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여행 여덟째 날, 흥경궁 공원의 침향정 계단에 앉아 호수를 내려본다. 사월 중순인데도 30도를 오르내린다. 나무 그늘에선 음악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과 드러누워 낮잠을 청하는 사람이 보이고 용당 쪽에선 저음의 색소폰 소리가 들린다. 점심시간이라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고 호수에는 조금만 쪽배가 떠다닌다.
계단 응달에는 시원한 바람이 머물다 가고 멀리 보이는 모란꽃밭에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자신만의 시간을 즐긴다. 일상이 회복되고 여유로운 우리나라를 생각해 본다.
옆에 놓인 비닐봉지에는 사과 두 개, 귤 한 개, 홍삼 한 팩과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수 한 병이 들어있다. 당 현종과 양귀비가 노닐던 궁궐에서 고독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중국말만 아니면 반월성과 월지에 호젓이 앉아 있는 착각이 든다. 봄바람에 실려 오는 양귀비의 속삭임을 들으며 사과 한입을 베어 먹는다.
유적지가 월요일 휴관이라 우리는 개인별 여행을 하기로 했다. 여행 욕심으로 지친 심신을 달래려 아침을 먹고 다시 낮잠을 자다 열두 시가 넘어서야 호텔 인근에 있는 흥경궁으로 갔다.
흥경궁(興慶宮)은 당 현종이 정무를 처리하며 양귀비와 생활하던 궁궐이었는데 지금은 역사 유적 공원이다. 경주의 월지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규모가 크고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공원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공원에는 이백의 청평조(淸平調) 삼수 중 첫 번째 시와 비스듬하게 모로 누워 팔베개한 이백의 동상이 있다. 내용을 번역해 보니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시다.
“옷은 구름 같고 고운 얼굴은 꽃인 듯, 봄바람은 난간에 스치고 진주 이슬 꽃잎에 맺혔네. 군옥산(群玉山) 정상에서 본 선인이 아니라면 요대(瑤臺)의 달빛 아래서 만날 선녀이리라”
이백은 침향정(沈香亭) 앞에 있는 모란꽃밭에서 당 현종의 요청으로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연작 삼수를 거침없이 읊었다고 한다. 이 시는 이백에게 영욕을 함께 안겨준 시로도 유명하다.
현재 시안을 주도하고 있는 역사 문화 콘텐츠는 전성기의 장안과 양귀비, 진시황 병마용갱, 셴양 한나라 문화란 느낌이 든다. 오늘도 모란꽃을 바라보는 양귀비를 상상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시안 여행 아홉째 날, 셴양 한양릉박물관에 가는 날이다. 오늘도 혼자만의 자유여행이라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열한 시가 넘어 알리페이를 이용해 택시를 불렀다. 호텔에서 박물관까지 20km가 넘는 거리인데 43위안이라고 한다. 시안 여행에서 가격 대비 가성비가 좋은 것은 대중교통 요금이다. 택시는 시안 중심가를 지나 웨이강을 건너 아파트와 주택이 즐비한 길을 시원하게 달린다. 셴양(함양 咸陽)은 진나라의 수도였으며 초한지에 나오는 항우와 유방이 중원의 패권을 놓고 피 터지게 싸우던 땅, 역대 중국 제왕들의 무덤이 가장 많은 곳이다. 한양릉박물관(汉阳陵博物館)이 있는 공원은 사방의 경계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다.
한양릉국가고고유적공원(汉阳陵国家考古遗址公园)은 입장료가 70위안이고 한나라 6대 황제인 경제의 황릉과 발굴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 있다. 크기와 형식은 다르지만, 경주 대릉원의 천마총이나 공주 왕릉원의 무령왕릉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박물관은 유적 공원 동쪽에 있는 외장 갱 중에 북쪽의 갱 열 개를 발굴하여 만든 지하 건물로 투명 바닥을 걸으며 발굴 당시의 유물을 원형대로 볼 수 있다. 사후의 황제를 지키기 위해 매장된 테라코타(도용 陶俑)는 위풍당당한 진시황 병마용에 비해 크기가 작고 표정이 다양하다. 당시 사람들의 직업과 생활, 동물, 토기, 청동기 등을 볼 수 있다. 진시황제가 권력과 정복을 중시했다면 한나라 경제는 안정과 경제·문화적 번영을 추구했으리라 추측된다.
황릉의 봉분은 윗부분이 밋밋한 동산 정도의 크기다. 황릉을 돌아 외장 갱의 발굴 현장을 보존한 ‘한경제양릉남궐문유적’에 들러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관광객이 드문드문 보이는 넓디넓은 유적 공원을 천천히 걸으며 남인수의 ‘황성 옛터’를 흥얼거렸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 알리페이를 이용해 택시를 부르자 십 분이 되지 않아 도착했다. 이 외진 곳에, 이렇게 빨리 오다니!
시간이 남아 호텔로 가지 않고 21위안 하는 택시를 타고 북시안역까지 가서 지하철을 타고 종루역으로 갔다. 종루역 광장에 있는 차 전문 집에서 18위안에 ‘치자수광 레몬티’를 마시며 여유를 부렸다.
무엇을 할까? 맞은 편에 보이는 백화점에 갔다. 신세계백화점 수준의 쇼핑몰로 화려하고 상품도 다양했다. 음식점이 몰려있는 코너에 들러 번역기를 이용해 제목이 독특해 보이는 ‘회화전과 계화냉떡’을 54위안에 주문했다. 타국에서 색다른 음식을 먹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멋과 맛을 음미하며 시안의 정돈되고 활기찬 거리를 내려본다. 배척하는 이웃이 아니라 상생하는 이웃으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이웃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첨단과학 분야에서 무섭게 달리고 있는 중국을 느낀다.
여행은 출발할 수 있는 용기,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열린 마음과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더 좋다.
여행은 흉금을 터놓을 좋은 기회다. 마음만 먹는다면 멍든 가슴을 치유할 수도 있다. 내일이면 귀국한다.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가. 담는 것 보다 비우고 싶은 마음이 더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2025.4.15.(61)
첫댓글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다녀야지 다리 떨릴 때 다니면 안된다고 하더군요. 선생님 여행기를 보니 가슴에 울림이 있습니다..
여행은 즐거운 일입니다 좋은 추억이 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