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은 붉게 물들어
단풍놀이 제철을 맞았다고
잎새들 너울너울 춤을 추는데
뒷산 멧둥들도 살이 오른다는 가실에
여기 늙어빠져 헐은 잇몸으로
빈 농약봉지처럼 퀴퀴한 내음
몸빼 가득한 할망구에
묵은 밭뙈기처럼 황폐한 얼굴들
함께 서울로 가네
고장난 경운기처럼 툴툴댄다고
태풍피해 몇 푼을 던져주면
또 한 해를 슬쩍 넘어가는
속절없는 세상판을 뒤집어보자
희망도 갈아 엎은 지 오래
쭉정이라도 한 데 모으면
불씨가 될지 몰라
우리 오늘 서울로 가네.(박남인)
-농민의 깃발 아래로
지난 12일 오후 2시 진도 향토문화회관 후문 쪽에 차량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수일 전부터 대회 참가를 독려하는 진도군농민회 소속 방송차량이 진도 전역을 누비고 다녔다.
농정파탄의 책임을 묻는 준엄한 심판을 내려야 하겠다고, 이대로는 450만 전국 농민들이 그대로 앉아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실정에서 현정부와 위정자와 농정책임자들에게 단호한 입장을 천명하는 이 대회에서 본 때를 보여주리라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진도읍 동외리 성죽굴가는 입구에서부터 대형버스가 줄을 서기 시작해 한시간여 후엔 향토회관을 넘어선 장관을 연출했다. 지산 금노에서 임회 죽림에서 해안에서 굴곡진 마을길을 벗어나 속속들이 모여드는 차량들.
진도군 유사 이래 진도 바깥을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몰려나간 것은 불과 몇차례 되지 않는다. 1271년 저 삼별초 항쟁 당시 2만여명이 포로로 몽고병들에 끌려간 아픈 역사와 왜구의 빈번한 노략질에 영암 시종면으로 혹은 해남 삼산면으로 잠시 피신한 역사였지만 이번만은 군민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모여 무려 1천 300여명이 40여대의 차량에 탑승, 서울로 서울로 향하였다.
핵발전소반대 상경투쟁도, 그 많은 싸움의 마당에는 소위 일당백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농민회원들이 주축이 되었을 뿐 일반 농민들이 이렇게 함께 모여 출진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오후 3시 조금 넘어 양인섭진도군수를 비롯한 많은 군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천리길 장도에 올랐다. 우리 진사연 회원은 농민회 소속인 조성문, 조성옥 그리고 진도민협 상임대표를 겸하고 있는 조정일의장과 내가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또 우리와 함께 서만석핵반대위위원장이 동참하여 홍보물을 차량마다 나누어주었다.
-일백인걷기대회 시발점 진도
신민식사무국장이 학교수업관계로 바쁜대도 불구, 장도의 격려금을 갖고 배웅을 해 주었다.다른 지역이야 다 당일 출발, 참가이지만 우리는 국토대장정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은 일정이다. 올 여름 농업회생을 위한 비장한 결심으로 100인이 모여 진도(용장산성)에서부터 일백일 걷기운동을 펼친 것도 이제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진도농민들의 뜨거운 의지가 민주사회를 갈망하는 오늘의 수많은 군민들과 함께 하며 살기에 진도는 새롭게 민주의 성지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날 출발장소에는 그러나 아쉽게도 진도군의회 의원들은 도대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군의회는 진도농업과 그 미래를 그렇게도 낙관하고 있는 것일까? 우습게도 진도경찰서 정보과는 참가인원을 대거 축소 보도하였다가 들통(?)나는 헤프닝이 펼쳐지기도. 하여 정보과직원이 해남 광장에서 강제 하차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다.
-여기서 잠시 진도농민운동사 들춰보기
1934년 4월 진도에서는 몇몇 청년들이 ?사유재산제도 부인을 전제로 지주계급을 타파하고 농민생활을 안정하게 보장하기 위해? 진도적색농민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주객관 정세를 분석한 위에 운동방침, 행동강령, 규약을 결정하고 산하에 서기국, 교양부, 조직부, 재정부 등의 부서와 각 면별 조직 책임자를 두어 활동에 들어갔다.
그들은 수개 里에 하부조직을 설치하였고, 일부 서당을 야학으로 개조, 장악하여 청소년의 의식을 깨우치기도 했다. 그러나 농민대중과 긴밀한 결합없이 소수의 지식청년들만으로 성급하게 결성된 진도농민조합은 스스로 한계를 느껴 출범 4개월만에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삼천만을 깨우는 농민가
차량 안에선 사전에 전농집행부에서 제작한 홍보테이프가 방영되었다. 전농회장을 비롯, 전국연합 의장과 아직도 이적단체의 슬픈 딱지를 떼지 못한 한총련 의장의 격려인사말에 이어 농민들의 애국가로 정착된 지 오래인 농민가 따라부르기가 나온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형제 울부 짖던 날/ 손가락 깨물며 맹세하면서/ 진리를 외치는 형제들 있다." 수세폐지, 고추수매 싸움에서 얼마나 비장하게 불러왔던 노래인가. 우리는 지금 그러나 '아스팔트 농사'를 지으러 가는 중이다.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들. 진도농민
각 동네마다 마을 부녀회를 중심으로 자비를 들여 음식을 장만하고 차량임대 경비까지 자체 모금하여 진도를 떠나는 농민들은 추운 날씨에도 격정을 가누지 뭇한 채 돼지고기 보쌈으로 배를 채우며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렸다. 소주기운이 추위를 녹인다.
