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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수필을 쓰는 사람들을 위해 / 정목일
수필은 멀리 있지 않다. 나의 생활 곁에, 삶의 곁에 있다. 슬픔의 곁에, 눈물의 곁에, 기쁨의 곁에, 그리움의 곁에, 정갈한 고독의 한가운데에 있다.
삶과 가장 근접해 있는 문학이 수필이다. 원대하거나 화려하거나 압도하려 들지 않는다. 수필은 자신의 삶과 인생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맑고 투명한 거울이다. 한숨이 나오거나, 그리움이 사무칠 때나, 외로움이 깊어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때 백지 위에 무언가 끄적거려 보고 싶어진다. 그냥 낙서일 수도 있고 문장으로 써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이 '끄적거림'은 별 의식 없이 나온 것이지만 마음의 독백, 마음의 토로로서 이 속에 자신의 인생과 느낌이 담겨진다는 뜻에서 중요하다. 이 끄적거림이 발전하면 삶의 기록, 인생의 기록이 되며, 문학으로 승화될 수 있다. 기록한다는 것은 자아(自我)의 발견이며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 기록함으로써 비로소 역사의식과 영원성을 수용하게 된다.
기록은 삶을 성찰하여 새로운 삶을 꿈꾸며,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는 작업이다. 기록하는 일을 통해 삶은 더욱 진지해지고 충실해지며 가치로워진다. 기록은 사실 그대로를 쓴 것이다. 체험(사실)에다 상상과 느낌을 보태어 재구성과 해석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수필이다. 기록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지만, 수필은 사실에 상상과 느낌을 불어넣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담아낸다. 우리 삶의 얘기가 그냥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수필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상상과 의미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필은 누구나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일기, 고백, 기행, 감상, 편지- 어느 형식이든지 자유롭게 마음을 토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자신과의 대화이다. 수필을 쓰기 위해선 동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과의 대화에 과장과 허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긴장을 풀고 어깨에 힘을 빼야 한다. 장신구도 떼어내고 화장도 지워버리고 홀가분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실에 눕거나, 턱을 괴고 앉아 친구에게 마음을 토로하듯 쓰는 글이다. 애써 잘 쓰려는 의식이나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도 없이―. 권위의식, 체면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일체의 수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동심으로 돌아가 순수무구의 마음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는 욕심에서 치장하고 수식하고 싶어 안달을 부리게 된다. 겨울 언덕에 선 벌거숭이 나무처럼 녹음· 꽃· 단풍도 다 떨쳐버린 맨 몸으로 보여주는 진실의 아름다움을 가져야 한다. 수필이 '마음의 산책' '독백의 문학'이라 하는 것은 진정한 자신과의 만남, 인생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성찰을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 내는 문학임을 말한다.
수필의 입문(入門)은 어느 문학 장르보다 쉽지만 수필의 완성은 실로 어렵다. 성공한 인생은 많지만 아름다운 인생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시작은 쉬웠지만 점점 들어갈수록 어렵게 느껴지는 글이 수필이다. 시, 소설, 희곡 등 픽션은 작가와 작품이 일치하지 않아도 되지만 논픽션인 수필의 경우엔 작가와 작품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 인생의 경지에 따라 수필의 경지가 달라진다. 수필은 인생의 거울이므로 사상, 인품, 경륜, 인생관 등이 그대로 담겨진다. 심오한 사상, 고결한 인품, 맑고 따뜻한 마음, 해박한 지식, 다양한 체험이 수필을 꽃피우는 요소이고, 이런 인생 경지에 도달한다는 자체가 구도, 자각, 실천의 길이 아닐 수 없다.
수필은 완성의 문학이 아니라, 그 길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문학이다. 수필은 자신의 삶을 통한 의미와 가치를 최상으로 높이는 도구다. 수필을 쓰려면 무엇보다 겸허하고 진실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꽃피우는 문학이므로 스스로 교만과 허위의 옷을 벗어야 한다. 마음속에 항상 자신의 영혼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을 깨끗이 닦아 두어야 한다. 마음속에 양심의 종을 매달아 두어서 불의나 탐욕의 손길이 뻗힐 때 스스로 자각의 종소리를 내게 해야 한다. 마음속에 맑고 깊은 옹달샘을 파 두어서 거짓의 먼지를 깨끗이 씻어 낼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마음의 경지를 얻은 사람이라면, 진실과 겸허의 눈으로 말하고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마음속의 울림 그대로를 끄적거려 보는 데서 시작하면 된다. 낙서라고 해도 좋다. 단 몇 줄의 문장을 만들고 점차 자신의 마음을 토로해 나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수필과의 만남을 얻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습성을 가지는 일이 수필을 쓰는 첩경이 된다. 삶의 기록이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1. 체험의 서술 *기록문에 불과
2. 체험 + 느낌
3.체험 + 느낌 + 인생의 발견, 의미부여 *수필진입
4. 체험 + 느낌 + 인생의 발견, 의미부여 + 감동
1은 자신이 겪은 대로 쓴 것이어서 기록문에 불과하다.
2는 수필이 되려면 체험과 느낌이 조화를 이뤄야 함을 말한다. 체험이 많고 느낌이 적을 땐 정서감이 부족하여 딱딱하게 느껴지고, 체험이 적고 느낌이 많은 경우엔 추상적이고 현실감의 결여를 느끼게 한다.
3의 수준이면 수필에 진입한다.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창출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체험을 통한 인생의 의미부여가 필요하다.
4의 경우엔 '감동'을 주문하고 있다. 수필이 자신의 체험을 소재로 한 글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나 인생의 의미를 일깨우고 읽는 보람을 안겨 주기 위해선 '감동'이 있어야 한다. '감동'은 문학성의 핵심 요소이다.
수필은 삶의 문학이다. 수필 쓰기는 자신의 삶을 가치롭게 꽃피우는 자각과 의미 부여의 행위이다.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의미의 꽃으로 피워낼 수 있을까, ― 이것이 수필을 쓰는 핵심이며 궁극적 목표가 아닐 수 없다.
2. 수필은 어떤 글인가
가. 수필의 정의
수필은 비교적 짧은 글로써 자신의 삶과 체험을 개성적, 관조적으로 자유롭게 진솔하게 나타낸 산문 형식의 한 장르이다.
나. 수필의 語源
수필은 서양어로는 essay이고 동양어로는 隨筆이다.
에세이는 프랑스의 몽테뉴에서 비롯되었고 시론(試論), 시도(試圖)라는 뜻이고 이것이 영국으로 건너가 발전되어 온 형식이다.
동양의 경우 '隨筆'이란 용어를 맨 처음 사용한 이는 12세기 남송(南宋)의 홍매(洪邁)(1123∼1202)로서 그가 쓴 「容 隨筆」에 연유한다.
한국의 경우는 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1260)을 수필의 범주에 넣을 수 있으며 용어상으로 조성건(趙性乾)의 한거수필(閑居隨筆, 1688), 연암 박지원(蓮岩 朴趾源, 1737∼1805)일신수필(馹訊隨筆) 등을 들 수 있다.
본래 에세이는 '시금(試金)', '계획(計劃)'의 의미를 가진 말로 '계량(計量)하다', '음미(吟味)하다'의 뜻을 지닌 라틴어의 「엑시게레 exigere」라는 어원에서 나왔다.
