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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용 난다’ 는 말이 무색한 시대. 하지만 예전에는 그런 사람도(?) 있었다.
소위 ‘인간승리’의 주인공들.
입시철에 즈음해 어려운 가정 환경을 딛고 26살 늦은나이에 수능 수석을 차지했던 ‘인간승리’의 주인공 장승수 변호사를 만났다.
■ 지은이 소개
1971년 경북 왜관에서 태어나 대구 경신고등학교를 하위권으로 졸업하였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술집으로 당구장으로 돌아다니며 싸움꾼 고교 시절을 보냈다. 싸움도 술도 오토바이도 다 시시껄렁해지던 스무 살, 공부에 대한 열정이 열병처럼 찾아왔다.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 노릇과 뒤늦게 대학문을 두드리는 늦깎이 수험생 노릇을 함께 했다. 그 동안 그는 포크레인 조수, 오락실 홀맨, 가스, 물수건 배달, 택시기사, 공사장 막노동꾼 등 여러 개의 직업을 전전했고,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서울대 정치학과, 서울대 법학과 등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작은 키, 왜소한 몸으로 공사판에서 살아남는 것도 힘들었지만 보통 머리, 낮은 고교성적으로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히고 얻어터지며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게 끝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다. 일을 해야 할 땐 일에 몰두하고 공부를 할 땐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러던 1996년 1월, 26살 늦은나이에 난생 처음 수능에서 1등을 하며 서울대 법학과에 수석 합격했다. 법학과를 졸업하고 2003년에는 제45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법조인의 길을 걷고 있다.
‘남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나도 할 수 있다’
1996년 1월 30일 스물다섯 장승수(張承守)는 대구의 한 아파트 건설 현장에 있었다. 6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포크레인 조수, 식당용 물수건 배달부, LPG 가스통 배달부, 골프장 조경 인부, 신문배달부, 택시기사를 거치며 홀어머니와 두 살 어린 동생을 부양했다. 토목공사장 막일꾼은 그의 7번째 직업이었다. 그날 기계톱으로 한창 목재를 자르고 있던 순간, 공사장의 누군가가 소리쳤다. "승수야, 니 서울대 수석 합격했단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 선 장승수. 그는“변호사가 된 지금의 나를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면 그건 9할이 내 어머니의 고생 덕분”이라고 말했다.
↑ 1996년 2월 수능수석 후 인터뷰하는
장승수의 모습.
↑ 장승수는“스물다섯 장승수가 그랬던 것처럼 변호사 장승수도 열심히 산다”며“담배를 피울 때 빼고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한순간도 한눈팔지 않고 일한다”고 말했다.
장승수(42)는 "지금도 그때 장면이 슬로비디오처럼 떠오른다"고 말했다. 1996년 대한민국을 '개룡'(개천에서 난 용) 신드롬에 빠뜨렸던 청년은 이제 머리숱이 듬성듬성한 장년이 되었다. 인문계 수석으로 서울법대에 입학한 그는 그해 여름 자전 에세이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를 펴냈다. 지금까지 174쇄를 찍은 이 책은 판매고 150만권을 넘었다.
승천을 꿈꾸는 '개천 태생' 젊음에게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는 기가 막힌 제목이었다. "출판사에서 소설가와 시인, 카피라이터를 위원으로 모셔서 몇 번씩 회의를 했지만, 제목을 못 정했어요. 그러다 출판사 담당자가 '이거다'라고 했습니다. '7가지 막노동…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당시 나의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 제목이었어요. 기사에서 실제로 내가 한 말은 '공부가 제일 재밌더라'였는데 제목을 단 신문사 편집자가 '가장 쉬웠다'는 감각적인 표현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는 당시 "'그런 제목을 달면 욕 먹는다'며 무지하게 반대했었다"고 말했다.
막일꾼을 거쳐 장승수가 8번째 직업으로 택한 것은 변호사였다. 2003년 45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한국 변호사 4명 중 1명이 모여 있다는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 자리를 잡았다. 사시 합격 때 잠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그는 이후 '조용하게' 살아왔다. 그의 이름 석 자가 다시 언론에 오르내린 건 총선을 앞둔 지난해 봄이었다. 새누리당이 대한민국 부(富)의 1번지이자 자신들의 정치적 아성인 강남 지역에 장승수를 공천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잇따라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장승수는 출마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장승수 이후 대한민국 개룡은 없다"고 말한다. 모두가 '대한민국 마지막 개룡'이라고 일컫는 장승수. 서초동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70만원짜리 맞춤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이 옷이 지금의 작업복"이라고 말했다.
