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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 연구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1. 서론: 사료와 목록
이 글은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하여 연구하고자 하는 학자들에게 학술적으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궁금할 수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 업적, 영성, 성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한마디로 연구자용 논문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브뤼기에르 주교를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데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와 업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연구 주제들도 함께 제시하고자 한다.
최석우 몬시뇰은 교회사 연구에서 사료가 지닌 중요성을 무척 강조하였다. 그래서 이런 말을 남겼다. “교회사는 경험적인 증거물을 통하여 실증적으로 성립되는 학문이고, 그래서 사들이 그 증거물이다. 교회사는 올바로 해석된 사료에서 발견되는 것만을, 또 그만큼만을 증언할 수 있다.”1)
매우 웅변적이면서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 문장이어서 교회사 사료에 관한 논문을 쓸 때면 자주 인용하는 편이다. 이번 논문 역시 최석우 몬시뇰의 금언을 준칙으로 삼고, 브뤼기에 르 주교 연구의 기초는 사료 확보와 올바른 사료 해석에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런데 사료가 중요하다는 말은 익히 알겠는데, 사료의 바다에 빠져서 익사하지 않고, 잘 헤엄쳐 나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즉 사료를 어떻게 정리해야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지 를 따져야 한다. 여기서 목록(inventarium)의 중요성이 등장한다. 사료들을 작성 연대나 작성자, 수신자, 소장처, 문서 분류 번호, 사료 성격, 사료 내용 등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이를 목록으로 만들어야 누구나 손쉽게 사료에 접근할 수 있고, 또 원하는 사료를 찾을 수 있다. 이런 목록이 없다면 아무리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하여 연구하고 싶어도 접근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연구자라면 누구나 사료의 중요성과 더불어 목록의 중요성도 절실하게 느낀다.
이하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들을 세 가지 주제로 접근하고자 한다. 먼저 관련 사료 가 현존하는 소장처들에 대한 조사 내용을 보고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어떤 사료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떤 분류 번호를 제시하면서 보여달라고 해야 원하는 사료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지를 소개하겠다. 다음으로 관련 사료들을 연대순으로 나열하였을 때 사료의 총량은 어느 정 도이고, 시기별로는 어떤 분포를 보이고 있는지를 다루겠다. 아울러 개별 사료를 분석할 때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지도 함께 제시하겠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료들을 사용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한 연구할 때 앞으로 해결해야 할 연구 과제들로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이것은 말하자면 브뤼기에르 주교 연구의 향후 아젠다(agenda)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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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석우, 「교회사 연구와 교회사 서술의 문제」, 교회사연구 23, 2004, 1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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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료 소장처에 대한 조사 보고
1)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가 어디에 가장 많이 있을까? 당연히 브뤼기에르 주교가 소속되어 있었던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이다. 그곳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파리 본부와 마카오 대표부로 보냈던 서한들, 파리 본부와 마카오 대표부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서한의 초안들,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에서 파리 본부를 경유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서한의 사본들, 그리고 브뤼기에르 주교와 관련한 서류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 조사를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다행히도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는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들을 대외적으로 공개하고 있으며, 한국 교회사 연구소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들을 복사 또는 촬영하여 국내로 들여왔다.2)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는소장하고 있는 문서들을 작성 연대에 따라서 두 가지 범주로 분류 하고 있다. 첫째는 고문서(les archives anciennes)이다. 이는 파리외방전교회가 설립되던 초기인 1660년부터1920년까지 작성된 문서들을 가리킨다. 둘째는 현대문서(les archives récentes)다.
이것은 1920년부터 최근까지의 문서를 정리한 것인데,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와는 관계가 없으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고문서에 해당하는 서한들은 해당 문서를 작성한 선교지역과 작성 연대에 따라 순서대로 정리하고, 이것을 두꺼운 책자의 갸름한 내지에 한 장씩 붙이는 방식으로 보관하고 있다. 이 문서철 가운데 조선 대목구 문서철에 해당하는 제577권과 제579권에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들이 집중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또한 파리 본부 신학교 발송 공동서한 문서철 제63권, 로마 대표부 문서철 제238권, 마카오 대표부 문서철 제303권, 제319권, 제320권, 제321권 그리고 시암 대목구 문서철 제888권, 제892권 등에도 관련 사료들이 산재해 있다.
조선 대목구 관계 문서철 제577권은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의 탄생에 관한 내 용을 담아서 사천 대목구장 생 마르탱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 서한부터 최양업 신부가 마카오 유학 시절 스승이었던 리부아 신부와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1860년 9월 3일 서한까지 약 140통의 서한 자료들을 담고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와 관련한 사료로는 조선 교우들이 사제 파견을 요청하면서 교황께 올린 1826년 서한,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이 조선 선교지 관할 의향을 타진하면서 파리외방전교회 파리 본부의 랑글루아 신부에게 보낸 1827년 9월 1일 서한을 필두로 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와 조선 대목구 설정에 관한 각종 서한이 제577권 의 전반부에 들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자면 제577권은 조선 대목구의 역사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들을 수집하여 편철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한 모두가 수록되어 있지는 않고, 그중에서 일부만 들어 있다. 제577권에 실린 브뤼기에르 주교의 첫 서한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포교성성 추기경 장관에게 보낸 1832년 11월 9일 서한과 파리 신학교 지도자들에게 보낸 1832년 11월 10일 서한이다.
이 서한들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2년 10월 18일 마카오에 도착하여 조선 대목구 설정 칙서와 조선 대목구장 임명 칙서를 받은 이후에 쓴 것이다. 그러므로 제577권의 편찬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칙서를 수령한 이후에 작성한 서한만을 조선 대목구 관련 자료로 판단한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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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연구를 위하여 한국 교회사 연구소가 조사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와 그 총목록을 제공받았다. 소장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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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832년 11월 이후에 작성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서한이라고 해서 제577권에 모두 수록되지는 않았다. 일부 서한들은 제579권에 실려 있다.
조선 대목구 관계 문서철 제579권은 1797년부터 1874년까지의 서한 자료들을 싣고 있다. 아마 제577권의 편찬자와는 다른 인물이 제579권을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1797년부터 1860년까지 서한들을 엮은 제577권에서 빠진 것들과 사본들을 다시 모으고, 여기에 1861년부터 1874년까지의 서한들을 추가하여 제579권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제577권에는 구베아 주교의 1797년 8월 15일 서한이 연대 미상의 라틴어 사본 3통과 1801년 로마에서 인쇄 간행된 이탈리아어 번역본이 실렸다면, 제579권에는 불어 번역본과 포르투갈어 번역본이 다시 실려 있다. 이것을 보면 제579권의 편찬자가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 내부에서 새로 발견 한 문서들을 바탕으로 1797년 이후 조선 선교지의 역사에 관한 문서들을 다시 모아서 문서철을만들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제579권의 전반부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보냈거나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서한 자료만이 아니라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한 서류들도 수록되어 있다. 가령 19세기 프랑스에서 성직 지망자가 대신학교에 진학할 때 갖추어야 할 학사 학위를 브뤼기에르 주교가 받았음을 증명하는 1812년 10월 30일 학사 학위 증명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사제로 서품된 이후에 가입한 에그벨의 노트르담 트라피스트 신심회에서 1819년 5월 18일에 발행한 신심회 가입 증명서, 브뤼기에르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신분으로 아시아 지역에 파견되었음을 증명하는 1826년 2월 4일 출발 허가서 등이 있다. 또한 포교성성에서 파리외방전교회 파리 본부로 보낸 1831년 9월 9일 조선 대목구 설정 칙서와 조선 대목구장 임명 칙서, 시암 대묵구장 플로랑 주교가 브뤼기에르 신부를 1829년 6월 29일에 주교로 승품하였음을 기록한 1829년 11월 1일 증명서 등도제579권에 들어 있다.