처음 쓴 사람은 프랑스 몽테뉴이고 다음에 에세이라는 말을 써 넣어 이 용어가 쓰이도록 한 사람은 영국의 베이컨이 「명상록」이란 의미로 썼다.
다. 수필의 종류
(1) 수필과 에세이
「영어의 essay라는 말에는 '評論'이라는 뜻과 '隨筆'이라는 뜻의 두 가지가 있다.
에세이를 보통 수필이라고 번역할 때, 평론부문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의 수필을 의미한다.(文德守, 「現代文章作法」, 서울靑雲出版社, 1964, p 261)"수필은 동양적인 에세이요, 에세이는 서구적 수필"이라고 윤오영씨는 말했다. 프랑스의 R.M 알베레스는 "에세이는 그 자체가 원래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로 된 문학"이라고 설명했으며 일본의 요시아 세이이찌(言田精一)는 "수필론에서 에세이는 구분해서 정의할 수 없다."고 정의했다.
(2) formal essay와 Informal essay
㈎ formal essay
객관적 진리와 무게있는 지식은 정연한 논리적 전개를 통해 나타낸 글(重隨筆, 논리적수필 輕隨筆)
㈏ Informal essay
독자들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고 정서와 기쁨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 글( 經隨筆, 서정수필 軟隨筆)
영문학에 있어서 유달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에세이는 포오멀 에세이(formal essay)와 인포멀 에세이(Informal essay)로 나뉘어져 있다. 이 두 종류는 내용과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전연 다른 것으로 그 후자가 우리가 말하는 수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인포멀'이란 말은 正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그 내용에 있어서 객관적 진리와 무게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독자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독자를 자극시키지 않고 마음을 늦추게 하는 글이다. 한가한 시간에 쓰여지는 글이며, 한가한 시간에 읽는 글이다.
이 에세이는 논문이 아니므로 무엇을 증명하거나 어떤 결론에 도달하여 필자의 주장을 독자에게 설명을 시키려 들지 않는다. 정연한 논리적 전개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遠廻와 脫線을 하다가 제길을 찾아 들어서는 버릇이 있다. 명상적이요, 철학에 가까운 경우에 있어서도 결코 조직적 체계를 설립시키지 아니한다. 그리고 포멀 에세이는 반드시 정확해야 할 引引用句, 引喩, 參照 등도 어느 정도의 誤診은 容認을 받는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포멀 에세이는 횡설수설하는 잡담은 아니다.
(3) essay 와 Miscellany
'수필'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외국어로는 Miscellany와 essay가 있다.
㈎ Miscellany
우리 나라에서 흔히 통용되는 수필은 Miscellany에 속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身邊雜記나 感想文, 雜文을 일컬어 Miscellany라고 하는 데 그에 비추어 우리 나라에 쓰는 수필은 역시 그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부드럽고 정서적인 문체로서 엮어가며 스스로의 見聞 또는 感想을 우리의 수필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 essay
Miscellany에 비하면 어떤 문제를 놓고 논의하는 小論文, 論說에 가까운 것이다.
중국의 예를 빌린다면 論, 啓, 議, 書, 序記, 說 같은 것이 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라. 수필의 특성
(1) 산문(散文)의 문학(文學)
산문 정신이 강한 글, 소설, 희곡이 조탁(彫琢)된 글이라는 인상이 짙고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구성을 나타내지만 수필은 소재를 자기 생각에 나타나는대로 표현한 글; 자기 생활을 계획적인 의도없이 사실대로 드러낸 글이다.
(2) 고백적(告白的) 자조문학(自助文學)
소설과 희곡에서는 표현 뒤에 주제를 숨기지만 수필은 겉으로부터 그것을 드러낸다.
픽션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적나라하게 마음을 드러낸다. 자기의 취미, 지식, 이상,정서,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 등과 습관까지도 솔직하게 노출시킨다.
스필쓰기는 자신의 삶과 인생을 진실의 거울 앞에 비춰보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진실이 바탕이 된다. 수필이 '고해성사(告解聖事)'라는 것도 진실에 입각한 고백적 자조문학임을 말한다. 수필은 ' 넌픽션'이라는 특징을 나타낸다.
(3) 무형식(無形式)의 형식문학
수필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글을 말한다. 시, 소설, 희곡에 비하여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에 형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형식은 내용 즉, 정서, 상상, 사상을 예술화하는 그릇이므로 어떤 장르이든 문학형식의 제약을 받지만 수필은 비교적 제약을 덜 받고 자유롭게 써 갈 수가 있다는 특성을 가진다.
예컨대 구성이 없는 문학장르가 있을 수 없지만, 수필엔 의도성, 계획성보다 써내려가는 중에 지연스럽게 구성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자유분방함 속에서도 조화의 미와 작자의 체취와 멋을 드러낸다.
(4) 다양(多樣)한 제재(題材)의 문학(文學)
수필은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무엇을 담든 필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다. 자연풍물, 신변잡사와 보고 느낀 것 모두가 수필의 조재가 된다.
다만 이를 가지고 어떻게 '수필' 로 빚어낼 것인가 하는 것은 필자의 솜씨의 경지에 따라 달라진다. 산문시적 수필이 될 수 있고, 유머가 흐르는 경쾌한 산문이 될 수 있고, 운취가 그윽한 서정수필, 논리정연한 논리수필, 예리한 비판정신이 번쩍이는 비평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주변의 사소한 것에서부터 원대하고 심오한 사상,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담을 수 있는 문학이다.
(5)해학(諧謔)·비평정신(批評精神)의 문학(文學)
수필은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냉철한 비판정신과 내일을 제시해 주는 지표가 깃들어야 한다.
유머, 지혜와 위트, 비판정신은 수필의 본질이다.
(6) 개성의 문학
수필은 자신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문학이다. 자신의 주장, 주의, 세계, 발견,명상, 습관, 체취 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데서 수필의 묘미가 있다.
따라서 자신만의 독자성과 체험의 세계, 정서의 시계를 펼치는 것이야말로 수필의 개성(個性)을 꽃피우는 일이다.
(7)경지의 문학(文學)
수필은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인생을 담는 그릇이므로, 인생경지에 따라 수필의 경지가 그대로 반영된다. 시, 소설, 희곡은 작가와 작품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아도 되지만, 수필은 곧 자신(삶과 인생)이므로 작가와 작품은 일체이며 동일시된다.
심오한 사상, 고매한 인품, 유머와 위트, 다양한 체험, 폭넓은 지식, 따뜻한 인간애 등이 좋은 수필가가 될 수 있는 요건이 되며, 이를 갖추기 위해 부단한 인격의 도야 훌륭한 인생연마가 필요하다.
좋은 수필을 만난다는 것은 곧 좋은 인간을 만난다는 것을 말한다.
수필의 경지는 바로 인생의 경지를 뜻한다.
수필이 경지의 문학인 까닭에 완성의 문학이 아니라, 깨달으며 완성을 향해 나가는 구도의 문학인 것이다.
수필의 모습
수필은 고해성사와도 같다.