◇3800㏄ 에쿠스와 38평짜리 전셋집
장승수는 2001년, 2002년 사법시험 2차에서 거푸 고배를 들고서 2003년 12월 합격증을 받아 들었다. 그는 2006년 판·검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개업하는 '연수원 변호사'로 법조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서울지방변호사회 9374번째 변호사. 문 닫는 변호사들이 나올 때였다. 서른다섯이던 그는 "망하면 다시 막노동을 할 각오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생각보다 잘 벌리더라"며 웃었다. "김&장에 간 동기들보다 많이 번다"는 장승수는 변호사 10명이 속한 작은 로펌의 대표변호사다.
―어떤 집에서 사시나요?
"서울대 합격 당시 살던 집은 대구의 보증금 1000만원짜리 전셋집이었습니다. 변호사가 되고 법조타운과 가까운 방배동의 60평 빌라에 전세로 살았어요. 최근 경기도 평촌 산 아래 공기 좋은 38평짜리 아파트로 옮겼지요. 역시 전세입니다. 돈이 없어서는 아니고, 다들 지금은 집을 살 때가 아니라고 해서."
그가 경기도 평촌으로 옮긴 건 동생 내외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장승수의 뒷바라지를 받은 동생 장승대는 고려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를 통과해 현재 기획재정부 서기관으로 근무 중이다. 장승수는 "동생 가족과 함께 살 3층짜리 집을 지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3층 전체는 도서관처럼 꾸며서 차도 마시고 아이들과 책을 보며 놀 계획이다.
그는 2007년 11월 결혼했다. 지금 다섯 살 아들이 있다. 마담뚜의 중매를 거절하고 어머니가 소개해준 규수와 결혼했다고 한다. 법조인에 대한 선입관 때문일까?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궁금했다.
"'변호사 업계 표준'이라는 3800㏄급 에쿠스를 탑니다. 지난해 운전기사가 이민을 간 뒤 내가 직접 운전을 하지요. 그런데 (키가 작아) 에쿠스 운전석에 앉으면 페달에 발이 안 닿았어요." 그는 단신(短身)이다. 키를 묻는 말에 "공식적으론 160㎝"라며 웃었다.
"직접 용접을 해서 페달이 요만큼 튀어나오게 만들어놨어요. 키가 작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는 없지만 불편한 게 많네요. 기성 양복은 맞는 게 없어서 맞춤 양복을 입지요. 명품을 입고 싶어도 맞는 게 없으니, 하하하. 세상은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듯해요."
―외모는 운동선수풍입니다.
"의뢰인들도 '변호사같이 안 생겼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무실 서랍에서 한 장의 흑백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 사시를 준비하며 봉천동의 '대원체육관'에서 권투를 배울 때의 모습이었다. 식스팩이 선명했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코도 약간 휘어 있었다. 그는 "한때 프로복싱 신인왕을 꿈꿀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에게 "지금은 어떤 운동을 하느냐"고 물으니 "주말에 가끔 골프를 친다"고 말했다. 장승수는 에세이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에서 "도대체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골프장에서 심신을 수양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라며 골프에 반감을 나타냈었다. 그는 말했다.
"조경 인부로 스무 살 무렵부터 골프장을 드나들었어요. 그린 위에서 일하다 골퍼들이 오면 숨었지요. 그 기억 때문에 골프를 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세계에선) 어쩔 수 없더군요. 첫 홀 티잉 그라운드에 섰을 때 기분이 묘했습니다."
◇내가 龍? 이무기 정도 되려나?
―4수 만에 수석을 했는데, 만약 그때 실패했다면?
"다시 도전을 안 했을 거예요. 지쳐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으니까. '십장'(현장감독)을 하다가 건설회사를 하나 차리지 않았을까요? 그러고는 IMF 때문에 부도를 맞았을 것이고…."
―당신을 '대한민국 대표 개룡남'이라고들 합니다.
"굳이 아니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용(龍)도 용 나름이죠. 내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렇게 높은 사람, 성공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굳이 분류하자면 '이무기'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장승수가 이무기?
"서울대 수석이라는 한 번의 성공으로 인생이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 이후에 많은 시행착오, 실패가 있었어요. 그런 경험들이 쌓여 세상 일이라는 게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압니다. 나는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변호사일 뿐이지요."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의 저자 장승수변호사가 7일 서초동 변호사 사무실에서 자서전 출판이후 10년동안을 이야기했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장승수에서 끝났다고 합니다.
