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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산청문인의 시 - 한예원캠프 시낭송대회 관련 시>
제 2회 한예원캠프 시낭송대회 관련 시 공지합니다.
산청문인의 시 또는 자유시로 참가가 가능하며
산청문인의 시 가산점은 없습니다
단지, 산청문인의 시를 알리기 위해
선정해 두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더러도 산청문인의 시 낭송을 환영합니다)
산에 가서
강희근
나이 스물을 넘어 내 오른 산길은
내 키에 몇 자는 넉넉히도 더 자란
솔숲에 나 있었다
어느해 여름이던가,
소고삐 쥔 손의 땀만큼 씹어낸 망개 열매 신물이
이 길가 산풀에 취한 내 어린 미소의
보조개에 괴어서,
해 기운 오후에 이미 하늘 구름에 가
영 안 오는
맘의 한 술잔에 가득가득히 넘친 때 있었나니
내려다 보아, 매가 도는 허공의 길 멀리에
때 알아, 배 먹은 새댁의 앞치마 두르듯
연기가 산빛 응달 가장자리에 초가를 덮을 때
또 내려가곤 했던 그 산길은
내 키에 몇 자는 넉넉히도 더 자란
솔숲에 나 있었다
가락지
강희근
대한민국에서는 가락지를 보면 논개가 보인다
논개의 그리움인 하늘도 보이고
논개의 외로움인 강물도 보인다
논개의 밤, 캄캄한 밤이었던 시대도
꿈꾸는 시간 아닌
생시의 어느 때 어느 자리
그림 한 장으로 뜨고
논개의 서러움,
산하에 개미처럼 와 덮이던
저들의 고깔 모양의 모자와 모자들
참을 수 없구나
탕, 탕 저들 총기소리 헤집고 다니던
조선의 성가퀴
그 둘레
여인의 눈은 서릿발 치고
여인의 손가락 가락지에 피가 돌았다
아, 대한민국에서는 가락지를 보면 논개가 보인다
논개의 노래인 조선,
조선의 피가 보이고
꽃송이 송이송이 나라로 피는
마침내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보인다
가락지를 보면
가락지 낀 여인의 손을 보면
설산
김규정
내가 이고 있는 눈은
한여름에도 녹을 줄을 모른다
떼를 써 본들
말끔히 무너져 내리고
봄풀 다시 돋아날리 없다
해를 거듭할수록
눈부신 은빛 켜켜이 쌓여만 간다
상계에 오르려면
정갈한 모습이어야만 하나보다
더럽히지 말아야 하리
먹물로 더럽히지 말아야 하리
약초
김규정
가슴 뜨거운 이들은
싸움꾼임을
함부로 떠벌리지 않는다
병마 제압하려면
먼저 저들 목숨
내 놔야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이들 위해
아파하는 이들 위해
명예롭게 죽고자
묵묵히 때 기다리며 산다
멸시하지 말자
천대하지 말자
아무나 따르기 쉽지 않은
드높은 의기(義氣)
칭찬할 일이다
본받을 일이다
아 고구려