촛불 앞에서 자신이 지닌 모습을 그대로 진실의 거울 앞에 비춰보이는 일이다.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선 맑게 닦여진 마음의 거울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촛불 앞에서 행하는 고해성사, 그 자체는 아니다. 모든 것을 진실의 거울앞에 다 드러내 놓았을 때, 마음 속으로부터 넘쳐 흐르는 눈물을 다 흘리고 난 뒤의 독백같은 것이 아닐까한다. 온갖 감정의 앙금과 갈등의 응어리를 눈물로서 씻어내고 자신의 영혼이 맑은 거울을 갖게 되었을 때, 수필의 모습은 비로소 드러난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참모습이며 영혼이다."
무심결에 탄식처럼 토해내는 이 독백이 수필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독백이 다 수필이 될 순 없다. 사람마다 지닌 마음의 거울은 제각기 다르다. 이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닦는 일이란, 곧 인격의 수련과 마음의 연마를 말한다. 아무리 철학과 사상이 심오하고 학식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수필가가 되기 위해선 마음의 연마가 필요하다. 마음의 거울에 삶을 어떻게 비춰내느냐 하는 것이 수필이다. 즉, 철학과 사상, 학식이 수필의 요건이 될지언정, 수필 그 자체일 수 없는 것은 그러한 요건을 통해서 자신의 삶과 결부시켜 인생에 어떤 해석과 의미를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 수필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유의 것으로서, 독자들의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독백이되 그냥 자신의 푸념이어서는 안되며, 모든 사람에게 공감과 새로운 발견과 의미를 제공해야만 수필이 될 수 있다.
수필은 맑은 가을, 산야에 피어나는 들국화와 같다.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수수하고 소박하다. 자신을 과장해서 보이려거나 뽐내려 들지 않고, 진솔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 걸음 물러선 마음의 여유, 남 앞에 나서지 않는 겸허, 꾸밈없는 소박함 속에 수필의 향훈이 있다. 들국화는 화려한 모습은 아니나, 그냥 외면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샘물에 막 얼굴을 씻고난 모습처럼 그 표정엔 맑은 고요가 가라앉아 있다. 단번에 눈길을 끄는 꽃은 아니나, 볼수록 아리잠직하고 샘물을 길어 올리는 듯한 신비감이 깃들어 있다. 이 평온하고 정한(靜閑)한 발견과 경지가 수필의 참모습이 아닐까 한다.
수필은 시와 소설의 중간 거리에 조촐하게 자리잡고 있다. 시의 정서적 율격, 소설의 사실적 재미를 함께 지니면서 시로는 토로할 수 없는 삶의 이야기, 소설로선 수용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 수채화일 것이다.
시가 여백을 남긴 동양화라면, 소설은 사실적인 구도를 보여주는 서양화에 비유될 수 있다. 수필은 시처럼 지나친 압축과 상징, 또한 비유를 수용하지 않고 소설처럼 장황하거나 독자들에게 흥미와 충격을 주어 현혹시키려 들지 않는다.
수필은 시와 소설의 거리 중간쯤에서 시와 소설이 지닌 장점을 취하면서 특유의 빛깔을 만들어낸다. 수필은 전형적인 현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스런 격조를 지님으로서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부담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포근하게 느껴지는 정감, 문득 깨달음을 주는 삶의 이야기, 평범한 생활인의 철학, 삶에 활력을 불어 넣는 해학을 제공한다. 수필의 친화력, 자연스러움은 누구나 쉽게 독자로 끌어들일 뿐 아니라, 글을 쓰고픈 마음을 갖게 한다. 이것이 수필이 갖는 장점이요, 특질의 하나다.
누구든지 써보라고 마음을 끌지만, 좋은 글을 빚어내기란 쉽지 않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선 항상 마음의 거울을 청결히 닦아두어야 하고, 그 거울에 인생의 멋과 정감이 비춰져야 한다. 마음의 바탕에 심오한 사상, 고매한 인품, 삶의 철학과 명상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 향기가 배여나야 한다.
수필은 마음의 대화이다.
사람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지려 하고 남기고 싶어한다. 한 사람의 생애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가. 유명하고 훌륭한 사람은 그가 엮어낸 인생 얘기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기억되는 사람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비록 역사에 남지 않는 인물일지라도, 오랜 세월 동안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겨놓은 사람들이다. 정의를 위해 몸을 던진 사람들, 지순한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연인들, 평생동안 우정을 나눈 친구들, 가난했지만 고고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의 삶과 얘기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이야기가 상대방의 가슴속에 감동의 등불이 되어 켜져 있을 순 없을까. 두고두고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향기로 남을 순 없을까. 수필은 긴 얘기가 아니다. 평범하고도 소박한 이야기이나, 그 속에 비범의 세계가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수필은 연꽃처럼 피어난다.
남들이 눈여겨 보지 않는 진흙속에 뿌리를 내리고 어느날, 환한 연꽃첨럼 피어난다. 흙이 썩어야 연꽃을 피울 수 있듯이 냉대와 소외의 기다림 속에 한 송이 연꽃이 피어난다. 수필은 원대한 포부나 찬란한 꿈을 지니지 않는다. 욕심으로부터 초탈한 마음의 경지, 소박한 생각이 피어올린 꽃일 따름이다. 자신의 가숨속까지 다 썩힌 바탕에서 뜻밖에 연꽃이 피어난다. 연꽃을 피우려고 진흙구덩이 속에 자신을 묻고 기다릴 줄 알아야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
수필의 세계는 다양하다. 굳이 장미나 난(蘭)만이 꽃이 아니듯, 꽃마다 일생을 통해 피어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각자의 삶과 개성으로 피어낸 수필을 가꿔야 한다. 개성과 함께 자신이 추구하는 독자적인 세계를 가진다든지, 전문성을 지니는 일도 중요한다. 한국인은 논리성보다 정서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지만, 앞으로는 논리적인 글, 철학적인 글, 명상적인 글도 많이 나와야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스며들어서 얼마나 친숙하고 자연스럽게 전달되며, 감동의 물결을 일으켜 놓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수필을 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필을 쓰는 자세일 것이다. 시와 소설과 희곡과는 달리, 수필은 바로 자신의 삶, 그 자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단순히 신변잡사(身邊雜事)의 나열이 아니라, 그 속에서 진실의 발견, 본질의 탐구, 의미의 창출이 있어야 한다.
수필이야말로, 어떤 글보다 진지하고 심오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수필은 가야 토기였으면 한다.
청자나 백자처럼 우아하고 볼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자기(磁器)가 될 수 없다.
고려청자에는 우리 나라의 해맑은 가을 하늘이 얹혀 있다. 조선 백자에는 봉창 문을 물들이는 달빛의 맛, 순백의 선미(禪味)가 깃들어 있다.
나의 수필은 그냥 토기였으면 한다. 토기는 청자나 백자와 같이 흙으로 빚었지만 매끄럽지 않고 눈을 끌지도않는다. 청자가 장미라면 백자는 난이요, 토기는 이름도 없는 풀꽃일 것이다.
나는 아무런 기교도 없이 그냥 손으로 빚어 만든 토기 항아리에 더 정감을 느낀다. 문명의 얼굴을 쓰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체온이 느껴지는 토기는 천 년 전의 손길과 진솔한 마음을 그대로 전해 준다.
토기 항아리엔 수천 년 전의 풀내음과 인간들의 소박한 마음이 담겨 있다. 빗살무늬 하나에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가던 바람, 짐승들의 뒤를 쫒던 숨소리, 들판에서 듣던 풀벌레 소리가 잠겨 있다.