"동의할 수 없어요. 기업 사건을 많이 해서 CEO들을 많이 아는 편입니다. 그중에 동갑내기 CEO가 있는데, 벌써 시가총액 수천억원대 기업을 일궜어요. 지방대 공대를 나온 사람이에요. 학벌이 성공의 기준인가요? 왜 꼭 서울대여야 해요? 서울대에 가는 것 말고 새로운 꿈을 꿀 기회는 많아졌어요. 학벌이란 고정관념을 버리면, 꿈과 열정, 성실로 성공한 '개룡'들은 주위에 많습니다." "어느 정도 열정을 가져야 개룡이 될까"란 질문에, "열정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라고 그는 말했다.
―성공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도움은?
"좋은 선생님들이지요. 가난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지 않도록 해준 분들. 그런 훌륭한 선생님들을 배출한 사회의 덕을 본 것은 분명해요. 그리고 어머니. 나를 키운 건 8할이 어머니, 나머지 1할은 어머니의 기도였습니다. 그러고도 남은 1할이 있다면 내 노력이었을 거예요."
장승수가 10세 때. 아버지는 관 하나 짤 돈도 남기지 못한 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장승수는 "홀로 된 어머니는 운전학원 구내 간이식당부터 구멍가게·도매상·만화방·한복가게·세탁소·염색공장·버선공장을 전전하며 우리를 키우셨다"고 말했다.
그가 새누리당의 강남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거론됐을 때 야당을 지지하는 한 대학교수는 "장 변호사의 성공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많은 사람을 노력 부족의 '패배자'로 만들고 약자와 빈자를 위한 구조 개혁을 회피하는 소재로 사용될까 우려된다"고 트위터에 썼다. 장승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정곡을 찌른 말이지요. 그래도 난 여전히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장승수의 말을 믿고 한번 열심히 해보느냐, 아니면 '나는 운도 없고 잘난 것도 없으니 안된다'고 포기할 것이냐. 밑져야 본전이지요. 안 하면 뭐할 겁니까." 총선 공천설의 내막에 대해선 "세월이 흐른 뒤에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장승수 스타일이 통하지 않은 연수원
사람들은 막노동하면서 서울대에 수석 합격한 그를 천재라고 생각하지만, 고등학교 때 측정한 그의 I.Q는 보통 학생 수준인 113이다. 그를 수석으로 만든 건 시간이 걸려도 기초부터 쌓아가는 정공법이었다. 그는 "교과서는 정성을 다해 글자 하나 삽화 하나라도 빼먹지 않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본고사를 위해 상경하기 전날까지 수학 교과서를 최소 하루 한 시간씩 매일 봤다. 영영사전을 볼 때는 표제어 아래 모든 문항을 다 보고 맨 마지막 어원 설명까지 빼놓지 않고 읽었다고 했다. 이것이 수험생들에게 유행한 '장승수 스타일'이다.
―사법시험 공부도 장승수 스타일로?
"다들 신림동 고시학원에서 요약 판례를 보고 족집게 총정리를 받고 모의사법고시를 쳤습니다. 나는 법대 도서관에서 법 원문과 법학 논문을 읽었어요. 판례는 교재의 각주에 달린 것까지 원본을 다 찾아 읽었습니다."
―그런 공부법이 사법연수원에서도 통했나요?
"아주 우수한 성적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연수원에선 시험일 이전 3년간의 대법원 판례가 모조리 시험 범위이지요. 너무 방대해서 대부분의 연수생은 요약 판례를 봅니다. 나는 판례 원본을 다 읽었어요. 그런데 그게 오판이었지요. 사법연수원 과정은 실무 과정인데, 결과적으로 그에 맞는 기술적인 공부를 덜 했던 것 같습니다."
―성적은?
"100등 안에 들 정도로 우수한 건 아니었지만 부끄러운 성적도 아니었습니다. 공개 못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한 법무법인의 대표인데 영업도 생각해야 하고…. 허허."
―변호사가 되고 첫 재판은?
"연수원을 2등으로 졸업할 만큼 뛰어난 동기가 부모님 재판을 맡겼어요. 상대는 화재보험 회사였습니다. 의뢰인은 실화, 보험회사는 방화라고 주장했어요. 보험회사가 내세운 직원을 상대로 한 증인신문에서 승패가 갈렸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 직원한테 내가 완전히 농락당했어요. 패소했지요."