조종명
아무도 허물 수 없다
여기는 나의 고토故土
떠도는 구름도 이 땅을 사랑하여
노을에 탄다
땅 위의 모든 것들은
하늘을 우러러
어둠에 덮인다
만리 여로
밤 기차는 고량高粱 밭을 갈라 덜컹거리며
감감한 지평에 안개를 일으킨다
혼강渾江을 비껴 솟아오른 노령老嶺
그 장백長白의 한 줄기를 넘으면 환도성丸都城
일만 이천 고분을 끼고 내리면 국내성國內城
아 곤곤滾滾한 압록강
나그네는 우두커니 선다
조중朝中 철교 건너면 만포滿浦 땅인데
호태왕好太王 비각 돌각담 밑에
하늬바람 맞아 떨고 있는
풀 한 포기
그 앞에 그 앞에 꿇어 앉았다
나는 사랑할 줄 아는가
내 할아버지 할머니를 나의 고토를
간절한 간절한 그리움만 가지고 여기 왔는가
백리로 벚꽃 피다
조종명
허공을 떠다녔던 나에게
백년 전 헤어졌던 첫사랑이
저렇게 밝은 길을 따라 돌아온다
비가 오면 빗속에 섞여 있다가
살랑살랑 가지 흔들리면 꿈꾸다가 깨다가
다 잊고 있던 동안 텅 빈 채 살아오다가
밉지도 반갑지도 않은 내 속을 두드리며 오니
온 몸이 떨려서 말할 수가 없구나
사랑아 너의 굳은 마음이 이제 보니
그 긴 세월을 죽기는 커녕
흔들리지도 않았음을 알겠구나
이렇게 벅차게 찾아오면
온 몸을 던져 안아볼 수도 바라볼 수도 없구나
그저 떨리기만 하는구나
내일 홀연히 비바람 불어 네가 떠나고 없어도
사랑아 또 백년을 어찌
기다리지 못하겠는가
제비
정동교
새파란 앳된 곡예사
후터분한 긴긴 해 깔고
우주의 신비를 푸느라
식음 잊은 채
품고 돌아가며
불러보고 얼린다
꽉 찬 사랑둥지
본능이 발휘되는, 원추리
꽃잎 같은 다섯 입에
어둠 가면 개울물 되어
화살같이
중앙에 입 맞추고
회전하는 그 순간
난간에
꽁무니 내미는 미물
섬광처럼 소름일 때
찰나에,
배설물을 낚아채는
윤기 없는 깃털
작아진 몸체에
무논에 비린
어머님이 찍힌다
타령
정동교
맘대로 안되는 게
어디 인간사뿐이라
일 년을 기다리다
잠시 피었다가
그것마저
허용되지 않은 목련이나
삼십년을 기다리다
갈 길마저 사라져
피워보지 못한 꽃이나
그 꽃이 그 꽃이지
나란히 선 동백은
타는 노을 같건만
고개 떨구겠지
다 때 못 만난 탓이지
산청 사매(四梅)
류준열
민족의 영산 지리산 기슭 마을에 추상같은 선비의 기개 빼닮은 산청 삼매, 오랜 세월 고고한 향기 그윽하게 풍기며 세상의 빛이 되었다.
시천면 사리마을 조식선생의 남명매(南冥梅), 단성면 운리마을 강회백선생의 정당매(政堂梅), 단성면 남사마을 하즙선생의 원정매(元正梅)
삼매에 가려져 이름 드러내지 못하고 산야에 웅크리고 앉아 묵묵하게 세상 밝히는 단성면 운리마을 산청 야매(野梅), 후세에 이르도록 이름표 하나 세우지 못해도 한세상 떠받치며 올곧게 살았던 산청 백성의 표상
지리산 기슭 산청에는 선비의 표상 삼매가 있고 이름 없이 살다 간 백성의 표상 야매가 있다.