자기는 흙을 빚어 천삼백 도 정도의 온도로 구워 낸다. 흙이 불 속에서 하나의 자기로 될 때까지 도공들은 자신의 영혼과 솜씨를 불에 태운다. 흙이 화염 속에서 자기가 될 때까지 도공들은 신열 속에 자신을 태우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형태나 빛깔은 재주나 지혜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흙과 불과 도공의 영혼과 신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보태어졌을 때라야만 명품(名品)을 얻을 수 있다.
청자이되 고려인의 마음이 맑게 비치는 신비스런 하늘빛은 아무리 마음을 맑게 닦아 낸 도공일지라도 빚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달빛을 보듯, 한 그릇의 정화수를 대하듯 부드럽고 고요한 백자의 빛깔을 불 속에서 완성하는 일은 자신의 재주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흙과 불과 도공의 영혼이 어떤 영감을 얻어 일체감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에 무릎을 치는 명품 한 점을 얻을 수가 있다.
나의 수필은 그냥 덤덤하고 수수한 수필이길 바란다. 아예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지지도, 오로지 한 가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열성과 인내도 없을뿐더러 솜씨마저 시원하지 못하다.
그냥 소박하게 흙으로 마음대로 주물러서 빚고 싶다. 장식도 없이 세상에 남겨 놓아야 할 작품을 만들겠다는 욕심도 부리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빚고 싶다.
하지만 흙은 좀 가려 쓰고 싶다. 내가 나서 자라던 고향 언덕의 흙, 동무들과 어울려서 뒹굴던 들판의 흙, 그리고 내가 묻힐 땅의 그 흙으로 빚고 싶다. 그래야 만이 나의 토기에는 나의 고향과 생각과 생명이 담겨질 것만 같다. 결국 내가 태어나서 돌아가야 할 곳은 흙의 품인 것을 알기 때문에 ……. 토기 항아리에 담긴 물, 풀꽃이 내 생각이며 나의 세계이다.
나의 수필은 난(蘭)이 아니다.
청초하고 우아한 기품이 깃든 난이 될 수는 없다. 그냥 풀꽃이나 민들레 같은 소박한 꽃이면 한다.
나의 수필은 고귀한 학(鶴)이 될 수도 없을 뿐더러 학이 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하늘 높이 구름속에서 보리밭으로 떨어지면 자유자재로 노래부르는 종달새가 될 수 없을까.
고상하고 품위 있다거나 깨끗하다는 고정관념 속에 빠져 버리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는 자유, 어떤 형식,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수필의 매력이다. 꼭 학일 필요가 없고 학이라야만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들판의 허수아비에 놀라 달아나는 참새나 미루나무 꼭대기에 보금자리를 지은 까치가 돼도 좋으리라.
나의 수필, 내가 쓰고자 하는 수필은 완숙한 문장이 아니다. 문장을 가다듬는 일은 일생을 수련하는 일이기도 하다. 좋은 문장은 곧 좋은 인품과 사상과 인생관을 포용한다.
완숙한 문장이기보다는 서툴러 보이나 개성적인 문장을 쓰고 싶다. 문장보다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물을 보는 눈과 느낌이다.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사물에서 나만의 발견, 어떤 내 나름대로의 생각한 조각을 어떻게 찾아낼 수 없을까.
나의 발견법, 명상법, 그리고 조촐한 미학을 어떻게 진실되게 형상화 시켜 놓을 수 있을까…. 나는 표현보다도 먼저 발견과 명상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결국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것들에서 생명의 신비, 우주의 생명률(生命律)을 찾아보려는 것이 내가 수필을 쓰는 데 항상 갖는 고민이며 관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늘 영감적인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해 본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달빛을 머금은 풀꽃과 같아질 수 있으며, 고기장수 아주머니의 심정과 같아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같아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을까. 다만 마음을 맑게 닦아 두어서 뭇 사람들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게 해 두는 것이 내가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길임을 터득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수필은 고상하지 않으나 속되지 않고, 다정한 벗님의 편지를 받아 읽을 때처럼 그리움을 전해 주길 원한다. 국화꽃 곁에서 읽는 벗님의 편지글에서처럼 잊었던 추억의 등불이 켜지고 다시금 순수한 정의 샘이 솟아났으면…….
나는 되도록 형용사와 부사, 비유법을 쓰지 않아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진실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형용사와 부사는 얼마나 차이가 많으며 과장되기 쉬운가. 주어와 술어로써 든든한 뿌리를 박고 과장법과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의 실체를 진실 되게 나타낼 수 없을까…. 뿌리가 든든해야 한다. 형용사나 과장법은 무성한 잎새이거나 화려한 단풍잎일 뿐 겨울이면 떨어져 버릴 것이다. 미문(美文)이란 사치스런 옷에 불과하다.
나의 수필, 나의 삶이여.
그것은 무명의 한 작은 별이며, 풀숲에 피어 아직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고 이름 한 번 불러 주지 않는 풀꽃이다.
※ 수필 쓰기의 실제 -제목, 서두, 본론, 결말, 퇴고
1. 서두와 결말
수필의 서두는 그 해당 작품의 첫 인상이 되므로 작품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긴요하다. 글의 출발점은 그 작품의 운명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분위기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수필의 서두는 글의 전체적인 흐름을 예시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두는 간결하면서도 상징적인 표현이거나 단순하면서도 어떤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여운을 드리움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관심을 갖고 읽도록 하는 흡인력을 지니기도 한다.
시작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을 하면 절반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문장의 바른 길은 발단의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만큼 서두는 중요하다는 얘기다.
수필은 청자(靑磁)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散策)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있는 것이다.
피천득(皮千得)의 <수필> 중 앞부분
독자들은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의 마지막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소녀와 사랑에 빠졌던 로버트 죠던은 적진의 철교를 폭파한 후 허벅지에 총상을 입게 되고, 그녀를 떠나보낸 후 기습해 오는 적과 대치하다가 최후를 맞게 되는데, 그가 그녀에게 마지막 남긴 말을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가야 해. 하지만 나는 당신 곁을 떠나는 건 아냐. 두 사람 중 하나가 있는 한 우리는 함께 거기 있는 거야. 하던 그 말 한 마디를.
수필에 있어서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감동적인 말을 여운으로 남기는 것은 좋지만, 설교조나 교훈조로 설득하려 든다거나 강요하거나 지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결말은 글을 마무리하는 부분이므로 매듭을 잘 지어야 한다. 결말에서 매듭을 제대로 짓지 못하고 허술하게 처리하게 되면 실패작으로 쳐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필의 결말에는 작자 나름대로의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수필이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인생 탐구의 문학이라면, 결말은 그 인생 탐구의 귀결점이라 할 수 있다. 평범 속에서의 비범함이 재기 넘치게 반짝이는 결말을 보여주는 글이라면 좋은 매듭이 될 것이다.
전쟁 미망인, 납치 미망인들의 윤리를 운위하는 이들의 그 표준하는 도의의 내용은 언제나 청교도의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채찍과 냉소를 예비하기 전에 그들의 굶주림, 그들의 쓰라림과 눈물을 먼저 계량할 저울대가 있어야 될 말이다. 신산(辛酸)과 고난을 무릅쓰고 올바른 길을 제대로 걸어가는 이들의 그 절조와 용기는 백번 고개 숙여 절할 만하다. 그렇다 하기로니 그 공식, 그 도의(道義) 하나만이 유일무이의 표준이 될 수는 없다.