장승수는 패배를 두고두고 곱씹었다. 그는 "그 사건 이후 상대방 증인을 신문할 때 관련 사건 기록을 모조리 외워버렸다"고 말했다. 역시 장승수 스타일이다. 그렇게 하자 증언 한 마디 한 마디의 진위를 즉각적으로 가려내 반박할 수 있었다.
◇오십 이후엔 잡스처럼 살고 싶다
장승수의 일거수일투족은 서울대의 관심사였다. "도서관에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초콜릿과 분홍색 메모지가 있었어요. 메모지엔 '막노동판에서 서울대까지라는 인간 승리의 장승수씨 맞죠?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를 읽었어요. 그 책을 읽고 많은 용기를 얻었답니다. 그런데 도서관엔 가방만 있네요'라고 씌어있더군요. 나도 모르게 남의 시선이 의식됐지요. 졸려도 엎드릴 수가 없었어요."
유명세(有名稅)라고 했던가? 장승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양한 소문도 학내에 돌았다. 그중엔 "장승수가 실연당해 술을 마시다가 만취해 서울대 언덕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장승수는 "처음 들었다"며 껄껄 웃었다. "친구들과 학교 앞 주점서 술 먹고 나오다 넘어져 뇌진탕 치료를 받은 적은 있어요. 큰 부상이 아니었는데…." "장승수가 기가 막히게 예쁜 여학생과 사귀다가 헤어져 술에 취해 괴로워하는 모습이 목격됐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런 적은 있었던 것 같네요"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서울대에 들어갔지만, 가난의 후유증은 남았다. 1997년 11월 기말고사 때 밤샘을 한 장승수는 정신을 잃었다. 폐결핵이었다. 그는 "못 먹고 힘들게 살아온 여파가 긴장이 풀어지면서 한꺼번에 나를 덮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장승수인데…'란 생각으로 버텼다. 전염 위험이 있는 초기 2주를 빼고는 약을 먹으며 매일 도서관을 찾았다. "막노동과 입시 공부를 병행하면서 '몸과 머리는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어요. 폐결핵에 걸리고 '정신력이 약해진 것이 아닌가'라며 자학했지요.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자신을 몰아붙였습니다." 대가는 결핵균이 늑막에 침투해 생긴 결핵성 늑막염이라는 합병증이었다. 완쾌 진단을 받을 때까지 1년이 걸렸다.
학창 시절 장승수는 최우등생은 아니었다. 4.3 만점에 평균 3.3점(B+) 수준이었다. 어느 날 귀가하는 길에 서울대생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었다. "장승수 그 새끼, 공부가 제일 쉽다더니 별것 아니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대학 시절 경제적으로 그를 떠받친 주춧돌이었다. 그의 책은 1996년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와 김정현의 장편소설 '아버지'에 이어 베스트셀러 통산 3위에 올랐다. "한 번에 4000만원이 입금된 적도 있었어요. 인세로 받은 돈이 모두 4억원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인세를 받아 첫 번째 한 일은 어머니를 위해 대구에 2층 양옥집을 마련한 것이었다. 동생과 지낼 방 2칸 전셋집도 서울대 부근에 마련했다.
―본인은 가문을 일으켰는데 아들에게 바라는 것은?
"법조인은 안 됐으면 해요. 변호사가 힘들다는 뜻이 아니라, 법조인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뒷수습하는 사람이잖아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새롭게 뭔가를 만들어가는 일, 예컨대 예술이나 사업 같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꿈은?
"쉰까지만 변호사 일을 열심히 하고 이공계 공부에 도전하고 싶어요. 스티브 잡스처럼 기술로 현실을 바꾸고 싶습니다."
“신혼 재미 좋습니다~.”
변호사 장승수(38) 씨와의 인터뷰가 성사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두 달 전인 2007년 11월 초 처음 그에게 연락을 취했을 때 그는 무척 바빴다. 아니 바쁠 수밖에 없었다.
일도 일이지만 ‘빼빼로데이(11월11일)’에 있을 결혼식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정으로 장 변호사와의 인터뷰는 미뤄졌다.
12월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인터뷰에 응한 장 변호사는 조건을 달았다. 가능한 한 짧게 해달라는 것.
장승수 변호사의 사무실인 서울 서초구의 법무법인 로투스에 도착한 것은 2007년 12월3일 낮 1시께였다. 점심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운 그를 기다리며 사무소 안을 둘러보았다. 사무소 입구에 걸어놓은 대형 액자가 눈에 띄었다.
