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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병특수수색대동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Benh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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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사 최대비극은 세계사를 뒤틀어 놓은 국제적인 대 환란인 6.25 전쟁이었다.
3년여 (1950,6.25~~1953,7.27)의 동족상잔을 돌아보면서, 특별히 전쟁 후 태어난 젊은이들이 잊지 않고, 잘 못 이해하지 않도록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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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부터 병력 유입, 배치완료 1945년 8월 15일 우리민족은 일본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되었으나 곧 38선이 그어져 북에는 소련군, 남에는 미군이 주둔하였고, 1948년에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후 소련 스탈린의 사주 받은 평양의 김일성 공산일당은 1950년 6월 남침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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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당시 평양의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평양동부교회에 다녔는데 1950년 5월1일이 주일이었므로 교회에 나갔다가 인민군 퍼레이드를 보았다. 이 날 퍼레이드는 그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중무장 장비 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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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가을부터 50년 봄에 이르면서 만주까지 중국공산당('팔로군')이 진출하였다. 중국공산군 내 많은 조선적 군인들이 탱크 .대포. 차량등을 열차에 싣고 계속 들어와 평양거리는 솜옷 입은 군인들로 가득찼다. 그 육중한 탱크가 5월 1일 평양거리에 나타나 전차電車길을 누비며 좌우로 회전하면서 우지직하고 선로가 비틀어 찢어졌다.그 이튿날부터 그들을 평양거리에선 볼 수가 없었다. 그 군인들과 탱크들은 그 길로 38선으로 내려가 6월 25일 남침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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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 년이 지난 오늘 날, 어찌 된 영문인지 많은 젊은이들이 '6.25'는 대한민국이 먼저 '북침'했다고 믿고 있으니 참으로 황당하고 통탄할 노릇이다 거짓 선전으로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적화통일 하고자 하는 북한 공산집단은 "6.25'는 '남침'이 아니라, 미국이 제국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 기술적으로 유도한 '북침전쟁'이었다고 순진한 젊은이들을 세뇌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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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군 출신 고급장교 증언에 의하면 6월 25일 새벽 괴뢰군 최고사령부가 운영한 방송에서, 동부전선에 위치한 부대들에게는 "서부전선에서 '북침'이 개시되었다, 전면전쟁은 불가피하다"고 했고, 서부전선 부대들에게는 "동부전선에서 '북침'이 개시되었다. 이 방송 원고는 최근까지 북괴군 총정치국 적공과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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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던 장학봉 전 북한 정치사관학교 교장이 1990년대 초에 쓴 "피와 눈물로써 씌여진 우리들의 력사." (81명의 수기록, 950 쪽) 속에 (이 원고는 출판이 못되고,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의회 도서관에 기증되었음) 북한국 3성 장군을 지낸 유성철 전 북한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의 수기 "피바다의 비화"가 있는데 그 안에서 아래와 같은 글이 적혀 있다 (2007년 2월 7일 연합뉴스가 마이크로 필름에 담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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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김일성은 스탈린을 방문 ...
6.25 전쟁 작전계획을 민족 보위성 작전국에서 약 1개월간 극비리에 작성하였는바...
소련 고문단 와씰리에프 중장 뽀스트미꼬브소장...들이 주동역할을 하였다,"
"나 자신이 이 로문( 露文,러시아 語)으로 된 작전계획을 번역하여 강건 참모장에게 주었다. 바로 이 계획이 실천에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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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6.25전쟁은 소련군과 북의 지도부의 공동구상이라는 점이 재확인되었다. 소련은 북한군에 3,000여 명의 작전고문관을 배치하여 직접 남침훈련을 시켰으며, 소련 출신 한인들을 중심으로 제 105전차여단을 창설하였고, 해군과 공군의 창설을 지원 하였으며, 내무성 산하의 보안대, 경비대 등의 이름으로 막강한 군사 예비대를 확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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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의 남침 준비가 완료되자 소련 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초 개전이 임박하여 북한에서 철수함으로써 그들의 남침기도를 은폐하였다. 결국 김일성의 무력통일 야욕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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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9년 '조소 군사비밀협정'
2) 1949년 중공과의 '상호방위조약' 및 중국대륙의 공산화
3) 1949년 미군의 한국에서의 철수
4) 1949년 무력침공에 대한 스탈린의 승인