천년 향 천년차
이용호
작은 발한짝 붙일 곳 없는
벼랑 끝 산중턱에 홀로선
뿌리 깊은 천년차나무
영산에 하나뿐인 명수茗樹
모진 풍파 격어 넘어
독야청청 그 기상 자태 / 세계만방에 울려 펴지니
아낌없이 이한 몸
사다리에 운명걸고
온 정성 따 담아
탐스러운 잭설차 잎/ 떫은맛은 삼키고
설탕친 듯 달콤한 / 천하제일 다선일미
지리산 정기 모아모아
두류산 기슭에서
수백년을 이어온 / 천년 역사의 차나무
덖고 또 덖어도
비비고 우려도 / 녹색차신 천년차
손바닥 담은 찻잔
해맑은 웃음 비치네
입안 가득 아련함 / 코끝도 취한 그 향기
맴 돌다가 꼬르륵
설탕 뿌린 초코렛 맛 / 신령스러운 그 맛깔
오감의 신비로움
아무도 모르네만
하나같이 볕는 감탄사
다르질링차1 기문차2
누가 일품인지
떠나가신 초의선사 / 그 자신은 알지어라
지리산 가는 길
이용호
숲을 지나서
개울을 건너서
돌 너더러 지나
칼바위
꼬불꼬불 가파른 길에
망바위
숨 고르며 사부작사부작
어느새 법계사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한번 쳐다보고
부처님 전 독백하며
마음은 벌써 천왕봉
개선문 지나
깔딱 고개 오르니
삼 계절을 한 폭에 담은
지리산 천왕봉
내려 다 보니
여름 가을 겨울
운무 속에 다도해
한 컷에 찍힌 자연의 신비
예 가 바로 무릉도원
엄마의 회초리
길영수
엄마라는 말에는 깊은 샘이 있지요
나직이 불러볼수록 깊은 샘에서 솟는 눈물샘이 있지요
홀로 가만히 불러보면
어느 샘 깊이에서 차오르는 아린 기억들
괜시리 눈물이 흐릅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나이가 깊어질수록
시나브로 불러보는 엄마라는 한마디
기도처럼 한숨처럼 불러보는 엄마라는 한마디
당신은 지금 어디쯤에서 나를 굽어보고 계시는지요
나는 문득 오랜 기억 하나를 풀어 놓고 가슴을 칩니다
그날은 당신께서 빗자루를 회초리 삼아 들고
나를 꾸짖고 계셨지요
내 종아리를 때린다는 것이
자꾸만 땅바닥만 두드리고 계셨지요
나는 그냥 엉거주춤 서서 용서를 빌 생각도 하지 않았지요
엄마의 회초리는 아무리 때리셔도 아프지 않은 줄만 알았습니다
헛매질만 하시던 당신께서는
도망이라도 가라면서 내 엉덩이를 밀치셨지요
그때의 헛매가 지금에서야 이토록 아플줄은 몰랐습니다.
이토록 가슴이 아릴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그리운 이름
어머이 어머이 어머이
바람의 기억
길영수
살아 있음을 알리겠다고
문틈을 헤집고 울어 대는 바람아
오밤중 아무도 없을 거리에
성난 무리가 되어
저토록 쓸고 다니나
어느 어둠 속을
술은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는 고단한 노래를 들고
저 바람 속을 오셨다
외투 없는 밤중에
이 밤
숲으로 가자
저 바람을 데리고
이승 저승을 넘나들진 못하여도
저린 기억 하나
향초처럼 사르리라
아버지 계시는 황량한 숲에서
아버지 섰던 자리
내가 서서
무거운 저 바람을
맞고 서서
지리산 빈 들판
민수호
사람의 목숨과 인권은
하늘 같은 가치이다
국가 권력은 국민을 생명 앞에서
존엄으로 지켜야 할 것이다
다시는 다시는 영구히, 대한민국에서
공권력의 이름으로
*견벽청야(堅壁淸野)작전 같은
빈 들판 만들어 사람을
청소하듯이, 싹쓸이 하고
묻지마 학살(虐殺)하라는
작전 명령, 이런 이런 천인공노할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무섭고 억울해서, 훌쩍이고 밀리며
분(忿) 삭이며 살아가고 있는
산청 함양 거창사건 1,517 여 가족과
억울한 희생자 934 여 명은
지금도 독(石)자갈 된 빈 땅에서
시효 울타리에 갇혀서
울퉁불퉁 누워만 있다
지리산 빈 들판에
울퉁불퉁 누워만 있다.