‘초지일관(初志一貫)’이라는 사자성어가 멋진 필체로 쓰여 있었다. 잠시 후 사무소로 돌아온 그에게 던진 첫 질문은 당연히(?) 결혼 이야기.
- 결혼 축하합니다. 여자친구 만들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셨다면서… 어떻게 만나셨나요?
“제 어머님 소개로 만났습니다. 인연인가 봐요. 제 처 되는 사람과 처음 약속을 잡았을 때는 제가 바빠 못 나갔어요. 약속시간이 다 됐는데도 일이 안 끝나 전화를 했죠. 실례지만 못 가겠다고요. 2~3주 지나 갑자기 생각나더군요. 그래서 전화를 했어요. 휴일에 한 번 만나자고. 다행히 흔쾌히 응해줬고, 그 인연으로 5개월 사귄 후 결혼하기로 했죠.”
사무소를 개소한 지 2년 정도 됐다는 장 변호사. 처음에는 친구와 함께 합동사무소를 운영하다 얼마 전 로투스 법률사무소와 연합해 법무법인을 세웠다고 한다. 변호사 장승수는 어떤 송사에 가장 관심이 있을까?
“물론 다른 소송도 하지만 기업 관련 분야 소송을 자주 했어요. 주식 양도 문제 같은 것. 개인적으로도 그쪽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기업 분야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개천에서 용 안 나온다’는 말 동의 못해
그는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자마자 변호사가 됐다. 그는 왜 판·검사가 아닌 변호사의 길을 택한 것일까? 사법연수원 성적이 좋지 않아서였을까?
“꼭 성적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는 원래 법률가 체질이 아니거든요. 법대를 선택했으니 어쩔 수 없이 사법시험을 준비한 셈이죠. 판사·검사·변호사를 놓고 생각해 봤을 때 제게는 변호사가 가장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변호사는 뛰어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창의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점에서 제 성격에 맞았거든요.”
- 그렇다면 법률가가 아닌 다른 진로를 선택했다면….
“저는 아마 건설 쪽 일을 했을 것입니다. 건설회사 사장 같은….”
- 20대 초반의 건설현장 경험 때문입니까?
“네 그런 영향이 있습니다.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건설의 보람에 대해 잘 알고 있지요.”
그의 과거를 떠올리며 든 궁금증 하나. ‘인간승리’의 주인공 장승수에게도 인생의 역할 모델이 있을까? 그는 “없다”고 했다. 오직 자신만을 믿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닮고 싶은 사람은 많다고 했다.
“유명인이나 역사적 인물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각계각층 사람 중에서 인격적으로 훌륭하거나 매사에 성실한 분을 뵈면 닮고 싶다고 느껴요.”
장 변호사의 소원대로(?) 짧게 인터뷰를 마치려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질문. ‘개천에서 난 용’인 인간 장승수는 요즘 회자하는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요즘 입시제도가 실제로 어떤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사실은 수능시험 난도가 낮아졌다는 점이죠. 시험이 쉬워지면 특별히 과외를 받지 않아도 교과서나 학교수업만으로도 충분히 성적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 점에서 저는 ‘개천에서 용 안 나온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가진 자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못 가진 자들을 소외시키기 위한 변명 에 불과한 것 아닐까요?”
이어 그는 “‘개천’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말로 인해 절망할 필요는 절대 없다”면서 “그 자체가 나약한 정신의 소산”이라고 강조했다.
바야흐로 입시철이다.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던지는 장승수 변호사의 한마디.
“열심히 하면 됩니다. 꾸준히 온 마음을 바쳐 내가 하고자 하는 공부를 하면 됩니다. 이 외에 특별한 노하우는 없습니다.”
1996년 서울대 전체수석으로 법학과에 진학한 장승수 씨.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였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여읜 장씨는 1990년 대구 경신고를 졸업한 뒤 홀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건설현장 일용직, 가스 배달원, 식당 배달원, 택시기사, 중장비 조수 등 소위 3D 업종을 닥치는 대로 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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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내가 서울대를 목표로 삼은 것은 ‘최고’라는 이름 때문도, 드라마에 나오는 ‘야망’같은 것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게 주어져 있던 한계를 한계로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지난 5년 동안은 내 삶을 제한하는 조건들과 싸워 온 시간들이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나 자신의 한계, 내가 가진 선천적인 열등한 조건들이었고, 그러므로 내가 넘어야 했던 가장 큰 산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희귀한 독종’이 아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그것에 몰두했을 뿐이다.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히고 얻어터지며 부지기수로 쓰러졌지만, 그게 끝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다. 다시 일어날 때마다 맷집도 조금씩 더 생겨났다.
