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의 죽음과 말씀 흥왕
사도행전 12:20-24
신약에 헤롯이란 이름이 여럿이 나오기 때문에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 왕으로 임명된 헤롯입니다. 대헤롯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얻기 위해 성전을 건축하였고 탄생하신 예수를 죽이기 위해 많은 어린이를 학살했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대헤롯이 죽고 그의 세 아들 아켈라오와 안디바스 그리고 빌립이 분봉왕 헤롯으로 등장합니다. 아켈라오는 동생 빌립의 아내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삼았음을 옳지 않다고 책망한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인 헤롯입니다.
유대를 삼분하여 아켈라오, 안디바스, 빌립을 분봉왕으로 다스렸지만 형제간에 서로 다투다가 아켈라오의 아들이요 대헤롯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가 다시 통일 왕국의 왕이 되어 유다와 사마리아까지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심문하고 로마 가이사 황제에게로 보낸 헤롯은 아그립바 2세로서 대헤롯의 증손자입니다(행25과26장). 이렇게 해서 여섯 명의 헤롯이 있습니다.
본문 20절에 헤롯은 대헤롯의 손자 아그립바 1세입니다. 아그립바 1세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통치하는 큰 실세를 가진 유대의 왕이지만 왕노릇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왕 위에 로마 황제가 있기 때문에 황제의 눈에도 잘 보여야 했으며 백성들의 환심도 사야했습니다. 당시 황제는 로마 대제국이 항거하는 소동이나 혁명이 없고 조용하기만을 바랬습니다. 황제는 특별히 유대의 평화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예루살렘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소동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크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1세 헤롯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였습니다(2). 야고보가 의인이냐 악인이냐, 죄가 있느냐 없느냐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냥 죽였습니다. 한 사람을 죽여서 예루살렘이 조용해진다면 그냥 죽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대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장로들로 유대종교 지도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야고보를 죽입니다.
야고보를 죽였더니 아니나다를까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 더 죽이면 더 좋아하겠구나, 그래서 베드로를 죽이려고 잡았는데 그날이 무교절이라 죽일 수가 없어서 옥에 가두고 든든히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베드로를 감옥에서 끌어냈습니다. 사람들은 천사가 베드로를 끌어냈다고 하는데도 헤롯은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애매한 간수들만 죽였습니다.
헤롯이 가장 두려워하고 떨어야 하는 때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이 지금 어떻게 운행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 천사가 베드로를 옥에서 풀어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생각하고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헤롯은 야고보를 죽이고도 조금도 가책이 없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을 목베어 죽였는데도 괜찮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사의 도움을 받아 베드로가 옥에서 나왔다면 헤롯이 두려워해야 하지 않겠습까?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헤롯에게 결정적인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헤롯에게 주어지는 심판은 가난과 질병의 고통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악을 행하고도 형통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어진 심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거든 때가 온 줄로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헤롯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했습니다(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편했다는 말입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무엇을 어쨌기에 헤롯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지 알 수 없지만 아래의 문맥을 보아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필요한 식량을 비롯한 모든 생필품들이 항구 도시인 두로와 시돈을 거쳐야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롯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에 노여워했다고 봅니다. ‘노여워하다’란 말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적대감을 품은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헤롯이 노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왕국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기 때문에 부득불 헤롯과 화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롯과 화친하기 위해서 왕의 침소를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했습니다.
‘블라스도’란 이름은 전형적인 로마인의 이름입니다. 로마 사람을 자신의 침실을 주관하는 내시로 삼았다는 것만 봐도 헤롯은 친로마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침실을 주관하는 내시라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블라스도를 설득해서 헤롯과 화해를 하고자 한 것입니다.
헤롯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의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의 화해를 위해서 특별한 날을 택하였습니다(27). 그런데 헤롯이 어느 날을 택하였는지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 요세푸스의 기록에 로마 황제의 생일날을 택하였다고 합니다. 헤롯은 로마 황제의 생일을 축제의 날로 택하고 주둔한 로마군인들을 비롯하여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아울러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생일 축하를 받아야 할 로마 황제가 그 자리에 없으니까 결국은 황제의 단상에 헤롯이 앉아서 황제가 받을 축제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를 풀고 화해를 하겠다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때 은을 쳐서 만든 왕복에 햇빛이 비쳐 광채가 나는 헤롯을 보고 보고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비롯한 백성들은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헤롯의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의 화해를 위한 연설을 신의 소리라고 말 한 것입니다.