5) 1950년 애치슨 성명 (한국,대만의 극동방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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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북괴군 남침과 국군의 후퇴 6월 25일 새벽 4시?남으로 기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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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 정권은 전쟁준비를 위장하기 위해 상투적인 평화공존 전술을 구사했다. 곧 남한에 있는 남조선 노동당 중책인 '김 삼용'과 '이주하'를 북에 계신 우리민족의 지도자인 '조만식'선생과 교환할 것을 제의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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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 신성모 국방장관은 북괴군이 남침을 위해 38선에 이동 집결하는 위급한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리면서, 남침시기를 1950년 4월 또는 5월로 예측하여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50년 4월 21일 발령한 경계강화 지시가 너무 오래 되었고, 농번기도 되었다는 이유로 6월 23일 비상경계 태세를 해제하고 24일 토요일 오전 일과를 마친 후 전 부대에 외출 .외박을 허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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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틈을 이용하여 북괴군은 6월 25일 새벽 4시 전 전선에 걸쳐 침공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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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군 대 북괴군의 군사력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1950년 6.24 현재>
구분 남한 북한 비고 총병력 104,993명 203,380명
육해공, 해병 탱크 전 무 242대 (T-34)
소련제 자주포 전 무 176대(SU-76)
소련제 곡사포 91문(105mm) 172문(122mm)
1:6 항공기 22대(연락기 등 211대(YAK-9,IL-10 등)
1:9.6 함정 28( 소행정 등) 30( 수송, 고속정)
1:1.1 * 자료: 한국전쟁사 제1권, 국방부 UN 안보리 긴급소집. 주일미군 출동 북한 침공은 6월 25일 오전 6시경 옹진, 개성, 의정부, 춘천지역 전 전선에서 38도선을 넘기 시작했으며, 동해안 강릉 남쪽에서는 상륙작전이 이루어졌다. 병력, 장비의 열세에다 경계강화태세까지 해제되어 전투준비가 부족했던 국군의 전선은 춘천지구 (아군 6사단)를 제외하고는 파죽지세로 밀려, 서울은 사흘만인 6월 28일 점령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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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남침은 대한민국은 물론 ,자유세계가 놀랐다. 그리하여 미국시간 25일 (일요일) UN안보리가 긴급 소집됐으며, 평화 파괴행위로 규정 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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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군의 즉각적 적대행위 중지
2) 군사력의 38선 이북 철회 요구안을 9:0으로 가결한다. 동시에 주일 미군 제 24 사단 스미스 부대가 최초 로 참전하게 되었고, 우방 16개국이 우리를 도우러 한국으로 달려왔다. 6월 29일 새벽 맥아더 장군이 도쿄 (東京)로부터 수원에 도착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고, 한강으로 올라가 한강남쪽 제방에서 전투상황을 관측하다가 호 속에서 한국군 병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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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가 병사와의 대화]
맥아더: "자네는 언제까지 이 호속에 있을 것인가?" 한국병사:" 예! 각하, 저는 군인입니다. 군인이란 명령에 따를 뿐 입니다. 저의 직속상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여기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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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군: "명령이 없을 때엔 어떻게 할 것인가?"
" 병사: "옛! 죽는 순간까지 여기를 지킬 것입니다.
" 장군: "오! 장하다, 자네 말고 딴 병사들도 다 같은 생각인가?
" 병사: "옛! 그렇습니다. 각하
" 장군 :"참으로 훌륭하구나! 여기 와서 자네와 같은 군인을 만날 줄은 몰랐네, 지금 소원이 무엇인가?
" 병사: "옛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놈들의 전차와 대포를 까부술 수있도록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
" 장군: "음……. 그리고 또 없나?
" 병사: "옛! 없읍니다.
" 장군:" 알았네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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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맥아더 장군은 병사의 손을 꼭 쥐고 나서 통역을 맡고 있던 김종갑 대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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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령! 이 식식하고 훌륭한 병사에게 전해주시오. 내가 도쿄에 돌아가는 즉시 미국지원군을 보낼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 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훌륭히 싸우라고"( 정일권 장군 회고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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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침공군은 경부선 도로와 철도를 주공격 루트로 남진을 계속했다. 수원. 조치원대전. 추풍령을 넘어 대구 북쪽 왜관까지 거침없이 밀고 내려왔고, 호남지방은 거의 무저항으로 공주, 전주, 군산, 목포, 하동. 진주를 거쳐 마산 서쪽 가야까지, 그리고 동해안은 영일만까지 장악하게 된다. 이제 남은 땅은 낙동강 하류 동족의 동서100Km 남북 ,130Km의 자투리 뿐이었고, 그 동남 끝단엔 부산이 있었다. 여기까지 온 기간이 6월 25일부터 7월말까지 40일도 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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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는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지워지는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해상에서도 적군은 게릴라 부대를 삼척, 울진 등지에서 상륙시켜 후방교란을 획책하고 있었는데, 부산지역 약 600여명의 편의 게릴라 (민간복 착륙)를 침투시키기 위하여 수송선 1척이 남하하던 중 6월 25일 저녁에 발견하여 계속 추적되어 오다가 26일 새벽 울산 앞바다에서 한국 해군 백두 산호( PC-701함) 에 교전 중 격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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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들 편의 게릴라 부대가 부산근처에 기습상륙 했더라면 한국방어는 더욱 어려워 졌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군이 전면전을 담당하기에는 지휘체제가 미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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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UN군 사령관에게 위임함으로써 국군 및 UN 군이 단일 사령부 지휘아래 통합작전을 수행하게 하였다. 7월 하순~8월 초순 약 10일간의 영동, 김천지구 전투에서는 적 전차부대가 신속한 작전으로 미군에게 계속 타격을 가하면서 추풍령을 넘고 있었다. 