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중순이 조금 지나 내 둘째 여동생이 태어 났다. 나의 아홉 형제 자매중 다섯만이 살아 있는데 고향에서 난 형제는 바로 둘째 여동생 뿐이다. (나의 형과 바로 아래 남 동생은 해방되기 전 홍역으로 사망하고 자매 둘은 앞으로 다시 말 하겠지만 피란 시절 거제도에서 사망 하였다)
우리집 생애 가장 가난하고 공포 속에 살았던 시절이라 둘째 여 동생은 영양 실조로 잔병 치레도 참 많이 하면서 자랐다. 내가 학교에 갔다 오면 어머니가 동생을 어린 나의 등에 엎히고 포대기 끈으로 흘러 내리지 않으라고 너무 꼭 조여 매시는 바람에 가슴이 답답아여 숨이 막힐 지경이어서 쩔 쩔 매던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그러시고는 농토가 없으므로 농사 일은 못하시고 바느질 솜씨가 좋으셔서 동네 삵 바느질을 도맡아 하셨다. 당시 어머니의 이 고생 하심이 우리 집안의 주 수입원 전부 이셨다.
1948년 늦 가을의 일이다. 시골 벽촌 이라 머리가 길면 할머니가 잘 들지도 않는 재봉 가위로 듬성 듬성 머리 카락을 깎아 주셨는데 아무리 기술적으로 다 깎고 다듬 었다 하여도 사내인 내머리는 흡사 얼룩말 가죽 씌어논 꼴 이었다.
나는 이것이 창피해 누가 있으면 양손 바닥으로 머리를 가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업을 마치고 귀가 하려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아주 다정히 부르셨다.
이제까지 선생님이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신 적이 없는데 나는 의아 하여 또 예의 그 얼룩말 가죽 같은 제 머리통을 감싸고 긴장 하면서 선생님께 다가 갔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내 머리를 아주 귀엽 다는 드시 쓰다듬어 주시면서 '화곡아! 네 아버지 요즈음 잘 계시지? 아버지 집에 오셨니?'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 깜짝 놀랐다. 이렇게 젊고 이쁘신 선생님이 왜 우리 아버지 안부를 물으시지? 하는 것과 그때 내 아버지는 내무서원 들에게 사상이 이상 하다고 감시를 받다가 잠적하여 이웃도 모르게 설악산 신흥사 뒷쪽 계조암에 몇년간 몰래 숨어 계실때 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를 못 보았기에 머리를 좌우로 젓고 있으면서 머리 깎은 챙피스럼 보다 나의 또 다른 관심사는 내 어머니가 계시는데 왜 선생님이 관심을 갖느냐, 이것이 더 큰 근심거리 였다.
어렸지만 나의 이성 감각은(?) 상당한 수준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기도 한다. '화곡아! 네 아버지 오시면 꼭 나에게 아무도 모르게 살짝 알려줘! 하시는 선생님의 사랑 넘치는 말씀을 뒤로 하고 창피한 까까 머리를 감싸며 집으로 갔다.
그뒤 내가 철이 들면서 생각하니 그 선생님을 통하여 내무서 원들이 아버지를 수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저는 공포의 전율을 느꼈다.
어린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걸 이용하여 그들은 나에게 아버지 행방 여부를 추적하고 있었다는 그 사실 때문이다.
늦은 가을 어느날 한 밤중 왠 일인지 홀연 잠이깬 내가 들으니 주변에서 두리번 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못 뵙던 아버지가 한 밤중에 보고 싶은 가족을 보시러 오신 것이다.
아버지가 어리 둥절한 나를 할머니가 가위로 깎으신 나의 까까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웃으시던 모습이 생각 난다.
잠든 어린 두 동생도 안아 보시고 머리를 쓰다 듬어 보시며 한참 그렇게 계시다가 보따리를 챙기시더니만 밖으로 나가셨다.
어머니가 먼저 밖으로 나가셔서 망을 보시고 들어 오시자 마자 일어난 일이다. 할머니도 허겁 지겁 밖으로 따라 나가 셨다.
1950년 1월 말까지 아버지가 설악산 신흥사 계조암에 잠적하신 뒤로 나는 이렇게 아버지 얼굴을 한번 밖에 보지 못 하였다.
이튿날 내가 학교엘 가려는데 어머니와 할머니는 번갈아 가시면서 나를 붙들고 누가 아버지에 대해 물으면 아버지 못 보았다고 대답해라! 알겠니? 아버지 못 보았다고! 알겠니? 하시면서 수도 없이 나에게 다짐 하시던 생각이 난다. 나는 나서 처음으로 어른들로 부터 거짓말을 하기를 강요 받은 셈이다. 지금 생각 하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내 앞에서 절규를 하셨다. 나는 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가 왜 저렇게나 두려운 눈빛으로 야단 이신가 속으로 의아해 하였다. 또 거짓말 까지 하라시니.... 그러나 어린 나였지만 할머니 어머니 말씀을 명심하고 누구를 만나도 아버지에 관한 얘기엔 시침이를 딱 떼었다. 모른다고 하겠다고 어른들과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였으리라.
1949년 여름 방학이 될 무렵 우리 학교에서는 기억나는 행사 하나가 있었다.