아버지 사랑
민수호
골똘히 생각하다가 생각한 것은
짚으로 꼬온 새끼 줄 하나 생각해 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월이, 그리움이, 사랑이
눈 뒤에 꼬깃꼬깃 숨어 버렸다
어린 시절 시골 살 적에 아버지가 농사일에 쓰려고
새끼를 팔자내기로 꼬우는 것을 생각해 냈다
새끼 꼬는 숙달된 기술이 눈에 선해서
아버지가 생각 속으로 풍덩 숨는다
육십갑자 한 바퀴 돌아 넘는 지금에야
해가 위세 떨치며 뜨고
달이 자존심 거두듯 지는
자연의 법칙인 것처럼,
가족을 필사적으로 사랑했구나
늦게나마 눈 이슬 적시며 고해 성사를 한다
눈 뒤에는 사람을 움직이는
몸의 종합박물관 두뇌도 있고
그 뒤에는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뇌가 뿜어주는 생각도 버티고 있으니
팔자 내기로 왼쪽으로 꼬우는 새끼줄 속에
그리움과 사랑이 합의된 자연법칙처럼
때늦은 고마움으로 혼미 되어 흐느껴진다
눈 뒤에서 고개 숙인 키다리 가을 수수처럼
수백 미터 바닷속 깊이만큼 생각이 난다.
구십에다 셋, 장모님
서석조
살다 보면 아픈 날이
숱하지만 어찌하나
소나무가 분재로
아등바등 살아내듯
살아서 구십에다 셋
난잎을 닦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의
궁색한 문안이야
오히려 벽에 걸린
마른 장미 보는 일
벌 나비 찾지 않아도
제자리에 꼿꼿한
맨드라미 꺾인 목을
철사로 감아 살린
너의 그 심성이면
세상은 너 편이다
아들아, 세상없어도
나는 너가 세상이다
구세주
서석조
남양산 로터리
횡단보도 소나기 속
우산 없이 허둥지둥
헤쳐 뛰던 한 아낙이
전봇대 부여잡으며
곱다시 젖어 드는데
웬 승용차 한 대가
느닷없이 멈춰서서
차창을 스륵 내려
우산 하나 툭 건네곤
휑하니 가던 길 그냥
미련없이 가버려
세상에 참, 구세주가
따로 또 있을 리야
화들짝 놀라 펼친
우산 위 빗줄기가
축포를 터뜨리듯이
은빛으로 퍼져난다
개밥그릇에 대한 단상
이학근
우리 집 개밥그릇은
이빨 빠진 사발이기도 하였고
찌그러진 양은 그릇이기도
쓰다버린 세수 대야이기도 했다
남은 밥이 담기기도 하고
버린 생선내장이나
여름날 쉬어버린 죽이
담기기도 했다
하도 돌려 가면 핥아먹어
반질반질하기는 하나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더욱
찌그러져 가는 밥그릇이었다
비가 오면 비가 담기고
눈이 오면 눈이 담기고
밥이 나오면 밥이 담기고
죽이 나오면 죽이 담긴다
별이 뜨면 별이 담기고
달이 뜨면 달이 담기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담기고
낙엽이 지면 낙엽이 담긴다
사랑이 오면 정이 담기고
이별이 오면 눈물이 담기고
내가 담으면 내 마음이 담기고
네가 담으면 네 마음이 담긴다
아무도 탐내지 않고
아무도 흉보지 않고
아무도 깔보지 않고
아무도 욕하지 않는다
개밥그릇은 언제 어디서나
낮추어 살기에 그러하다.
접시꽃 당신
이학근
울밑에 접시꽃 가지마다 매달리고
긴 모가지 키 올려 담 넘어 올랐네
동글 납작 접시마다
가슴 가슴 담아서
한 여름 긴긴 낮에 긴 사연을 엮으리.
엷은 꽃잎 부연 꽃술 실바람에 나부끼고
다문 송이 차비 차려 송이송이 달렸고나
한낮 지나 해그름 되니 기다림에 지쳐서
하늬바람에도 흔들리네.
해마다 여름 되면 접시꽃 피어도
키 큰 당신, 눈 큰 당신, 접시꽃 당신은
스치는 바람 이래도 다녀 가 주었으면
알 수 없어 늙어버린
지난 여름 긴 여름.
