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가 있는 그림여행] 정우련.소설가 | |
마음 깊이 생각의 침전물로 담겨있는 유명한 그림을 소주제와 함께 기행하는 시리즈를 마련합니다. 그 여행에는 기억 추억 사유 느낌이 낯익은 벗처럼 함께 할 것입니다. 미술평론가 옥영식씨,시인 김형술씨,배철영 동의대 철학과 교수,소설가 정우련씨가 매주 돌아가면서 새로운 느낌의 그림 에세이를 선보입니다.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공동우물가에 있던 우리 집 단칸방 벽에 엽서 한 장 크기 만한 조잡한 복제화가 붙어 있었습니다. 언제 누가 붙였는지도 모르는 그림이었습니다. 방 벽에 여섯 식구의 옷가지며,달력,사진틀,비와 양은 쓰레받기 따위까지 너절하게도 걸려 있었습니다. 그 틈서리에 수면 위로 주홍빛 햇살이 흘러내리는 아침 항구의 풍경이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따금씩 그 그림이 눈에 띄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아도 내가 그 그림을 특별히 의식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얼마 뒤 우리는 이사를 했고 그 그림은 벽에 붙은 껌딱지처럼 곧 잊혀지고 말았거든요.
내가 다시 그 그림을 본 것은 고2 때였습니다. 교내를 온통 술렁이게 한 멋진 미술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오셨더랬습니다. 전체 조회시간에 선생님이 노란 원피스를 입고 나타나시던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물은 사라지고 오로지 그 여자만이 봄날 아침 햇살 아래 출렁이는 모네의 그림처럼 눈부셨습니다. 내 생애를 통털어서 그렇게 노란 원피스가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여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에게 말이라도 한 번 붙여보려고 안달을 하던 남자 선생님들의 어지러운 눈빛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 그녀가 미술시간에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의 명화'를 보여주었습니다.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음악같은 선생님의 서울말씨와 화집을 넘기는 하얗고 길다란 손가락을 의식하면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내 눈이 번쩍 뜨이는 그림이 나타났답니다. 바로 그 껌딱지처럼 잊혀졌던 그림이었습니다. 모네의 '인상,해돋이'였지요. 그 그림이 당당히 제목까지 있는,그것도 세계적인 화가의 그림이라는 사실에 숨막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모네는 전형적인 인상주의 화가죠. 인상이란 말은 바꾸면 분위기가 되죠. 인상주의란 용어도 1874년 인상파들의 첫 그룹전에 출품한 '인상,해돋이'에서 유래했어요. 일화가 많은 그림이죠. 그는 야외의 태양광선과 찬란한 색채를 이용해서 순간순간을 캔버스에 옮겨 놓은 화간데 날이 어두워지면 나는 죽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할 만큼 햇빛을 사랑했어요. 이를테면 생생한 색채 속에서 아롱거리는 빛의 끊임없는 진동과 격렬한 다이나미즘을 묘사한 지적이기보다는 감각적인 화가였어요. 모파상은 모네가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순간순간 변하는 빛과 색의 조화를 다섯 개의 캔버스 위에 포착하는 포수였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그가 27장이나 그린 루앙 성당만 보아도 아침과 점심,해질녘,밝은 날과 흐린 날,눈오는 날과 비오는 날의 빛과 색이 각각 다르죠. 색과 빛의 변화현상이 모네에게는 삶의 즐거움이었는데 그런 모네를 세잔은 '모네는 단지 하나의 눈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맙소사. 얼마나 대단한 눈인가' 하고 말했다지요.'
대략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설명을 듣는 그 순간,'인상,해돋이'는 내 안에 전혀 새로운 운명으로 박혀들었습니다. 처음으로 그 여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여자가 말하는 그림에 대한 인식이 싹튼 운명적인 사건이었지요. 그날 다른 지루한 수업들이 끝나기를 기다려 학교 도서실로 달려가 명화집을 집어들었을 때의 전율이라니. 다시 만난 '인상,해돋이'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소년 시절의 모네가 화가의 꿈을 키웠던 곳이 항구도시 르아브르항이어서 였을까요. 그림 속의 항구는 내가 유년을 보낸 남항과 흡사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굴뚝에서 연기를 피워올리는 큰 화물선들이 안개속에 막연한 형상으로 나타나 있고,사람이 타고 있는 것이 선명한 작은 배 한 척,그저 인상으로만 처리된 그 뒤의 작은 배 두 척,잘고 토막진 재빠른 붓놀림이 경쾌한 파도의 움직임. 그리고,아 내 기억 속에서 선연하게 되살아나던 주홍빛 아침해와 바닷물 위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반사광선이 가슴을 물들이고 말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