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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크고 빼어난 이 땅의 많은 산들 중에서 누구라도 한번쯤은 가봤을 '남해 금산'으로 1월 산행을 다녀왔다. 아시다시피 보리암, 해수관음보살, 이성계의 수도처, 비단 금(錦)을 하사한 이름의 유래 등이 두서없이 튀어나오는 곳이다. 물론 내 고향집 가는 꼬부랑길도 그 섬에 있다.
고향이 그곳이라는 것이 이렇게 불편할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마치 신경회로가 딸린 족쇄를 차고 첫 테이프를 끊은 느낌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글을 쓰기조차 두려웠다. 2월의 산행을 다녀오고 3월 산행지를 물색하는 동안에야 밀쳐 두었던 1월의 금산을 불러본다. 그것도 스스로는 뚜렷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왠지 시와 문학의 이야기가 될 것만 같은 그날의 후일담을 우선 이 시로 대신해본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정호승,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리는 사이, 봄비 두어 번 다녀갔다. 비밀처럼 굳게 채워졌던 땅이 몽글몽글 풀어지자 꽃씨를 잉태한 사실이 여기저기서 폭로되었다. 날은 삽시간에 봄으로 열리고 묻어두려 했던 힘겨운 이야기들이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되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절대군림자였던 지난 겨울이 하루아침에 곤두박질 치며 제 허허로운 민낯을 보이고 있다. 지금껏 본 적 없던 역성혁명이자 여성혁명이다.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낯선 지표, 날선 용기들이 당연하게 지탱해오던 이 사회 금기의 벽을 무너뜨렸다. 책상에서 공부하던 이데올로기도, 현장에서 쌓아왔던 위계의 수순도 철저하게 무시해버린다. 겨울 공화국에서 봄의 시민사회로 혁명의 바톤이 넘겨진 것이다.
이것이 봄인지 폭동인지 미처 헤아리지 못하겠다. 그저 꽃씨 품은 흙들이 일으키는 봄의 대란 같기도 하고 처음 보는 사생결단 신종 바이러스 같기도 하다. 살아본 어른일수록 이 봄에 더 적응하지 못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법조계에서 문화예술계로 정치권으로 또 어딘가로(어디든) 날아오를 민들레 홀씨들. 제도권이 키운 포탄을 장착하고 과녁을 정조준하였다. 생각보다 강인한 민들레, 노래처럼 퍼져나간다. 이것은 봄의 민란이다. 변명과 사죄의 분열된 몸짓으로 그들의 시대를 떠나보내는 그녀들의 선전포고다. 어디로 갈지 어디까지 갈지 이 봄의 징조만으론 알 수 없다. 그저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만 저 미풍 속에 날아오는 꽃씨 보듯, 짐작만 할 뿐이다.
누구나 다 아는 곳을 갈 때는 다른 방향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금산탐방지원센터가 아닌 양아리 두모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주차장 입구의 서복 동상이 암시하듯 진시황과 관련있는 부소암 코스는 개방한 지 몇 년 안 된 금산의 또다른 명소이다.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이곳까지 유배되었다는 설도 있고 단군의 셋째 아들 부소가 일찌감치 천일기도를 했다고도 한다. 측량할 길 없는 이야기 속에 불로불사의 청정해역 이미지와 함께 전국3대 기도처라는 명성도 보인다.
부소암
힘센 아귀로 머리통을 꽉 잡은 듯 구멍구멍 패인 흔적이 인상적인 부소암. 그 형상이 뇌를 닮았다 하는데, 불시착한 소혹성 같기도 하다. 우주 어딘가를 떠돌다 보면 꼭 이렇게 생긴 행성 하나쯤은 만날 것 같은 예감, 다들 있지 않을까. 꿈까지 확장하기 좋은, 어쩌면 이 놀라운 흐름이 삶의 가치를 바꿀 적당한 기회일지도...
부소암은 서로가 부소암이다. 부소암(바위巖) 아래에 살포시 깃든 부소암(암자庵)이 갑작스런 방문객들에 화들짝 놀란 인상이다. 누군가 향불보다 그윽한 커피향을 피워 올린다. 가정집 같은 생김인데 놓여지는 장소에 따라 암자가 되는 인상이다. 불문에 귀의하려는 행자 한 분이 커피 보시를 해준 것으로도 모자라 바위에 깃든 저마다의 표정을 법문처럼 읊어준다.
