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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홍은동 삼각산 옥천암(玉泉庵)을 찾아서 ①
옥천암 마애관세음보살좌상(磨崖觀世音菩薩坐像) - 일명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 -
옥천암이 집에서 지근한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찾을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지난 정월 대보름인 2월 24일 비니초님과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3년 전 부처님 오신 날 찾은 바가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옥천암은 차를 타고 다니며 수도 없이 보아와서 보도각 백불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하여 보도각 백 불이 부처님이 아닌 해수관세음보살인 점과 이 절에 얽힌 고양군 신도면에 살던 노총각 윤 덕삼(尹德三)이 나무를 하여 서울 도성 안에 내다 팔며 생계를 꾸리던 중 여기서 기도를 하 고 장가를 들어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카페에 한 번 소개해 보고자 마음을 내어 찾았습니다.
집에서 걸어가면 30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차를 타고 가면 하림각 앞 에서 7018번을 타거나 세검초등학교 앞에서 110A번, 153번을 타고 2.3번째 정류장인 홍 지문, 옥천암에서 내리거나 유원하나아파트에서 내리면 갈 수 있지만 운동삼아 걷는 것도 좋은 일이라 걸어 갔습니다.
홍지문(弘智門과)과 탕춘대성(蕩春臺城) 모습
홍지문(弘智門) 안쪽
상명대입구 앞에서 홍은동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홍지문이 나옵니다. 이 홍지문은 인왕산 북쪽 끝자락 홍은동 방면의 도로 밑에 있는데 탕춘대성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 탕춘대 성은 지금은 도로가 있어 끊어져 있지만 남으로 인왕산과 이어져 있고 상명대쪽으로 이어 져 있습니다.
홍지문(弘智門) 및 탕춘대성(蕩春大城)
홍지문(弘智門) 및 탕춘대성(蕩春大城)에 대하여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3호 / 시대 : 1719(숙종 45)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 4번지
이 성은 1719년(숙종 45)에 쌓은 것으로, 한양의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여 세운 성이 다. 도성과 북한산성 사이 사각지대인 지형에 맞게 두 성 사이를 이어 성벽을 만든 일종의 관문성(關門城) 성격을 지녔다. 성곽 둘레는 약 4km로서, 성 안에 연무장(鍊武場)인 연융 대(鍊戎臺)를 만들고 군량창고 등을 갖추었다. 성벽은 크기가 고른 장방형의 돌로 반듯하 게 쌓아 숙종 때 성을 쌓는 기법을 잘 보여 준다.
홍지문(弘智門)은 홍예(虹霓)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문루(門樓)를 지었는데, 대개의 성문처럼 우진각(隅進閣)지붕이다. 그 옆으로 이어진 수문(水門)인 오간수대문(五間水大 門)은 홍예 5칸을 틀어 수구(水口)로 썼다.
베풀었던 것에서 유래했는데, 홍지문은 한북문(漢北門)으로도 불렸다. 1921년 홍수로 인 해 홍지문과 오간수대문은 무너졌으나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다시 지어졌다. 』
우진각(隅進角) 모양의 홍지문 지붕
우진각(隅進閣) 지붕이란 네 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을 말하는데 모임지 붕이라고도 합니다. 앞에서 보면 사다리꼴, 옆에서 보면 세모꼴의 지붕입니다.
탕춘대성(蕩春臺城)의 오간수대문(五間水大門)
홍지문 밖에서 바라본 모습
옛날에 구파발, 고양 등지에서 도성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 문을 통과하고 창의문(彰義門 紫霞門)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이 문은 중요한 관문 중의 하나입니다.
홍지문 편액 숙종(肅宗)의 글씨
홍지문의 지(智)는 '지혜'를 뜻하기도 하지만 '북쪽'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홍지문은 북쪽 문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사대문(四大門)에 드는 것도 아니고 사소문(四小門)에 드는 것도 아닙니다. 사대문이란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서쪽에 돈의문 (敦義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이죠. 그리고 사소문은 동북쪽에 혜화문(惠化門), 동남쪽 에 광희문(光熙門), 서남쪽에 소의문(昭義門),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을 말합니다.
