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면 소리가 낮보다 더 크게 들리지. 그래서 해 일자에 소리음자가 합해지면 어두울 암(暗)이 되는 거야" 아이들에게 어두울 암자를 소개할 때 하는 말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처럼 정말 열하를 건너갈 때 낮에 보던 그 강물과 달리 강물 소리가 크게 들리니 더 무서울 법도 하다. 빛이 사라진 세상, 그것도 더 어둠이 짙어지고 세상의 소리마저 사라진 밤이 되면 더 깊이 마음의 문이 열린다. 어쩌면 더 먼 우주의 별빛이 신호를 보내올 것만 같은 밤에 우리는 잊고 지냈던 추억과 아름다웠던 풍경을 떠올린다. 날씨가 차가워지고 또 이렇게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십이월을 맞이하면서 싱숭생숭한 기분을 달래기도 한다. 하루하루 자신도 알 수 없이 나이들어가는 얼굴을 보거나 피곤에 휩싸이는 자신을 볼 때가 있다. 어둠 속에서 불연득 자신의 자화상을 바라보게 된다.
글을 쓰다 컴퓨터를 끄고 다시금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 동안 작중의 극단적인 상황을 떠올려 본다. 픽션과 소설화, 그 극단과 현실가능한 이야기라니, 어쩌면 그저 너무 평범해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리라. 예민하고 고집이 센 여자의 영악한 말대답처럼이나 결코 쉽게 물러나지 않을 대사를 따라 가기도 하고 또 유명작가의 알려지지 않는 작품을 읽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도 그 줄거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다.그 작품을 감상하기 보다 그 작품을 쓴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기 때문일이도 모른다. 나라면 어떻게 쓸까를 염두하면서 글을 읽는 일은 작품감상을 방해할 때가 많다.
알베르토 까뮈의 <오해>나 막스 프리시의 <만리장성> 안톤 체홉의 <벚나무 동산>을 읽어본다. 훈훈한 인간성과 부조리 상황, 위기에 처한 현대인의 소외감정과 방관자로서의 죄의식, 신선한 스타일, 예민한 심리해석, 정확한 묘사력이란 말들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무의식에 가까울 정도로 우리는 수없는 말을 하면서도 그런 말들에 담긴 인생적 의미를 음미할 시간이 없이 스쳐지나간다. 상황에 대한 극단적인 가능성으로 증폭시켜내는 이야기 만들기의 절박함과 여유를 다시금 음미해 본다. 인생을 아무리 살아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또 그 깊이를 음미하지 못한다면 그저 사는 흉내만 있을 뿐이지 않는가.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 속에서 어떤 일을 조명해 그 안에 담긴 어떤 이야기를 말할 것인지,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다시금 우리 안에 가득차 있는 세상의 떠도는 이야기를 학인하기도 하고 또 너무 절박해서 더 이상 그걸 그릴 거리마저 빼앗겨버렸다는 당혹감에 한 줄도 쓰지 못할 때가 있다.
감상과 냉소, 숨겨두고 걷기, 철저히 걸어가면서 조금씩 드러낼 것, 자신도 모르는 것처럼 자신마저 속여야 할 것, 어쩌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이야기는 그 불가해한 신명을 잃어버리는지도 모른다. 결론을 알아서 인생을 사는가. 살아가면서 찾아가는 것이 인생아닌가.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모든 걸 다 오픈시켜 버리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신비로 다가가지 못한다. 칼날을 밟아 피가 툭 튀는 것처럼 세상 가시밭길을 걸어간다. 자랑하듯 말하지 않기, 절박하고 단호한 깊이, 깨닫게 하는 암시뿐, 짧고 단단한 글귀만이 빽빽히 무의식의 바다를 건넌다. 일기작가의 글처럼, 더 솔직해지는 것도 능력이고 더 많은 일들의 관련성을 찾아내는 것도 관건이다. 다 알기에 적어가는 것이 아니라 적어가면서 알아가는 것임을. 주위에도 말하는 깊이를 가르치는 선생과 또 소리없는 행동을 가르치는 협객이 있다.
한 마디로 결론이 나지 않는 세상의 이야기들, 그래서일까 끝없이 대화는 이어진다. 결론을 내린다고 결론이 아니다. 끝없이 주고 받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끝나지 않은 전쟁처럼, 곳곳에서 불꽃이 인다. 살아 있는 한 말이 있고 행동이 있다. 우리는 때로 수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옥좌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찬란한 빛을 본다. 생명의 파동이 그치지 않는 한 끝없이 물결지는 말과 행동들, 그건 어쩌면 수없이 많은 날들을 보내면서 만들어냈던 영화들이 프로그램에 의해 사람들에게 반복되면서 쏟아져 나오는 것과 같다.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사람들에게 비쳐지고 있는가.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의 은밀한 가능성이 사람들에게 다가오는가.
한밤 중, 모든 것들이 물러나 앉은 시각, 다시금 자신을 돌아다 보면서 세상의 미미한 소리와 또 마음을 흔들며 지나갔던 하루를 떠올린다. 그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또한 서서히 변해가고 있는 세상과 인생을 적어나간다. 가장 고요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다. 천상과 가장 가까운 도시라는 예루살렘처럼, 천상과 지상을 가르는 경계의 베일이 얇아지는 시각이다. 모든 걸 물리고 다시금 고요해지는 순간, 우리는 그 무한한 역사의 시간과 만난다. 혼이 내리고 또 혼이 오른다.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는 시각이다. 세월이 가고 또 세월이 오는 영원한 찰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