이 때,( 1999년 9월 29일 AP의 첫 기사로 세계에 알려진) '노근리 사건'이 7월 26일 영동읍 노근리에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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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적운은 피란민 대열 속에 게릴라 정찰대를 민간복으로 변장 침투시켜 정보수집, 사탄유도(射彈誘導),지뢰매설, 보급차 습격, 포진지 기습 등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작전일지에 의하면 50여 명의 피난민 무리가 철도를 따라 남하하는 것을 적군으로 오인, 불가피한 오발포를 한 사고로 기록되고 있으나, 피난민 쪽에 서서 선제공격을 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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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적군은 이곳에 핀나민들을 한 줄로 앞세워 논, 밭 등을 지나가게 하여 지뢰매설 여부를 확인하려는 작전도 감행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2006년 5월 29일, AP통신은 존 무쵸 전 주한미국 대사가 국무부에 보고한 'UN군 당국은 최전방에서 피난민 집단의 접근에 대한 전투지침을 작전부대에 하달하였다'는 기사를 보도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일부에서 '양민학살'의 근거라고 주장, 여론을 왜곡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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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낙동강전선 방어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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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가급적 북방에서 적군을 저지하고,인천에 상륙하여 이를 협공한다."는 전략구상하에, 우선 일본에 있던 미 제 24사단을 한국에 급파,적군의 남하저지를 시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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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북괴군은 최신식 전차와 야포,그리고 잘 훈련된 보병으로 아군에게 재정비의 시간을 주지 않고 속전을 강행하였다. 후방에서는 게?라전으로 남한내 불순분자들을 동원하여 UN군 병참선과 통신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병행하였으므로 미군은 피아(彼我)간에 분간이 어려워 혼전을 피할 수 없었다.(앞으로 예상 될 북한의 전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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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두보 ( 경상남북도의1/3)를 사수하기 위하여 분전한 약 50일간의 진지 사수작전(陣地 死守作戰)을 되돌아 볼 때, 풍전등화 같았던 나라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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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UN군의 총반격작전.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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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공군의 폭격으로 행동이 완전히 제한된 적군은 총공세가 실패하자 전투능력 상실과 최악의 병참지원,피로 중복,영양결핍,패전감, 무자비한 지휘통솔 등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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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6일 9시를 기해 미 제 10군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호응하여, 낙동강 전선에서도 UN군 및 국군이 총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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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9월 15일) 서울 탈환
새벽 6시30분 경 미 해병 제 1사단 제5연대의 289명 병력은 인천의 월미도 상륙작전에 성공했으며 이로써 근 3개월의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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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남침 3일만에 서울을 빼앗긴 직후, 맥아더 장군은 수원근방 전선을 시찰할 때 이미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였다. 이 작전이야말로 전략, 전술적인면 뿐아니라 정치적, 심리적 효과가 극대에 달할 것이고, 더 나아가 호남 곡창에 있는 전략물자인 쌀을 북괴군에게 빼앗기지 않는 것이 한국국민에게 더 없는 값이 될 것이라고 맥아더 장군은 역설했다.인천상륙작전은 '세기의 大도박'5천대 1의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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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사령부에서는 상륙작전 계획을 구체화하여 워싱턴에 보고한다. 워싱턴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계획을 확인 토의하기 위하여 '콜린스'장군과'서먼'제독을 특사로 극동사령부에 파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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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3일에 맥아더 장군은 특사단에게 약 한시간동안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타당성 설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강한의지를 보이는 결론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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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나의 판단이 빗나가 승리할 수 없는 방어로 돌입한다면,나는 몸소 그 곳에 나아가 상륙군이 피나는 좌절을 맛보기 전에 철수시킬 것이다. 그 때 유일한 손실이란 나의 직업적인 명예뿐 일 것이다. 그러나 인천은 결코 실?하지 않는다. 인천은 성공한다. 그것은 10만명의 생명을 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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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콜린스 장군은 그 연설이 '감동적인 연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은 8월 30일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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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 함정 226척을 포함한 총 261척의 상륙작전 기동부대는 약 75,000명을 상륙시키는 데 성공하였다.