바위 부소 얼굴에 거북이 앉았다는 건 누구라도 알 법한데, 거북이 얹힌 곳이 코끼리 머리 위라는 건 그려줘야 보인다. 안타깝게도 절반쯤이 암자 지붕에 가려졌지만 코를 비비는 코끼리 눈만은 또렷이 알겠다.
가리키는 손끝에 무엇이 어른거릴까. 3월 같았던 1월의 아지랑이 속 부끄러운 봄의 살갗이 닿았을까.
사실 부소암에 들어서면 암자보다 먼저 달려오는 것이 맞은 편 바위 군락이다. 어디서나 절집 풍경은 전체를 조망해야 그 온전함을 알 수 있다. 저 암릉구간이야말로 부소암을 조망하기 가장 탁월한 장소일 법하다.
노도와 두모마을이 조만간 닿을 듯이 가깝다. 언제였던가, 모처럼 친정을 두고 파도소리 들으며 잠들자고 하여 두모마을 바닷가에 텐트를 쳤다. 텐트도 어렵게 쳤는데, 저녁이 되자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파도 소리 끝내주고 낭만은 죽일 듯이 넘쳤는데, 비까지 와주시니 무어라 할지... 그러나 그 비는 예사 비가 아니었다. 그해 여름 기록적인 폭우로 시작한 태풍 '루사'. 태풍인 줄 모르고 흔한 소나기로 생각하다가 제법 오는군, 하는데 더욱 가관이었던 건 내가 그만 거짓말처럼 졸음이 쏟아졌다는 거다.
빗방울은 텐트 위로 또록또록 떨어지는데, 눈은 자꾸만 감기고... 사실 무슨 잠이 그렇게 퍼부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생소할 정도다. 파도소리와 자장가 소원을 이룬 기념이었다고 하면 되지만.... 그 시간 옆에서 단 1초도 못 자고 텐트를 뚫고 들어오는 비바람을 몸으로 막았던 사내. 급기야 날이 밝기도 전에, 만화처럼 날아갈 것을 우려한 듯, 진짜 예사로운 일이 아님을 그때서야 직감한 듯 나도 서둘러 텐트를 걷었다. 날려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 강렬한 바람과 비를 리얼로 경험한 일, 조금은 황당하고 어찌 그런 일이 싶지만, 이제는 두모 하면 떠오르는 '웃픈' 이야기가 되었다.
뒤를 돌아나오면 육중한 바위에 가려져 암자는 사라지고, 바위의 부담스런 얼굴만 자꾸 부풀어오른다. 독특한 생김만으로도 한 몫 단단히 할 저 얼굴, 투구처럼 단단하고 무사처럼 강인하다.
상사암
상사암에 올랐건만, 상사암 전신을 다룬 사진이 없어 내 자신의 기록물을 뒤져 마침내 찾았다. 몇 해 전 잎이 무성하던 여름날, 보리암에서 찍은 상사암이 용케 거기 있었다. 벼랑 위 상사의 터엔 옛 사람들이 남긴 전설 한 토막과 후세 어느 시인이 남긴 절창이 숨쉰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 '남해금산' 전문
시인의 깊은 뜻은 알 길이 없으나, 아마도 남해 금산 상사암 전설이 모티브가 되어 좀 더 극적인 이별노래로 형상화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 '바위'란 것이 이별 후 단단해진 혼자, 라면 이 바위군락들은 인간의 아픔이 낳은 저마다의 이별가일 것이다. 읽을수록 드라마틱한 시다. 그런가 하면 남해가 낳은 문인으로 고두현 시인이 있다. 일찍이 다양한 서평으로 많은 저서를 쓴 문학전문기자로 정평이 나 있지만, 나로선 고향에서 온 소포처럼 시나 산문을 쓸 때가 특히 좋았다.
깊고 푸른 바다 속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 몰래 건네 주고
막 돌아오는 길인가 봐
얼굴 저렇게
단감 빛인 걸 보면.
-고두현, 「바래길 첫사랑」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중략)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고두현, 「늦게 온 소포」
가난하고 강인한 고향의 어머니를 빛깔과 향기로 빚어낸 작가의 서정이 돋보이는 시다. 누구나 고향을 가졌지만, 풍경과 사람이 일치되는 느낌을 받을 땐, 아름다운 고향을 둔 기쁨을 커다랗게 밝히고 싶어진다. 내 고향 보물섬.
특정한 모양도 의도도 없단 듯 기기묘묘하게 뒹구는 돌들. 부소암 못다 본 코끼리 코를 여기다 떼어놓은 듯하다.