그런데 제579권에 들어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 본인의 서한들은 제577권과 마찬가지로 마카오에 도착한 이후에 작성한 것들이다. 첫 번째 서한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인 교우들에게 보내 는 사목 서한의 라틴어본이다. 작성일은 1832년 윤6월 26일(anno Salutis 1832 die 26 mens. Junii intercalaris)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날짜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양력으로 1832년 6월은 윤달이 아니다. 그리고 1832년 6월 26일이면 아직 브뤼기에르 주교가 페낭에 있을 때였으며, 7월 25일이 되어서야 파리에서 보낸 뒤부아 신부의 편지를 받고 자신이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되 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 사목 서한 라틴어본의 날짜에는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 다. 음력으로 따졌을 때 1832년의 윤달은 9월이었다. 그런데 출처 불명의 한문본 사목 서한에는 1832년 윤9월 26일로 되어 있고, 이를 양력으로 계산하면 1832년 11월 18일이 된다. 그러면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카오에 도착하여 전후 사정을 파악한 뒤에 왕요셉을 북경으로 보내면서 사목 서한을 지참하게 한 시기와 거의 맞아떨어진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본다면 제579권에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들을 편철한 담당자는 조선 대목구의 역사 편찬과 관련하여 제577권의 편찬자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브뤼기에르 주교의 개인사에 관한 사료들까지 수집하고, 여기에 조선 대목구 설정과 관련하여 포교성성과 파리외방전교회 사이에 오간 서한과 조선 대목구 설정 칙서 및 조선 대목구장 임명 칙서까지 망라하여 제579권의 전반부를 구성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필요한 사료들을 모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샤를 달레가 1874년에 조선 천주교회사를 간행한 것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샤를 달레가 제579권의 편찬을 시도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제579권에 묶을 서한과 서류들을 정리하여 조선 천주교회사를 집필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문서고를 담당한 인물이 제579권을 완성하였을 수있다. 어쨌든 제579권에는 브뤼기에르 주교 개인 서류, 조선 선교지 관할 문제의 교섭 서한, 조선 대목구 설정 칙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대목구장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에 작성한서한들이 모여 있다.
그렇다면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기 이전의 사료들은 어디에 있을까?
가령 시암 대목구 선교사로서 활동하던 시절에 쓴 서한, 파리 본부에서 포교성성과 조선 문제를놓고 교섭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고 조선에 선교사로 가겠다는 의향을 처음 내보였던 서한, 방콕에서 페낭, 싱가포르, 마닐라를 거쳐 마카오에 도착할 때까지 작성한 서한 등은 조선 대목구 관 계 문서철에 들어 있지 않다.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의 문서철 편찬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 카오에서 정식으로 칙서를 수령하기 전까지는 시암 대목구 소속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사료들은 시암 대목구 관계 문서철 제888권과 제892권에 들어 있다. 시암 대목구 관계 문서 철에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 사료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선교사를 지원하면서 썼던 1829년 5월 19일 서한을 비롯하여 조선에 가기를 열망하는 내용이 담긴 서한을 여러 차례 파리 본부로 보냈는데, 이 서한들이 모두 시암 대목구 문서철에 편철되어 있기 때문 이다. 또한 시암 대목구 선교사로서의 활동 내용이 담긴 서한 자료들 역시 브뤼기에르 주교를 연구하는 데 필요하다. 비록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사로서 활동하지는 못했지만, 방콕과 페낭 등 시암 대목구 선교지에서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를 연구함으로써 그가 선교사로서 어떤 자질과 능력을 지녔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시암 대목구 문서철에는 그의 장상이었던 플로랑 주교가 파리 본부에 보낸 보고서들도 있다. 아직 조사되지는 않았지만 아마 플로랑 주교가 시암 대묵구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의 덕행과 평판을 기록한 내용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에서 소장하고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 가운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마카오 대표부 문서철 제303권, 제319권, 제320권, 제321권에 들어 있는 자료들이 다. 여기에는 마카오 대표부의 르그레주아 신부와 브뤼기에르 주교 사이에 오간 서한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파리 본부 신학교 발송 공동서한 문서철 제63권에는 조선 선교지 문제를 놓고 파 본부에서 각 선교지로 보낸 공동서한들이 여러 통 들어 있는데, 브뤼기에르 주교의 활동에 대한 파리 본부의 생각들을 읽을 수 있는 자료들이다. 아울러 파리외방전교회 로마 대표부 문서 제238권에는 포교성성에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낸 공식 문서들과 로마에 파견되어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대표가 파리 본부에 알리는 보고서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자료들 역시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한 파리 본부와 포교성성의 입장을 살피는 데 필요한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에는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한 사료들이 여러 문서철에 산재 해 있다. 가령 제801권은 코친차이나 북부 대목구 문서철인데, 여기에는 레제로 신부가 마카오 대표부의 바루델 신부에게 보낸 1829년 7월 19일 서한이 들어 있는데,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지를 맡는 문제에 관한 의견을 피력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한 동료 선교사들의 평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당시 파리외방전교회가 관할하던 대목구에서 파리 본부로 보낸 서한들에도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한 내용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한 연구를 위해서는 조선 대목구 문서철, 시암 대목구 문서철, 마카오 대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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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흥미롭게도 이 문서철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어머니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즉 1835년 9월 28일 서한이 들어 있다. 원본인지 사본인지는 불확실하다. 최근 카르카손-나르본 교구장 발랑탱 주교의 말을 인용하면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후손들이 이 서한을 찾아서 서울대교구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서한이 중요한 이유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보낸 서한 가운데 유일하게 브뤼기에르 주교의 주교 문장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4) 교황청 포교성성은 1622년에 설치되었고, 1988년에 인류복음화성으로 개편되었다. 교황청은 2022년에 인류복음화성과 새복음화 촉진평의회를 통합하여 복음화부로 개편하였다. 여기서는 당시 명칭을 고려하여 포교성성이라고 부르겠다.
5) 최석우, 「나의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695-6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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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철, 로마 대표부 문서철, 파리 본부 발송 문서철 등에 실린 자료를 가장 먼저 살펴야 하며, 그 외에도 여러 문서철에 산재한 자료들도 추가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한편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에는 고문서와 더불어 현대문서 문서철도 존재한다. 고문서는 서 한을 붙여서 만든 낱권 책자에 일련번호를 매긴 문서철로 구성된다. 반면에 현대문서는 책자로 만들지 않고 종이 상자에 해당 서류들을 모아둔다. 한국 천주교 관계 현대문서는 DF라는 분류 번호가 붙어 있다. 그중에서 DF220-1은 브뤼기에르 주교 관계 문서들을 모아둔 서류철이다.3)
아마 고문서 책자를 제작한 뒤에 발견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들을 따로 분류해 놓은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처럼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는 400년 이상 된 문서들을 보유한 곳이어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가 완벽하게 다 발굴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앞으로도 새로운 사료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2) 교황청 포교성성 문서고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 다음으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를 많이 보관하고 있는 소장처는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 문서고이다.4) 한국인 학자로서 포교성성 문서고를 방문하여 조선 천주교 설립 초기 자료와 조선 대목구 설정 관련 자료를 열람한 최초의 인물은 고(故) 최석우 몬시뇰이었다. 그는 1956년 초에 로마를 방문하여 8개월 동안 포교성성 문서고에서 관련 자료들을 직접보고 베껴 쓰거나 사진으로 찍었다.5) 이 자료들은 최석우 몬시뇰이 1961년 독일 본 대학에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의 부록에 들어 있다. 그 뒤 1983년에 수원교구의 윤민구 신부가 로마 라테란 대학교 박사과정에 있으면서 ‘103위 순교자 시성 청원인’ 자격으로 포교성성 문서고를 방문하여 조선 천주교 초기 역사에 관한 자료들을 열람하였고, 1996년 수원교구의 ‘윤유일 바오로와 7위 순교자 시복’을 위하여 다시 포교성성 문서고를 찾아가 자료들을 촬영하였다.6) 2000년 무렵부터는 서울대교구의 고(故) 최승룡 신부가 주기적으로 포교성성 문서고를 방문하고 조선 천주교 관련 자료들을 복사하여 주교회의 문화위원회와 한국교회사연구소 등에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이하의 서술은 최석우 몬시뇰, 윤민구 신부, 최승룡 신부에 의해 수집된 자료들에 바탕을 두었다.
포교성성 문서고 사료 목록을 정리한 연구서에 따르면 포교성성 문서고 소장 자료 분류 방식은 1893년을 기점으로 크게 바뀌었다.7) 즉 1893년부터는 개별 서류나 서한에는 주제에 상응하는 코드 번호를 부여하고, 입수된 순서에 따라 프로토콜 번호를 기입하는 방식으로 정리하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1893년 이후 포교성성 문서고에 도착한 조선 천주교 관련 사료에는 ‘중국과 인접한 왕국들(Regni adiacenti alla Cina)’ 관련 사료라는 의미에서 코드 번호 131번이 부여된다.
반면에 1892년까지의 문서들은 코드 번호 없이 포교성성 월간 회의록, 주간 회의록, 특별회의록, 그리고 각 회의록에 첨부된 사료 모음 등의 대분류로만 구성되어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의 조선 대목구 관계 문서철 제000권과 같이 한국 교회 사료가 별도로 편철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각 회의록과 사료 모음집에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들을 찾아야 한다.
첫째, 포교성성 추기경들과 다른 구성원들이 매달 개최하는 전체 회의의 회의록(Acta Sacrae
Congregationis, Acta)이 있다. 1622년부터 1982년까지의 회의 기록이 345권으로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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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윤민구, 103위 성인의 탄생 이야기, 푸른역사, 2009, 191-198쪽.