법계사 눈물 1
최인락
민족 원혼 잠든 곳
범종 여운 잠재우고
계곡 안아 드니 안도하는가?
민족상잔 업보
괴성으로 가득 찬 구곡九谷
원귀의 방랑 처
지쳐 찢긴 상처투성이
구름 모여들면
눈물 도랑 이루고
비바람 불어와
통곡 소리 지구 삼킬 태세
지친 몸 가눌 길 없어
애잔한 나뭇가지 부여잡고
눈물 닦는 깊은 불심
법계사 눈물 2
최인락
한반도 높은 불심 1450
천하 아우른 안개 여운
지혜로운 어머니 품
일궈낸 불국정토
만백성 안아
포용 속 인자한 눈물
하얀 눈 솜 덮어 위로하고
비바람 일어 괴성 통곡
마음껏 우시게
애꿎은 원혼 달랠 길 없어
염불 외치다가
던져버린 쉰 목탁 소리
따라 우는 불심
꽃상여 타고 훨훨
-김우명달 ․ 김옥순 2007년 3월 어느 날
김종우
어느 날
조선의 딸이었던 나는
나라를 빼앗긴 힘없는 식민지 백성이 된 나는
내 나라를 집어 삼킨 제국의 성전에 바쳐졌어
나라를 팔고 일제에 부역하던 무리들의 딸들이
서 있어야할 자리에 순이, 숙이, 영이…….
죄 없는 식민지 민중의 딸들이 끌려가 서 있었어
그곳이 만주 봉천이었는지
먼 북쪽 일본군 나남사단 주둔지 막사였는지
아니면 남양군도 밀림 한가운데 였었는지
참, 오랜 세월을 참아냈지
어느 날은 그 끔찍한 나날들이 팔순이 넘은 나를
칭칭 감고 놓아주지 않았어
그래서 뜰에 금낭화를 심고 이름 모를 꽃들을 심어
나비를 부르고 벌을 불러 모아
내 마음에 박힌 아픈 상처의 흔적들을 씻고 또 씻었어
그게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으니까
그 끔찍한 나날들 속에서도
내 눈물을 받아 머금었던 풀들이
꽃이 되고 나비가 되어 위안소 여기 저기 환하게 피어났었어
그 꽃들이, 그 꽃들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됐었지
아, 마치 어제인 듯 아프고 아프기만 하네
하지만 이제 돌아가려고 해. 내가 끌려 갔던 그날로
아니, 내가 끌려갔던 그 앞날로 돌아가려 해
파란 하늘이 눈부신 오늘이 그날이야
꽃상여 타고 훨훨 떠나는 날이야
그동안 참 고마웠어!
다들 안녕,
새벽강
김종우
Ⅰ.
숲은 오랜 고전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산과 들이 온통 빛의 음계에 젖어
한 움큼씩의 물보라를 천공을 향해 밀어 올리고
새떼가 아득히 솟구치는 지평선
먼 강변의 마을들은 하나씩
풍경의 찬란함을 따라나서며
덜 익은 시대의 눈물들이 있는
새벽의 둥지를 떠나
자욱한 안개의 변주를 타고
江의 하구까지 따라나선다.
Ⅱ.
오오, 숨 가쁜 江의 순례여
밤 새워 눈발이 성성이던 꿈의 돛폭마다
저 무한한 하늘의 살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이윽고 모든 형상들이 빈 몸으로 남아
어둠의 물목을 지키다가 무너지는 시간
선사의 퇴적층을 가닥가닥 풀어헤치며
江은,
이미 예정된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Ⅲ.
보라!
낱낱이 무너지며 숲을 떠나던
바람과 별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묵시의 빛을 퉁기며
서정의 지평을 향해 몰려나가고
때로 층층의 침묵으로 사라져가던 생애,
그 생애의 불꽃을 일으키듯
江은, 보이지 않는 천근의 무게로 달려와
늦은 이웃의 마지막 잠을 깨운다.
