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 飛龍비룡 辛鐘洙신종수 總務총무님 提供제공.
** 가을이 깊어가네요. 오늘, 가을 내려앉은 한잔의 커피와 함께 박수근의 ‘울림’에 빠져보시는 것 어떠세요? **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
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가장 즐겨 그린다’-세상을 뜨기 3개월 전 편지에서
* 박수근(1914-65)이 잠들어 있는 곳: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로 265-15
소설가 박완서는 그녀의 첫 소설 「나목(裸木)」의 제목을 화가 박수근의 그림 「나무와 두 여
인」에서 가져왔다.
소설 속에서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이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한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중략-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로 표현하
고 있는 바로 그 「나무와 두 여인」에서다.
박수근의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는 대부분 나목이다. 잿빛 하늘에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삭풍에 바르르 떨고 있는 나목이다.
화가 박수근은 나목이었다. 궁핍과 이방인 아닌 이방인 취급의 삭풍 속에서 생존을 위해, 그리고 자신만의 작품 세계 구축을 위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바둥대며 안간힘을 썼던 메마른앙상한 가지의 나목이었다.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고 양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가정형편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박수근은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해, 18세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해 입선한다.
1935년 어머니의 별세와 아버지의 채무 과다로 가족이 흩어지면서 춘천으로 거처를 옮긴 박
수근은 1936년부터 1943년까지 8차례 계속해 선전에 입선한다. 1940년 2월 아버지가 살고있는 강원도 철원군 금성면의 이웃 처녀인 춘천공립여학교 출신의 김복순과 결혼하고, 이때부터 박수근은 부인인 김복순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같은 해 박수근은 평안남도 도청에 서기로 취직해 평양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동인전을 갖는 등 작품활동을 병행하고,1945년 광복 이후에는 철원 금성으로 돌아와 금성여자중학교 미술 교사로 일한다.
6.25가 일어나자 1.4 후퇴 때 유엔군을 따라 남하하던 박수근은 피난 중 가족과 갈라져 혼자
남으로 내려오고, 아내 김복순은 1952년 10월 자녀를 데리고 북한을 탈출해 서울에서 박수근과 상봉한다. 전쟁 중 동료 화가의 화방을 통해 헐값에 그림을 팔아 연명하던 박수근은 미군 PX의 초상화 화가 일자리를 소개받아 생계를 잇는다.
전쟁 후 열린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서 특선과 입선을 한 이후 박수근은 국전과 대한미술협회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입선과 특별상을 수상하고, 1954년에는 한국현대회화특별전의 28명 초대화가에 명단을 올리기도 한다. 1959년, 1960년에는 국전 추천작가에 선임되고 1962년에는 국전 심사위원 및 추천작가에 위촉되며, 같은 해 주한미군공군사령부가 주선한 ‘박수근특별초대전’을 열기도 한다.
그러던 중 1963년 박수근은 병마와 불운을 한꺼번에 만난다. 백내장 악화로 왼쪽 눈을 실명하고, 오른쪽 눈으로만 그림을 그리던 중 이번에는 간경화 응혈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병원에 입원해 회복 불가라는 판정을 받은 박수근은 1965년 5월 6일 전농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난다.
박수근은 호(22.7×15.8cm)당 그림 가격이 2억 4천만원(2019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역대 화가 중 가장 높다. 그러나 작가의 생애는 그 반대였다. 죽는 날까지 생활고의 연속이었다. 가족의 잠자리인 좁은 방이 그의 화실이었고 그림 보관 창고였다.
그는 어린 시절을 ‘아버님 사업이 실패하고 어머님은 신병으로 돌아가시니 공부는커녕 어머님을 대신해서 아버님과 동생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우물에 가서 물동이로 물을 들어와야 했고, 맷돌에 밀을 갈아 수제비를 끓여야 했지요’라고 회상한다. 그리고 1964년 미국의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좀 더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모든 일을 극복하자니까 생활난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최열,박수근평전 시대공감,2011,마로니에북스,227면)라고 쓴다.
어렸을 때나 작가가 되어서나 박수근은 내내 절박하고 궁색했다. 박수근에게는 4가지가 없었다. 학연, 지연, 혈연 그리고 물정 4가지였다.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으로 학력은 물론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었고, 북에서 월남해 지연이 있을 리가 없었고, 집안이 가난해 혈연이라 할 것이 없었고, 사람 사귀는 것은 물론 재테크는 고사하고 남에게 사기를 당할 정도로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오로지 하는 것은 그림 그리는 것밖에 없었다.
‘문학가들은 그들의 사후에는 흔히 당대의 위대한 왕공 귀족이나 정치가들보다도 더 많이 회
자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고 아주 미미하다’는 아담 스미스의 주장은 바로 박수근과 같은 경우를 두고 한 말이었다. 살아생전 가장 가난한 작가였고 죽고 나선 가장 비싼 작가가 된 박수근이었다. 서럽도록 시린 가난과 소외가 낳은 그의 그림이 아이러니하게 지금은 부의 상징, 부자들을 위한 금빛 찬란한 장식이되었다.
박수근의 화풍 즉, 그의 호 미석(美石)을 딴 ‘미석 화풍’은 한국적 소재와 주제에, 현대화된 박수근만의 감각과 표현기법이 더해진 것이다. 그림의 주요 소재와 주제가 소녀, 중년 여성, 중년 남성이 집 앞 골목, 생계를 위한 장터 등에서 열심히 노동하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들은 무채색의 색감, 두껍고 거친 질감의 박수근표 표현기법으로 묘사된다.
박수근이 떠나고 난 뒤 언론은 ‘박수근은 매우 개성적인 작가로 회백색계의 단조로운 색조의
두꺼운 색층과 오톨도톨한 특유의 마티에르를 가지고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를 진하게 담았다’고 말하고, 평론가는 ‘한눈팔 겨를 없이 오직 정진과 애정, 영적인 자기 세계를 형성’한 작가일 뿐만 아니라 “한국적 작가의 하나의 이상상”(최열,박수근평전 시대공감,2011,마로니에북스,253-5면)이라고 평가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이고, 창의적인 작가가 바로 박수근이라는 이야기다.
박수근의 그림은 거칠면서도 부드럽고, 쓸쓸하면서도 따뜻하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위안을 주고, 절반의 추상이면서도 회고적이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가장 즐겨 그린다’라고 작가가 죽음을 3개월 앞두고 외국인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작가가 인간의 선함과 진실에 주목했고, 또 작가 자신이 그런 선함과 진실의 눈으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인간의 모습들이 단순하지 않을 리 없고, 그런 군상들에 대한 표현이 복잡할 까닭이 없다.
박수근은 병마 앞에 끝내 무릎을 꿇는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
지막 말을 남기면서.
이승에서의 삶이 고단했던 탓일까, 그는 떠남을 서둘렀다. 그가 간 곳이 그의 믿음대로 천당이었으면 좋겠다. 그가 이곳 이승에 머물러, 이승은 조금 더 천당에 가까워졌다. 그의 작품이
주는 부드러움, 따뜻함, 위안 그리고 회고로 사람들이 잠시라도 평안을 느낄 수 있어서.
* 출처: 신동기 저 《울림》(M31, 2020년 9월 출간) p38-43- 4
*****(2024.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