7) Josef Metzler, Inventory of the Historical Archives of the Sacred Congregation for the Evangelization of Peoples or De Propaganda Fide, Rome:Urbaniana University Press, 1983, p. 90.
8) Ibid., p. 21.
9) 윤민구 신부는 포교성성 월간 전체 회의 회의록을 ‘인류 복음화성 행록’이라 부르며, 조선에 관해서는 제24권(1655)에 간단히 언급된 것을 시작하여 간간이 소개되어 있다고 하였다. 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가톨릭출판사, 2000, 12쪽.
10) Josef Metzler, Op. cit., p.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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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임석한 추기경이나 비서의 보고가 있고, 구성원들이 내린 결정 사항이 실려 있다.
그래서 포교성성 월간 전체 회의 회의록에는 포교성성의 주요 활동과 결정 사항이 담겨 있다.8)
이 회의록에 브뤼기에르 주교나 조선 대목구 관련 사료가 들어 있는지는 아직 조사된 바가 없다.9)
둘째, 포교성성 월간 전체 회의에 보고된 원자료 문서철(Scritture Originali riferite nelle
Congregazioni Generali, SOCG)이 있다. 1622년부터 1892년까지의 보고 자료가 1,044권으로 묶여 있다. 이 원자료 문서철은 1622년부터 1668년까지의 기록을 지역별로 나누고 제1권부터 제 417권까지 정리한 첫 번째 시리즈, 1669년부터 1892년까지의 기록을 연대순으로 나누고 제418 권부터 제1,044권까지 정리한 두 번째 시리즈로 나뉘어 있다.10) 조선 천주교회 초기 사료, 브뤼 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 조선 대목구 관련 사료가 이 원자료 문서철에 들어 있다면 두 번째 시리즈에 있을 것이지만 이 역시 아직 조사된 바가 없다.
셋째,특별회의 회의록인데, 그중에서 중국과 동인도사안 관계 특별회의 회의록(Acta
Congregationis Particularis super rebus Sinarum et Indiarum Orientalium, Acta CP)과 이 회의에 보고된 원자료 문서철(Scritture Originali della Congregazione Particolare dell’Indie e Cina, SOCP)이 중요하다. 중국과 동인도 문제를 다루는 특별회의는 1664년부터 상설화되었고, 1665년에 특별회의 관련 기록이 특별 섹션으로 따로 성립하였다.11) 특별회의 회의록은 1665년부터 1856년까지의 기록이 161권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보고 원자료 문서철은 1667년부터 1856년까지의 기록이 78권으로 정리되어 있다.12)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는 이 회의록의 제21권(1822-1832)과 제22권(1833-1840)에 들어 있다. 그리고 특별회의에 보고된 원자료 문서철에서는 제75권, 제76권에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가 들어 있다. 형식 논리로만 보면 회의록에는 회의 안건과 결정 사항만 있고, 해당 회의에 보고된 원자료는 원자료 문서철에 따로 정리되어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즉 회의록에도 안건 개요, 심의 사항, 결정 사항 다음에 원자료의 활자본이 있고, 여기에 원자료가 첨부되어 있기도 하다.
가령 회의록 제21권에는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이 주재한 1828년 9월 회의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북경 교구 관련 사안을 검토하면서 정하상과 유진길이 교황께 올린 성직자 파견 청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논의했는데, 심의 사항 뒤에 정하상, 유진길 서한의 라틴어 번역 활자본과 한문 필사본이 실려 있다. 그러므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를 조사하려면 특별회의 회의록과 원자료 문서철 모두를 교차 검토해야 한다.
넷째, (주간) 회의 보고 문서철(Scritture riferite nei Congressi, SC)이 있다. 이것은 주간 회의
에 보고된 문서 자료의 모음집인데, 1,45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자료는 포교성성 전체로 보면 이차적인 중요성을 지니며, 전체 회의에서는 논의되지 않은 것들이다. 하지만 주간 회의에 보고된 것이고, 또 선교지의 일상적인 삶을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매우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13) 그중에서 중국과 인접 왕국들에서 포교성성으로 보내온 서한 문서철(SC Cina e regni adiacenti)은 1798년부터 1892년까지의 자료들을 35권 분량으로 정리한 것이다.14) 여기에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는 제6권, 제7권, 제8권에 들어 있다.
다섯째, 포교성성 극동대표부 문서철(L’Archivio della Procura della Congregazione
nell’Estremo Oriente, APEO)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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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Ibid., p. 47.
12) http://www.archiviostoricopropaganda.va (2024년 6월 6일 14:25 검색)
13) Josef Metzler, Op. cit., pp. 48-49.
14) Ibid., p.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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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부터 18년 동안 포교성성 문서고 담당자였던 요제프 메츨러(Josef Metzler OMI, 1921-2012) 신부가 목록을 정리하여 간행한 책자에는 극동대표부 문서철에 관한 소개가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대략 짐작하자면 광동성 광주, 마카오, 홍콩 등에 설치되었던 포교성성 극동대표부는 선교지에서 포교성성으로 보내는 서한들과 포교성성이 선교지에 보내는 서한들, 그리고 대표부 신부가 작성한 서한들이 모여 있다. 실제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포교성성 극동대표부의 대표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1835년 7월 27일 서한을 비롯하여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들이 극동대표부 문서철 제20권, 제21권에 들어 있다.
그런데 포교성성 문서고에 소장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를 조사할 때 두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먼저 사료의 폴리오(folio) 번호 문제이다. 정식으로 출판된 서적에 표기된 일련번호 는 페이지라고 부른다. 반면에 사료 묶음집에 매겨진 일련번호는 폴리오라고 부른다. 페이지는 앞면과 뒷면에 각기 다른 번호를 적지만, 폴리오는 앞면에만 적고 뒷면에는 적지 않는다. 대신에 폴리오의 뒷면은 앞면 번호에 v를 부기하여 읽는다. 여기서 v는 뒷면(verso)의 약자이다. 앞서 최승룡 신부가 포교성성 문서고에서 조선 천주교 사료를 복사하여 한국 교회에 들여왔다고 하였다. 이 작업은 엄청난 노력과 외교력을 요구하는 것이고, 최승룡 신부가 현대 한국 천주교 역사 연구에 끼친 공적이 지대하다.
이 자료들은 현재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교회사 사료실과 한국교회사연구소 문서고 등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자료의 상단에는 스탬프로 찍은 여러 종류의 일련번호와 손으로 적은 숫자들이 적혀 있다. 이 중에서 스탬프 번호는 원래 포교성성 문서 고에서 개별 문서에 찍은 일련번호가 아니다. 최승룡 신부가 방대한 사료를 복사하면서 여러 묶 음의 사료들이 뒤섞이지 않도록 일련번호를 찍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스탬프 번호를 해당 사료 의 폴리오 번호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상단에 적힌 손으로 쓴 숫자가 원래 문서고에 서 붙인 일련번호인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어떤 경우에는 폴리오 번호를 매기는 규칙과 무관하게 매긴 흔적도 있다. 게다가 흑백으로 복사하였기 때문에 본문 자체도 판독하기가 매우 어려울뿐더러, 일련번호를 연필로 적었는지 잉크로 적었는지 분간할 수가 없다. 따라서 앞으로 포교성성 문서고 소장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들을 좀 더 정확하게 연구하려면 새로 복사하 여 판독하고 번역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문서철의 약어에 관해서도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기존 연구들이 같은 문서철을 각기 다른 약어로 표기함으로써 연구자들에게 혼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최석우몬시뇰의 박사학위 논문에는 특별회의 회의록(Acta CP)을 ACP로, 특별회의 보고 원자료 문서철 (SOCP)을 SO로, (주간) 회의 보고 문서철(SC)을 SR로, (주간) 회의 보고 원자료 문서철(SOC)을 SOR로 약칭하였다. 메츨러 신부의 포교성성 문서고 안내서는 1983년에 간행되었고, 최석우 몬 시뇰이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하던 1956년에는 그와는 다른 약어 표기가 사용되었던 것 같다.15)
또한 이석원에 따르면 포교성성 극동대표부[마카오] 문서철의 약칭도 국내에서 연구자에 따라 약간 다르게 표기되고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하는 교회와 역사에는 APF로 되어 있고, 주교회의 교회사사료실 문서목록에는 APM으로 되어 있으며, 수원교회사연구소에서는 APEO로 사용한다는 것이다.16) 아마 APF는 포교성성 문서(Archivio Propaganda Fide)를, APM 는 마카오 대표부 문서(Archivio Procura Macau)를, APEO는 극동대표부 문서(Archivio Procura Estremo Oriente)를 약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같은 문서철을 가리키는데 로마자 약어 표기가 달라서 발생한 문제이다. 이처럼 문서철의 약어 표기에 혼란이 있을 때는 현재 포교성성 문서고에서 정식으로 붙이는 문서철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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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기초, 경인문화사, 2010, 219쪽. 각주 21과 각주 22에 나오는 두 가지 문서철, Prop. SR 1812-1820과 SC Cina Vol. 4(1812-1820)은 같은 문서철이다.
