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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는 '토머슨'이라는 유령이 산다
빗방울에 벚꽃이 평소보다 진한 핑크빛을 띠던 지난봄의 어느 날, 나는 도쿄에 있었다. 전위예술가이자 ‘초예술 토머슨’(‘Thomason’을 음차한 일본어 표기로는 ‘토마손’이지만, 원어표기법에 맞게 ‘토머슨’으로 쓴다)이라는 개념을 만든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사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전시 제목은 <아카세가와 겐페이 사진전-일상에 흩어진 예술의 미립자>. 불과 열흘 전, 그의 책 <초예술 토머슨>의 번역 원고를 마감한 참이라 우연히 찾은 전시회에 ‘성덕’이라도 된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사진전에서는 현대예술가 6명이 아카세가와가 1985년부터 2005년까지 찍은 4만여 장의 사진 가운데 미공개됐던 120점을 골라 소개했다. 정작 아카세가와 본인은 2014년에 타계했으니 전시회장에 와 있을 리는 만무했지만, 벽에 걸린 작품들은 왠지 관람객에게 뭐라고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한결같이 일상 속 우연의 순간을 포착한 사진들은 어딘가 익살스러우면서도 섬뜩했고, 감상하는 이를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 허를 찔렀다. 나는 그 사진들을 바라보며, 전시 제목처럼 일상 곳곳에 뿌려진 예술의 미립자가 아카세가와의 필터를 거쳐 ‘초예술’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초예술 토머슨, 이름만으로는 그 정체를 가늠하기 힘들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초예술은 말 그대로 ‘예술을 초월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으나, 그 뒤에 붙은 ‘토머슨’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아카세가와가 훗날 ‘순수 계단’이라고 불릴, 오로지 오르내리기만 할 수 있는 계단을 도쿄 요쓰야 인근에서 발견하며 시작되었다.
계단의 본래 기능은 어딘가에 다다르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계단 끝에 목적지가 없다면? 그가 마주한 이 ‘순수 계단’은 순수하게 오르내리기만 할 수 있는 무용(無用)의 상태로 철거는커녕 망가진 곳이 아름답게 보수된 채 한 료칸 건물에 조용히 붙어 있었다.
순수 계단을 발견한 아카세가와가 처음부터 초예술을 떠올린 것은 아니다. 무언가 이상하기는 한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러다 에코다의 ‘무용 창구’, 오차노미즈의 ‘무용 문’을 차례로 발견하며 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사고에 이르렀다. 그리고 의식 세계의 지하 3층에서 꿈틀대던 ‘초예술’이라는 개념이 지상으로 서서히 부상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초예술은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이분화된 세상의 틈에서, 마땅히 철거돼야 하는데도 부동산에 부착돼 아름답게 보존되고 만 무용의 장물을 말한다. 중요한 점은, 어떤 의도도 없이 그저 아름답게 보존돼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발견한 이의 가슴 떨림과 감동이 수반되면, 결국 그 어떤 설명을 덧붙이기도 어려울 만큼 예술의 경지를 뛰어넘은 장물이 되어 ‘초예술’이라는 영예(?)를 거머쥐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이처럼 초예술은 ‘예술을 뛰어넘기만 하면’ 그게 무엇이든 다 해당할까? 아카세가와도 이 부분을 염려했다. 그래서 유용과 무용의 틈새에 있는 물건에 초점을 맞춘 이름을 찾았고, 그게 바로 ‘토머슨’이었다. 토머슨은 누구인가. 1980년대 일본의 프로야구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는 높은 연봉을 주고 정성스럽게 모셔온 외국인 용병 선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재적하는 동안 자신의 방망이에 제대로 공도 맞히지 못하고 헛스윙만 날리다가 제값을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의 대명사가 됐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게리 토머슨이다. 굳이 돈을 들여가면서 정성스럽게 보존한 사물의 모습이 게리 ‘토머슨’의 모습과 겹쳤고, 예술마저 뒤로하고 실용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은 초예술의 이미지와 중첩됐다. 이렇게 ‘초예술 토머슨’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이후 아카세가와는 자신이 강사로 있던 학교 학생들과 함께 ‘초예술탐사본부 토머슨관측센터’를 결성했다.
