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곰직이 교우촌 (순례지/성지)
간략설명:봉황산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는 교우촌
지번주소: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곰직이 교우촌이 있었던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는 본래 순흥군 수식면(順興郡 水息面) 지역으로 영주 부석사의 주산인 봉황산(818m,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와 영주군 부석면 북지리 경계에 위치) 밑에 위치한다.
봉황은 오동나무를 좋아하며 죽실을 먹고 산다 하여 오전리(梧田里)라 불렀고, 1914년 군 · 면 통폐합 때 덕산리를 병합하여 봉화군 물야면에 편입되었다.
곰직이골은 오전 마을 동북쪽에 있으며 봉화읍에서 물야면사무소를 지나 오전 약수터로 가는 길목 1㎞ 못 미쳐 왼쪽 깊숙한 골짜기로 들어가야 나온다. 이곳은 옛날에 곰이 새끼를 쳤다고 하여 곰직이골(곰집)이라 하며, 또한 풍수지리설에 곰의 혈이 있다 하여 풍수들이 명당을 찾기 위해 다녔던 골짜기이다. 봉화군과 영주시와 강원도 영월군 경계 지역에 있는 선달산(1,236m) 입구와 오전 약수터에서 박달령(1009m)으로 올라가는 깊은 골짜기가 바로 곰직이골이다.
이 골짜기는 옛날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로 몇 곳에 옛날 집터가 있고, 권병길 씨가 살던 집과 과수원 옆에서 옛 옹기 가마터가 새로 발견되기도 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부근이 바로 옛날 교우촌 자리로 추정된다. 이곳에 처음으로 신자들이 살았던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로 박해를 피해 처음 예천으로 피신 왔던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黃嗣永, 1775-1801년)가 강원도와 접경 지역인 이곳에 숨었다가 제천의 배론 옹기점으로 가서 유명한 황사영 백서를 썼다.
그 후 이곳은 신자들의 피난처가 된 듯하며, 정해박해(1827년) 이전에 충청도 홍주 고을 출신인 이재행 안드레아(李在行, 1776-1839년)가 이곳 곰직이 교우촌으로 이주해 왔다. 그는 고향에서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집안과 재물과 이웃을 버리고 산골에 은거해 살며, 오랫동안 이곳저곳으로 피난을 다니다가 마침내 곰직이 교우촌에 안착한 것이다.
그는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안동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대구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다시금 배교를 강요당하며 형벌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후 12년 동안 옥에 갇혔다가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관덕정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