16) 이석원, 「1830년대 중국인 사제 여항덕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과의 갈등」, 중국근현대사연구 96, 2022,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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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카르카손 교구 문서고
브뤼기에르 주교는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 교구 출신이었다. 카르카손 대신학교에서 사제로 서품되었고, 대신학교 교수 신부로 활동하다가 파리로 가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카르카손 교구 문서고에도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들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카르카손 교구 문서고는 카르카손 교구 주교관(Evêché de Carcassonne et Narbonne, 89 Rue Jean-Bringer, 11003 Carcassonne) 2층에 있다. 문서고 담당자는 미술사학자 가엘 파비에(Gaël Favier) 박사다.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 조사를 위하여 2023년 10월 23일 오전에 카르카손 교구 문서고를 방문하였으나, 문서고 담당자와는 일정이 맞지 않아서 만날 수 없었다. 대신에 교구 사무국장 베르나르 뒤멕(Bernard Dumec) 신부가 맞아 주었으며, 문서고 내부를 견학하고 몇 가지 서류를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뒤멕 신부가 보여준 서류는 1803년 9월 24일부터 1827년 12월 22일까지의 카르카손 교구의 성직 서품 대장이었다. 이 대장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삭발례(1806년 9월 25일), 시종품과 기타 소품(1812년 5월 23일), 차부제(1814년 3월 26일), 부제(1814년 6월 4일), 사제(1815년 12월 23일) 서품 기록이 적혀 있었다.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고향의 부모, 질녀, 조카에게 보낸 서한들의 필사본 복사물이 8통가량 수집되어 있다. 복사된 형태로 보면 공책에 옮겨 적은 것들이다. 이 복사 자료를 누가 어디에서 가져왔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개포동 본당 신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 활동의 일환으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고향과 생가를 방문하면서 수집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 필사본이 카르카손 교구 문서고에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문서고 담당자 가엘 파비에 박사를 만나지 못해서 확정을 짓지 못하였다. 개포동 본당 신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형제 후손들을 만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족에게 보낸 서한의 필사본을 후손으로부터 얻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카르카손 교구 문서고 자료일 가능성이 높지만 아직 단언할 수 는 없다.
앞으로 브뤼기에르 주교 사료 수집을 위하여 카르카손 교구 문서고에서 협조를 얻을 때 해결 해야 할 과제들이 몇 가지 있다. 먼저 현재 수집한 가족에게 보낸 서한 필사본의 소장처가 카르카손 교구 문서고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다음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에 입학한 날짜가 불분명하다. 카르카손 교구 문서고에서 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을 찾아야 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소신학교에 입학할 때 나르본 교구 소신학교(현재의 보세주르 고등학교로 추정됨)를 잠시 다니다가 카르카손 교구 소신학교(현재의 생 스타니슬라스 사립 고등학교)로 옮겼다. 그러므로 나르본 교구 소신학교 입학 날짜, 카르카손 교구 소신학교 전학 날짜, 카르카손 대신학교(현재의 잔 다르크 천주교 사립학교) 입학 날짜, 이렇게 세 가지를 밝혀야 한다. 마지막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카르카손 교구의 교구장 주교, 동료 사제, 대신학교 학생들에게 보낸 서한들이 더 있는지를 조사해야 한다.
4) 오드 도립 문서고
오늘날 프랑스는 과거 천주교회가 보유하고 있었던 세례 대장, 혼인 대장, 장례 대장 등의 교회 기록을 도립 문서고로 이관하였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출생 증명이라 할 수 있는 세례 기록, 부모의 혼인 기록과 사망 기록, 형제들에 관한 기록 등은 모두 오드 도립 문서고 (Archives Départemales de l’Aude, 41 Avenue Claude Bernard, 11000 Carcassonne)에 보관되어있다. 오드 도립 문서고는 프랑스의 다른 도립 문서고와 마찬가지로 해당 사료들 대부분을 인터넷에서 온라인으로 열람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1792년 2월 13일에 레삭 도드(Raissac d’Aude) 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과 부친이 1833년 9월 12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는 증명서, 모친이 1837년 4월 27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는 증명서, 부모가 1769년 3월 6일 나르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혼인 기록, 브뤼기에르 주교 형제들의 세례 기록, 혼인 기록, 사망 기록도 온라인으로 열람할 수 있다.
그래도 몇 가지 불확실한 사항이 있어서 2023년 10월 23일 오후에 오드 도립 문서고를 방문 하였다. 먼저 세례 기록이 흑백이고 가장자리가 눌린 상태로 스캐닝되었기 때문에 판독이 불분명한 부분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오드 도립 문서고에서는 컬러 스캔본을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점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가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었다. 오드 도립 문서고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태어났고, 브뤼기에르 주교의 부모가 나중에 사망한 집에 관한 부동산 정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드 도립 문서고에서 제공한 자료는 부모 사망 이후 유산 상속에 관한 서류와 당시 레삭 도드 마을 지도였다. 이것을 통해서 부모가 살던 집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형 루이 브뤼기에르에게 상속되었다는 것, 마을 지도에서 그 집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등을 알 수 있었다.
옛 지도상으로 그 집의 위치는 현재 레삭 도드 마을의 디디에 부스케(Didier Bousquet) 면장과 본당의 연로한 신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가라고 지목하는 집의 위치(4 rue du Parc, Raissac d’Aude)와 일치한다.
5) 기타 소장처와 출처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는 방콕에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카오에 있던 프랑스 선교수도회 선교사 라미오 신부에게 보낸 1829년 5월 29일 서한의 복사본이 있다. 자신이 조선에 선교사로 갈 결심을 하였음을 밝히면서 조선 입국 방법을 문의하는 내용이었다. 이 복사본에는 로마 선교 수도회 문서고(Arch. Romae-Lazaristae)라는 글귀가 여백에 적혀 있다. 그러면 이 서한의 원본
은 로마 선교수도회 문서고에 있다는 것일까? 하지만 선교수도회의 로마 문서고는 파리 본부 문서고로 이관되었다. 그래서 2023년 10월 17일부터 20일까지 파리의 선교수도회 본부 (Congrégation de la Mission, 95 rue de Sèvres, 75006 Paris) 문서고에서 자료를 열람하였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라미오 신부에게 보낸 1829년 5월 29일 서한의 원본은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에 라미오 신부의 뒤를 이어 마카오에서 프랑스 선교수도회 대표부를 이끌었던 장 바티스트 토레트 신부의 일지, 1835년 7월 12일 서만자에 도착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와 석 달가량 함께 생활했던 프랑스 선교수도회 선교사 조제프-마르시알 물리 신부의 서한 등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한 단편적인 언급들을 발견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로 거처를 옮기고자 하였을 때 서만자 선교지의 장상이었던 중국인 선교수도회원 설 마태오 신부나 마카오의 토레트 신부가 이를 허락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브뤼기에르 주교와 토레트 신부, 브뤼기에르 주교와 설 마태오 신부 사이에 주고받은 서한 자료가 남아 있고, 이것이 파리 선교수도회 문서고에 남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한편 브뤼기에르 주교는 중국 내지를 여행하기 위하여 마카오 성요셉 신학교의 포르투갈 선교수도회 선교사들의 허락을 얻고자 애썼다. 결국 포교성성 대표부 움피에레스 신부가 나서서 남경까지 가는 허락과 지리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마카오 교구 문서고에도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가 남아 있을 수 있다. 또한 마카오 교구 문서고에는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와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부의 위치에 관한 서류도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마카오 교구 문서고에 미리 열람 신청을 하고 2023년 8월 11일 방문하였지만 담당자(Mr. Benedict Keith Ip)가 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만날 수 없었고, 이후 여러 차례 이메일로 문의하였으나 아직 아무런 답변이 없다.