처음엔 무엇 하나 갖춘 것 없는 나 자신이 싫었지만 차츰 나 자신에 내재된 ‘잠재력’을 확인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열정과 가능성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보통 사람들에게 숨겨진 위대한 에너지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각자의 삶에 내재된 그러한 가능성 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운명을, 한계를 바꿀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럴 힘이 있다.
- 6p ~ 7p -
■ 막노동꾼에서 서울대 수석까지
* 나는 소설책을 빌려다 보기 시작했다. <삼국지>를 비롯하여 <폭풍의 언덕>,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무기여 잘 있거라>, <좁은 문>, <테스>, <달과 6펜스>, <지성과 사랑>,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등 고전 명작을 읽은 것이 이때의 일이다.
- 22p -
* 술에 취해 오토바이를 타다가 길가에 처박히고 말았다. 눈을 떠 보니 어느 종합병원 응급실이었다. 병원을 나와 길가에 주저앉아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세상살이가 버겁다는 느낌과 함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막연하게나마 다가온 최초의 순간이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나는 내 미래의 꿈이나 장래의 계획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뜬금없이 찾아온 이런 생각은 의외로 질기게 머리에 달라붙어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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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사의한 일이다. 싸움도 술도 오토바이도 다 시시껄렁해 보이고 모든 게 회의스럽기만 하던 그 시절, 지금껏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열정이 새삼스럽게 불타오르기 시작한 건. 봄날 보았던 고려대학교의 교정이 환상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언강생심 꿈조차 꾸지 않았던 ‘대학’이라는 곳이, 갑자기 나에게 남겨진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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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기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이 시절 나는 하루의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공부만 하며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원까지 걸어오는 그 짧은 시간에도 공부 생각을 했고, 쉬는 시간에도, 점심, 저녁 도시락을 먹고 나서도 책과 씨름했으며 때때로 밤 10시 야간 자습이 끝나고 다른 아이들이 다들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앉아 있다가 1층 현관으로 내려가 보면 벌써 학원 문이 잠겨져있어서 수위 아저씨에게 야단을 맞으며 문을 열어 달라고 해서야 학원 밖으로 나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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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이처럼 공부에 매달릴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부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내 인생의 물줄기를 바꾸기 위해 내가 직접 선택한 마지막 대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교시절 학생이라는 본분을 벗어나 방탕의 극치로 세월을 보냈던 경험이 나를 두렵게 했다. 한 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벗어나기 시작하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져서 결국에는 도저히 걷잡을 수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시작할 때부터 한 치의 틈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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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 간다는 것이 이토록 참을 수 없는 기쁨을 줄지는 몰랐다. 그 당시에는 정말이지 공부하는 일이 그렇게 즐겁고 만족감을 주는 일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의 말씀을 흉내 내어 혼자서 이렇게 되뇌이곤 했다. “누가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공부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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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는 나의 스파링파트너
* 내가 이처럼 누구라도 서울대 입학이 가능하다고 장담하는 것은 대학교 입학시험의 출제 대상 영역과 그것으로 측정하고자 하는 사고력이라는 것이 배움의 단계에서는 기본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고교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을 공부하는 데 유별난 지적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다음은 노력이다.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는 당연히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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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은 공부가 지겨운 것, 하기 싫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판단의 속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정작 공부가 하기 싫은 것이 아니고 공부 말고 다른 것들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엉뚱하게 공부가 하기 싫다는 말로 잘못 표현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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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랐던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분명히 즐거운 일이다. 공부하는 것에서 신명에 가까운 즐거움과 쾌감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면 우리의 머리도 그때만큼은 보통 이상의 능력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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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에는 왕도가 있는 법이므로 그 왕도를 찾아가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요령이라 할 수도 있고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공부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떻게 그 왕도를 찾아갈 것인가.
