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개노래(055)-삶이 갈림길에 설 때
산이 보이면 강을 알고, 강이 보이면 산을 알 수 있다.
산은 높아지며 맥을 짓고는 멈추고, 강은 낮아지며 맥을 짓고는 흐른다.
그 산맥과 강물의 끝은 똑같이 바다다.
금북정맥은 경기도 안성에서 시작하여 천안 성거산과 광덕산, 예산 대흥봉수산, 청양 다락골과, 덕산·해미 가야산에서 갈라져 서쪽으로는 안면도 바다로, 동북쪽으로는 황무실·신리·솔뫼를 지나 아산만으로 흘러든다.
이 금북정맥이 충청도 호서지역을 휘감아 돌며 내포를 만들어낸다.
사거리[1]는 황무실 산마을과 신리 들마을 가르는 길목이었다.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세거리[2] 교우촌과 신리 교우촌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이 있었다.
세거리 쪽으로 내려오면 세거리(삼호) 본동와 삽교천 강개나루터로 가는 세 갈래 길이 또 나타났다.
박해시대에 황무실·면천·합덕교우들이 예산이나 공주 산중으로 피하려면 삽교천의 거더리·강개·옥금리 나루터로 와야 했다.
그 나루터 가까이에 박해를 피하다가, 또 박해가 멎으면 나루터 가까이 갯벌을 막아 살며 교우촌을 이루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두 제자가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며 이러쿵저러쿵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채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루카 24장).
두 제자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엠마오에서 예루살렘까지 수많은 갈림길에 섰을 것이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기까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수많은 갈림길에 섰을 것이다.
그처럼 인생은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여러 번 갈림길에 서게 된다.
박해시대에 내포교우들은 사거리에서 세거리를 택했고, 세거리에서 삽교천을 택했다.
그리고 나루를 타고 강을 건너 예산이나 공주 산중으로 갔다.
해마다 오월과 구월 초하룻날에 여사울에서 솔뫼까지 하는 ‘내포도보성지순례’ 때 그때의 그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순례자들은 순교자의 땅, 목숨으로 지킨 신앙의 땅, 곧 聖地 쪽을 택한다.
내가 인생이 갈림길에 설 때도 내 신앙이 가리키는 쪽을 택하면 된다.
[1] 당진시 합덕읍 대합덕리와 대전리 경계에 있다. ‘사거리’는 東으로는 대합덕리·합덕리, 西로는 상궁리양촌·고덕·덕산, 南으로는 신리·거더리, 세거리·강개, 北으로는 잔다리(작골)·성동(응정리)·황무실·버그내·당진으로 갈리는 길목이다. 대전리 중심지인 ‘궁말’(宮里)은 조선 제5대 왕 문종의 왕비 현덕왕후권씨(顯德王后權氏, 1418-1441)가 태어났기에 생긴 지명이다. 현덕왕후는 1441년 24살에 단종을 낳고 하루 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했다. 단종은 즉위 후 어머니에게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현재 대전리 궁말과 잔다리 중간 있는 공동묘지에 1972년과 1985년에 백미제(삽싸리방죽) 서쪽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가족묘역에서 이장한 ‘신리성지 손씨무명순교자묘역’이 있다.
[2] 대합덕리에 속한 자연부락 ‘세거리’는 ‘삼호’(三湖)라고도 한다. 동쪽에 합덕방죽물길(合德堤), 서쪽에 삽싸리방죽물길(白米堤), 남쪽에 삽교천물길 등 세 물줄기가 지나면서 생긴 지명이다.
첫댓글 작골이 잔다리가는 초입이긴 하쥬
우리 조상들 일부도 삽교천서 배를타고 경기도 광주 쪽으로 도주를 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