마지막으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한들 가운데 프랑스 선교잡지 전교회보(A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에 게재된 것이 여러 편 있다. 제3권(1828)과 제4권(1830), 제5권(1831),
제6권(1833), 제8권(1836), 제9권(1837) 등에 실려 있다. 이 서한들은 리용에 있던 전교후원회 본부에서 파리외방전교회 파리 본부에 요청하여 원본이나 사본 형태로 받아서 책자에 수록하였을 것이다. 책자가 남아 있어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윤문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전교회보에 실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의 원본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리용의 전교후원회 본부에 문의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완적인 작업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한 자체는 발굴하지 못했더라도 전교회보에 실린 인쇄본만으로도 사료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3. 시기별 사료 현황
지금까지 파악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의 총량은 어느 정도일까? 2010년 조사 당시에만 해도 120건가량이었다.17) 그런데 2024년 2월 14일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제공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 총목록에는 251건의 상세 목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새로 발견한 사료까지 합치면 총 264건이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의 현재 총량이다. 이 사료들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 주기에 따라서 ① 교구 사제 시기, ② 시암 대목구 선교사 시기, ③ 조선 선교사 지원 시기, ④ 조선 대목구 설정 시기, ⑤ 중국 내륙 종단 시기, ⑥ 구급촌 체류 시기, ⑦ 서만자 체류 시기, ⑧ 선종 이후, 이렇게 여덟 시기로 나누어 사료의 분포를 점검하면 유용하다.
아울러 사료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들(작성일, 작성자, 작성지, 수신인, 수신일, 사료 성격, 사료 언어, 소장처/수록 지면, 분류번호)을 정확하게 기재하고, 사료의 형태적 성격과 내용적 성격에 대한 고찰들을 담은 뒤에 관련 참고 사항들을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현재 이러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제공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 총목록 엑셀 파일을 바탕으로 작업하고 있다. 기존 목록에 존재하는 오류를 수정하고 새로 발굴된 사료를 추가하고 있다. 죄송하게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 논문이 학술지에 게재될 때까 지 완성할 계획이다. 그러면 어떤 형태로 작업이 진행되어 있는지를 보고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샘플을 제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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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 연구를 위한 서설」, 조현범 외, 돈사 조광 교수 정년기념 논총 한국 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 디자인 흐름, 2010, 49쪽.
연 번 | 작성일 | 작성자 | 작성 지 | 수신자 | 사료 성격 | 언어 | 소장처/ 수록지면 | 분류번호 | 사료 고찰 | 비고 |
1 | 1792. 02. 13 | 미켈 신부 | 레삭 도드 | 세례 기록 | 불어 | 오드 도립 문서고 | 에티엔미켈 (EtienneMiquel, 1754-1835)신부는 레삭도드 본당 주임사제였으며, 1792년 2월 12일에 태어난 바르텔레미브뤼기에르에게 세례를 줌. 대부는 도피네 출신 상인바르텔레미 파지, 대모는누이인루이즈브뤼기에르였음. | 미켈신부에 관한록은다음을참고. LeChanoine abarthes, Histoiredu Clergede l'Audede 1789a 1803, Carcassonne: EditionsRoudiere, 1939, p. 291. | ||
2 | 1806. 09. 25 | 카르 카손 | 삭발례 기록 | 라틴 어 | 카르카손교구 문서고 | Registre Ordinations,f. 17. | 카르카손 교구장 아르노-페르디낭 드라포르트(Arnaud-Fer dinand de la Porte, 1756-1824) 주교가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소신학생에게 삭발례를 베풀었음을서품 대장에 기록함. | |||
3 | 1812. 05. 23 | 카르카손 | 시종품 등 서품 기록 | 라틴 어 | 카르카손 교구 문서고 | Registre Ordinations,f. 17 | 카르카손 교구장 아르노-페르디낭 드라포르트Arnaud-Fer dinand de la Porte, 1756-1824) 주교가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소신학생에게 삭발례를 베풀었음을 서품 대장에 기록함 | |||
4 | 1812 . 10. 3 | 루이 드 퐁탄 백작 | 파리 | 문과 대학 입학 자격 증 | 불어 | 파리외방 전교 회문서고(AMEP) | v. 579 f. 58 | 제국교수단 수장인 루이 드 퐁탄 백작의 명의로발급된 문과대학 입학 자격 증서. 공화국 교육개혁 이후 대신학교 입학을 위해 필요한 서류. | ||
5 | 1814. 03. 26 | 카르 카손 | 차부제 서품 기록 | 라틴어 | 카르카손 교구 문서고 | Registre Ordinations,f. 82. | 드 라 포르트 주교가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신학생에게 차부제품을 수여하였음을 서품 대장에 기록함. | |||
6 | 1814. 06. 04 | 카르 카손 | 부제 서품 기록 | 라틴 어 | 카르카손 교구 문서고 | RegistreOrdinations, f. 88 | 드 라 포르트 주교가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차부제에게 부제품을 수여하였음을 서품 대장에 기록함. | |||
7 | 1815. 12. 23 | 카르 카손 | 사제 서품 기록 | 라틴 어 | 카르카손 교구 문서고 | RegistreOrdinations,f. 105 | 드 라 포르트 주교가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부제에게 사제품을 수여하였음을 서품 대장에 기록함. | |||
8 | 1819.05. 18 | 에티 엔 수사 | 발랑 스 | 브뤼기 에르 신부 | 트라피 스트 신심회 가입 허가서 | 불어 | 파리외방 전교회 문서고 (AMEP) | v.579, f. 59. | 엄률 시토 교단 트라피스트회 소속 액벨 성모 수도원 원장 에티엔 수사(본명은 피에르-프랑수아 드폴 말미)가 브뤼기에르 신부에게 보낸 신심회 가입허가서 | 엑벨 트라피스트 수도원 설립자에티엔수사 신부의전기. Casimir Gaillardin, Vie du R. P. DomEtienne, Paris: Auguste Vaton, 1841. |
9 | 1825. 01. 16 | 브뤼 기 에르 신부 | 카르 카손 | 귀알 리 주교 | 교구장 에게 보낸 청원 서한 | 불어 | 카르카손 교구 문서고 | 카르카손 교구장에 입명되었으나 아직 파리에 있던 귀알리(Gualy) 주교에게 브뤼기에르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서 편지를 보냄. 귀알리 주교는 1월 31일에 수신하고 2월 27일에 답신을 보냈다고 겉봉에 적어 둠. | ||
10 | 1825. 02. 07 | 델마 신부 | 카르 카손 | 귀알 리 주교 | 총대리 신부의 보고서한 | 불어 | 카르카손교구 문서고 | 카르카손 교구 사무국장 겸 총대리 델마(Delmas) 신부가 파리에 있던 귀알리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어 브뤼기에르 신부의 계획을 언급함. | ||
11 | 1825. 09. 08 | 브뤼 기 에르 신부 | 카르 카손 | 부모 | 불어 | 카르카손 교구문서고 (추정) | 카르카손교구주보 (1935.10. 5일자) |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기 위하여카르카손을 떠나면서 부모에게 보낸 작별 서한 |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67~70쪽 | |
12 | 1825. 11. 06 | 브뤼 기 에르 신부 | 파리 | 어머 니 | 불어 | 카르카손 교구문서고 (추정) | 브뤼기에르 신부가 파리에서 고향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번역본에는 이 편지의 일부가 1825년 12월 15일 편지의 번역문에 들어 있다. 착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
13 | 1825. 11. 2 | 브뤼 기 에르 신부 | 파리 | 질녀 | 불어 | 카르카손교구문서고(추정) | ||||
14 | 1825. 12. 15 | 브뤼 기 에르 신부 | 파리 | 부모 | 불어 | 카르카손 교구 문서고 (추정) | 파리를 떠나기 전에 고향으로 보낸 마지막 편지로 추정된다. 번역본에는 위의 1825년 11월 6일 편지의 내용 일부가섞여들어가있다. |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73~75쪽 | ||
15 | 1826. 02. 03 | 파리 본부 | 파리 | 바루 델 신부 | 공동 서한(제 18번) | 불어 | 파리외방 전교회 문서고 (AMEP) | v. 63, ff. 61-64 | 파리 본부에서 발송하는 공동 서한의 초안집에 실린 것으로 바루델 신부를 수신자로 하고 있음. 1826년 2월에 출발하는 선교사들을 거론하면서 브뤼기에르 신부를 언급함. | |
16 | 1826. 02. 04 | 파리 본부 | 파리 | 브뤼 기 에르 신부 | 출발허가 및 선교 사신분 증명 | 라틴 어 | 파리외방전교회문서고(AMEP) | v. 579, f. 60. | 신임 선교사를 파견할 때 지침하도록 하는 출발 허가서인데, 인쇄된 형식에 브뤼기에르 신부의 이름이 수기로 적혀 있고, 하단에 랑글루아 신부 등의 서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신분증명서라고 할 수 있다. | |
17 | 1826.04. 0 | 브뤼 기에 르 신부 | 항해 중 | 부모 | 불어 | 카르카손 교구문서고 (추정) |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76~77쪽 | |||
18 | 1826. 07. ? | 브뤼 기에 르 신부 | 바타 비아 | 부모 | 불어 | 전교회 회보 (APF) | t. 4(1830), pp. 200-203 |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6년 7월 1일자바섬 바타비아 항구에 도착하였고, 8월 28일 마카오로 다시 출발하였다. 이 편지는 바타비아에 체류하는 동안에 쓴 것이어서 7월로 추정하였다. 전교회 회보에 실린 인쇄본서한에는날짜가없다. |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78~81쪽 | |
19 | 1826말 /1827 초 | 브뤼 기에 르 신 부 | 바타 비아 | 귀알 리 신부 | 카르카 손 교 구 총대리 신부에 게 보 낸서한 | 불어 | 전교회 회보 (APF) | t. 4(1830), pp. 203-206 | 편지의 수신인 귀알리(Gualy) 신부는 카르카손 교구장 귀알 주교가 아니라 카르카손 교구 총대 신부다. 브뤼기에르신부는 마카오에서 시 대목구로 파견되었고,페낭으로 가는 여정서 다시 바타비아를들렀다. 브뤼기에르신부가 마카오를출발한것은1826년 12월 11일이고, 페낭에도착한 것은 1827년 1월 12일이다. |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82~86쪽 |
20 | 1827. ?. ? | 브뤼 기 에르 신부 | 페낭 | 바루 델 신부 | 페낭에서마카오로보낸서한 | 불어 | 파리외방 전교회 문서고 (AMEP) | v. 892, ff. 554-556 |
4. 연구 과제들
1) 중국 종단 여행의 경로와 그 이유
아직 브뤼기에르 주교의 중국 행적에 관하여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몇 가지 있다. 절강성 남부 항구 상륙 지점, 남경 근방 교우촌 유숙지, 장강 도하 지점, 직예 교우촌 도착지 등의 구체적인 지명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3년 5월 12일 처음으로 중국 본토에 상륙한 히아포(Hiapou) 항구로는 절강성 북쪽의 사포(乍浦), 브뤼기에르 주교가 본격적으로 중국을 종단하는 여행을 출발할 때까지 1833년 5월 23일부터 7월 20일까지 머물렀던 교우 촌의 위치로는 소주(蘇州) 근방,18) 탈진한 몸을 이끌고 1833년 8월 26일 가까스로 도착한 직예 교우촌으로는 보정부(保定府) 안가장촌(安家庄村) 부근의 작은 마을19) 등을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분명한 증거 자료가 없어서 확정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브뤼기에르 주교가 거쳐 간 장소들의 지명을 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왜 그런 여행 경로를 선택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사안이 될 수 있다.