어느 거리에서 친구의 부인 한 분을 만났다. 그 부군은 사변의 희생자로 납치된 채 상금 생사를 모른다. 거리에서 만난 그 부인 ? 만삭까지는 아니라도 남의 눈에 띌 정도로 배가 부른 ? 그이와 차 한 잔을 나누면서 선생님도 저를 경멸하시지요. 못된 년이라고…… 하고 고개를 숙이는 그 부인 앞에서 내가 한 이야기가 바로 이 바둑판의 예화(例話)이다.
과실(過失)은 예찬할 것이 아니요, 장려할 노릇도 못 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과실이 인생의 올 마이너스일 까닭도 없다.
과실로 해서 더 커지고 깊어 가는 인격이 있다. 과실로 해서 더 정화(淨化)되고 굳세어지는 사랑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느 과실에서 적용된다는 것은 아니다.
제 과실의 상처를 제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가야반(盤)의 탄력 ? 그 탄력만이 과실을 효용한다. 인생이 바둑판만도 못하다고 해서야 될 말인가?
김소운(金素雲)의 <특급품(特級品)> 중 끝부분
이 글은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갖게 하는, 즉 인생의 카운셀러가 되어 줄 수 있는 삶의 지혜와 교훈이 담긴 글이다.
과실은 장려할 것이 못되지만, 인생의 올 마이너스일 까닭도 없다고 하는 지론이 바로 그것이다.
2. 서두는 어떻게 시작 하는가?
서두는 글의 첫머리로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서두는 독자의 흥미를 갖게 하되 앞으로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암시하도록 써야 하며, 글의 내용과 목적도 논리적인 글인 경우에는 밝혀도 좋다.
바람직한 서두의 시작은
① 진솔한 자기 고백적인 기술로써 글 읽는 이의 관심을 끌어 낼 수 있으면 좋겠다.
② 대개 일반적인 글에서 많이 쓰는 방법인데 기상의 변화나 장소의 환기 등으로 사실을 직접 진수하여 글 읽는 이에게 다가가는 것도 바람직하다.
③ 의문형의 적절한 지시 내지는 열거로 글 읽는 이의 주의를 환기하는 방법도 있다.
④ 중국의 문장가 호적은 '전적을 이용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 있지만, 짧고 새로운 문구나 사항을 인용하여 참신한 느낌을 주게 할 수도 있다.
이에 반해 바람직하지 못한 서두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① 쓰려고 하는 글에 대한 장황한 배경 설명이나 불평은 옳은 글의 시작이라 할 수 없다.
② 글의 첫머리에 개인적인 변명을 중언부언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③ 새롭지 않은 진부한 내용이나 사상 등을 제시하는 것도 독자의 흥미를 반감시키는 서두이다
④ 사전적 정의를 인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⑤ 끝마무리가 예상되는 서두도 좋은 글의 시작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좋은 글이 되기 위한 서두의 시작은 자연스럽고 참신하며, 독자의 흥미를 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몬로의 5단계 구성법(motivated sequence)은 ①주의 환기 ②과제 제기 ③과제 해명 ④해명의 구체화 ⑤결언, 행동화의 촉구로 글의 서두는 주의 환기이다.
서두에서 꼭 한가지 충고하고 싶은 점이 있다. 본론과 밀접하지 않는 부분을 도입부에 넣어서 독자들을 지루하게 하지 말라는 점이다.
요즘 명사(名士)들의 '수필'중에 흔히 그런 것이 많다. 수필을 마치 어떤 '교훈'이나 '훈화'처럼, 또는 선외(選外) 논설처럼 여겨 이건 틀렸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글들이 많은데 그나마도 핵심은 간단한데 도입부가 너무 지루해서 더욱 안타깝다. 이런 글들이 저지르고 있는 도입부의 오류는 대략 이런 것들이 있다.
① 공개되지 않아도 될 사생활의 지나친 공개...... 남의 사생활에 독자들은 관심이 없다. 적어도 자기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위치가 아니면 지나친 사생활을 공개하지 말 일이다. 불량품을 근절하자는 내용을 쓰기 위해서는 가장 악질적인 불량품의 예를 드는 것으로 서두를 장식하면 된다. 그렇지 않고 뭐 딸(혹은 아들)과 언제 어느 시장에 가서 구경한 이야기부터 집안 식구들의 인물 묘사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문장 작법에서는 공사(公私)를 분명히 가려야 한다.
② 극히 상식적인 것을 혼자 아는 척하고 서두를 늘어놓지 말 것...... 남이 모르거나 느끼지 못한 사실로 첫 구절을 공격해야지 진부한 것으로는 안된다. 이것 역시 소위 네임 벨류가 있다는 분들의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류의 하나다. 글에서 서두는 일종의 기습이요, 게릴라며, 협공이여야 성공적인 것이지 선전 포고를 한 후에 동원령을 내리는 식의 문장은 실패다.
③ 가능하면 도입부를 짧게 할 것...... 서론을 짧게 하라는 이야기는 현대인의 상식이다.
다 바쁜 사람들이니 요점으로 바로 들어가야 한다. 알베레스는 현대 소설의 특징으로 바로 이 긴장감을 들었다. 즉, 모파상의 <귀환>과 말로의 <인간조건>을 그는 비교했다. 모파상은 주인공을 등장시키기 위하여 바다의 묘사부터 마을, 골목, 집으로 시선을 옮겨간다.
그러나 말로는 첫 구절에서 <첸은 모기장을 들춰 올릴까? 그냥 모기장 너머로 갈겨 버릴까?>로 시작한다.
어느 글이나 현대인에겐 긴장과 요절을 처음부터 줄 수 있어야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헌영의 <처음과 끝을 하나의 線으로 연결하는 작업>에서
위의 인용문처럼 수필의 시작은 중요하며 또한 결코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시작이다. 가옥의 대문처럼 수필 전체의 구조와 어울리는 시작이여야 한다.
3. 어떤 서두가 바람직할까?
① 색다른 의견 제시나 사람의 흥미를 끄는 서두
보통사람이 생각해 내지 못하는 의견이나 남다른 생각 또는 충격적인 어구 로 시작하는 방법인데 이는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신선감이 있다.
사람은 행복한 맛에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하는 맛에 산다. 추구 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극히 불행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또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다. 사람은 그래서 다 같이 살아 왔다.
윤오영의 수필 「生活의 情」의 첫머리다.
슬픔과 기쁨으로 얼룩진 무늬를 짜며 살아가는 인생살이의 감정을 고백한 글이다. 눈물과 웃음의 아롱진 무늬, 이것이 인생의 문제이며 바로 생활의 정이라고 작가가 말했듯이 서두에 서 이 글의 전체를 암시하고 있다.
② 유명한 말이나 속담, 격언, 일화, 명언 등을 인용하는 서두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인용한 어귀의 해설이나 설명에 그치고 말 위험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인용에 주의를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쇼펜하워는「위대한 사람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육체적으로 위대한 사람이요, 하 나는 정신적으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했다. 육체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앞에서 커 보이나 멀어질수록 작아 보이고 정신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멀어질수록 커 보이지만 내 앞에 오면 결점도 있고 실책도 있는 나와 같은 범인이다. 이것이 실로 위대한 사람이다.