망대
금산의 제1경이자 가장 높은 봉우리(705m) 이름이 망대이다. 이곳에서 아름다운 금산의 38경과 남해바다의 조화로움을 가장 잘 볼 수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 최남단 봉수대로 사용되었으며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라고 하니 돌틈을 비집은 그림자마저 고아함이 느껴진다.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이자 기도도량으로 알려진 보리암 해수관음상
언제나처럼 인파로 붐비는데.... 사진 찍을 땐 몰랐고 지금 보니 아는 사람이 보인다. 여기서 보니 반갑다.
이런 분은 좀 더 고요할 때 따로 만나고 싶다. 이왕이면 환상적인 일출과 함께.....
금산 보리암은 원래 이름이 보광산 보광사였다. 우리나라 사찰이 대개 그렇듯 원효대사나 의상대사가 주인공인데 이 절 역시 원효대사가 세웠다. 이제는 아버지 생신날짜보다 더 알려진 이성계의 백일기도처로, 조선을 개국한 후 비단을 두른 錦山이 되었으며 절은 보리암이 되었다.
애초 남해 금산으로 산행지를 택한 것이 한해의 소망을 담아 기도하고 비단 같은 복록을 받자는 의미였는데, 알아서들 잘 빌었으리라 짐작한다.
쌍홍문(쌍무지개)
쌍홍문의 바위 하나가 굴러 세존도를 만들었다는 멋진 전설의 문이다. 푸른 초목이 없어서인지 조금은 괴기스런 인상도 풍긴다. 가운데 기둥이 우뚝 선 메부리코 닮아서인지 문이라기보다 움푹 패인 눈.... 그렇게 말하니 괜히 무섭다. 상상을 접어겠다. 그런 의미에서 까마득한 전설 같은 실화의 섬 세존도를 급조해보았다.
세존도(世尊島)/참고사진
석가 세존이 머물렀다는 전설의 섬 세존도. 남해군의 최남단 섬으로 상주에서 직선거리로 25.68㎞에 위치한 바위섬이다. 그야말로 푸른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석가모니 섬이다. 석가세존이 금산에서 득도한 후 돌로 배를 만들어 타고 바위섬을 뚫고 지나갔는데 그때 지나간 흔적이 금산의 쌍홍문과 세존도에 난 두 개의 동굴이라 전해진다. 공상과학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통쾌한 스릴이 있다. 섬 꼭대기에는 스님을 닮은 스님바위가 있다 하고 동굴 천장에는 '미륵'이라는 글씨도 있다 한다. 미조에서 배를 타고 1시간 정도를 달린다고 하는데..... 꼭 가보고 싶은 미지 같은 섬이다. 가보지 못한 나를 대신해 어르신 시인 중 오세영 시인(서울대 명예교수)께서 '남해 금산'이란 시를 통해 세존도를 살짝 복원해 놓았다.
저 고해 苦海를 건너면 미타찰彌陀刹에 다다를까.
빈 선창 가득히 달빛을 싣고
창망히 떠가는 돛배 하나,
서西로 가는 달빛을 좇아 무심히
노를 젓는 가랑배 하나,
누가 남해바다에
암벽과 초목으로 지어 한 척 배를 띄웠나.
부처 하나 가슴에 안고
달빛 화안한 봄밤에 노를 저어 하늘을 간다.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창망히 떠가는 돛배 하나.
-오세영, 「남해 금산」
쌍홍문 위쪽에서 사진을 찍을 때 발견했다. 굴이 직렬로 놓였을 때 하나의 굴이 또 있다는 것을... 일직선상이지만 구멍은 보다시피 하나가 아니라 두 개다. 쌍홍문 속에 작은 문 하나 추가요~....
그럴싸한 쌍홍문의 전설 덕분인지, 다이내믹하고 스릴 있는 석가 세존을 느낀다. 이대로 굴러 바다까지 가자~는 것을 그 누군가 열망했음일까.
하산 후 올려다보면 다시금 그 산이 고마워짐을 느낀다. 이 산 이름이 금산인 것이 고맙고, 내력 있는 명승지여서 더욱 고맙다. 그 둘러싼 아름다운 바위, 오늘따라 미칠 듯이 사랑스러운 건 나뿐인지. 땅을 뚫고 오른 저 바위를 두고 어찌 모욕을 던지겠는가. 인간은 발 아래 내려와야 크게 깨달을까. 돌아오면 다시 가고싶은 산이 있다. 그곳이 지금은 '남해금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