왜 그런가? 먼저 브뤼기에르 주교가 중국 내륙을 종단하던 시점과 유사한 시기에 중국 남쪽, 특히 마카오에서 중국 북쪽, 북경까지 여행한 사례가 없지 않았다. 프랑스 선교수도회 선교사 조제프 마르시알 물리 신부, 포르투갈 선교수도회 조앙 드 프랑사 카스트루 에 무라 신부, 그리고 사천 대목구 선교사 로랑 앵베르 신부 등이 있다. 그리고 전교회 회보에 실린 선교수도회 선교사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의 서한들에도 마카오에서 광동을 거쳐 육로로 북상하거나, 배로 복건까지 간 다음에 다시 육로로 이동하여 강서, 호남, 호북 등지에 산재한 선교지로 이동한 기록이 있다.
그중에서 유독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이 힘들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를 읽어보면 소주 근방에서 왕 요셉과 안내인들을 대동하고 운하를 따라가는 배에 오른 뒤부터 직예 교우촌에 도착할 때까지 중국인 교우의 집에서 묵었다는 기록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당시 선교사들의 중국 내륙 여행 패턴과 아주 다른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은 중국인 교우 마을이 어디에 있고 중국인 관헌이 지키고 있는 관문은 어떻게 피해서 갈 수 있는지를 잘 아는 안내인 교우를 대동하고 교우 마을이나 교우의 집을 중간 경유지로 하여 여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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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최석우 몬시뇰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중국 강남의 교우촌에 머물다가 1833년 6월 26일 북경에서 돌아온 왕 요셉을 만났다고 하면서 소주 근방의 어느 작은 교우 마을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왕 요셉의 편지에 근거한 설명이었다. 그런데 최석우 몬시뇰은 이 설명에 주석을 붙이면서 작은 실수를 하였다. 즉 포교성성 문서고에 소장된 왕 요셉의 편지를 근거로 들면서 1833년 1월 18일 서한(AP, Acta CP, v. 22, f. 152)과 1833년 3월 26일 서한 요약문(ibid., f. 316)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최석우,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142쪽.) 그런데 왕 요셉이 브뤼기에르 주교와 의 만남을 보고하면서 마카오의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발신지를 소주라고 적은 것은 1833년 7월 1일 서한(AP,Acta CP, v. 22, f. 153.)이다. 그러므로 왕 요셉의 편지를 근거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강남 유숙지가 소주 근방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19) 브뤼기에르 주교가 도착한 직예 교우촌 위치를 안가장촌 부근으로 추정하는 것은 처음 시도하는 작업이다. 그 근거는 이러하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나중에 샤스탕 신부가 북경에서 피레스 주교의 제안을 받고 카스트루 에 무라 신부의 사목지로 가서 큰 환영을 받았는데 그곳이 자신이 36일 동안 죄수처럼 붙들려 있던 마을에서 1/4리외(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고 여행기에서말하였다. 샤스탕 신부도 카스트루 신부가 있던 곳으로 가서 큰 환영을 받았다고 밝혔다. 브뤼기에르 주교보다 약간 늦게 출발하여 산동에서 활동을 시작한 카스트루 신부는 1830년대에 보정부 안가장에서 활동하였다. (Alan Richard Sweeten, China’s
Old Churches, The History, Architecture, and Legacy of Catholic Sacred Structures in Beijing, Tianjin, and Hebei Province, Leiden: Brill, 2020, p. 254.) 그리고 카스트루 신부는 1847년 6월 11일 북경 근방의 호림점(胡林店)이라는 마을에서 프랑스 선교수도회 물리 주교를 만나고 북경 선교지 관할권을 넘겨주면서 안가장에 거처를 마련하라고 조언하였다. (Octave Ferreux, The History of the Congregation of the Mission in China, 1699-1950, translated by Hippolyte Henk De
Cuijper, New York: New City Press, 2022, pp. 155.)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브뤼기에르 주교가 도착한 마을은 안가장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보정부 안가장은 기존의 추정 지점보다 상당히 북쪽에 있다. 그래서 과연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이 황하를 건넌 이후에 안가장까지 북상할 수 있었을지 의문스러울 수 있다. 이런 의문에 충분히 공감하면서 더 많은 사료 탐색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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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교우 마을이나 교우의 집에서 유숙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남경에서 북경까지의 여행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은 남경 교구와 북경 교구를 맡고 있던 포르투갈 선교수도회 선교사들, 그리고 강서, 호남, 호북, 서만자를 맡고 있던 프랑스 선교수도회 선교사들이었다. 왜 이들은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에게 중국 내지에 산재한 교우 마을에 관한 정보를 주지 않았을까? 좀 더 일반화하여 말한다면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및 프랑스 선교수도회 선교사들 사이의 관계는 어떠했는가를 밝히는 것이 브뤼기에르 주교 연구의 아젠다 중 하나이다.
2) 서만자 체류 시절의 행적과 활동
브뤼기에르 주교는 피레스 주교 등 포르투갈 선교수도회 선교사와 긴밀한 협조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래서 남경 부근에 도착하였지만, 당시 남경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선교수도회의 카스트루 신부나 도밍고-호세 엔히케스 신부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소주에서 직예까지 대단히 힘든 여행을 해야만 했다. 북경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피레스 주교가 허락하지않은것이었다.
대신 산서로 가서 살베티 주교의 도움을 얻어 1년 동안 쉬면서 조선 교우들과 연락을 취하고 입국을 도모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왕 요셉을 북경으로 보내어 조선 교우들과 접촉해 보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조선 교우들에게 이상함을 느꼈다.
결국 조선 교우와 접촉하는 데는 산서 대목구 주교관보다는 서만자의 프랑스 선교수도회 선교지가 더 위치도 북경에서 가깝고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과연 이 판단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각이었을까? 좀 더 세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에서 프랑스 선교수도회 장상 장 바티스트 토레트 신부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서만자로 갔다고 하였다.