행복한 인생
유영복
세상에 필요 없는 사물 없고
쓸모없는 사람 더욱 없다
사람은 생태계 금수저로 세상에 왔으며
사람마다 부여받은 소임은 다르다
수많은 종류의 꽃 색깔처럼
사람도 다양해야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고
세상이 더욱 찬란하고 아름다워진다
봄이 오면 산야의 풀과 나무들이
울긋불긋 다양한 꽃을 피우듯
재주껏 자기만의 독특한 꽃을 피우면
훌륭한 삶이 될 것이다
아름다운 행성 지구별을 아끼고
맑고 투명한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인생은 금상첨화이다
삶이 마무리되기 전
하늘과의 비밀 대화를 알 수 없기에
너의 인생이 행복한지는 하늘 외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용서
유영복
남아 있는 날이 얼마일까
아프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고
정신 멀쩡하게 당신을 알아볼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을 마감하기 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용서이기에
내가 그어 놓은 마음속 바둑판 선을 없애고
새하얀 도화지로 되돌리자
원한과 복수심은 나를 지옥으로 만들고
풍부한 상상력의 샘을 메마르게 하며
결국에는 벼랑 끝으로 끌고 가서 떨어뜨린다
세상이 등을 돌릴 때
화내거나 슬퍼하지 마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세상을 용서하라
믿고 사랑했던 사람이 등을 돌릴 때
화내거나 슬퍼하지 마라
땅바닥에 이마를 댄 가장 낮은 자세에서
용서하라
용서는 지옥의 문을 열고 나오는 일이며
자신을 다스리는 주인으로 회복하는 일이며
새로운 나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용서가 가져오는
내면의 평화와 자유의 힘을 회복하자
모란꽃 인연
양곡
모란꽃을 만나러 가는 아침에
전생에는 그대가 나를 찾아다니는
연인이었을 거라는 우리들의 인연 이야기는
생각하면 조금은 쓸쓸한 일입니다
부처님이 밤새 다녀 가신듯 늦은 봄비가 다녀간 날
전생에 그대가 보릿고개를 넘어 나를 만나러 오시듯
이승의 나는 아직도 잠 덜 깬 바람처럼
어머니 산소에 심어 피는 모란꽃을 만나러 갑니다
이쪽에서는 이제 막 꽃잎이 피어나고 있는데
저쪽에서는 먼저 핀 꽃잎이 벌써 시들고 있군요
뭐라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슬픔 같은 것들이
꽃잎 가득 이슬로 맺혀오는군요
전생에는 그대가 나를 찾아다니는 연인이었다는
이야기는 비 그치듯 맑은 하늘로 어느새 잊혀지고
내가 그대를 찾아다니듯 모란꽃을 만나러 가는 인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은 쓸쓸한 일입니다
능소화(凌霄花)
양곡
하늘을 향해 높이 오르는 꽃, 꽃말이나 슬픈 전설조차
잊은 채 까닭도 모르게 피고 지는 꽃들이 더 아름답다
화단이나 정원의 꽃보다는 가꾸는 손길 한번 닿지 않은
길섶이나 묵정밭에 제멋대로 자라는 들꽃이 더 아름답다
도구대(陶丘臺) 언덕배기에 난양대로 피어난 능소화
기품 있는 양반집 담장 안에서나 겨우 볼 수 있었던 꽃
한때는 선비의 풍류가 서린 어사화임을 일러주는 까닭일까
소리 없이 피었다가 처절하게도 지고 있는 능소화
저렇게 아무렇게나 피어난 꽃이 더 아름답다
화분에 담기지도 않고 장식용으로 쓰이지도 않고
가꾸지도 않고 선물용으로 포장되지도 않은 채
아무렇게나 피었다가 아무렇게나 시드는 꽃이 더 아름답다
구절초
양곡
음력 구월 구일에 약효가 가장 뛰어나다고 구절초라
부르는 꽃 단오에는 다섯 마디 중양절에는 아홉