魯迅의 수필의 첫머리다. 쇼펜하워의 말을 인용했으면서도 그 말의 원뜻과 는 상관없이 전부 노신의 말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인용의 묘체요 묘리다.
그런데 만약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쇼펜하워는 「위대한 사람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육체적으로 위대한 사람이요, 하나는 정신적으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 있다. 육체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지만 정신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자기를 숨긴다. 육체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정신은 썩었지만 위대한 사람은 육체는 졸렬해 보이지만 정신 속에는 무한한 만석이 가득 차 있다.
이렇게 장장 수십 장의 글을 썼다면 이는 이미 소펜하워의 말이요 글 쓴 작가의 말은 아니다. 이런 글을 쓰려면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고인의 말이나 고사로 지면을 채우는 일은 특히 삼가할 일이다.
③ 사실과 사건, 생각 등을 거두절미하고 쑥 끄집어내어 쓰는 서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때때로 일어난 사건 및 생각 따위는 사람의 주위를 끌기 쉬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 만일 사건이나 사실이 유머러스하거나 신기하면 서두의 효과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자식은 돈은 벌러 외지에 가서 백골로 돌아오고, 딸은 돈벌이로 호텔에서 웃으며 나온다. 죽은 자식은 잊으면 그만이다. 외국 손님 품에서 시달리는 딸년은 약간 애처롭지만 아침에 웃고 들어오는 얼굴은 역시 해사하다. 그러나 기쁜 것은 돈이다.
윤오영의 수필 「왜 울었던고」의 서두다. 현실을 떠나서 생활이 없고 생활을 떠나서 생활이 없고 생활을 떠나서 수필이 있을 수 없다고 볼 때 수필은 바로 생활문학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다가 보면 눈물이 없을 수 없고 왜 우느냐고 자신에게 묻는다면 그것은 자신도 모를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
④ 장소나 시간 분위기, 자연, 환경, 인물묘사 등으로 시작하는 서두
본문과 관련이 있는 재미있는 재료를 가지고 서두를 장식하는 것이다.
한동안 뜸하던 꾀꼬리소리를 듣고 장마에 밀린 빨래를 하던 날 아침에 참외장수가 왔다. 노인은 이고 온 광주리를 내려놓으면서 단 참외를 사달라고 한다. (法頂<神市>)
⑤ 가정적 설문, 문제점 제시, 호소적인 것, 대화나, 독백, 古典의 출전을 밝히는 것, 强調하고 싶은 것 등을 제시하는 서두 이것은 쓰기 쉬운 방법이나 참신하고 산뜻한 맛이 나지 않는 게 흠이다.
수필의 서두는 일정한 제약이 없다. 그러나 서두는 장황한 것보다는 간명하게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정서적인 문장이 훨씬 참신하고 신선하다. 무미건조한 서두는 우선 처음부터 독자를 잡치게 만든다. 한마디로 느낀 대로 솔직하게 쓰면 된다.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만들려면 글이 서두에서부터 시든다.
한편의 수필은 서두가 무리하지 않게 자연스럽고 순조로우면 가장 무난한 서두가 아닌가 하다.
4. 수필의 서두의 또 다른 학설
시작이 반이란 말이 있다. 수필처럼 원고지 15매 내외의 지면에 승부를 걸어야 할 때 시작의 비중은 그만큼 커진다. 첫인상이 일생을 좌우한다고도 한다. 수필처럼 주로 생활의 실감에서 소재를 선택해야 되고 평범 가운데 비범을 발견해야 하는 글일 때 서두는 개성이 있고 신선감이 있어야 한다.
수필의 서두를 어떻게 써야 한다는 원칙이나 제한은 있을 수 없다. 다만 서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주제와 소재가 정해지고 구성까지 다 끝내놓고도 일성을 터뜨리지 못해 붓이 정지해 있을 때 서두를 끌어내는 방안을 강구해 보자.
(1) 서두의 중요성
"첫 센텐스, 그것은 내 창작에 있어 거의 전부다." 인생파 작가 계용묵 씨의 말이다. 샴페인도 마개가 잘 뽑히면 술맛이 좋다. 선보일 때도 첫인상이 좋으면 거의 성공한다. 출발은 종말을 예언하기 때문일까, 시작은 모든 일의 반이기 때문일까? 우리나라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 또한 수필에도 해당되는 적절한 말이라고 여겨진다. 왜냐 하면 서두는 바로 독자를 이끄는 첫 관문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서두는 발단에 해당되어진다. 이 서두가 잘 풀리면 그 수필은 시종여일하게 잘 풀려나간다. 이는 실제 글을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체험하게 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기실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이 서두를 끄집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체험했음이 아닌가.
서두는 도입 단락에 해당한다. 도입단락은 전체 글의 첫머리에 놓이는 단락이다. 전체 글의 문을 여는 구실을 하므로 본격적으로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전개에 들어가기 전에 읽는 이의 관심을 끌거나 전체 글에 대한 예비적인 서술을 하게 된다. 이런 예비적, 입문적 구실을 하는 것이 도입 단락이다. 글에 따라서는 도입 단락이 없이 바로 일반 단락으로 시작되기도 한다. 그런 글에서라도 대개 한두 문장 정도 글의 문을 여는 구실을 하는 문장이 있기 마련이다.
서두 즉 도입 단락의 기능은 두 가지 정도이다. 하나는 글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체 글의 내용을 개관하는 것이다. 전자는 주로 수필에서 많이 쓰는 것으로 글의 내용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읽는 이의 궁금증을 자극하여 글을 읽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후자는 설명적 에세이에서 전체 글의 내용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구실이다. 전체 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포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읽는 이들이 원하는 내용인가를 쉽게 파악하도록 돕는 기능을 수행한다.
윤오영은 이 서두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글은 '시작이 중요하다. 첫머리 한 마디가 전편을 밀고 나가기 때문이다'고 전제하고 '서두에 설명이나 서론을 늘어놓지 말 일이다. 그것은 극히 문장의 정서를 죽이고 청신한 기분'을 해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될 수 있는 대로 긴 허두를 붙이지 말고 간명하게 시작하되 전편에 대한 암시적인 기틀이 되도록 유의하고 이론적인 말을 피해야 한다. 한 마디로 해서 느낀 대로, 직접 써 나가면 된다. 이러저리 만들어 보려는 데서 잡치는 것이다.
결국 서두는 느낀 대로 암시적인 기틀이 되도록 함이 무리 없는 시작이 됨을 제시한다. 그럼에 서두는 수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함도 그 소이가 여기에 있게 된다. 어떤 글이든 서두가 있고, 독자는 서두에서부터 읽어 들어간다. 서두는 독자를 끌어들이는 첫 번째 관문이다. 신문 칼럼을 읽는 사람 중에는, 서두와 중간과 끝 부분만 읽는다는 사람도 있다. 전문을 이해하는 데에 서두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두는 작품을 좌우한다는 말일 수도 있다.
