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히아(Sanhia)의 메시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2024. 5. 3
채널: 마이클 허시 Michael Hersey
공동 의존성에 대한 이전 메시지에 대한 응답으로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여기에 의역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많은 문제는 어렸을 때 사랑받지 못한 데서 오는 것 같고, 우리 안에 채워야 할 블랙홀이 있다고 느낍니다. 제가 들은 모든 영적인 대답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거나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면 어떻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정답은 분명 있겠지만, 사랑이 없는 사람을 향한 비난의 마음이 큽니다. 제 생각에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님으로부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분은 제가 영적인 책이나 선생님들로부터 자주 듣는 것처럼 “너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이런 해석이 사람들을 더 자기중심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궁금해하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멋진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라건대 우리는 그것의 모든 측면을 다룰 것입니다. 많지는 않지만 모든 문제는 개인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시되기를 바라는 데서 비롯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것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여러분을 위한 완벽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다른 어떤 것도 줄 수 없기 때문에 사랑으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개인적인 의지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는 반대로 다른 것을 원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분리를 유지하면 고통스럽고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어떻게 자랐는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양육에 대한 여러분의 인식은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여러분의 신념과 투영과 모든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부모에 대한 절대적인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그들은 신성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모든 인간이 대부분 그렇듯이 하느님의 뜻보다 개인적인 의지를 선택했습니다.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최선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각성 과정을 가장 잘 지원하기 위해 여러분의 삶에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해 주신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이제 여러분이 할 일은 내면으로 들어가서 부모님을 판단의 잣대로 삼고 있는 곳을 보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곳은 바로 여러분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곳입니다. 부모님이 여러분에게 주셨고 지금도 주시는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영이나 하느님께 도움을 요청하세요. 여러분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끼는 곳이라면 어디든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희생자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께 “당신은 틀렸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의 개인적인 의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도록 자신을 불행과 분리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하느님이 주신 것을 저항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의 분리를 포기하세요. 개인적인 의지를 포기하세요. 상황이 달라지기를 바라면서 현재와 싸우는 것을 그만두세요. 이것이 바로 지금 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의도를 가지세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최고이자 가장 좋은 것임을 알고 그것을 신뢰하세요.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질문, 영적인 가르침... 혼란스러운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어떻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다른 좋은 질문들도 있습니다. 쓰거나 말할 수 있는 진리는 전체 진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말로는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거의 과정을 통해 이러한 질문에 접근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이미 한 가지 큰 힌트를 제공했습니다. 하느님의 뜻보다 개인의 의지를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여러분이 사랑에 대해 배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인 자아를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목표를 살펴보세요. 사랑받고 싶다는 느낌은 개인적인 자아를 위한 목표입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 노력하지 마세요. 대신 매일 매 순간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는 데 집중하세요. 그것이 무엇인지 보세요. 마지막 메시지를 다시 읽고 사랑으로 착각하는 상호의존의 모든 측면을 살펴보세요.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서 받고자 하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족함과 궁핍함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지금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채워야 할 구멍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있는 그대로 완벽한 하느님의 신성한 자녀입니다. 인간의 조건은 하느님과의 분리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타락입니다. 그것은 사랑받지 못하거나 사랑스럽지 않다고 느끼는 것, 죄책감을 느끼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이것은 부모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난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조건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과 공유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임무는 자신의 개인적인 의지를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형되는 현재에서 하느님이 제시하시는 완벽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것 중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여러분의 창조물입니다. 그것은 비난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기를 원할 때, 여러분은 이러한 고통스러운 경험을 실제처럼 보이도록 창조합니다.
피해자인 척하는 대신 여러분의 힘을 하느님께 내어줌으로써 여러분의 힘을 사용하세요. 사랑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과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희생자, 공동 의존의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위해 이 일을 해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경험은 그들이 아니라 여러분이 책임져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여러분에게 사랑을 줄지 여부를 결정함으로써 여러분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분명 무력한 피해자가 될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여러분의 거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무도 여러분에게 사랑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서 그 사랑이 비춰지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동안은 사랑을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랑받는다는 느낌은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인 요구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랑을 지구상의 다른 모든 사람에게 전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공간에 있지 않다면 그들은 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 경우 모두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나눠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헛된 몸짓입니다. 그것은 오직 여러분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항상 여러분을 위해 존재했던 것을 받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이러니한 점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사랑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을 받고자 하는 개인적인 의지를 포기하고 항상 사랑을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뜻에 순복하세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일은 오직 여러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여러분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무섭게 들릴 수도 있고 무력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힘이 되는 말입니다. 사랑을 느끼기 위해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해주거나 세상을 향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절대적인 힘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피해자가 아니며 피해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라는 영적 스승들의 말과 이로 인해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자신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시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해석이 자신의 삶에서 원하는 것을 바라보고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라면, 그것은 개인의 의지를 따르는 것에 대한 지지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과 사랑에 순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하느님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저항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신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현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는 말씀이 그렇게 해석된다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해석되는 예수님의 성경 말씀을 보면 흥미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아마도 이 말씀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우위에 두라는 말씀이 아니라 여러분 사이의 하나임을 표현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진술로서 권장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은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행동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분리란 없습니다.