마디가 된다는 구(九)와 중양절의 절(節), 꺾는다는
절(折) 자로 산국 감국 뇌향국 갯국화 개미취 쑥부쟁이
와 함께 산에 들에 피어나는 들국화 구월에서 십일월
까지 허준순례길에 소금을 뿌린 듯 산청탑라이스를
흩어놓은 듯 동의보감촌 산 언덕을 하얗게 덮는 꽃
지난겨울부터 올 여름이 다갈 때 까지 산비탈을 누비며
솔숲을 훑으며 정성들여 가꾼 일꾼들의 땀방울이 맺혀
다가갈수록 향기로운 꽃 왕산 필봉산의 좋은 기운이
마디마디 배여 있어 볼수록 정감이 피어나는 꽃
몸을 따듯하게 하고 부인병이나 신경계 질환에 좋아
선모초(仙母草)라 하는 구절초 구절초 하고 이름만
불러도 온몸에 생기가 돌아 힘이 살아나는 꽃, 구절초
책
양곡
날마다 배달되어오는 책들을 아내는
이제는 책 좀 오지 않게 해달란다 집계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한 달에 스무 권은 넘게
부쳐져 오는 것 같다 작은 집에 좁은 방안에
보관할 수가 없어서 그동안 내버린 것만도
헤아릴 수 없는 책들을, 나는 전부를
못 읽어도 전부를 읽으려고 늘 씨름을
한다 방안 구석구석이 언제나 너절하다
책의 갈피갈피마다에는 저자의 숨결이 배어 있다
처음에는 못 느낄 때도 차분히 나의 생각을 비우고
나의 마음을 몸의 아래로 내린 채 읽기 시작하면
어느 책 무슨 책이든 글쓴이의 배어나는 심혈이
나는 늘 고맙고 즐겁고 아름답고 눈물겹다
안개 속에서 책을 읽으면 책 속에 길이 보인다
비가 오는 날 책을 읽으면
비행기가 나는 푸른 하늘이 보이고 햇빛 쨍쨍한
바닷가도 보인다 눈이라도 펑펑 오는 겨울날
사방으로 뻗친 길들이 눈 속에 파묻혀 오도 가도 못할 때
책을 펼치면 한반도의 북쪽으로 가는 통일의 길이 보이고
나진 선봉 경제특구를 지나 실크로드가 환하다
자작나무 삐죽삐죽 늘어선 시베리아 대륙횡단 철도를
철커덕 철커덕 타고 달리는 내가 있기도 한다
지리산 연가戀歌
김태근
앙상하게 서 있는 고사목 사이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철쭉의 향연
천왕봉 그 아래 바래봉 허리를 휘감는다
타오를 듯 타오를 듯 몸부림치는 저 분홍 물결
소리 없이 사라져간 역사의 영혼인가
수백 년을 이어 온 인고의 세월인가
어디까지 누구에게 닿으려고 저토록 사무치게 일렁이는가
낮게 더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소리 따라 푸른 강가에 닿으려나
복숭아 빛 석양으로 물든 하늘가에
길 잃고 서성이는 그들의 아픈 영혼을 달래주려나
피고 지는 세월로 쪼그라진 내 어머니 젖가슴에 닿으려나
온 육신 파랗게 멍들었다가
순간순간
폭포처럼 뿜어내는 정열의 꽃이여
불타는 영혼이여
오늘도
지리산의 봄은
연분홍 진분홍 철쭉으로 물결치는구나
사무친 그 한마디 못하고
가슴으로 가슴으로 물결치는구나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김태근
꽃이 피고 꽃이 져도 사시사철 그리운 님이시여
당신이 사무치게 그리워 파란 하늘을 바라봅니다
산천초목이 총소리에 흔들리고
만백성이 피 흘리며 억울하게 울부짖는 전쟁터에서
희뿌연 총탄 속으로 사라져버린 님이시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어찌 당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어찌 당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올해도 무궁화는 어김없이 피어나는데
당신은 당신은 어디에 계시는지요
부모형제를 위하여
내 이웃을 위하여
내 나라 내 조국을 위하여
이 세상 단 하나뿐인 목숨을 바치신 님이시여
거룩한 님이시여
파리하게 멍든 잎으로 돋아난 무궁화 잎사귀는
당신이 내쉬는 푸른 한숨인가요