같은 약속을 샤스탕 신부에게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토레트 신부가 마치 그런 적이 없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20) 어쨌거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서만자로 옮겨와서 설 마태오 신부 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했다. 마카오의 토레트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만자 유숙비를 공짜가 아니라고 계산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 본인이 선종하는 바람에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에 청구하지는 않았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만자 체류는 1년 정도였다. 그동안 브뤼기에르 주교는 많은 활동을 하였다. 먼저 조선 교우들을 설득하여 주교 입국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조선 대목구 신학교를 국경 지역에 설치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또한 앵베르 신부를 조선 대목구 부주교로 추천하였다. 마지막으로 만주 지역 재치권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이런 일들은 신생 대목구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서만자 활동을 연구하는 것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대목구장 재임 마지 막 시기를 분석하는 것으로서 조선 대목구의 앞날에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시기를 다루는 셈이다. 그만큼 큰 의의를 지닌다.
그뿐만 아니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시암 활동을 정리하면서 시암 민족지와 시암어 연구 노트를 작성하였듯이 이번에는 서만자에서 체류하면서 서만자의 프랑스 선교수도회 선교지 신학교 도서관에 있던 자료를 활용하여 조선 천주교 순교 역사를 정리하였으며, 또 중국 사료의 연대기를 칠십인역 바이블의 연대기와 대조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노력을 글로 정리하여 짧은 단평을 남겨 놓았다. 이렇게 브뤼기에르 주교가 짧은 글로 남긴 동아시아 천주교 관련 기록은 두 편 정도에 불과하다. 아직 정식으로 임지에 착좌하지도 못한 상황이었으며, 서만자에서 조선 입국을 확정지은 다음에 신변 정리와 입국 이후의 활동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그런 글을 지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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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정양모 신부, 윤종국 신부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7,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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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남겨 놓은 사료들, 여행기 원고, 서한들, 단평들 등에서 짧게 서술한 조선 천주교회에 관한 언급들을 모아서 분석하는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것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본인의 임지 조선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곳의 주교로서 본인의 임무를 어떤 무게로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그래서 초대 조선 대목구장으로서의 마음가짐, 사목 책임자로서의 사명감과 포부 등을 알게 해주는 연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만자 체류 행적과 활동에 관한 연구는 조선 대목구장으로서의 공식적인 활동, 특히 조선 대목구 장래의 큰 의미를 지니는 활동을 조명한다는 점, 그리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남긴 각종 기록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교회를 이해하고 있던 내용과 사목 책임자로서의 사명 의식을 밝힌다는 점, 이렇게 두 가지 차원에서 학술적인 의의가 큰 연구라고 할 수있다.
더구나 서만자 체류 연구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위시한 파리외방전교회 측과 토레트 신부를 지역 책임자로 하는 프랑스 선교수도회 측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해명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왜냐하면 브뤼기에르 주교가 라미오 신부에게 조선 입국에 관한 정보를 요청한 적도 있고, 또 마카오를 출발할 때 강서 지방으로 가는 프랑스 선교수도회 선교사 라리브 신부와 동행한 적도 있었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프랑스 선교수도회와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받은 것은 서만자 도착과 더불어 이루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파리외방전교회와 프랑스 선교수도회의 관계가 그렇듯이,21) 브뤼기에르 주교와 토레트 신부 사이에도 마냥 화기애애한 분위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가려고 마카오를 출발하던 무렵에 움피에레스 신부는 성요셉 신학교의 포르투갈 선교수도회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남경까지 여행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수도회 토레트 신부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분명 프랑스 선교수도회도 강서와 호광으로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었다. 그러면 강 서, 호광을 거쳐 산서로 간 다음에 북경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고 도와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하지 않았다. 그 연유를 정확히 밝히는 것은 현재 발굴된 사료만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만자 체류 시절 행적과 활동을 하나의 연구 주제 혹은 연구 영역으로 놓는 다면 그 속에는 같은 프랑스 선교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와 선교수도회, 브뤼기에르 주교와 프랑스 선교수도회 선교사의 관계에 관한 연구들도 포함되어야 한다. 실제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출발하기 불과 두 달 전이었던 1835년 7월 12일 서만자에 도착했던 물리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뒤에 파리 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겪은 고난의 원인에 관해서 언급하였다. 물론 피레스 주교의 입장을 변호하는 내용이었다. 피레스 주교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고, 그가 브뤼기에르 주교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중상모략이라고 하였다.22)
이 분야에 관한 연구는 앞으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닐 것으로 기대된다. 왜냐하면 파리외방전교회와 선교수도회는 19세기 서세동점 시기 중국 사회와 중국 천주교 역사에서 양대 축을 형성하던 중요한 선교단체였기 때문이다. 물론상해 지역에서는 프랑스 예수회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였다. 1840년대에 재진출하는 예수회가 상해의 서가회와 직예의 헌현에서 중요한 선교 기지를 구축하고 많은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파리외방전교회는 사천, 귀주, 운남에서, 그리고 프랑스 선교수도회는 강서, 호광, 북경, 몽골에서 많은 활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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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나중의 일이지만 몽골 대목구장이었던 프랑스 선교수도회 물리 주교와 만주 대목구장이었던 파리외방전교회 베롤 주교는 두 대목구의 접경 지역에 있던 선교지를 둘러싸고 재치권 분쟁을 수십 년 동안 지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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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만큼 19세기 중국과 인접 지역의 천주교 선교, 프랑스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을 이해하려면 세 단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수도회, 예수회를 중심에 놓고 연구해야 한다. 서만자는 파리외방전교회와 프랑스 선교수도회가 만나는 접점이었다. 선교수도회 물리 주교가 몽골 대목구장이 되어 파리외방전교회 베롤 주교의 만주 대목구와 재치권 다툼을 벌일 때도 서만자는 선교수도회의 중국 북방 선교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연유로 브뤼기에르주교 관련 사료를 더 많이 발굴하고, 현재 발굴된 사료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것은 학술적으로 의미가 크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 체류 시절에 행했던 활동과 그 맥락은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될 수 있다.
3) 신설 대목구의 지속을 향한 헌신적인 노력과 그 의의
브뤼기에르 주교가파리와 로마에 보낸 서한들에는 그가 막 신설된 조선 대목구가 안정적으로 지속되기를 얼마나 열망했고, 이를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브뤼기에르 주교 연구의 귀결점이자 백미에 해당하는 부분은 바로 그의 생애와 활동이 지니는 교회사적 의의를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대목구의 설정과 지속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절대적인 공헌이라 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발굴된 사료만으로도 이러한 점은 충분히 논증할 수 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의 노력이 교회사적으로는 어떤 위상을 부여받을 수 있는지, 나아가서 교황청 포교성성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헌신적인 노고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사료를 발굴해야 한다. 아울러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례와 유사한 일들을 찾아서 비교하는 작업도 진행할 필요가 있다.