상급생 어린이 회장 격인 형이 금강산 수련을 떠난다 하였다. 운동장에서 교문까지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모두가 도열한 한가운데로 그 형이 양 어께에 손바닥 만한 계급장 같은 것을 달고 멋스럽게 지나 갈때 그때 선생님이 커다란 목소리로 '우리의 ***가 영명하신 김일성 장군님의 은혜로 금강산 수련을 떠난다!' 하면서 요란하게 박수를 치며 환송하던 기억이 난다. 일주일쯤 뒤 그 어린이 회장이 돌아 올 땐 더 대단하였다. 선생님이, '보라! 드디어 *** 이 김일성 어버이 수령님의 가르침을 받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라!' 하며 우뢰 같은 박수를 치면서 나는 그 순간 온몸에 전률을 느끼면서 나도 이 다음에 커서 저 형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면서 몹시 부러워 했던 생각이 난다. 지금도 나는 그 때의 생각이 나서 우리 대한민국의 학생들이 금강산 관광을 가는 계획을 그리 좋은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김일성 우상화의 사상교육에 동참하는 것이라 여기는 나의 시각이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두 여동생이 그렇게 원산으로 가신뒤. 고향에는 할머니와 내가 단 둘이 남아 나는 학교가는 날 빼고는 매일 할머니 치마 자락만 붙들고 졸졸 따라 다니다 시피 하였다.
할머니가 생각 하시는 맏 손주인 나에 대한 정성은 대단 하셨다.
할머니는 9남매를 낳으셨는데 모두다 유행병 (주로 홍역)에 걸려 심지어 하루 저녁에 두 아들을 잃으신 적도 있으실 정도로 충격과 한을 가슴에 가득히 지니시고 계시는 분이셨다. 정신도 한번 잃으셨다고 하였다. 오직 나의 아버님만 무녀 독남으로 살아 나셔서 성장하신 것이다. 그러니 아들과 손주들에 대한 사랑의 집념이 대단하셨다. 년년생으로 난 내 아우 때문에 나는 돌이 조금지나 할머니 차지가 되었고 할머니 젖을 5살 까지 먹어 젖이 나왔 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주로 다른 집 농사 일을 거들어 주시고 겨우 끼니 되는 정도만 얻어 오셔서 우리집 양식으로 하셨다. 워낙 부지런 하셔서 체구는 작으셨으나 기운이 쎄시어 장정들이 지는 지게를 지시며 일을 하셔서 동네 어른들이 깜짝 깜짝 놀라곤 하였다. 또 삼베 베틀에 앉으셔서 하루 종일 삐이꺽 찰가닥, 삐이꺽 찰가닥 하는 소리를 내면서 북을 오른 손에서 왼손으로 왔다 갔다 건네면서 그때 마다 바디집을 잡아 땡겨 가로로 이어진 실을 다지고 한쪽 발에 신을 신으시고 그신 코 끝에 굵은 끈이 달려 베틀 뒷쪽 위로 이어진 끈이 잡아 당겨 졌다가 풀어지고 잡아 당겨 졌다가 풀어질때 그때 마다 규칙적인 형언할 수 없는 특이하게 들리는 베틀 짤때 들리는 그 소리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할머니의 베를 짜시고 명주실로 비단을 짜시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한폭의 예술적인 동작과 같다고 생각 된다. 그 동네에서 베와 비단을 제일 잘 짜셨다고 소문이 나셨으니까.
나의 아버지가 열 다섯 되시던 그해 동짓달 초 여드레 날에 할아버지는 대포에 가마니를 짜러 가셨다가 밀폐 되다시피 한 방안에 숯불 피운데서 까스가 나와 일산화 탄소 까스에 중독이 되셔서 48세 년세로 갑자기 돌아가신 뒤에 나의 할머님은 외 아드님을 데리고 억척 스럽게도 세상 속에서 사셨다. 세상에 안 해 보신 것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다 해 내셨다고 하신다.
할머니는 내가 놀이로 가지고 있는 장남감 들은 하나도 버리시지 않으셨다. 공기돌 이고 땅 따먹기 할때 손가락을 접어 튕기는사금 파리를 동그랗게 다음은 것 이라 던지 심지어 자 치기 막대까지 할머니가 방 한 구석에 신주 단지 모시드시 잘 보관해 놓으신다.
그리고 매일 저녁 옛날 얘기를 해 주신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우리 집안 내력을 노상 들려 주셨고 특히 7대조 부터 우리 집안의 가계 이야기라 던지 조상님들과 얽힌 이야기라 던지 당신이 경험 하신 이야기라 던지 이와 얽힌 동네 다른집 역사 이야기라 던지 매일 저녁 나는 할머니의 말 동무가 되었고 할머니가 얘기 하실 때의 청수(聽手), 곧 지음(知音)이 돼 드린 것이다. 할머니가 입만 열면 할머니의 그 다음 이야기가 무엇인지 나는 다 안다. 지금까지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이상스러우리 만치 거의 다 기억한다. 할머니는 처음 말씀 하시는것 처럼 항상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 하신다. 마당에 멍석 깔고 할머니 옆에 누워 타 들어 가는 쑥으로 된 모기 불 연기를 쐬어 가며 은하수를 쳐다보며 이건 뭐고 저건 뭐고 하면서 초가지붕 위에 달린 둥그런 참 박위로 날아 다니는 박풍도 쳐다보며 설악산 앞산 송암산 아래 동네에서 할머니와 나는 그렇게 지나며 부모님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