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9월 11일(수) 이사야 29:9-16 찬송 490장
9.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11.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12.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15.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16.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개역 개정)
- 남유다의 영적 무지와 외식 및 불신앙에 대한 책망 -
지난 말씀(28:23-29:8)에서 거듭 강조한 바 남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목적이 멸망이 아니라 교육과 연단이라면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의 어떤 부분을 연단하고 무엇을 교육하시기 위해 징계하시는가?
오늘 말씀은 바로 이에 대한 답변을 주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먼저 9-12절은 영적 맹인이 되어
하나님께서 거듭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묵시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유다 백성들의 영적 무지에 대한 책망을,
13-14절은 입술로는 주를 존경하나 마음은 떠나 있는 외식된 행위에 대한 책망을,
15-16절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이방 국가와 언약을 비밀히 맺은 사실에 대한 책망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해
유다 백성들을 교육하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또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교훈을 주고 있다. 즉
①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무지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죄악에 빠지게 되는 바
항상 말씀으로 교훈과 책망을 받기에 힘써야 한다.(딤후3:16)
② 하나님께 대한 마음을 닫아 버리고 겉으로만 신앙하는 체하는 외식은
영으로만 가능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키는 가장 큰 장애가 되는 바
이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
③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고 의뢰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곧 우상인 바 이는 제1, 2 계명을 범하는 것임을 명심하여 경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의지하여 행하는 경건한 삶의 도를 터득하여야 한다.(롬12:1-2)
15절)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여기서 ‘자기의 계획’이란 유다가 앗수르의 침공 계획으로 인하여
국가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유다의 지도자들이
애굽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여 당면한 난국을 타개하려고 하였던 것을 말한다.
15절은 유다가 이러한 계획을 하나님 몰래 추진하려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유다가 애굽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사야가 일찍이 유다가 애굽을 의지하려는 태도에 대하여
어리석은 일로 지적하고 책망한 것과 깊은 관련을 지닌다.(19:11-17; 20: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애굽을 의지하여
앗수르의 침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일을 하나님 몰래 은밀하게 추진하였다.
물론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이사야 몰래 은밀하게 추진한 것을 의미한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선지자인 이사야만 모르게
자신들의 계획을 추진한다면 하나님도 그 일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은 선지자의 보고를 통해서만
인간들과 관련된 일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말하자면 유다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인간과 거의 다를 것 없는
제한적인 존재로 여긴 것이다.
이 얼마나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인가?
유다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제한하는 자들이었다.
마치 그리스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상으로 수많은 신들을 만들어낸 것처럼
유다 사람들도 하나님을 자기들 생각대로 다듬고 고치고 멋대로 이해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을 자기들 마음대로 이해하고 자기들 생각의 틀에 맞추어
생각하는 자들이 제대로 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신앙이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으로 변질되는 것,
그들의 삶이 자기들의 악하고 죄악된 본성을 따라 패역한 것,
궤사(詭詐)한 것으로 변질되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진리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고 또 믿고 확신하게 되면
자연스레 우리의 신앙도, 삶도 온전해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자 되심, 전지하심,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심,
자비로우심과 긍휼하심만 아니라 의로우심과 심판주되심을 알 때
우리의 신앙과 삶 역시 균형있고 온전한 것이 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지 못하는 자가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할리 만무하다.
전지하심을 모르는 자가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지혜를 구할리 만무하다.
무소부재하심을 알지 못하는 자가 어둠 속에서, 홀로 있을 때,
범죄의 유혹이 닥칠 때 자기 손과 발, 마음과 욕심을 금할리 만무하다.
하나님의 심판주되심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자기 인생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겠다는 각오를 다질리 만무하다.
바른 신앙은 바른 하나님 이해에서 비롯된다.
다윗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위대한 신앙인,
하나님 앞에서 항상 정직한 신앙인이 될 수 있었을까?
바로 그가 하나님을 정확하게 온전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창조자요, 초월자로서 전능하고 전지하신 분으로 인정하였다.
그는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의 생각까지도 감찰하시며
아니 계신 곳이 없어서 인간의 모든 행위를 다 감찰하신다고 믿었다.(시편139편)
결국 이러한 그의 신앙고백적 인식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하고 정직한 위대한 신앙인으로 만든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신앙 고백하는 자리,
그곳이 참된 축복의 길로 서는 입구이며 바른 신앙 생활의 첫걸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로 알기에 힘써야 한다.
또 하나님을 향해 바른 신앙 고백을 올리기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을 정직하고 진실하고 온전하게 알고자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죄악에서 떠나는 길이며 온전한 삶의 길, 축복과 형통의 길,
영광과 축복의 길에 들어서는 자리임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한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렘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