지난 메시지에서 언급했듯이 여러분의 임무는 자신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주변의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봉사를 하려는 의도를 갖는 것은 옳은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고 사랑의 에너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모든 곳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 판단이 나 자신에 대한 판단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판단을 소유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만 보일 때까지 내 안의 그 판단을 다스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한동안 바쁘게 지내야 하는 꽤 큰 성취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랑의 감정은 다른 사람의 책임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대신 해주고 가르쳐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유감스럽게도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 한 여러분은 계속 불행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하느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비난이 아닙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다행히도 여기에는 절대적인 선택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인 의지 대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금을 받아들이고 직면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도록 선택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사랑, 특히 그 용어에 대한 대부분의 인간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사랑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의지인가요, 아니면 하느님의 의지인가요?
개인적인 의지를 내려놓으면서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뜻에 순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서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공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돌에 새겨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지침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여러분의 내면의 신성한 앎이 여러분을 인도할 것입니다.
우선 두 가지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먼저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세요. 현재와 다른 미래를 원하지 않거나 현재와 다른 미래를 원한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를 알아차리세요. 과거의 피해자가 되는 것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도 알아차리세요. 이러한 생각을 알아차렸을 때는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세요. 그런 생각들이 현재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세요. 그 생각의 궤적을 따라 마음이 긴 생각의 기차를 따라가도록 허용하지 마세요. 이러한 생각은 여러분의 개인적인 의지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그것들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하느님에게, 영에게, 나에게, 다른 누군가에게 넘겨주세요.
지금을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붙잡는 것은 하느님과 분리되어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따라서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지금 이 순간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며, 그것을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유일한 임무는 판단하는 생각을 내려놓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세요. 여기에 없는 것보다는 여기에 집중하세요. 이 연습에 익숙해지면 여기 있는 것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고, 변형하고, 개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나 무엇이 빠져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으로 바꾸세요.
두 가지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게 첫 번째입니다. 둘째,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인식과 생각 모두와 관련하여 감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이러한 느낌들은 분리를 믿는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여러분은 있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에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들을 알아차리고 가능한 한 그 느낌들과 함께 현재에 머물러 있으세요. 만약 여러분의 마음이 그 느낌들을 이것 또는 저것 때문이라고 합리화하거나 이것 또는 저것의 희생양이라고 느끼고 있다면, 그 생각을 알아차리고 놓아주세요.
마음이 원인으로 집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지금 여기에 없습니다. 원인이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한다면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지만, 대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향해 달려오는 차가 여러분의 지금 안에 있습니다. 부모님도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며, 읽거나 들은 세계 사건도 지금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여러분의 느낌들이 여기에 있으니 받아들이세요. 그 느낌들에 대해 행동할 필요는 없으며,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느낌들을 바꾸거나 그런 느낌들을 느낀다고 스스로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히 그 느낌들이 더 이상 여러분의 지금 속에 있지 않을 때까지 경험하기만 하면 됩니다. 느낌들이나 생각들이 여러분을 이끌려고 할 때마다 따라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세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집중하세요. 그렇게 간단하지만 반드시 쉽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의 습관은 에고가 주도하는 개인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지만,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에 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지금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은 신성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누구인지 말한다고 해서, 또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과 그것을 공유해야 한다고 해서 여러분은 결코 그것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고 여러분에게 가져오는 것의 완벽함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성한 본성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불신을 표현하고 하느님의 뜻보다 개인적인 의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싶다면 멈추세요!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 마세요. 연습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환영하고 감사하다고 말하며, 느낌들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신성입니다. 여러분의 창조주가 그러하듯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하나이고 동일합니다. 다를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자각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저항을 멈출 때, 상황을 바꾸거나 자신을 더 낫게 만들려는 노력을 버릴 때, 찾아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이유 중 일부입니다.
좋은 지금(Good Now)
산히아/스피릿
https://eraoflight.com/2024/05/03/message-from-sanhia-how-can-i-learn-to-love-myself/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