소재를 만난 사람의 머릿속에는 쓰고자 하는 말이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써야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아무 데서나 시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서두가 독자를 끌어들이게 할 것인가에, 서두의 중요성이 있다. 이 중요성을 땅을 비집고 솟는 싹의 떡잎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한 속담을 인용한 말이다. 나그네의 갈림길 같다고도 했다. 말하자면 갈림길에 들여놓은 발길의 향방에 인생길이 달라지듯, 수필의 서두도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2) 서두의 요령
서두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는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다. 취향과 개성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 하나의 나무를 보고 쓴다고 하자. 이때의 서두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나무를 보게 된 동기에서 시작할 수 있고, 나무가 서 있는 입지적 조건이나 나무의 모양, 또는 주위 환경 상황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서두는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의 한 부분이다. 동기부터 쓸 수도 있고 결론부터 말할 수도 있다. 대상을 순서적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중심부분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수필은 서두의 제시 방법에 따라 작품의 성공이 좌우된다. 제시 방법이란 표현 방법을 뜻한다. 말하자면 신선미가 없이 진부한 설명적 표현이거나, 걸러지지 않은 감정의 노출이거나, 독자에게 강박감을 주거나 하는 따위이다. 서두는 차분한 말로 정적 분위기를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문체나 형식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경수필의 경우는, 서두의 목소리가 높아서는 아니된다. 요구하거나 교훈적이거나 설교적이어서도 성공적인 것이 못 된다.
서두의 표현에는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첫째 불분명한 인상을 주지 않는 일이다. 이를 테면 첫 구절 시작이 지시대명사 '그'니 '어느'로 시작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대명사의 시작은 막연한 상황을 말하는 격이므로, 사실 개념과 떨어져 실감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독자를 끌어들이기에 효과적이 아니다. 다음은 1인칭 대명사 '나'로 시작하는 경우이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서두에 붙는 '나'는 군더더기일 경우가 있다. 수필은 문장 주체가 이미 '나'이다. 그러므로 '나'가 붙는 것은 서두에서나 내용에서나 군더더기일 때가 많다. 다만 예외인 경우는 작자 자신을 강조해야 할 때다.
'그' 라던가 '어느' 따위로 시작되는 것은 수필의 본질에서도 벗어난다. 작자가 주체가 되지 않는 형식 이를 테면 논설체 같은 경우가 아니면, 수필에도 육하원칙 같은 것이 요구된다. 작자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어떤 생각을 했는가 따위다.
막연히 지시대명사 '그'로 시작하는 것은 처음부터 원칙에서 벗어난다.
개성적 매력의 들머리에 표현기교를 모으는 게 예술문이라면, 내용전달에 초점을 두는 일반 문장에선 본론으로의 효과적 유도가 더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서두에서 흥미와 주의를 일으켜 놓고 중간에서, 그 흥미와 주의를 지속적으로 유지케 하고 마무리에서, 운치롭고 인상적으로 마치게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수필문에 붙여지는 주의사항이다.
해외 문학파의 한 사람이고 만연체 문장의 수필가인 김진섭 씨는 "문장은 발단의 예술이다"고 했고, 희곡 <<벗꽃동산>>으로 유명한, 러시아 비판적 리얼리즘 최후의 작가 체홉은 "대부분의 작가가 작품에서 실패하는 것은 처음과 끝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① 그 글에서의 서두는 그 한 문장뿐이다.
그 한 문장을 찾을 일이다.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의 주장이 수필의 서두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명수필의 작가에게서 듣는 '서두 한 줄을 찾는 데 피나는 산고의 아픔을 겪었다'는 고백을 자주 듣는다. 한흑구는 <나무>라는 수필을 쓰는 데 5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며,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는 서두글을 찾았다고 한다. 역설적이지만, 플로베르의 말대로 거기에 꼭 알맞은 한 마디를 그는 5년 만에 찾았던 것이다.
② 중심사상을 보다 구체화한다.
중심사상이란 그 글의 주제의식으로서 몸에 배태한 생명체와도 같은 것이다. 몸에처럼에서의 "사랑은 하나다."라든가, 피천득의 수필 <순례>에서의 "문학은 금싸라기를 고르듯이 선택된 생활경험의 표현이다."라는 문장들은 모두 중심사상의 핵을 앞세운 예의 서두다.
밴 생명도 열 달이 차야 산기를 느끼는 것처럼, 그 산기와도 같은 글의 서두도 의식의 구체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짐으로써만 가능하다. 안병욱의 수필 <인생은 예술>
③ 비유, 암시적인 문장이 효과적이다.
수필은 대우적인 문학이면서도 직접성을 피하여 완곡하게 우회하는 은근성을 체질로 한다. 이것은 보다 효과적으로 독자의 이해와 공감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단순구성의 수필에서는 대개 완만하거나 겸손한 문장으로 출발하여 말미에 가서 그 주제의 핵을 일반화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시간적 순서를 밟지 않고 전개하는 병렬식 구성의 수필에서는 글의 서두에 예민한 신경을 쓰게 된다. 즉 직유나 은유의 문장으로 거의가 서두부에 주제의 핵을 상상처리하는 두괄식의 문장이 오게 된다.
(4) 난해하거나 추상적인 문장은 피하는 게 좋다.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일부러 어려운 외래어나 시문의 구절들, 또는 전문적인 용어들을 앞세우는 경우가 있다. 피할 일이다. 호기심이나 기대감의 유발보다는 오히려 이질감이나 혐오감을 불러일으켜 독자를 밀어내는 결과가 된다. 추상적인 문장일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념이나 관념이 글머리에 설 때, 대개는 친화감을 잃게 되어 호소력과 설득력을 잃게 된다. 때문에 수필의 서두는 '첫인상'으로서의 '선명성'을 잃지 말아야 하고, '예보적 기능'으로서의 '암시성'을 생명으로 해야 한다.
(5) 제목에 대해 배려한다.
서두는 제목과 더불어 한 눈에 들어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러므로 일단 제목에 매력을 느낀 독자가 한층 더 흥미를 느끼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다. 만약 한여름의 절전을 위하여 대통령이 남방셔츠 차림으로 집무하는 모습을 텔레비젼을 통해서 보고, 권위 의식에 사로잡혀 경직된 우리 사회 지도층을 꼬집는 글을 쓰고자 할 때, 그 글의 제목을 <대통령의 넥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수필의 첫 문장을 '대통령이 넥타이를 풀었다'라고 시작하면, 첫 문장이 제목을 반복하는 꼴이 되어 긴장감이 떨어진다. 따라서 서두 첫 문장을 적을 때는 항상 제목을 배려해서 표현하는 게 좋다.
(6) 결미와 조응되게 해야 한다.
서두는 글 전체를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 글의 분위기나 주제의 무게, 소재의 성격에 따라 자연스럽게 어울려야 한다. 그러므로 주제에 접근하는데 어떤 암시적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다. 결미와 자연스러운 조응은 주제가 강조되고 감흥을 더해 줄 것이므로 본문을 거쳐 결미에 닿는 흐름에서 동떨어지지 않는지를 살펴야 한다.