그리고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여 북진하고 있는 미 제1기갑사단과 인천으로 상륙한 미 제 7사단 병력이 9월 26일 서정리( 오산~평택간)에서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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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같은 날,한 미해병대는 연희동 및 마포 쪽에서 중앙청 쪽으로 미 제 7사단 병력일부는 서빙고,뚝섬 방향에서 서울시내 쪽으로 ,그리고 국군제17연대는 하왕십리로 진출하여 전략요지인 망우리를 점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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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새벽 서울시내 곳곳에서 시가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6시 10분 한국해병 제2대대 6중데 1소대는 박정모 소대장의 전투 지휘아래 중앙청?뜰안에 대한민국?태극기를 하늘 높이 게양하였으며,9월 28일 10시경 (종군기자들에 의하면) 명동의 교회당을 비롯한 많은 교회에서 서울탈환을 축하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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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89일간 공산치하에서 신음하던 서울은 자유를 다시 찾았고,9월 29일 12시 서울 환도식 이후부터는 눈앞에 다가온 통일만이 남은 과제임을 다짐하며 희망의 10월을 맞는다. 9월 29일 맥아더 원수는 서울을 대한민국 정부의 관할하에 엄숙한 식전에서 (환도식)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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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로서 인류의 가장 큰 희망의 상징인 UN기 아래서 싸우는 우리 군대는 한국의 수도를 해방하게 되었읍니다.공산주의자의 전제적 지배에서 해방된 시민은 다시 개인의 장와 존엄을 제일로 하는 생활을 영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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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이 입은 전쟁의 참화에 대하여 전 세계는 깊은 관심과 우의로 단호히 궐기하여 전력을 다하여 귀국을 구원하기로 맹세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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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를 살리려면 정신을 살리지 않고서는 안됩니다.UN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본인은 각하에 대하여 귀국 정부의 소재지를 회복하고 ,이에 따라 각하가 헌법상의 책임을 충분히 달성할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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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우리들은 한국국민에 관한 책임을 각하와 귀 정부에 맡기고 본관과 부하장병들은 다시 군무에 전념할 각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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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北韓進擊) 9월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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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총 사령부는 모든 작전부대에 대하여 일단 38도선에서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6.25의 불길 석에서 찾아낸 단 하나의 보람이 있다면 그것은 국토통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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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령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승만 대통령은 즉 시 군 수뇌들을 불러 비장한 결의를 다짐하였다.-[단독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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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과 정일권 총사령관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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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국군의 통수권자는 맥아더냐? 아니면 이 나라 대통령이냐?..UN은 우리가 38선을 넘어가서 국토통일을 이룩할 권리를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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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총사령관 정일권 소장: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이미 대통령 각하께서 서명하신 문서에 따라 UN군 총사령관에게 이양되었으므로 지금 다시 이중으로 명령을 내리시게 되면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또한 북진에 관하여는 UN에서도 곧 결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오니 좀?더 형세를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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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 의견은 다만 군사지휘 계통에서 말씀 드리는 것이고,대통령 각하께서 국가 상황으로 보아?꼭 그렇게 하시는 것이 ?겠다고 명령을 내리신다면 저희들은 오직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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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대통령은 품안에서 명령서를 꺼내어 정일권 사령관에게 건넸다.
"내가 이 나라 최고의 통수권자이니,나의 명령에 따라 북진을 개시라"( '晩'자의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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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권 총사령관은 강릉지구로 북진하고 있는 1군단장 김백일 소장에게 "작전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 국군이 반드시 점령해야 할 38선 북방의 뚜렷한 지형지물이 없겠는가?" 정일권 장군은 제 1군단장의 회신을받고,워커 8군사령관과 협의, "38선 바로 북쪽 00 고지로부터 적의 저항이 치열하여 국군이 큰 손실을 입고 있으니 이를 점령 안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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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권 총사령관은 다음날 제 1군단 가령부를 방문,최전방 제3사단 (이종찬 대령) 23연대 작전지역으로 나아가 전선을 시찰,그것에서 38선 돌파를 명령했다. 10월 1일 국군 제3사단 23연대(김종순 대령),22연대 (김응상 대령)도 이미 월선직전에 있었느데 ,정일권 소장은 전방시찰 중 23연대장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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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전황이 아떤가?"
