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이들이 책을 펴고 글을 읽어.'' 갓 여섯 살이 된 딸아이 눈에는 그것이 참 신기하게 보였나보다.
동네에 겉으로 보기엔 삐까번쩍한 어린이집이 있었다. 일 년을 다니더니 그 어린것이 ''난 저런 어린이 집에는 다니고 싶지 않아.'' 라고 말하지 않는가. 한사코 반대를 하니 시장 과일점에 아이를 잠시 맡기고 어린이집에 가서 이제 어린이집에 못보내겠다고 아이가 가기싫어 하는데는 어쩔수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하고 나왔다. 식단과 다르게 나오는 음식은 말할것도 없고 아이에게 들은 소리도 충격이고 한글 가르치기는 어린이집 프로그램에 없는 일이라며 한사코 거절한 이유도 내겐 이유였다. 컴퓨터 바이올린을 추가로 원하면 가르치고 원치 않으면 그시간대에 장난감 가지고 놀게 한다는 그 말도 맘에 들지 않았다.
묘책으로 길을 가다가 봐 둔 어린이집이 있었다. 다시 들어가 내부를 보니 이 방 저 방 온돌방으로 되어 있고 원탁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오손도손 이야기도 주고 받는것이 화기애애해 보였다. ''원장님! 전 아이를 한글반에 넣길 원합니다. ''네, 다자녀 혜택도 볼 수 있고 도와드리겠습니다.'' 하고 자신있게 답을 하였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한글반이 꽉 차서 영어반으로 돌렸다는 얘기다. 동사무소에 가서 다자녀 혜택을 볼 수 있는 용지를 받아 왔으나 다음 날 아침 일찍 동사무소 직원은 시골에 땅이 있는 것을 간과했다. 혜택을 줄 수 없다. 되려 가지고 오라 했다. 어린이집 원장은 어떻게든 돕겠다 하고선 오리무중이다. 꾹 참고 생각지도 않은 영어반 원어민이 가르친다는 영어반을 아침마다 보냈다. 수업료도 더 많았다. 별로였지만 그런일이 아니었다면 영어를 아이에게 가르칠리 만무한 난 그당시 돈벌이는 하지 않으면서 부지런히 탐구열로 다녔다. 그런데 일 년이 다 갈 즈음 우연히 한글반 아이들과 함께 버스를 타게 된 우리아이가 ''엄마! 아이들이 가정연락부 공책에 숙제 얘기를 하고, 어린이 집에서 책을 펴고 글을 읽어.'' 라고 얘기를 하는것이 아닌가. 그래 일곱살이 되면 진짜 글을 가르쳐 학교에 보내야 한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원장을 찾아 약속과 다르지 않은가 아이가 집에 돌아와 이 얘기를 하는데 내년이면 학교에 가는데 책을 읽을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안되면 이제 이곳에 못보내겠다고 얘기했다.
무심코 어린이집을 지나다 딸아이가 공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여 뭐하니 하니 선생님이 오늘은 이 부분만 하라고 했어 하고 십 분만 매일 이같이 한다고 하며 ㄱㄴㄷㄹㅁㅂㅅ을 공책에 썼다. 그래~ 하고 돌아서 나왔다. 영어는 영어데로 가르쳐 영어 웅변대회도 나갔다. 우리나이엔 발음이 굳어져 어려운데 참 자연스럽게 외워서 한 장을 거뜬히 해냈다 제스쳐까지 하며. 그 당시 마흔에 낳은 딸아이라 어딜 보내도 신경이 쓰였는데 그곳은 컴퓨터에 비밀번호만 입력하면 원탁에서 아이들과 공부하고 밥먹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점이 제일 마음에 들어 그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아이는 자라서 대학때 엄마를 타이완 구경을 시켜주고 결혼해 태교여행 가자며 베트남 다낭 자유여행에서 맛있는 음식과 이곳저곳에 데리고 다니며 구경도 시켜주었다. 어릴 때 영어반에 들어 경험한 외국어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이 여행에서도 자유롭게 세계어를 구사할 수 있게 만든 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글 읽는 소리가 딸아이에게는 듣기좋은 소리 매력이었을 것이다.
삼희성이 아이 울음소리, 글 읽는 소리, 다듬이 소리라고 누가 말했던가! 난 몇 세였는지 기억조차도 할 수 없는 아주 어릴 적 멀리서 아득히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를 들었다. 정말 그 소리는 시도때도 없이 들었다. 그 소리에 깨고 그 소리에 잤다. 어쩌면 말도 못하는 아기를 눕혀 놓고 두드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그 소리가 익숙하고 듣기싫지 않았던 것을 보면 말이다. 기억속에 눅눅한 옥양목을 접고 접어가며 마주보고 아주머니가 주거니 받거니 빠르게 치며 장단 맞추어 노래도 불렀던것 같다. 빨리 끝나지 않았는데 지겨워하지 않았는것 같고 듣는 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들은듯 하다. 김장김치도 서로서로 도와가며 함께 한 걸로 봐서 모든면에서 서로 단결이 잘 되었다. 우리 꼬맹이들은 이집 저집 서로 자연스럽게 눈만 뜨면 제집 드나들듯 왔다갔다 하며 다듬잇 돌 다듬이를 만지니 무거워 엄두도 못내고 만지지 마랬다며 흰 옷감도 호기심은 많았지만 지나쳤다. 흰두루마기 입은 어르신이 지나면 참 인사성이 밝았고 어른들은 뉘 집 아인지 담박에 알아 보았다. 그렇게 뽀얗게 빨고 애써 두들겨 펴고 흰 옷을 정성들여 즐겨 입던 우리 조상들이었다. 그때 그시절엔 마음만은 다듬이 소리만큼 맑았고 공들여 정성이 들어간 옷이었기에 품격이 있었다. 요즈음 우리는 그 정성과 근면성의 발 뒤꿈치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이제는 나를 평온하게 했던 그 다듬이 질 소리를 들을길이 없다. 골목마다 들리던 아이 울음소리도 글 읽는 소리도 좀체로 듣기 힘들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그 때 그 시절로 아득히 다듬이 질 소리 자장가처럼 듣던 그 시절로. (202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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