(7) 교조적인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독자는 자존심이 강하고 싫증을 잘 낸다. 진부한 설명이나 교훈으로 독자를 가르치려는 의도를 보이거나 저속한 표현이나 꼭 필요하지 않은 외래어 사용도 거부감을 준다. 독자를 가르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고사나 명구의 인용은 참신하지 못하고 개성적이기 어려운 반면 내용이 반전되면 절정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유머와 위트로 파격을 주는 효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3) 서두의 유형
처음과 끝은, 문장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알파요, 오메가인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글을 잘 쓰는 데에는 여러 가지 주의할 점이 많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첫머리를 잘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첫인상이 중요한 것과 똑같은 이치다. 서두의 기법은 학자에 따라 각양 각색이다. 필자는 대원리 2가지와 소원리 20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오직 중요한 것은, 읽힐 문장의 서두는 재미, 새로움, 감명 중 그 한 가지는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재미'는 호기심의 사촌이다. 담 너머 사과가 가장 달다고 했다. 재미가 있을 문장인가 아닌가를 첫 석 줄에서 판단하려고 한다. 남의 집 불 구경 않는 군자가 없다는 것은, 도덕보다는 흥미에 더 많이 지배당한다는 인간 속성을 꿰찌른 말이다. '재미' 그것은 가장 확실한 유도책이다. '새로움'도 '감명'도 '재미'의 별명에 불과하다. 첫머리를 시작하는 요령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첫 문장을 여는 대원리 2가지와 서두 단락을 여는 소원리 20 가지 기법을 소개한다.
다음은 내용과 기능으로 본 서두 기법의 대원리 두 가지다. 글의 첫마디는 매우 중요하다. 처음의 한 줄이 글 전체의 인상을 좌우한다. 서두의 몇 마디에 글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내용을 강조한 경우
글은 그 논지가 명백할수록 좋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글의 맨 앞에 제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처음부터 맹백한 생각을 갖도록 하는데 효과적이다.
① 주제의 제시
'말이 무성하다'
'자유, 자유 안에서, 자유를 위하여'
먼저 주제를 제시하면 글의 긴장감을 더하게 된다.
② 소재의 제시
서두에 소재를 제시하여 사건이나 경험을 중심으로 글이 전개될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나는 얄궂은 호박 한 개를 가지고 있다.'
'땡감 두 접을 샀다.'
③ 상황의 제시
'흰색과 노란색의 액체가 아주 천천히 방울지며 떨어지고 있다.
'오색 풍선을 매단 자가용이 푸른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상황을 제시하는 것은 독자에게 현장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④ 감상의 제시
글 전체의 분위기를 암시하기 위하여 감상을 제시하기도 한다.
'겨드랑이에서 스멀스멀 날개가 돋아나서 날아갈 것 같다'.
(2) 기능을 강조한 경우
① 간명함이 주는 편안
'전설은 아름답다.'
'구례와 하동을 잇는 길은 진솔같이 깨끗했다.'
② 참신함이 주는 매력
'가슴이라는 공책이 있다'
③ 호기심이 주는 충동
'욕탕은 알맞게 김이 서리고 따뜻했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5. 서두 쓰기의 예
어떤 글이든 서두가 있고 독자는 서두에서부터 읽어 들어간다.
서두는 독자를 끌어들이는 첫 번 째 관문이다.
신문 칼럼을 읽는 사람 중에는 서두와 중간과 끝 부분만 읽는다는 사람도 있다. 전문(全文)을 이해하는 데에 서두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두는 작품을 좌우한다는 말일 수도 있다.
소재를 만난 사람의 머리 속에는 쓰고자 하는 말이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써야할까 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아무데서나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서두가 독자를 끌어들이게 할 것인가에 서두의 중요성이 있다.
이 중요성을 "땅을 비집고 솟는 싹의 떡잎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한 속담을 인용한 말이다. 나그네의 갈림길 같다고도 했다. 말하자면 갈림길에 들여놓은 발길의 방향에 인생길이 달라지듯, 수필의 서두도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서두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는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다.
취향과 개성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 하나의 나무를 보고 쓴다고 하자. 이 때의 서두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나무를 보게 된 동기에서 시작할 수 있고, 나무가 서 있는 입지적 조건이나 나무의 모양, 또는 주위 환경 상황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서두는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의 한 부분이다. 동기부터 쓸 수도 있고 결론부터 말할 수도 있다. 대상을 순서대로 시작할 수도 있고 중심부분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수필은 서두의 제시 방법에 따라 작품의 성공이 좌우된다. 제시 방법이란 표현 방법을 뜻한다.
말하자면 신선미가 없이 진부한 설명적 표현이거나, 걸러지지 않은 감정의 표출이거나, 독자에게 강박감을 주거나 하는 따위다.
서두는 차분한 말로 정적 분위기를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문체나 형식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부드러운 수필의 경우는 서두의 목소리가 높아서는 안 된다. 요구하거나 교훈적이거나 설교적이어서도 성공적인 것이 못 된다.
서두의 표현에는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첫째 불분명한 인상을 주지 않는 일이다.
이를테면 첫 구절 시작이 지시 대명사인 '그'니 '어느'로 시작되는 경우다. 이와 같은 대명사의 시작은 막연한 상황을 말하는 식이므로 사실 개념과 떨어져 실감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독자를 끌어들이기에 효과적이 아니다.
다음은 1인칭 대명사인 '나'로 시작하는 경우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서두에 붙는 '나'는 군더더기일 경우가 있다. 수필은 문장 주체가 이미 '나'이다. 그러므로 '나'가 붙는 것은 서두에서 내용에서나 군더더기일 때가 많다. 다만 예외인 경우는 작자 자신을 강조해야 할 때다.
'그'라든가 '어느' 따위로 시작되는 것은 수필의 본질에서도 벗어난다. 작자가 주체가 되지 않는 형식, 이를테면 논설체 같은 경우가 아니면, 수필에도 육하원칙 같은 것이 요구된다. 작자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어떤 생각을 했는가 따위다. 막연히 지시 대명사인 '그'로 시작하는 것은 처음부터 원칙에서 벗어난다.
예문을 보자.
[예문 1] 화해의 그때
그녀와 헤어진 후 우울한 기분은 떠나질 않는다. 커텐을 한 쪽으로 밀어붙이고 창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그래도 시원함은커녕 끈끈하고 습기 찬 공기가 가슴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검은 구름이 바로 머리 위에서 몰려다니는 것을 보니 곧 비가 내릴 것 같다. 비가 와야 가뭄이 풀릴 터이지만 믿을 수는 없다. 사흘째 연이어 구름만 떠돈다. 나의 마음이 우울한 것은 날씨 탓만은 아니다.
[예문 2] 수화기를 놓으면서
나의 용돈으로 서점에 가서 처음 산 책이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이다.
그때 친구들 간에는 '빙점'이 인기 있는 책이었다. 베스트셀러였다.
[예문 3] 그 남자의 손
신호등이 바뀌었다. 길을 건너기 위해 차도로 내려섰다. 옆에 있던 남자가 팔을 둘러 손으로 내 등을 밀며 걷는다. 나는 갑자기 하던 말을 중단했다. 등허리에 가득 덮힌 듯한 남자의 손에 온통 신경이 쏠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대낮 서울 거리에서 나와 함께 팔을 겯고 걸어도 상관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예문 4] 손 들고 세운 차
나는 공짜로 남의 차를 얻어 탈 때가 있다. 함께 어울리다 같은 방향인 때는 편승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탈 때도 있다.
모르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으나 나와 빈 가슴을 얼마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 숭배주의자이다. 시골을 즐겨, 찾아 나설 구실을 만든다. 몇 해 전에는 완행열차에 실려 기차여행을 했지만, 근래에는 완행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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