* 누구도 공부를 잘하는 방법을 알고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1등만 한 학생이라고 해도 그 역시 처음부터 1등하는 공부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부 방법이라는 것은 공부를 해 나가면서 차츰차츰 혼자 터득해 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자신이 공부해 온 방식을 되돌아보고 그 문제점을 찾아내고, 이에서 나아가 더 좋은 공부방법을 찾아보려고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리고 언제든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면 새로운 방식, 남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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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세상은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만을 출발점에 세워 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기본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읽은 위인전의 주인공 가운데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이따금 노력하지 않고도 성공한 듯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의 경우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별로 노력하지 않은 것 같지만, 정작 본인은 뼈빠지게 노력한 경우. 또 하나는 비록 겉보기에 성공한 것 같지만, 정작은 성공이 아닌 경우.
결론적으로 말해서, 진정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건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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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 내가 공부하는 풍경 가운데 남과 다른 게 있다면 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로 암기를 위해서, 혹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대개들 연필로 연습장에다 무엇을 써 보거나 그려 보면서 공부를 하는데, 나는 전혀 그러지 않는다. 수학 문제조차도 암산으로 풀 때가 많고, 다른 과목은 아예 하루 종일 공부해도 연습장과 연필이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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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고난 바보나 지능지수가 200이 넘는 엄청난 천재가 아닌 이상, 사람의 머리는 다 오십 보 백 보다. 아무리 공부를 못하는 아이라도 자기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빠른 두뇌회전을 보이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다. 물론 집중을 해서 공부를 하려면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오로지 공부만 해야겠다는 마음자세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집중을 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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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이성은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행할 수는 없다. 책을 보면서 딴 생각을 한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이성이 딴 생각 하나에만 매달려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의식적으로 읽고 있는 문장에 살을 붙이고 또 그것을 암송함으로써 우리의 이성에서 딴 생각을 쫓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집중’이라는 추상적인 행위를 구체적인 행위로 전환시켜 의식의 영역에서 우리의 의도를 관철시킬 수 있게 된다.
- 166p -
* 시험을 치는 행위는 결국 문제라는 입력 정보를 받아서 우리가 공부한 것들을 출력 정보로 내놓는 일이다. 따라서 책을 보며 공부를 할 때 우리가 보고 있는 그 내용을 내가 원할 때 출력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가며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름이 있는 내용은 그 이름과 내용을 연결해서 명확히 외우는 것이고, 이름이 없는 내용일 땐 이름을 붙여서 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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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 양과 성적의 상관 관계 : 공부를 하다보면 '위기'가 찾아올 때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한동안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만족할 만큼 성적이 오르지 않을 때이다. 나도 이런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다. 특히 91년에 처음 공부를 시작해서 한 달에 10점씩 꼬박꼬박 올라가던 모의고사 점수가 여름을 맞이하면서 석 달 가량 정체되어 있었을 때는 '이게 내 한계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날짜는 하루하루 지나가는데 미친 듯이 공부해도 성적은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하면, 그것처럼 수험생의 피를 말리는 일도 없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성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공부한 양에 정비례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공부한 양과 성적과의 상관 관계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계단'의 모습과 비슷하다.
흔히들 성적이란 것이 공부하는 양이 증가할수록 우상향하는 직선 또는 곡선의 형태로 끊임없이 상승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공부를 하고 또 해서 그 축적된 양이 일정한 수위에 오를 때까지는 아무런 외형적인 성과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계속해서 쌓여 가는 공부량이 어떤 수위에 이르는 순간, 그 동안 축적되어 온 것들이 일시에 터져 나와 확연히 눈에 띄는 성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성적이 향상될수록 정체기는 길어지고, 정체지가 길수록 도약하는 정도는 깊어진다.
그러므로 꾸준히 열심히 하는데도 성적이 잘 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고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는 분명히 노력의 결과가 현실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믿고, 그런 위기의 순간일수록 더욱 공부에 정진하는 것만이 정체기를 줄일 수 있는 지름길이다.
- 174p ~ 175p -
* 우리의 습관에도 일종의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다. 가령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열심히 하는 그 습관에 관성이 붙어 있어서 계속 그 힘에 몸을 싣기 때문에 더 더욱 열심히 하게 되고, 한 번 하기 싫다는 생각에 이끌려 책상을 벗어나기 시작하면 계속 그 관성에 이끌려 더 더욱 쉽사리 거기에 이끌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내 몸을 실을 만한 관성을 가지도록 애쓸 필요가 있다.
- 175p -
* 어떤 형태의 것이든 한 번만 그 유혹의 순간을 흔들리지 않고 넘기고 나면, 이번에는 유혹을 극복하는 데 관성이 붙어서 다음 번 유혹도 쉽게 물리칠 수가 있게 된다. 그래서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는 것 아닌가. 처음 한두 번만 잘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점점 더 그 일을 하기가 쉬워지는 것이다.