헤롯을 향하여 ‘당신을 신으로 섬기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왕이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단의 교주가 이렇게 해서 신이 되는 것입니다. 북한 사람들이 이렇게 해서 김일성이를 신으로 만들었고 아들 손자까지 신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은 그에 대한 말이 없습니다. 말이 없다는 것은 자신을 신이라고 하는 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리어야 할 영광을 자기가 받았습니다. 헤롯이 적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그런 아첨의 소리를 들었을 때 마땅히 꾸짖어야 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에 고넬료가 온 집으로 더불어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베드로에게 절하였을 때에 베드로는 황급히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라’(행10:26)고 말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걷지 못한 사람을 고쳐 걷는 것을 보고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하며 제사를 지내려고 했을 때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며 ‘신이 아니라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행14:15).
그런데 헤롯은 신이라는 말을 그대로 수용한 것입니다. 바로 그때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23)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때 헤롯이 죽으면서 ‘너희가 나를 신이라고 부른 것으로 인하여 나는 죽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이라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나는 신이 아니라’는 말을 못했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대한 칭찬을 듣고도 침묵하는 것은 수용하는 것입니다. 헤롯은 인간으로서는 받을 수 없는 칭찬과 존경을 기분 좋게 받아들인 죄로 죽었습니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가 탈옥했는데도 헤롯은 양심에 가책도 없을 뿐 아니라 ‘신’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침묵했습니다. ‘신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신이라는 말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신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헤롯은 기분이 좋아서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자신을 신으로 수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12장에서 대조적인 두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23절에 헤롯은 주의 사자가 치니 벌레에 먹혀 죽었다는 말씀과 7절에 주의 사자가 옥에 갇혀 자고 있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쇠사슬에서 벗어나 살아났다는 말씀입니다. ‘치다’는 말과 ‘쳤다’는 말은 원어로 점 하나도 다른 것이 없는 동일한 ‘파탓소’ 입니다. 동일한 주의 사자가 동일하게 쳤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심판의 대행자로 나타난 주의 사자가 헤롯은 죽이기 위해서 쳤고, 베드로는 살리기 위해서 쳤습니다.
헤롯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 사자가 쳐서 벌레에게 먹혀 죽었습니다. 외경 마카비서에 의하면 배에서 벌레가 나오고 그로 인해 악취가 날 정도로 몸이 썩어들어가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를 핍박하고 사도 야고보를 죽인 헤롯이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쉽게 범할 수 있는 것은 과분한 칭찬을 듣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과분한 칭찬을 듣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고 그 칭찬을 받아들입니다. 속으로 좋아할 뿐 사양할 줄을 모릅니다. 분에 넘치는 칭찬을 듣고서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사람 잘 못 봤소’라고 말을 못하고 받아들이므로 작은 헤롯이 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가 형통하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죄를 지었으면 불행해야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일이 잘되고 형통하는 것을 보고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축복이 아니라 망할 징조가 가까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불의한 것에 대한 심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헤롯이 죽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 하더라”(24)고 하나님께서 오늘 나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므로 교회 성장의 비결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헤롯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지더라는 이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헤롯이 죽음으로 베드로가 더 높아지더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헤롯이 죽었지만 베드로는 역시 쫓겨 다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교회는 성장하였다는 말씀입니다.
헤롯의 죽음이 있은 후 복음이 더욱더 널리 전파되어 감을 나타내 줍니다. 아무리 혹독한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교회가 흥왕하는 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요 섭리입니다.
이 말씀에서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박해하고 복음 전하는 사도들을 죽이고 훼방하는 헤롯을 주의 사자가 쳐서 심판하시므로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더하더라’는 말씀은 다음절(25)에 “바나바와 바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는 말씀과 상당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헤롯의 죽음으로 지금까지 초대교회에 주역이었던 베드로의 사역에 대한 말씀은 더 이상 없고, 헤롯의 죽음으로 바나바와 바울이 초대교회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헤롯의 죽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말씀 승리의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가 연계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헤롯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 성장의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헤롯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였다는 이 말씀을 초대교회에 일어난 한 사건으로만 아는 것은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그립바 헤롯만 헤롯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에도 현대판 헤롯이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여러분이) 헤롯이 될 수가 있습니다. 교회 성장에 방해가 되고 말씀전하는 주의 종들을 힘들게 하면서 잘못으로 알지 못하는 현대판 헤롯이 될 수 있습니다.
야고보를 칼로 죽인 것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 폭력은 영혼을 병들어 죽이는 무서운 살인입니다. 말 한 마디로 상처를 입히고 시험들게 하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면 오늘의 헤롯입니다.
우리는 헤롯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헤롯은 죽어야 합니다.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면 헤롯은 죽습니다. 회개하여 헤롯을 죽입시다. 주의 사자가 쳐서 벌레에게 먹혀 죽은 헤롯은 지금은 지옥불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자는 베드로를 쳐서 쇠사슬을 풀고 손잡아 옥에서 이끌어 낸 주의 사자가 최후의 심판의 날에 나와 여러분의 손을 잡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의 사자의 손에 이끌려 주님께서 예배해 놓으신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