"한 사람도 월북 안했읍니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빨리 북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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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사령부는 10월 1일'조선인민군 총사령관'에게 "항복"하라는 성명을 발표 했으며,10월 2일 북진을 명령하였다. 10월 5일 중부전선에서 국군 제 6사단이 월선북진을 시작했고, 제3사단 23연대와 24연대는? 선두전진하며 하루 24 km 씩이나 북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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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7일"한국 평화통일에 관한 8개국결이안"이 UN에서 찬성 47/반대 5/기권 8로 가결되었는데, 제 2항에 "UN군은 한국 통일정부 수립에 필요한 기간을 넘어서서,한국의 어떠한 지역에도 머무를 수 있음"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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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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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제 1사단장은 10월 6일 미 제 1군단 본부에서 '작전명령'을 수행하라는 연락을 받고, 단독으로 청주에서 대전으로 가서 작전명령을 받아 보고 매우 실망하였는데; 평양 공략을 포함한 북진계획에 제 1사단은 예비대로서 해주 공격의 임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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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그의 수기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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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밀어 오르는?묘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다시 한 번 간청을 했다.
"밀번 장군! 평양은 저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평양까지의 도로나 지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읍니다.장군께서도 아시다시피 여기 평양까지 가는 도로는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차량의 기동에 많은 장애가 있읍니다. 이러한 지형에선 어떤 경우에는 차량보다 도보행군이 더 유리할수 있읍니다. 우리 사단에게 임무를 주십시오. 그러면 밤낮으로 도보행군을 강행하여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하여 보이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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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새 흥분하고 있었다. 평양탈환은 기어코 내 손으로 이룩해 보이겠다는 의지가 감정을 자극해 버린 것이다. 밀번 장군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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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시선이 어색하게 교차하고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초조와 불안과 분노의 격류가 온 몸을 휘감고 드디어 눈물이 터져 나와 버렸다.
나는 위신도 체면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밀번장군 앞에서 울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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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도 평양공격의 임무르 원합니까? 제너럴 백"
"원합니다! 꼭 맡겨 주십시오,밀번장군!
나는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말했다.
"제 1사단의 기동력으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읍니까?"
"저는 거짓말 하지 않읍니다.문제없이 평양을 탈환해 보이겠읍니다. 약속하겠읍니다. 훌륭한 전과를 보여 드리겠읍니다."
"좋읍니다. 제너럴 백! 당신의 애국심과 용기를 샀읍니다."
결심을 한 그는 행동이 빨랐다. 즉시 참모장을 전화로 불렀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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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 평양시내의 수많은 교회당에서 종소리가 일제히 울려퍼지는 가운데,국군과 UN군을 환영하는 인파가 평양거리를 메웠다. 10월 21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은 인산인해를 이룬 평양시민 대회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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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동포여러분! 만고풍상을 다 격고 39년만에 처음으로 대동강을 건너 평양성에 들어와서 사모하는 동포여러분을 만날적에 나의 마음속 감상을 목이 막혀서 말하기 어렵습니다. 40년 동안 왜정 밑에서 어떻게 지옥생활을 했던가를 생각하면 눈물이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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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입성의 선봉으로 영예의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은 국군 제1사단은 승리의 결의를 다시한번 다짐했다. 같은 날 도쿄에서 날아온 맥아더 원수는 미군 첫 평양돌입 부대인 제5기병연대 F중대를 사열했다. 이때 그는 96일전 포하에서 처음으로 상륙했던 200명 가운데 고참병이 있으면 앞으로 나와 보라고 말했다. 나온 병사는 겨우 5명, 그 중에서 3명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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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전선: 국군 제 군단 (제 3사단,수도사단)은 10월 10일 원산진출 (제3사단),10월 17일 함흥,흥남에서 진출(수도ㅓ사단)하였다. 10월 26일 미 제10군단이 이원(利原)으로 상륙하여 미 해병 제 1사단과 미 제7사단 일부는 장진호 지역,미 제 7사단 일부 및 국군 3사단 일부는 혜산진까지 (11월 21일) 그리고 수도사단은 11월 24일 현재 청진까지 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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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공군 개입과 ,전선교착,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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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15일 웨이크(Wake)섬에서는 트루만 미국 대통령과 맥아더 UN군 사령관의 회담이 열렸다.맥아더 장군은 한국동란에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그러나 실은 이미 일주일 전, 10월 7일부터 약 12만의 중공군이 압록강 및 두만강을 도하하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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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련의 변화 속에서 10월 24일 국군 제 6사단 1연대에서 중공군 포로 1명을 나포하여 사단장에게 보고하였으나 "대수로울 것 없다., 계속 북진!" 했고, 10월 25일 제 6사단 2연대는 온정리 사북쪽에서 중공군과 첫 교전이 있었는데 이때 중공군은 꽹과리와 피리를 불면서 공격해왔다는 보고 등 중요한 판단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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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제 6사단 7연대 1대대 수색소대는 초산을 거쳐 압록강에 가서 태극기를 곳고, 대통령께 진상할 압록강 물을 담아왔다.