'일년 내내 뼈바지게 농사지어도 남는 것은 빚뿐'이라는 노래가사처럼 심신이 시들고 허허로움만이 들판을 뒤덮는다. 언제 누가 농약병을 마셔버릴 지 아무도 모른다. 진도가 자랑하던 구기자도 대파도 이제 수지가 맞질 않는다. 그렇다고 농사 이외에 달리 할 것도 없는 진도. 그래서 진도사람들은 끊임없이 노래를 만들고 불러왔을까.
고창휴게소에서 잠시 쉬는데 깜박 해남에서 차를 놓친 분이 있다고 선도차량 방송이 나왔다.
차량별로 선탑자가 인원파악을 수시로 해 왔지만 아차하면 이런 우발사고가 발생된다. 나도 예외는 아니리라.
일곱시가 넘어 중부지방 유성에 도착했다. 이곳은 온천관광지로 유명한 곳답게 유흥업소와 숙박업소가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거리에 불온전단처럼 수없이 널려져 있는 광고쪽지명함들엔 늘씬한 알몸의 여인들이 요염한 미소와 뇌쇄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폐해가 여성들을 더욱 노골적으로 성상품화하는 가운데 농어촌의 남자들은 평등한 맞선이나 연애의 권리를 무참히 박탈당하고 있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차라리 묻지마 관광들은 천진한 편에 속하지 않을까?
젊은이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차량 차창 가득히 절묘하게 꽂아놓는다.
-어머니 대지의 땅을 일궈온 사람들과 함께
조의장과 나는 의신면 응덕 연주리 주민들의 차를 타고 가 런던파크장에 숙소를 잡았다. 604호. 방은 넓다. 조의장, 서위원장 그리고 나와 갑자기 나타난 의신면 옥대리 점방주인 이렇게 네사람이 방을 쓰게 되었다. 옥대사람은 이미 술기운이 제법 올랐는지 바깥에 나가면 18만원짜리 오입질을 입에 올리다가 먼저 잠에 들었다. 동네사람들은 사실 효도관광을 여러차례 다녀온지라 나같은 젊은 촌놈과는 비교가 안된다.
도대체 요즘 들어 나는 정신이 없다.
출발 전에 아무리 가방을 뒤져 보아도 수첩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주말 녹차씨를 줍기 위해 영암 미암에 가서 김정호향토문화진흥원장, 이병진진도예총지부장 등과 녹차통닭에 소주를 들이붓다가 지녁 늦게 진도에 와 다시 우리 진사연 후원회원인 예림카페의 미향씨등과 어울려 또 얼마나 목운동을 해 왔던가. 우수영에서 산 젓갈은 형제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었다.
그 깊은 밤 동생 애숙이와 광주에서 온 형들과 또 막걸리에 소주를 섞어 거의 인사불성, 다음날 온 형제간이 다 모여 가게에 딸린 어머니 방 도배를 했다. 장판도 새로 깔았다. 나는 풀질을 했다. 어질어질 한 가운데 한나절 작업이 끝 난 후 텃밭에서 뜯어 온 야채에다 삼겹살 구이를 싸먹는 맛도 일품이었다.
오후에는 형제들을 이끌고 첨찰산 숲을 찾았다. 하늘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단풍잎이 너무 곱기만 했다. 우리는 절 뒤편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 길 옆에 떨어진 잣밤(짝밤. 정식명칭은 구실잣밤)을 줍기 시작했다. 그 고소한 맛을 아는 이들은 이 철을 고대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잣밤도 뿌리 약한 감나무처럼 해걸이를 한다. 박노해시인은 '해걸이'를 하는 것은 '뿌리에 힘을 모으는 일'이라고 규정했다.
일요일은 그렇게 갔다. 술에 쩔은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 채 다음날 아침 아내와 함께 죽림진료소로 향했다. 수첩도 오버도 다 어디로 갔는가? 월요일은 도대체 무엇을 했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화요일은 장날이며 나는 죽림에서 아홉시50분 버스를 타고 읍내로 갔다. 아직 시간은 있다. 나는 편지글을 썼다. 늘푸른아카시아와 구운몽이다. 인천사는 친구들에게도 메일을 보냈다. 혹여 누굴 만나지는 않을까?
예향신문사에 들려 컴퓨터를 켠다. 가만 점심은 어떻게 하지? 또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일요일밤은 그놈의 신문사에서 잔 것 같은데. 그러면 어떻게? 창준이와 병영이와 뭘했지? 건망증이 아니다. 진도문협과 광고동문회 그리고 청첩장을 건내준 관사도 박진우합동결혼식이 내일인가? 가만 열흘 후면 조갑련실장 해남지원 공판날이다. 자꾸자꾸 일기라도 써야 치매적 현실에서 벗어난다. 아버지 약을 타러가는 광주일정은 또 어떻게 잡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