책 <초예술 토머슨>은 일본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 토머슨으로 의심되는 물건을 발견한 ‘토머스니언’들이 상세히 고찰해 보내온 보고서와, 아카세가와가 세부 내용을 배배 꼬는 듯 독특한 시선과 사고로 이를 분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이 출간된 1980년대 일본은 곳곳에서 도시 재개발이 진행됐다. 오래되고 익숙한 동네가 물밀듯 밀려오는 빌딩에 잠겨 새로운 동네로 변하는 중이었다. 그전까지 당연하게 존재했던 유용한 것들은 무용해졌고, 새로운 유용한 것들이 등장했다. 초예술 토머슨은 그 틈새에 존재했다. 본래 보호해야 할 물건을 잃어버린 ‘무용 차양’으로, 시멘트로 말끔하게 발린 벽에 튀어나온 ‘무용 문손잡이’로, 건물 벽면에 붙어 있는 용도 불명의 사각형 돌출물 ‘카스텔라’로 말이다.
2023년,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도시는 어떨까? 당시와 마찬가지로, 아니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도시는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있다. 시대는 달라도 그 양상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마치 무한 루프처럼, 정겨웠던 풍경이 낯선 풍경으로 그리고 다시 익숙한 풍경으로 변하는 사이 이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흑색사진 속 초예술 토머슨은 먼 과거의 농담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도 내가 사는 곳 어딘가에 숨어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일상을 꾸려가는 도시에서, 매일 산책하는 길에서, 재개발을 위해 사람이 떠난 동네에서 발견될 수 있는 존재. 물론 전제 조건이 있다. ‘어? 뭔가 이상한데?’라는 직감을 무시하지 않아야 찾을 수 있다.
무려 500쪽에 달하는 <초예술 토머슨>을 번역하며 나는 자주 시간을 잊었다. 번역을 하다 고개를 들면 눈앞의 세상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니라, 앞으로 맞이할 미래처럼 느껴져 지금이 1980년대인지 2023년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그러나 작업하는 내내 자주 그리웠고 오싹해졌으며 결국에는 헛헛해졌다. 한 끗 차이로 쓰레기로 치부될 수 있는 토머슨 의심 물건을 세상 진지하게 분석하는 아카세가와의 시선을 따라가며 키득키득 웃었고, 그림자로 남고 길거리에 누워 있고 거리에 우뚝 솟아 있는 토머슨 물건들에 소름이 돋았으며, 결국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고 마는 그들의 운명에 덧없음을 느꼈다.
<초예술 토머슨>의 책등에는 ①이라는 숫자가 ‘초예술’과 ‘토머슨’ 사이에 자리한다. 마치 유용과 무용의 틈새에 존재하는 토머슨처럼 말이다. 책마저도 토머슨답다. 초예술 토머슨은 무용의 장물이라는 존재에 그치지 않고 길거리의 온갖 사물에 그 시선을 뻗치더니, 결국 ‘노상관찰학’이라는 학문으로 발전했다. 여기에 대한 책은 책등에 ②를 달고 세상에 나올 예정이다. 그저 재미로 시작한 일이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사상이 되어, 학문이 된 것이다.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던 철거되는 건물 파편에, 강에 부유하는 물건들에, 맨홀 뚜껑에, 만화 속 벌판에, 심지어 개똥에까지 시선을 주면서.
아카세가와와 세상의 토머스니언들이 발견한 무용한 장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지금도 끊임없이 뒤틀리며 새로워지는 도시 어딘가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토머슨이 존재할 것 같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든다. 그러면서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거리로 나가 호기심의 눈알을 굴리며 배회하고 싶어진다. 토머슨을 찾으며 지금 내가 사는 동네, 그리고 도시를 자꾸만 눈에 담고 싶어진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변화의 물결로 발견하지 못한 무용한 장물이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그렇다. 이 책은 도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전격 도시 배회 장려 도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마음이 든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 ‘안그라픽스’는 책 표지에 그들이 직접 발견한 초예술 토머슨을 보고한 것도 모자라, 급기야 ‘한국노상관찰회’를 결성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아카세가와가 온갖 협박(?)과 회유로 보고서 제출을 독려했듯 한국의 초예술 토머슨을 발견할 것을 압박(?)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하다 싶은 직감을 외면하지 말고, 결국 초예술 토머슨이란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 없는 물건들을 찾아 거리로 나가보자. 그리고 한국노상관찰회에 보고하자. 우리도 모르는 사이 도시의 유령이 되었다가 사라질 운명에 처한 초예술 토머슨을 구해줄 방법이 될 것이다. 비록 온갖 비유를 들며 토머슨 여부를 판정해줄 아카세가와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길라잡이가 되어줄 그의 책은 토머슨처럼 우리 옆에 머물러 있다.
서하나는 일본어 번역가이자 출판편집자다. <초예술 토머슨><저공비행><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 <이상하게 그리운 기분>(공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