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드 잡으러 간다
이혜숙
종일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반 지하방에서 세 식구가 휴일을 보내려면 하루가 길었다. 아침부터 친정에 가서 세 끼를 해결하는 것도 한두 번이라, 날씨만 좋으면 낙성대로 놀러 가곤 했다.
유치원 다니는 딸을 공주처럼 꾸며 놓으면 덕분에 왕과 왕비가 되어 행차하는 기분이었다.
“엄마, 어디 가?”
“무드 잡으러.”
낙성대 연못에서 잉어도 보고 배드민턴도 치고 손 그네도 태워주고 어둑할 때까지 놀다가 돌아오려던 때였다.
갑자기 딸이 울기 시작했다.
“무드 잡아준다더니 왜 그냥 가?”
딸은 잠자리나 나비처럼 무드를 채집해줄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하루 종일 놀아준 것은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원망 가득한 눈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빠가 허공을 향해 ‘무드, 무드’ 하면서 잡는 시늉을 했다. 엄마도 높은 곳을 향해 팔을 뻗으며 허공을 낚아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는 듯 열심히 무드를 잡으러 뛰었다. 그제야 딸의 얼굴이 함빡 피었다.
딸의 손에 무드를 쥐어 주었다.
“너무 꽉 잡으면 부서지니까 달걀 잡듯 살짝 쥐고 가야 해.”
“응.”
등에서 잠든 아이를 자리에 뉠 때까지도 딸은 동그랗게 쥔 손을 펴지 않았다.
딸은 아침에 일어나 손부터 살피곤 실망을 해도 곧 씩씩하게 말했다.
“아빠, 다음엔 더 높은데 있는 무드 잡아줘.”
그 말에 아빠의 어깨는 처지지 않았다.
지하 방에 사는 동안 우리는 참 많은 무드를 잡았다. 아니, 지하 방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참 많이 무드를 잡을 수 있었다.
내가 딸만 했을 때, 엄마도 우리 남매에게 이른 저녁을 먹이고 집을 나서곤 했다. 동생이 얼마나 개구진지 잠시도 내려놓지 못해 엄마는 동생을 업고 밥을 먹었다. 주인 집 딸 얼굴은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고, 엄마는 동생이 내다버린 주인 집 물건하고 비슷한 것을 찾으러 동대문 시장에 가는 날이 허다했다. 엄마는 동네 언덕에서 우리가 졸릴 때까지 양쪽 무릎에 기대게 하곤 옛날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계단에 빨래판을 놓고 셋이 앉아 버스 정류장을 내려다보면서 아버지를 기다릴 때도 있었다.
“아버지 언제 오나 머리 한 번 긁어봐라.”
엄마가 시키면 눈치 빠른 나는 앞머리를 긁곤 했다. 뒤통수를 긁으면 아버지가 늦는다고 혼났기 때문이었다.
집이 없었을 때 우리는 엄마의 동화를 참 많이 들었다. 아니, 집이 없었기 때문에 엄마의 동화를 참 많이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6학년 때 엄마는 ‘저 많은 불빛 중 하나가 우리 것’이길 소원했던 꿈을 이뤘고, 나도 딸이 6학년 되던 해에 방이 4개나 되는 집을 지었다.
열 개가 넘는 창문으로 하루 종일 볕이 들고 계절마다 풍경화가 바뀐다. 한 달 전에 산 화분엔 이른 봄꽃이 알록달록 피고지기를 되풀이 한다.
그렇지만 그 아까운 걸 혼자서 본다. 딸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외가로 갔고, 남편은 고3 아들 과외에 데려갔다 오느라 둘 다 자정이 되어야 들어온다.
혼자서 밥을 먹고 TV를 보고 일어났다 앉았다 하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엄마는 집에 없다. 엄마도 혼자서 집에 있는 것이 싫은 것이다. 노인정에 있을 엄마에게 휴대전화를 한다.
“엄마, 신설동, 옥수동 살았을 때 우리 집 없어서 엄마 속상했어?”
“무슨 소리, 너희들 어렸을 땐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좋았지.”
엄마는 당신이 지은 동화에 대해선 다 잊어버린 모양이다. 가난한 엄마들이 무엇으로 동화를 쓸 수 있었는지 이제 나는 알 것 같은데도.
꽃을 바라보다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아내의 생일에 장미 꽃다발을 사들고 들어온 남편에게 냉장고 놓을 자리도 없어 방에 들여놓고 사는 주제에 꽃병 놓을 자리가 어디 있냐고 면박을 주었던 일이다. 그러고 보니 그 후에 남편이 꽃다발을 들고 온 적이 없는 것 같다. 딸은 무드가 깨질까봐 손도 못 펴고 잠들었는데, 나는 남편이 쥐어준 무드를 박살내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무드 잡으러 가자고 하면 남편은 어떤 얼굴을 할까. 어느새 주름 깊은 남편의 얼굴.
수필집 <꽃을 솎는 저녁> 중에서
첫댓글 이혜숙님의 글이 참 좋군요.
무드는 만들어 잡는가 봅니다.
소박한 발상이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