사대문 이름을 보면 오상(五常)을 염두에 두고 이름을 지었는데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 만이 다릅니다.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肅淸門)이기도 합니다만 정도전(鄭道傳)이 이름을 지을 때 북대문은 홍지문(弘智門)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인의예지신(仁義 禮智信) 오상을 받드는 유교를 받드는 국가로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개혁과 정화의 의미를 담은 숙청문(肅淸門)으로 지어졌고, 연산군 때 숙청문이 폐쇄되고 나중에 원래 자리에서 약간 이건하면서 지혜를 공경한다는 의미로 숙정문(肅靖門)이 되었다고 합 니다. 북대문을 처음 의도한 홍지문이라 했으면 더 적합하지 않았다 생각됩니다. 아무튼 이 홍지문이란 명칭이 숙종 때 살아나서 이곳을 지키는 문이 되었습니다.
옥천암 전경
홍지문에서 약 300m 정도 더 내려가면 옥천암이 나타납니다. 홍제천가에 우선 하얀색의 마애보살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마애불상이 저 유명한 옥천암마애보살좌상이라 명명 된 마애관세음보살좌상입니다. 일명 (普渡閣) 백불(白佛)이라고도 합니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바라본 옥천암 마애관세음보살 좌상
홍제천가에 있는 옥천암은 민가가 가득하여 옛정취를 완전히 잃었지만 옛날에는 인왕산 끝자락을 감싸고 도는 홍제천이 물이 맑고 경관이 수려한 곳이었을 것입니다. 지나다니면 서 보면 그 점이 많이 아쉽게 보였습니다.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로 알려진 이 관음보살상은 해수관음(海水觀音)으로 알려져 있습 니다. 해수관음이라면 바닷가에서나 뵐 수 있는데 이곳에 해수관음이라니 의아한 일입니 다. 무슨 일이든 사연이 있겠지요? 그 사연을 알아보러 들어갑니다.
다리 건너기 전 바라본 보도각 전경
보도각 앞을 흐르는 홍제천(弘濟川)
옥천암(玉泉庵) 전경
보도교(普渡橋)
보도교(普渡橋)란 중생을 구제하는 다리란 뜻이니 피안으로 인도하는 피안교(彼岸橋)와 같 은 의미입니다. 이 다리를 건너 피안의 옥천암으로 갑니다. 옥천암은 기도도량으로 유명 합니다. 옥천암이 유명한 것은 전적으로 마애보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도교(普渡橋) 모습
삼각산 옥천암(三角山 玉泉庵) 일주문
이 일주문은 최근에 새롭게 건립되었습니다. 이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은 종무소 이고, 왼쪽엔 마애관세음보살상을 모신 보도각이 있습니다.
옥천암 보도각(普渡閣) 모습
이 정면의 모습은 다리를 건너기 전에 찍은 사진입니다. 앞에는 바로 홍제천이 흐릅니다.
보도각(普渡閣) 편액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글씨
보도각(普渡閣) 뒷모습
옥천암 마애좌상(玉泉庵 磨崖坐像)에 대한 안내문
옥천암 마애좌상(玉泉庵 磨崖坐像)에 대하여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7호 / 시대 : 고려시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동 8번지
이 불상은 옥천암 보도각 안 바위에 새겨진 마애좌상(磨崖坐像)이다. 불암(佛巖) 또는 '보 도각 백불(普渡閣 白佛)'로 일컫지만, 조선 말기부터 통칭하여 '백의관음상(白衣觀音像)'으 로 부르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할 때, 이 존상 앞에서 기원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아들 고종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 서울의 이름 난 불교 존상이 다.
독립된 거대한 불암바위 앞면에 5m의 장대한 마애상을 새겼고, 그 위에 팔작지붕의 전실 형 건물을 세워 마애상을 보호하고 있다. 존상은 머리에 고려 초기부터 유행하던 높은 보 관을 쓰고 있는데, 뿔처럼 생긴 관대에는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화려한 꽃무늬 수술 장 식이 표현되어 있다. 존상의 얼굴은 타원형인데 양감이 비교적 부드럽고 눈ㆍ코ㆍ입이 단 아하다. 신체는 건장하면서도 유연한 편이며, 얼굴은 단정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어서 고려 12~13세기 마애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옥천암 마애좌상(玉泉庵 磨崖坐像)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7호
흔히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로 불리고 있다가, 2009년에 공식 명칭을 ‘옥천암 마애좌상 (玉泉庵 磨崖坐像)’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명칭은 참으로 모호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옥천암에서는 '옥천암 마애관세음보살좌상(玉泉庵 磨崖관세음보살坐像)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당하다고 보여집니다. 명칭을 정할 때 사찰측과 이 런 협의가 없었는가 봅니다.