고운 자태로 피어난 분홍빛 하얀빛 꽃잎은
당신이 흘린 피 눈물인가요
무궁화가 되어 피어난 님이시여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송이송이 무궁화 꽃잎 꽃잎마다
그리움 안고서 피어난 님이시여
이제는 평화로운 조국의 이 땅에서
편안하게 잠드소서
차마 감지 못한 눈을 이제는 감으시고
부디 부디 편안하게 잠드소서
아버님의 지게
김태근
가을은 산음골 사정마을 앞산으로 저물어 간다
새벽이슬을 털어내는 아버님
마당 가득 나락을 널어놓는다
며느리의 아침 밥상을 받으시고
지게를 지고 밤 산으로 사라지는 아버님
소주 한잔에 밤 한 자루, 밤 한 자루에 소주 한잔
아버님의 긴 한숨은 하얀 뭉게구름을 타고 놀았다
다시 소주 한잔 머금고 지게를 짊어지는 아버님
어느새 밤 산에는 노을이 찾아들었다
지게를 마당에 고이 내려놓고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는
아버님의 야윈 뒷모습에
교통사고로 별나라 먼저 가신 어머님의 모습이 켜켜이 쌓인다
눈물 콧물 한 움큼 감춘 이듬해 가을,
아버님은 영영 지게를 지지 못하셨다
간암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와 지게는 아들의 소유물이 되었다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던 날,
아버님은 저 높은 하늘의 별이 되었다
나는 마당에 세워 놓은 빈 지게 너머로
밤 산에서 내려온 산 그림자 속으로 유유히 들어갔다.
밤 산의 밤은 석양처럼 영글어 가는데
아버님의 모습은 밤 산에도 노을 속에도 보이지 않았다
노을이 삼켜버린 아버님, 아! 아버님! 아버님! 아버님!
지리산 고사목에 기대어
김태근
지리산 고사목에 기대어 울어본 적 있는가
나는 대성산 천년고찰 정취암으로
산음골 성당으로 헤매이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고사목에 기대어 울었다
넓디넓은 하늘을 지고
남루한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아니한 채
인고의 세월로 묵묵히 서 있는 고사목
이승에서 재가 되어버린 어린생명 찾아 목 놓아 울었다
하얀 눈송이가 소복소복 나리던 1998년 겨울날,
어여쁜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하고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태어난지 채 두 달도 못되어 사망신고를 하게 될 줄이야
그 누가 그 누가 알았단 말인가
맑은 눈동자와 오똑한 코
동그란 입술과 도톰한 귓볼
작은 다섯 손가락과 꼼지락거리던 다섯 발가락
아직도 내 안에 꼬물꼬물 살아 숨 쉬는 너
내 어찌 너를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너를 따라 가지 못한 어미
끝끝내 너를 지켜주지 못한 이 어미는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구나
나약한 어미가 되어 고사목에 기대어 하염없이 울었다
알고 있으려나
너에게로 가는 길 저 고사목은 알고 있으려나
훨훨 날아서 너에게로 갈 수만 있다면
단 한번만이라도 작은 너를 볼 수 있다면
단 한번만이라도 너를 작은 너를 만질 수만 있다면
첫댓글 제 2회 한예원캠프 시낭송대회 관련 시 공지합니다.
산청문인의 시 또는 자유시로 참가가 가능하며
산청문인의 시 가산점은 없습니다
단지, 산청문인의 시를 알리기 위해
선정해 두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더러도 산청문인의 시 낭송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