서부전선의 미 제 8군은 11월 1일 청천강까지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면서 중공군과의 전투에 돌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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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군이 동서로 분단되어 (미 제 8군과 제 10군단) 서로 독립작전을 수행함으로써 동.서간 50마일의 공간이 형성되어 군수 보급문제 등 제반작전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1950년 10월과 11월에 한국전선에 투입된 중공군 병력은 9개군단,약 36만 명으로 추산된다.(휴전시까지 100만명으로 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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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 참전하자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청천강 지역에서 11월 24일 미 제 8군은 총공격을 시도하였는데 이에 맞선 중공군 주력5개군단은 11월 25일 근대미문의 인해전술로 일대반격을 갑행하여 UN군의 북진을 저지했을뿐만 아니라 12월 1일 UN군에게 청천강 남안으로의 철수를 강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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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철수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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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전선에서 UN군은 가급적 접전을 회피하면서 청천강 방어선에서 철수하였고, 국군 제 1사단 15연대가 12월 4일 최종 부대로 평양을 철수하였다. 이 작전에서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은 동측으로부터의 중공군의 포위였다. 특히 미 제1기병사단과 터키 여단, 영국군 제 27여단은 미 제 8군 우익에 투입되어 이 철수 작전을 엄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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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지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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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 이 지구에 투입된 중공군 제 3야전군 주력인 6개 사단 약10만 명 병력에 의해,장진호 서측을 통과하여 북진중인 미 해병 제 1사단이 완전 포위를당하고, 호수 동쪽에 있던 미 제7사단의 2개 대대도 돌파를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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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헤이그( 당시 10군단 참모,전 미국 국무장관)의 증언에 의하면 11월 말 경 상당히 지친 모습을 한 중공군 포로 26명을 알몬드 10군단장이 직접 심문을하였는데 그들은 10월 초에 이미 투입된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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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는 전혀 예기치 못한 함정에 빠진 것이다. 영하 30도의 강추위,1M이상의 폭설등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자들은 그대로 동사했으며 사상자 수는 4천 4백여명에 이르렀고, 미군 전쟁 역사상 최악의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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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기에 탑재한 공군기의 지원과 엄호를 받으며 적을 화력으로 제압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하여 겨우 12월 9일 제 1연대 1대대가 미 제 3사단 특수임무 부대와 합류에 성공하여 흥남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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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철수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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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13,000명 미군 31,000명 등 모두 44,000명이 12월 11일 흥남항에 집결 14일 승선을 개시하면서 철수 작전이 시작됐다.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눈이 오는 날은 백색 위장복을 착용하여 교두보를 침투 위협하였으나, 미 공군의 근접지원 폭격, 해군의 함포사격 등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게되자 12월 21일 인해전술을포기하고 , 북한군 단독으로 공격할 것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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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미 제 3사단 병력이 승선완료함으로써 흥남철수 작전을 성공리에 완료되었다. 흥남에서의 민간 피난민 탈출작전은 6.25 동란 가운데 으뜸 가는 '모세의 기적' 같은 역사였고 '한국의 모세' 또는 '한국의 쉰들러'라고 불릴 한봉학 박사(의사)는 한국전쟁사에 기리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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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학씨는(1922년 청진생)
당시 제 10군단 알몬드 장군의 군사고문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피난민을 함께 승선시킬 수 없다는 군단장에 애원하여 98,100명( 상당수가 기독교인)의 생명을 구원하였다.(헤이그 전 미국 국무장관 및 포니 해병대령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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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선 7척,LST 6척 도합 13척에 10만명 가까운 피난민들이 선박 구석구석,차량 밑, 장갑차 위에까지 쪼그리고 앉아 거제도까지 홍해를 건너는 심정으로 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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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은 장군( 당시 해병연대장) 증언에 의하면,
" 현박사가 해병대 통역관으로 있을때 전투중 부상당한 해병대원에게 그 자신의 혈관과 부상병 혈관을 직접 호스로 연결하여 피를 넣어주는 장면을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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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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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군은1950년 12월 31일까지 임진강 하류 (서부)와 동해안 38도선을 잇는 새로운 방어전으로 후퇴하였다. 1951년 신정을 기해 중공군 16만명 북한군 7만명 등 모두 약 23만명은 38도선을 일제히 돌파하려고 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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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방어망 구축을 시찰 중이던 8군사령관 ?터 장군이 12월 23일 자동차 사고로 전사, 릿지 웨이 중장이 12월 26일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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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제 8군 정면에는 평상시의 10배에 달하는 포탄이 낙하, 파상적인 인해전술로?