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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도에 산다
해남 땅끝에서 노화도로 가는 길은 유난히 화창하였다. “꽃구경이나 가지 여긴 뭐하러 오느냐”는 타박을 들으며 떠난 길이었다. 동행한 원로는 “사람을 찾으러 간다”고 하였다. 맑은 바다 위로 전복어장은 끝없이 늘어선 바둑판같았다. 땅끝 전망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노화도 산양진항에 닿았다. 생각보다 짧은 거리였다.
노화도는 완도군에 속한 읍소재지이다. 그 섬에 가려면 해남에서 산양진으로, 완도에선 동촌으로 뱃길이 열려있다. 노화도와 보길도 사이는 다리가 놓였고, 또 노화도에서 소안도를 향해 10년째 잇는 중이다. 섬들은 서편제로 유명한 이웃 청산도와 함께 남녘 바다를 내해(內海)로 둘러싼 모양새다. 보길도의 남쪽 망끝에서 바라보면 추자도가, 그 어깨 너머로는 한라산의 그림자가 기웃거린다.
망끝전망대는 아마 희망을 바라보는 곳이란 뜻일게다. 도착하던 날 그곳에서 기울어가는 해를 지켜보았다. 바다 위로 떨어지는 낙조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라고 한다. 너무나 아름다워서일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려는 사람들이 찾는다고도 했다. 한 번은 닭을 삶아서 놀러 갔는데, 마침 그곳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듯한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같이 먹자고 권하다가, 결국 교회까지 동행해 하룻밤 재워 보냈다. 문득 사람에게서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그 남자가 자고 갔다는 예배당 곁방에서 이틀 밤을 지냈다. 오랜만에 남이 부르는 찬송 소리에 새벽잠에서 깨어났다. 담장 밖에서 울리는 산꿩 소리가 유난하다. 그는 준비된 목회자였다. 1980년대, 지금은 서울 한복판인 난지도에서 목사노릇 했다. 학창시절 넝마와 구두닦이로 단련된 삶은 남들이 기피 하는 곳일 망정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자청한 길이 끊어질듯하다 여지껏 이어진 것을 보면 과연 그답다.
노화도에서 다시 목회를 이어간 것은 11년 전이다. 중도에 손을 씻은 지 20년 만이다. 다시 전도사 과정부터 시작하였다. 노화도에서 3년쯤 지난 즈음, 모처럼 부부가 함께 섬에서 뭍으로 나들이하였다. 감리사가 묻더란다. “목사님,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그만 뭍으로 나오시죠.” 아마 인사치레였을 것이다. 목사는 묵묵히 말이 없었지만, 아내가 대답하였다. “천국이 따로 없어요.” 그런 세월이 마치 시계가 멈춘 듯 천국의 시간이다.
천혜(天惠)교회는 1987년에 세워졌다. 언덕배기 위에서 마을이 눈 아래 내려다보인다. 야자수들이 나란 나란 서 있어 영락없이 이국적이다. 그런데 거리에 걸린 현수막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호남지역에 오래된 가뭄은 노화도에도 예외가 없어, 3월 5일부터 단수한다는 알림이었다. ‘2일간 급수, 6일간 단수.’ 다행히 섬 곳곳에 무성한 청보리밭과 이제 막 모내기를 끝낸 무논들 때문에 짐짓 여유가 있어 보인다.
“세월호 이후 땅 것들이 배 타기를 무서워해.” 그래서 찾아오는 이들도 예전만 못하다고 하였다. 마침 어쩔 수 없이 돌아온 사람이 있어 교회에 생기가 돌았다고 한다. 이른바 귀촌이다. 서울 생활이 너무 힘드니 그래도 고향에 살던 집이 있어 내려온 것이다. 다 무너져 내린 빈집을 수리하다가 멀리 교회가 보여 마음이 흔들렸다던 그는 아무도 모르게 해달라며 페인트칠 헌금을 맡겼다. “내 집도 수리하는데 교회도 해야겠지요.”
몇 해 전만 해도 교회학교에 열댓 명씩 다녔다. 어느 날 보이던 애들이 안 보여 애들에게 물어봤다. “어제부터 그 교회 다녀요. 노트를 준대요.” 목사는 근심 끝에 대답을 주었다. “다음 주부터 우리 다 같이 거기로 가자.” 장로수련회로 온 이들이 자꾸 미자립교회 운운하자, “우린 미자립이 아니라 이미 다 자란 어른인데요”라고 응수했단다. 그냥 오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시간이 더딘 섬에서 유난히 고운 필기체로 성경을 필사 중인데, 할머니들이 다 쓰고나면 목사가 떠날까봐 “천천히 쓰세요” 하신단다. 기실 은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몇 해 전 만해도 서울에서 여름성경학교를 도우러 왔다. 청년 교사들이 돌아가며 아이들에게 “너희도 한번 서울에 올라와”라고 했단다. 그해 가을, 애들 할머니가 조심스레 물으러 왔단다. 애들이 용돈을 꼬박 모으고 있는데 정말 가긴 가는 건지 조바심이 난 것이다. 아이들 목사는 더 조심스레 서울교회에 전화를 걸었는데, 어려운 물음에 비해 대답이 너무 쉬워 씁쓸하였다. “그런 계획이 없는데요.” 그래서 이듬해 아이들 소원에 따라 노화도 중리해변에 데리고 가고, 그 이듬해는 지리산으로, 또 한라산에도 다녀왔다.
할머니 밑에서 자라는 아이를 격려한다고 무심코 “너도 대학 가야지” 했단다. 그랬더니 아이가 정말 결심을 했다. “목사님, 대학가려구요.” 이젠 그 아이 등록금 마련하느라 여기저기 전화를 건다. “너만 어려운 게 아니다”라는 친구의 말을 애써 귓등으로 들으며 딴청을 부린다. “우리가 다 빌어먹고 사는 거 아니냐? 나도 기도하고(빌고) 전화한다.” 얻어 먹는 게 일상이 되었다며 그가 웃었다. “난 난지도 출신이야. 섬에는 걱정거리가 없어. 걱정해야 소용없거든.”
그는 길전(桔田)으로 불린다. 도라지밭이란 뜻인데 스스로 지은 별호(別號)이다. ‘도라지 길(桔)’ 자는 높고 험한 모양을 뜻하기도 한다. 도라지는 산꼭대기에도, 벼랑 끝에도, 어디서든 살아남는다. 번번이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린 길전 목사는 누구에게나 “제 몫이 있다”며 하늘이 주신 그 몫을 넉넉히 누리는 중이다. ‘서울 난지도에서 남해 노화도까지’ 하늘의 은혜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첫댓글 노화도 얘기는 참으로 생각하는 바가 많은 얘깁니다
말뿐인 내가 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집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읽는 노화도 이야기에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애잔하면서도 따뜻해집니다.
우리가 다 빌어먹고 산다는 말이 마음에 계속 남습니다...
기도할 수 있음에 얼마나 감사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