- 176p -
*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쉽다‘는 것의 원인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재미있으면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면 쉬워지게 마련이다.
- 177p -
* 내가 공부를 시작하면서 느꼈던 재미는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미지의 세계를 하나하나 알아 가는 과정이 주는 재미와 기쁨이다. 재미와 기쁨이란 것도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책을 읽으면서, 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직접 자기 눈으로 어떤 현상을 목격하면서 “아, 그래서 그렇구나!” 혹은 “아, 사실은 이런 거로구나!” 하는 식으로 마음속에 깨달음의 감탄 부호를 찍게 만드는 순간에 느끼는 희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나 지식을 바탕으로, 살아가면서 우연히 부딪히게 되는 일들을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뿌듯한 느낌 또한 공부가 주는 재미 가운데 하나다.
공부가 가져다주는 재미의 두 번째 측면은 능력의 확장을 통해 느끼는 쾌감이다. 공부라는 것 역시 일종의 두뇌 작용이다. 즉 머리를 쓰는 일이다. 우리 몸의 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자꾸 쓰다 보면 그 부분의 활동 능력이 커진다. 마찬가지로 머리도 자꾸 쓰다 보면 그 능력이 계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당장 내 머리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나 같은 경우 스무 살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보면, 전체적인 이해력이나 사고력은 말할 것도 없고 암산력이나 기억력,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좀처럼 감을 잡기 힘든 3차원 입체에 대한 연상력 등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짧은 인생을 보다 넓고 깊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앎’ 이라는 것, 그래서 배움의 즐거움을 역설한 공자의 말씀은 언제 들어도 새로운 영원한 진리인가 보다.
- 178p ~ 180p -
■ JSS식 학습방법
* 책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읽고 있는 내용이 무슨 말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 참고서에 의존할 수가 없으니 귀찮더라도 백과사전을 찾아보거나 선생님께 여쭤 보는 수밖에 없다. 공부를 하면서 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항상 ‘왜?’라는 질문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 185p -
* 어떤 과목의 어떤 개념이나 현상을 공부할 때도 먼저 그것이 무엇인가부터 확실히 알아야 하고 그러고 나서는 그러한 현상이나 사실의 이유 혹은 원인을 분명히 이해하며 공부를 하는 것이 올바른 공부 방법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과목별로 교과서를 정해 두고, 이를 계속 반복해서 보라는 것이다.
- 188p -
* 어느 과목에서든 근본적인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은 기계적인 암기는 거의 시간 낭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를 외우고 있지 않으면 그것 역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당장 머릿속에 들어 있질 않은데 어떻게 시험을 보고 또 세상살이에 배움을 활용한단 말인가? 비록 무언가를 암기한다는 것이 적지 않은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배우고 나면 가능한 한 외워 두려고 노력해야 한다.
- 223p -
* 문제와 그 문제의 풀이 과정 사이의 논리적 인과 관계를 분명히 밝혀 두는 습관을 갖는 것이 수학을 잘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문제를 풀 때마다 ‘왜 이런 문제는 이렇게 풀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 다음 나름대로의 논리를 세워 정리를 해두면, 아무리 새로운 문제를 만나더라도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하나?’하는 막막한 심정이 사라지는 대신 ‘이 문제는 이러이러한 개념과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무엇을 구하라고 요구하고 있으므로, 이는 이렇게 풀어가야겠다.’하는 논리적인 행동 요령이 서게 된다. 얼마나 많은 수의 문제에 대해서 이러한 행동 요령이 갖추어져 있느냐 하는 것이 수학 실력을 재는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225p -
* 교과서를 보는 데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교과서 아니라 다른 모든 책을 볼 때도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이 읽고 있는 문장이 무슨 말인지만 알면서 읽으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르는 말이 나올 경우 국어사전이나 백과사전도 찾아보고, 과학 과목 같은 경우에는 중학교 교과서를 뒤져보거나 선생님께 여쭤 봐야함은 물론이다. 이렇게, 공부도 부지런해야 잘 할 수 있다.
- 233p -
* 지난 5년간 입시 공부를 하면서 내가 얻은 게 있다면 사람에겐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장래에 내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앞으로도 배워야 할 것은 산더미 같고 내가 넘어야 할 한계도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한계들을 뛰어넘기 위해 나는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매야 하리라. 이제 나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 245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