인해 돌파구가 점차 확대되어 1월 3일 현 전선이 붕괴됨에 따라, UN군은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어선 [오산-제천-삼척]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동시에 부대 재편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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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재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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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15일 미군 특수임무부대는 오산-수원간의 적 배치상황을 탐색하기 위하여 수색 정찰 전투를?개시하였는데, 별다른 저항을 받지않고 복귀하는 전세호전의 기미가 엿보였기 때문에 릿지웨이 장군은 1월 25일부터 선더볼트( Thunderbolt) 작전 즉 항공지원하 보전포(步戰砲) 협동작전으로 적군을 분쇄하면서 한강선까지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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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수 많은 작전의 성공과 실패등을 거치면서 반격을 계속하여 3월 18일 UN군은 서울을 재탈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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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협정 조인
1951년후반에 접어들면서 전쟁의 양상은 점차 변해갔다. 휴전회담의 개막과 더불어 쌍방은 다 같이 마지막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군사작전을 계속할 것이라는 태도를 밝혔으나 내심으로는 협상을 파국으로 몰아 넣을지도 모를 대규모 공세작전은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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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전쟁의 양상은 '진지전','수색정찰전',' 고지 쟁탈전','교란사격과 방해폭격' 등으로 변했으며, 1952년 초 중동부 전선의 '금화지구전투', 양구북방 '크리스마스' 고지작전 그리고 52년 후반의 '백마고지 전투'가 전사에 특기할만한 전투들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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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휴전 직전인 5월 및 7월, 2차에 걸쳐 중공군은 휴전을 유리한 조건으로 성립시키고자 3개사단 및 8개 사단 규모의 공격작전을 감행하였다.그러나 UN군의 반격으로 종결되는 작전들이었고, 그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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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거국적인 반대에고 불구하고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개시된 이래 24개월간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조인되어, 우선 총성은 멎었으나 그렇게도 바라던 통일의 꿈은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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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온 국민은 거리거리에 나와 외쳤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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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100여 명의 귀한 목숨을 구하신 한봉학 씨와 이 청을 들어주며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신념으로 대한민국의 피난민들을 구해주신 미군단장님께 삼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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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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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쟁사상 유례없었던 '본국 송환거부'(반수 이상이 거부) '포로수용소 폭동'(수용소장 돗드 준장 납치) '반공포로석방' (이 승만 대통령의 영단) 등으로 휴전 회담이 정치문제화로 혼란을 초래한 '포로문제'와 '전투경찰의 작전' 문제 (예: 개성 철도 경찰대의 전원 순국,주요시설 보급로 경비, 피난민 정리,후방 게릴라 소탕 합동작전 등)를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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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에 들어가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한미 군사방위조약의 체결','연간 경제원조 2억달러', '국군 20개 사단 증강 및 해.공군력 강화' 등 보장을 받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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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 군인의 사상.실종자가 230만명, 남 .북의 민간인 350만명,피난 이재민 370만명,공산측에 의한 학살.납치 20여만명,전쟁고아 10여만명,이산가족 1,000만 명...모든 것이 부서졌고 불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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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이전에 월남한 동포 100만명,전쟁시 북한에서 피난 내려온 60여만명,반공포로 약 4반명 등은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자유'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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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에서의 포성과 살상이 멎은지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 와서 6.25를 다시 조명해보며 그 의의를 느껴보는 일에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북쪽 하늘에서는 아직도 고통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래도 민족을 유지시켜 주심은 무슨 뜻일까. 6.25 때의 결정적인 순간순간들을 주통치 주관하셨음을 깨닫게 해주심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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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미국을 들어 신속하게 쓰셨다.(안보리의 긴급회의시 소련대표를 불참토록 하였고),UN으로 하여금 파병토록 하심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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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미국으로 하여금 50년전에 세계 평화의 씨앗을 이 땅에 심어주셨다는 일이다. 한 전투에서 추위에 동사한 약 7천명의 미국 해병대원들을 비롯하여 16개국에서 온 15만명의 젊은이들이 왜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켜야 했는지..그들 국가의 요청에 응해 이 땅에 와서 한국을 지캬주는 거름이 되도록 하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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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6.25 전쟁은 한국 선교 뿐만 아니라 세계 선교를 위하여 그 결과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나타나는 것 같아 놀라고 놀랍다.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애태우던 북한 신앙인들을 끌어 내렸고, 흥남에서 실어 날라 더 넓게 복음이 전파됐고, 지금은 전세계 방방곡곡에 선교 일꾼들이 돌아??다니게 하셨다.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와서 싸워준,그리고 그 청춘들을 받친 16개국 국민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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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전(전투병력 파견) 16개국:
