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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 봉수산 순교성지
도로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의좋은형제길 25-14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에는 예로부터 ‘의좋은 형제’가 살았던 곳으로 유명한 마을이 있다. 밤에 몰래 서로의 논에 볏단을 건네줬다는 우애 깊은 이성만 · 이순 형제의 이야기가 담긴 ‘의좋은형제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또 다른 의좋은 형제를 만날 수 있는 성지가 나온다. 바로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나누던 ‘의좋은 순교자’,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 형제를 현양하는 대전교구 대흥봉수산 순교성지이다.
성지에 들어서면 넓은 잔디 광장 가운데 두 팔 벌린 성모상이 순례자를 반겨 맞이하고 있다. 성모상이 세워진 받침대는 사형을 집행했던 참수대(斬首臺)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 뒤로 전통방식으로 지어진 인상적인 목조건물이 있다. 기와지붕에 나무와 흙벽으로 이루어진 익숙한 건물이지만, 가까이 가면 일반적인 가옥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문마다 창호 없는 창이 뚫려있고, 지붕 바로 아래 달린 작은 창에는 창살이 쳐있는 옥사(獄舍)이다. 성지 바로 옆에 대흥 동헌이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대흥 관아의 옥사인 대흥 형옥원(刑獄圓)을 재현한 것이다. 형옥원은 죄인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고신(拷訊)과 형벌을 가하던 곳을 이르는 말이다. 옥사에는 3개의 방이 있고, 그 안에는 죄인들이 목에 차는 칼과 곤장을 칠 때 사용했을 형구들이 놓여 있다. 순교자들은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수개월 동안 모진 형벌과 고통을 참아내며 이 작은 공간에서 지내야 했다.
본래 대흥 관아의 옥사는 상중리 296번지 일원 옥담거리에 있었다. 또 사형을 집행하던 처형장은 예당호 내천변에 있었고, 조리돌림 등의 고신이 행해지던 저잣거리는 동서리 173번지 인근에 있었다. 김정신 스테파노(단국대 건축학과) 교수가 설계한 형옥원은 이들을 재현 · 기념하는 공간이다. 형옥원 앞마당은 십자 형태의 거리 모습으로 조성되어 조리돌림, 팔주리 등의 고신과 주리틀기와 큰칼 등의 형벌, 그리고 사형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그림과 설명문들이 준비되어 있다. 형옥원 바로 앞에는 형벌을 집행하던 의자와 곤장대도 놓여 있다.
대흥 관아의 옥사인 대흥옥을 재현한 건물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복자품에 오른 김정득 베드로와 그의 사촌 형제인 김광옥 안드레아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대흥옥은 순교자들이 갇힌 수많은 감옥 중에서 특별히 복자 김정득 베드로가 처형을 기다리던 곳이다.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는 이 지역과는 크게 연고가 없는 순교자다. 인근 고을인 예산에서 면장을 맡던 김광옥은 예산과 청주에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한양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예산의 처형장에서 순교했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를 생각할 때 김정득의 순교를 기리는 이곳에서 김광옥을 함께 현양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정득 베드로는 김광옥 안드레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두 형제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갔다. 두 형제가 피신하면서 가져간 것은 교회 서적과 성물뿐이었다. 두 형제는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기 위해 숨었는데, 그들의 피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더 빨리 발각되었다. 그래서 김정득은 홍주로, 김광옥은 예산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고, 이후 함께 청주에 수감되어 형벌을 받았다.
복자 김정득 베드로가 어떤 신앙생활을 이어왔는지는 상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한양으로 압송되어 1801년 8월 21일(음력 7월 13일) 받은 사형선고 선고문을 통해, 그가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신앙을 증언했을 뿐 아니라 이웃들에게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고, 어떤 형벌과 문초에도 신앙을 반대하는 말이나 다른 신자들의 거처를 밝히는 말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선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는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속에 숨어 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며, 형벌과 문초를 가하여도 아주 모질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사형선고를 받고 예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고신과 형벌로 몸을 제대로 가누기조차 어려운 상태에서도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김광옥 안드레아는 천상의 기쁨에 가득 차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각자의 처형 장소인 대흥과 예산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두 형제는 손을 맞잡고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했다. 김정득은 예산에서 얼마를 더 가서 대흥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 이튿날 읍내로 끌려나가 칼날 아래 목숨을 바쳤다. 김광옥 또한 같은 날 예산의 처형지에서 같은 시간에 참수로 순교했다. 그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이었다.
대흥면에서도 봉수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대흥봉수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성지는 두 형제뿐 아니라 대흥 고을 출신의 여러 순교자도 현양하고 있다.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작성한 「치명일기」(致命日記)에는 복자 김정득 베드로 외에도 황 베드로(46세), 백청여(50세 가량), 원지우 안드레아, 이 루도비코(43세), 이 아우구스티노(38세), 원 요셉(55세) 등 대흥 고을 출신 순교자 7위가 기록되어 있다.
