 작전으로
전각들이 대부분 전소됐다.
유일하게 전란의 피해를 피한 것이
바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탑으로,
여러 면에서 특색이 많다.
석탑은 총 9층이며,
높이가 15.2m로 하늘을 향해 쭉 솟아 있으며,
평면은 팔각형을 이루고 있다.
탑의 몸체와 지붕돌이 높지 않아,
각 층의 밀집도가 높다.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부를
연꽃 모양으로 조각하여
탑이 마치
연꽃에서 솟아난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옥개석의 각 처마에는
층마다 풍탁이 달려 있어,
살짝 바람이라도 불면
흔들리며 경쾌한 화음을 낸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앞에는
아름다운 보살상이 있다.
연화대좌 위에서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무릎을 꿇고 앉아
무언가를 공양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보살상은 본 지면
(‘불자라면 놓쳐선 안 될 사찰성보문화재 50選’)
을 통해
‘월정사석조보살좌상’으로 소개한 것처럼,
자신의 몸을 바쳐
부처님께 공양하였다는
<법화경>의 약왕보살상일 가능성이 높다.
2000년 여름,
이 보살상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살상의 대좌 아래 부분을 발굴하게 되어,
그 아래 묻혀있던
기단부의 중대석과 하대석을 발견했다.
탑 아래로 발굴을 확대해보니,
노출되어 있는 탑 기단부 아래에도
8각의 지대석이 있었다.
또한 탑과 보살상을
하나의 공간에 조성하기 위한 장치들도
함께 확인되어,
탑과 보살상이 함께 조성되었음이 명백해졌다.
그동안 이 탑의 조성 시기를
11세기로 보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발굴조사 과정에서
12세기 전반에 중국에서 유통된 화폐 성
송원보(聖宋元寶)와
숭녕중보(崇寧重寶)가 발견되었고,
화재를 당한 흔적 등이 드러나면서
조성시기를 12세기 중엽 이후로
추정하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화폐가 발견된 층위가
교란된 흔적이 있고,
어느 시기에 화재 등으로 사찰이 폐사되었다가
다시 여러 번 중창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탑도 이전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다각적 검토가 필요하다.
팔각구층석탑 사리장엄구(보물).
➲ 5층서 불상, 1층서 사리 발견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보살상의 조성 시기를
좀 더 좁혀볼 수 있는 유물들이 탑에서 발견됐다.
바로 이 탑에 봉안된 사리장엄구이다.
1970년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을 해체하여 수리할 때
5층 탑신의 네모난(넓이 13.2∼14.2cm,
폭 16∼16.5cm, 깊이 16cm) 사리공에서
보자기에 싸인 상태로
남쪽을 향하고 있는
은제 도금한 아미타불입상이 발견됐다.
그리고 1층의 탑신 윗면 중앙
원형의 사리공(넓이 32cm, 깊이 19cm)에서
각종 사리장엄구와 사리가 발견됐다.
사리공 중앙에
청동으로 만든 원형합이 있었다.
그 아래에
청동으로 만든 거울(靑銅龍文鏡) 1점,
동쪽에 작은 청동거울(靑銅無文鏡) 1점,
북쪽에 청동거울(靑銅四龍文鏡) 1점,
서쪽에도
청동거울(靑銅波文鏡) 1점을 세워 놓았다.
그 주위에는
부식된 향목편(香木片)이 다수 놓여 있었다.
청동합 내부에는
중앙에 은(銀)으로 만든 원형합과
보라색, 황색의 향을 넣은 주머니,
그리고
금동의 네모난 합과 향목 등이 들어 있었다.
은합 안에는
담홍색 사리 14과가 들어 있는
표주박 형태의 수정제 사리병 1개와
‘전신사리경(全身舍利經)’
이라고 쓰여 있는
닥종이로 만든 두루마리형태의 경전이,
폭 0.8㎝ 정도의 삼베 끈이 둘러져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리를 안쪽에 봉안하고,
이를 외호하기 위해
은합, 청동합으로 삼중의 장치를 둔 형태였다.
특이한 것은
청동으로 만든 거울을
이 사리장엄구 밑면과 남면을 제외한
동, 서, 북면에 세워
마치 사리장엄구를 보호하는
외합처럼 만든 것이다.
탑신 1층에서 발견된 청동합 안 사리장엄구.
➲ 법사리 ‘보협인다라니경’ 등장
<전신사리경>은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
(一切如來心祕密全身舍利寶篋印陁羅尼經)>
으로
보통 <보협인다라니경>으로 칭한다.
탑에는
신사리(身舍利) 외에도
법사리(法舍利)로 경전을 봉안했다.
백제계통의 탑 안에는 <금강경>이,
통일신라시기에는
<무구정경>에 의한 조탑 법식이 크게 유행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새롭게 등장한 경전이 <보협인다라니경>이다.
이 경전은
중국 남쪽의 오월국(吳越國)의 왕인
전홍숙(錢弘淑, 948∼978)에 의해
널리 유통됐다.
전홍숙은 10세기 후반
탑 안에 <보협인다라니경>을 봉안한
팔만사천탑을 제작하여
아쇼카왕임을 자처한 인물이다.
이 경전은
“탑 안에 이 경전을 사경해 안치하면
그 탑은
일체여래의 신력으로 보호받는 탑이 되며,
이 경전을 탑에 안치하면
이 탑은 전신사리를 장(藏)하게 될 것”
이라는 내용이다.
비교적 간단한 의식으로 접근할 수 있어서
더욱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탑신 5층에서 발견한 불상.
➲ 신사리와 불상, 경전 함께 봉안
5층에서 발견된 ‘월정사 탑 봉안 불상’은
은제 금도금기법으로 만든 것이다.
불신과 두광·신광의 광배
그리고 이중의 원형 연화대좌로 구성되어 있다.
몸에서 나는 빛을 상징하는 커다란 광배는
별도로 만들어서 불상에 접합시킨 것이고,
머리 부분의 빛을 상징하는 두광은
7엽으로 된 연꽃을 새기고
얇은 은판을 두들겨서 만들었다.
이 불상은 통통한 얼굴에
수인으로 시무외 여원인을 하고 있어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유물들은 대부분
고려 전기인 10∼11세기경에 제작된 것들이다.
유물 중 상당수가
중국과 형태가 유사한 것이 많아서
당시의 문물교류 실상을 살필 수 있으며,
탑과 보살상의 조성 시기 파악에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에는
부처의 유골을 가리키는 신사리와
법신의 형상인 불상,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을 함께 봉안했다.
한국에서 석탑을 조성한 이래
탑신부의 사리공을 중심으로
신사리와 법사리,
그리고 불상을 함께 봉안하는 형식은
삼국시대부터 정착되었는데,
이후 고려시대까지도 꾸준히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사리장엄구
(平昌 月精寺 八角九層石塔 舍利莊嚴具)’는
고려 초기의 금속공예사, 문화교류사,
불교사상사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된다.
[불교신문3683호/2021년9월14일자]
이분희
/문화재전문위원·불교중앙박물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