사료 발굴에 관해서 말하자면, 로마 사료, 즉 포교성성 문서고에 남아 있을 포교성성 추기경 임석 회의 회의록, 교황 알현 시 포교성성 추기경의 보고와 교황의 지시에 관한 기록 등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조선 대목구 설정 칙서가 반포되기 전에 열렸던 포교성성 7월 회의부터 조선 대목구 설정에 관한 논의 상황이 등장한다. 이것이 왜 9월 9일 대목구 선포로 급진전되었을까? 조선 대목구 신설 소식이 아직 마카오에 알려지지 않았을 때 움피에레스 신부는 여항덕 신부가 도착했을 때 어떤 지시를 내렸을까? 조선 대목구 신설 칙서가 마카오에 도착한 이후에는 움피에레스 신부가 여항덕 신부에게 어떤 조처를 내렸을까? 여항덕 신부는 포교성성 소속 선교사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움피에레스 신부를 자신의 장상으로 여겼다. 그런 만큼 움피에레스 신부는 여항덕 신부에게 명확한 활동 지침을 주었어야 한다. 이에 관하여 교황청 기록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직 여항덕 신부의 소속 의식과 행태에 관해서 설명되지 않는 모호 한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포교성성의 대응에 의문점이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호소, 마카오 대표부의 부정적인 보고(포르투갈 선교사들의 항의) 등에 대처하는 포교성성의 태도가 너무 미온적인 것은 아니었는가 하는 점이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겪었던 어려움의 상당 부분은 포교성성이 정확하게 방침을 제시하지 않았던 데서 연유한다. 이런 점들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로마 사료를 더 많이 발굴해야 한다. 다행히 각종 회의록(포교성성 주간 회의, 월간 회의, 특별회의)과 보고 자료집 등이 많이 발굴되어 있다. 다만 이 사료들이 해당 문서철에서 일부를 복사한 것이어서 전체 문서철 내에는 조선 대목구와 브뤼기에르 주교 관계 사료들이 더 있는데 이것이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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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Mémoires de la Congrégation de la Mission, Tome Huitième, Paris: La Maison Principale de la Congrégation de la Mission, 1866, pp. 827-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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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앞으로는 한국 교회사 사료 관련 일반 조사라는 차원이 아니라, 조선 대목구 설정 경위와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헌이라는 특수 주제에 한정하는 집중 사료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한편 브뤼기에르 주교와 유사한 사례를 조사하여 양자를 비교함으로써 브뤼기에르 주교가 한국 교회의 지속과 발전에 끼친 공적을 새롭게 재평가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새로운 사료 발굴과 함께 비교 분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브뤼기에르 주교와 유사한 어려움을 겪었던 인물은 없었는가? 만약 있었다면 그 인물은 어떻게 난관을 극복하고 자신의 임무를 달성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펼쳤는가? 그 인물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차이는 무엇이었는가? 그인물은 과연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임무를 완수하였는가? 완수했다면 그의 성공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역경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답을 주는 사례들을 조사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이탈리아 출신의 로도비코 마리아 베지(Lodovico Maria Besi, 1805-1871) 주교이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연로한 피레스 주교가 이끌던 북경 선교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하여 1833년 로마의 젊은 성직자이며 백작 가문의 일원이었던 베지 신부를 중국으로 보냈다. 베지 신부는 1834년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선교수도회 토레트 신부는 베지 신부가 선교수도회에 반대하라는 포교성성의 지침을 받았다고 의심하여 북경으로 가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게다가 북경에 있던 피레스 주교 역시 베지 신부가 북경으로 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베지 신부는 포교성성 선교사들이 맡고 있던 호광 선교지로 갔다. 한편 강남 선교지의 중국인 사제와 교우들이 1838년 베지 신부를 초대하고, 남경 교구장이었던 북경의 피레스 주교에게 베지 신부를 남경 교구의 총대리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프랑스 선교수도회 선교사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베지 신부는 강남 선교지로 들어갔다가 다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39년 9월 3일 베지 신부를 주교로 승품하고 산동 대목구장에 임명하였다. 산동 대목구는 남경 교구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이고, 남경 교구장이 공석이면 산동 대목구장이 남경 교구장 서리가 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베지 주교는 1841년에 강남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23) 그리고 예수회 총장 루탄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중국 상해로 예수회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24) 그 결과 예수회 선교사들이 다시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강남 지방에서 선교수도회의 전횡을 제압하고 새로운 선교의 시대를 열었다.25)
이처럼 베지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례와 유사하게 포르투갈과 프랑스 선교수도회 선교사들의 방해로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지만, 예수회를 본인 선교지에 초청하는 묘안을 내놓고 이를성사시켜 신설 강남 대목구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베지 주교의 성공담은 여러모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경우와 비교할 만하다.
물론 브뤼기에르 주교와 베지 주교의 사례를 비교할 때 시대적 차이를 간과하면 안 된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대는 아편 전쟁 이전이고, 중국이 아직 유럽 열강과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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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훗날의 일이지만 김대건 신학생이 세실 함장이 이끄는 함대에 타고 남경 조약 체결의 현장까지 가지만 세실 함장이 조선으로 가려는 계획을 포기하는 바람에 상해에서 발이 묶인 적이 있었다. 그때 강남 대목구장 베지 주교의 도움을 받아 배를 타고 요동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24) 베지주교의 사례는 다음을 참고하였다. Louis Wei Tsing-Sing, La Politique Missionnaire de la France en Chine: 1842-1856, Paris: Nouvelles Editions Latines, 1960, pp. 87-91. 이 책은 저자 위청심(衛淸心, 1903-2001) 신부가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을 출판한 것이다.
25) 교회와 역사 제585호(2024년 2월호)부터 신의식 선생에 의해서 세르비에르(Servière, SJ)가 쓴 불어본 역사서의 중국어 번역 본 강남 전교사(江南傳敎史)가 번역 연재되고 있다. 3월호부터 베지 주교의 활동이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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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중국 강남 지방에 영국을 비롯한 서양 군함과 상선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시기보다 약간 앞선 때였다. 반면에 베지 주교는 바로 그러한 서세동점의 시대,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동아시아 식민지 개척을 위한 각축전에서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으며, 대신에 영국과 프랑스가 중국과 인접 국가들을 침략하던 시대에 살았다. 그러므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외견상 실패와 드 베지 주교의 외견상 성공은 단순한 결과론적 비교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설령 결과적으로는 두 개인에게 실패와 성공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전체 과정, 결국 조선 대목구와 강남 대목구의 이후 역사적 전개 과정을 살펴본다면 반드시 실패와 성공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훨씬 더 혹독한 어려움을 겪었으며, 본인의 임지에 들어가기 직전에 선종하여 비운의 주인공으로 남은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베지 주교의 성공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례를 밑거름으로 하여 가능하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와 비극적 결말이 하나의 밀알이 되어 어떤 결실을 가져다주었는지를 밝히고, 이것이 교회사적으로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를 평가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교황청 포교성성 문서고에 소장된 관련 사료들을 더 많이 발굴해야 하며, 이와 더불어 베지 주교와 같이 유사한 사례들을 찾아내어 브뤼기에르 주교의 경우와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대목구의 설정만이 아니라 그 안정과 지속 및 발전에 어떤 공헌을 하였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앞으로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한 사료 조사가 더 이루어져야 한다면 바로 이러한 연구 작업을 하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야만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
대목구 설정이라든가 조선 교회 차원의 역사적 맥락으로만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동아시아 교회사의 범위에서, 그리고 19세기 선교 시대라는 맥락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이해하고 그의 공헌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5. 결론: 도구서의 필요성
원본 사료의 소장처 조사, 검토 연구, 분석이 왜 중요한가? 특히 소장처에 대한 조사를 진행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아직 발굴되지 않은 사료를 찾기 위해서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고향인 레삭도드와 출신 교구인 카르카손 교구 그리고 옛날 카르카손 대신학교에는 런사료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고향 마을에는 브뤼기에르라는 성을 가진 후손이 살고 있지않다.
원래 브뤼기에르 주교의 아버지도 네비앙 마을 출신으로 이웃 마을인 레삭도드로 장가를 든 인물이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엔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형제와 자매들도 레삭도드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 게다가 레삭도드 마을의 묘지에도 브뤼기에르 주교 부모의 무덤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레삭도드 마을에서 더 이상의 사료가 나올 수는 없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의 형제와 자매에서 이어지는 후손들을 찾아낸다면 그들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들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카르카손 교구는 역사가 매우 오래된 교구이므로 교구청 문서고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교구 사제로서 그리고 대신학교 교수 신부로 활동하던 시절에 관한 사료들이 아직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둘째, 소장처를 조사해야만 사료의 전승, 보존, 정리, 편철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겪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료는 그냥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기억의 한 가지 방식이다. 그래서 평판과도 관련이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의 한국 관계 문서철 제577권과 제579권에 별도로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한 사료들이 모여 있다는 것은 해당 문서철의 편집자가 브뤼기에르 주교를 기념하고자 하는 특별한 지향 아래에 기존의 사료 더미에서 새로운 사료들을 계속 발굴하였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의 시작 지점은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한 사료들을 모아서 엮음으로써 그를 망각에서 건져 올려기억의 장소에 놓아두려는 노력에서 비롯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 소장처의 사료 분포를 확인함으로써 어느 지역, 어느 소장처에서 사료 발굴이 미진한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방향으로 사료 발굴을 더 추진하게 된다. 이것은 해당 소장처에 기억화를 추동한다. 이를 통해서 현양과 추모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지금 서울대교구의 브뤼기에르 주교 시복 추진에 호응하고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와 카르카손 교구의 상황이 그러하다. 오드도립 문서고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 조사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 계보학 사이트(geneanet.org)에도 브뤼기에르 주교 시복 추진 소식이 전파되어 브뤼기에르 주교 본인과 부모에 관한 정보 아래에 이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이제 브뤼기에르 주교에 관한 사료들이 어느 정도 수집되고, 상세 목록도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고 하자. 그리고 지금까지 어느 정도 연구되었고, 앞으로 어떤 주제들이 더 연구되어야 하는지도 대략적인 가닥이 잡혔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무엇이 필요할까? 연구를 더 수월하게 할 수 있고, 또 더 신속하고 정확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들이 필요하다. 이것을 공구서 또는 도구서라고 부른다. 브뤼기에르 주교와 관련된 인물들의 생몰연대와 약전을 모아서 색인을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 포교성성, 포르투갈과 프랑스 선교수도회, 시암 대목구와 마카오 교구, 카르카손 교구 등 관련 기관들과 해당 시기의 주요 인물들에 관한 정보들을 모아서 별도의 자료집을 엮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도구류 저술들이 점점 많이 갖추어질수록, 앞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려는 학자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며, 이에 따라 관련 학술적 연구 성과들도 증대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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