대전교구는 2019년 5월 6일 124위 순교자들의 시복을 기념하고, 특별히 ‘의좋은 순교자’로 불리는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사촌 형제인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를 기억하고, 대흥 고을 출신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대흥봉수산 순교성지’ 축복식을 거행했다. 대흥봉수산 순교성지는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다 처형된 장소의 특성을 살려 토지면적 4628㎡에 330㎡의 임시 성당과 2314㎡의 ‘형옥원’을 갖추었다. 형옥원에는 박해시대 순교자를 가두었던 형옥 시설인 옥사, 저잣거리, 처형대가 재현되었고, 그 둘레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되었다. 아울러 성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되새기며, 봉수산과 예당저수지와 조화를 이루는 자연환경 속에서 순교 영성과 창조질서 보전을 함께 전파해나갈 예정이다. [2019년 가톨릭신문 이승훈 기자의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9년 12월 6일)]
복자 김정득 베드로(?-1801년)
‘대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정득(金丁得)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홍주의 대흥 고을에서 태어나, 친척인 김광옥 안드레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그가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김 베드로는 김 안드레아와 함께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탓에, 포졸들이 쉽게 그들의 종적을 찾아내고 말았다. 이후 베드로는 홍주로,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각각 압송되었다.
홍주 관장은 김 베드로가 끌려오자마자, 그를 배교시키기 엄한 문초와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김 베드로는 감사의 명에 따라 김광옥 안드레아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 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여기에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하여 참수하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당시 김정득 베드로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는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속에 숨어 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며, 형벌과 문초를 가하여도 아주 모질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예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김 베드로와 김 안드레아는 천상의 기쁨에 가득 차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김 베드로는 예산에서 얼마를 더 가, 대흥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읍내로 끌려 나가 칼날 아래 목숨을 바쳤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정득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1741?-1801년)
충청도 예산 여사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Andreas)는 오랫동안 그 지방의 면장(面長)으로 일하였다. 본디 그는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사나운 성격 때문에 모두 무서워하였다. 대구에서 1816년에 순교한 김희성 프란치스코가 그의 아들이다.
김 안드레아는 50세쯤 되었을 때, 같은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이웃은, 이때 그 사실을 알고 몹시 놀라워하였다.
이후, 김 안드레아는 드러나게 교리의 본분을 실천하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날마다 교우들과 한자리에 모여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렸고, 사순 시기마다 금식재를 지키고 갖가지로 극기 행위를 실천하였다. 그러면서 마침내 이전의 성격을 극복하고 어린양과 같이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김 안드레아는 자신이 입교시킨 친척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포졸들은 그들의 종적을 쉽게 찾아냈다. 이후 김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김 베드로는 홍주로 압송되었다.
예산 현감은 김 안드레아가 체포되어 오자, 바로 공범자들을 대고 천주교 서적을 내놓으라고 명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두 번째 신문에서도 그는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용맹함을 드러냈다.
“모든 언약이나 위협이 소용없습니다. 다시는 제게 물어보지 마십시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습니다. 사또께서는 임금님의 명령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저도 천주의 명령을 거역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제 대군대부(大君大父)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만 번 부당합니다. 우리 천주께서 저의 비밀한 생각과 감정과 의향을 보고 계시므로 마음속으로라도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현감은 김 안드레아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매질을 시켰으나 헛일이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신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안드레아는 감사의 명에 따라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 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여기에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하여 참수하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당시 안드레아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생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숨어 살면서 제멋대로 (교리를) 외우고 익혔으며, 천주교와 관련된 물건들을 감추어 두었다.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십계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면서 ‘한 번 죽는 것이니 달게 받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다.”
예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김 안드레아와 김 베드로는 그동안의 형벌 때문에 걸음을 뗄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용기와 힘으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을 마주잡으며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이튿날 김광옥 안드레아는 들것에 실려 예산 형장으로 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 기도를 바쳤다. 또 지정된 장소에 이르자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뒤에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를 마친 다음, 목침을 가져다 스스로 그 위에 자신의 머리를 누였다. 그리고 두 번째 칼날에 목숨을 바쳤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가량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광옥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뮈텔 주교의 「치명일기」에 기록된 대흥 고을 순교자
1. 복자 김정득 베드로
2. 황 베드로(46세, 치명일기 119)
3. 백청여(50세 가량, 치명일기 258)
4. 원지우 안드레아(치명일기 349)
5. 이 루도비코(43세, 치명일기 451)
6. 이 아우구스티노(38세, 치명일기 452)
7. 원 요셉(55세, 치명일기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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