미국,영국,프랑스,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델란드,그리스 ,터키,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디오피아,필리핀,태국,호주, 뉴질랜드, 콜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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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지원 5개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탈리아,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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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있기까지 도움을 주신 변일현 영락교회 OCU회장( 장로)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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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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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군인의 사상,실종자:? 230만 명
민간인:350만명 피난 이재민: 370만명
공산측에 의한 학살.납치:? 20여 만명
전쟁고아:10여만명 이산가족:? 1,000만명
월ㄴ마한 동포, 북한피란민, 반공포로 :? 204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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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12만명의 8군단 특수부대, 120만명의 정규군,500만 명의 예비군을 가졌으며 핵무기 이외에도 세계 3위의 생물무기와 화학무기,800개 이상의 미사일보유 1만3000문 이상의 야포를 보유한 군사강국으로 호시탐탐 무력 도발을 자행하는?북한에 대한 반공을 국시에 제 1위로 삼아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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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없이 총공격을 개시해야만 한다. 전국적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의 도처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전화.발전소.방송국 등 중요한 공공시설을 점거함과 동시에 지역 전력의 공급중단과 함께 통신.교통망을 마비시키고,임시혁명정부 臨時革命政府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하며, 군 주둔지역에 부식되어 유사시 군 주요 요인을 암살및 납치하여 지휘를 문란케하며 중요 군사기지를 파괴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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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一成(김성주가 본명)은 1945년부터 6.25 전쟁 이전까지 10월 대구 폭동, 조선 정판사 위폐 사건, 여순반란사건, 제주 4.3 유혈폭동 등의 배후였고, 이는 소련 스티코프 대장의 문서 등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그리고 6.25 전쟁 때 수백만의 동족을 학살했다. 여기에 숱한 납북자, 국군포로, 反체제인사들에 대한 폭압, 그리고 아들 金正日 대에 이르러 KAL기 폭파, 울진삼척 테러, 1.21 청와대 습격사건, 등 테러행위에 이어 체제 유지를 위해 300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을 餓死시켰다. 이런 천인 공로할 인간들을 편들고 조국을 배신하는 방송을 한 MBC는 좌익. 선동방송으로 나라보다 주적을 더 걱정 해주는 빨/갱/이 방송이다. 호남인이 주축인 역적방송 MBC를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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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一成(김성주가 본명)은 1945년부터 6.25 전쟁 이전까지 10월 대구 폭동, 조선 정판사 위폐 사건, 여순반란사건, 제주 4.3 유혈폭동 등의 배후였고, 이는 소련 스티코프 대장의 문서 등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그리고 6.25 전쟁 때 수백만의 동족을 학살했다. 여기에 숱한 납북자, 국군포로, 反체제인사들에 대한 폭압, 그리고 아들 金正日 대에 이르러 KAL기 폭파, 울진삼척 테러, 1.21 청와대 습격사건, 등 테러행위에 이어 체제 유지를 위해 300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을 餓死시켰다. 이런 인간 개백정 잡놈들을 편들고 조국을 배신하는 방송을 한 MBC는 좌익. 선동방송으로 나라보다 주적을 더 걱정 해주는 빨/갱/이 방송이다. 호남인이 주축인 역적방송 MBC를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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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와이는 mbc 방송이 일체 볼수가 없는데 정말 그런 방송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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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 순옥 (한국 예비역 기독군인 연합회, 해군대령 예편 )
실린 곳: 6.25란 무엇인가?
펴낸 곳: 1) 대한민국재향군인회 02-417-0641~5
???????? 2) 영락교회 선 교부 02-228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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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영령들의 넋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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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부터
죽어서도 그 자리 뜨지 못하고
이름 모를 골짜기 한떨기 꽃으로 태어나
저기 번득이는 총검 앞세우고
내려올 적의 군홧발 탱크소리에
꽃보다 더 아름다운 충혼의 애국심으로
그리운 부모형제의 안녕을 위해
또 죽음을 맞이하려는 호국영령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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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장미보다 더 진한 피빛 울음으로
그 애국충정심에 삼가 고개숙여 추모하오니
호국의 무거운 짐 잠시나마 벗어놓으시고
영령들을 기리며 추모하는 산자들의 호곡으로
죽어가는 나라 살리려 죽어가신 그 혼 달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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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지 그 골짜기 그 들판을 지키던 애국심
피끓는 산자들이 이어받고 물려받아
짐승만도 못한 살인마귀의 동족살륙을
태양보다 더 뜨거운 구국일념으로
님들이 흘리신 선혈의 백배천배로 갚아
조국 위해 산화하신 그 넋에 바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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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원수들의 진격을 피로 막아내시며
그리운 고향산천의 부모형제 잊으셨던
애국충혼의 호국영령들이시여~
피흘리며 분개했던 통한의 날을
우리 산자들 잊지않고 따르려 하니
무거운 철모 잠시 벗어 걸어 두시고
산자들이 바치는 애끓는 추모의 념으로
전쟁과 그리움 ,고통과 슬픔 없는 곳
하늘나라 그 높은 곳에서 편히 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