백불로 불릴 만큼 온통 하얀 것은 호분(胡粉), 즉 조개껍데기를 갈아서 표면에 입혀 놓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비로운 모습의 관세음보살님의 자안(慈顔)
이 관세음보살님은 해수관음(海水觀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관음성지로는 동 해의 낙산사 홍련암(紅蓮庵), 부산의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 남해에 보리암(菩提庵)과 여 수의 향일암(向日庵), 서해의 강화 보문사(普門寺) 등이 유명한데 육지 한복판에 해수관음 이라니 의아하지 않습니까? 이는 내륙 깊숙히 사는 사람이 쉽게 접할 수 없는 해수관음을 쉽게 접하게 하기 위한 배려로 조성했다고 합니다.
자비로운 모습의 관세음보살님의 수인(手印)
자비로운 모습의 관세음보살님의 모습 얼굴은 둥근 편으로 가늘고 긴 눈과 작은 입이 표현되어 있어 고려시대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옷 주름은 전반적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면서 형식적으로 처 리 되었고, 손에는 지물(持物)을 들지 않고 오른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엄지와 셋째 손가 락을 맞대고 있고 왼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대고 있습니다.
옆에서 바라본 모습
이곳 관음상 앞에서 기도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로부터 이곳은 기도하여 기도를 성취 하셨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안내문에 거론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기도와 흥선 대원군의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아들을 위해 기도하여 훗날 고종이 되었다는 것 외에 도 임진왜란과 관련된 전설도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권율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왜군과 힘든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기세 당당 한 왜군들은 한강을 타고 들어와 서대문을 넘어 자하문을 지나 한양도성으로 쳐 들어갈 기 세여서 권율장군은 더 이상 밀리지 않기 위해 옥천암을 요새로 삼아 배수진을 치고 홍제천 을 사이에 두고 야간 매복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후 야음을 틈타 왜군이 몰려왔다고 합 니다. 그때 왜군들 앞에 하얀 옷을 입은 장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에 왜군들은 조선 의 장수로 생각하여 일제히 조총을 쏘았는데 총알을 다 쓰도록 장수가 쓰러질 줄을 몰랐다 고 합니다. 날이 밝자 그 장수가 돌부처임을 확인하고 이에 당황한 왜군들은 겁을 먹고 퇴 각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권율장군이 반격하여 왜군을 전멸시켰다고 합니다.
공양미를 먹는 비둘기
그런데 옥천암의 전설은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전설이 있는데 이는 고양군 신도면에 사는 나무장수 노총각 윤덕삼(尹德三)이 이곳에서 기도하여 안내를 얻어 잘 살았다는 전설입니 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불교이야기>방 7번을 열어 보세요.
감사합니다. 백우 _()_
☞ 다음은 옥천암 2부가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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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옥천암 마애좌상 기도 도량으로 유명하죠.... 사진 감사합니다. _()_
여기서 날마다 어떤 거사는 3000배를 하시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저 비둘기 두 마리는 늘 같이 있더군요. _()_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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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홍지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진각지붕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_()_
순례기를 읽으면 모르던 사실도 많이 알게 되어 좋습니다.
옥천암 보도각 백불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바 있지만 백우님 동네에서 가까운데 있군요.
멋진 사진과 자세한 내용에 감사드립니다. 잘 보았습니다.
영험이 많은 곳이네요. 여기서 기도하시는 분들 모두 관세음보살님의 가피 듬뿍 받으시기 바랍니다.
홍지문을 수도 없이 보며 지나쳤는데 그것이 우진각지붕이라는 것은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_()_
마애관음보살좌상에 기도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공간이 넉넉하지 못한 관계로 사면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피 듬뿍 받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울동네에 옥천암같은 좋은 기도도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걸음 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_()_
그렇습니다. 한 번 발걸음을 하니 벌써 세 번 갔네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