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4월20일 미국 콜로라도주에 위치한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납니다. 에릭 해리스(18세)와 딜런 클리볼드(17세)라는 이름의 두 학생이 학교에 총을 들고 와 900여 발의 실탄을 난사하면서 13명을 살해하고 23명의 사람들을 부상을 입혔고, 살해당한 13명 중 12명은 학생, 1명은 교사였습니다. 두 학생은 자살했습니다. 그들은 마피아들이 즐겨입는 트렌치코트를 입고 학교에 나타났습니다. 그날 그들은 도서관으로 들어가 한 여학생의 머리에 총기를 들이대고 물었죠.“하나님을 믿느냐?”여러 명의 학생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여학생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들은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그러나 그 여학생은 말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다. 너희도 역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한다.”여학생의 말이 끝나지 마자 그들은 “네가 믿는 하나님의 곁으로 가라.”고 외치면서 여학생을 향해 총을 난사했습니다. 그 여학생의 이름이 ‘캐시 버넬Cassie Bernall’입니다. 생명이 걸린 순간에 그녀는 자신의 신앙양심을 따라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고백함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후에 그녀의 신앙을 본받자는 운동이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났고, 많은 십대들은 ‘그렇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Yes, I believe in God’이라는 케시 버넬의 고백이 들어간 티셔츠를 입고 학교마다 국기 게양대 앞에 모여 뜨겁게 기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어. 진심이야 두렵고 힘들겠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캐시버넬(당일 친구에게준편지)
때로 우리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이 뭐지? 의문이 들고,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캐시 버렐의 이야기속에서 우리는 죽음의 두려움보다 더 강한 믿음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을 부인하고 생명을 구한 다른 아이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약함때문에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 즉 신앙고백이 때로는 세상을 두려워않는 그리스도인들의 강력한 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나의 신앙고백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교회를 남기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유산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위에 세워져 오늘까지 2000년의 세월을 지나왔습니다. 수없이 많은 조직과 모임 나라들이 사라졌지만 교회는 그 생명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힘이 바로 신앙고백입니다.
교회를 설교의 주제로 하는 이 4월 우리들의 신앙고백을 다시 생각하고, 확인하는 시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기의 목소리로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나의 고백)
꽃이라는 김춘수씨의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한 존재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대상으로서 관찰할 때가 아니라 나의 마음에,생각안에, 삶으로 들어와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비로서 의미가 생깁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신앙도 예수님이 그저 관찰의 대상이거나, 지식적인 탐구의 대상일 때는 예수님은 내 삶에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알때 비로서 예수님은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하나의 여정과도 같습니다. 어떤 사람도 처음부터 예수님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속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지속되면서 예수님은 점점 내게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해주시고, 인생의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시고, 인생의 참된 목적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이 기준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내 삶의 기준입니다. 참 멋진 고백입니다. 인생은 기준이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기준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명품인생이 되기도 하고, 허접한 인생이 되기도 합니다. <유머> 어떤 사람이 개와 달리기를 해서 졌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말합니다. "개만도 못한 분" 열심히 노력해서 개와 동시에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옆 사람이 말합니다. "개같은 분" 더 노력해서 개보다 빨리 들어오자 옆사람이 말합니다. "개보다 더한 분" . 웃자는 말이지만 기준이 개가 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을 기준으로 살지 않으면서 돈많이 벌고, 승진하고, 많이 갖는게 의미없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인들이 세상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이유, 세상을 쫓아 목매는 이유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사도신경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정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모일때마다 확인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고백은 참고는 되도 힘이 되지는 못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가이샤라 빌립보로 들어가는 길위에서 그들의 신앙고백을 듣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말이 나옵니다. 갈릴리에서 북쪽으로 약 45분쯤 자동차를 타면 헐몬산 기슭의 바니아스라는 곳에 이릅니다.
시편133편에 보면 헐몬의 이슬이 산들에 내림같도다 할 때의 그 헐몬산입니다. 헐몬산 자락에서 나오는 풍부한 물은 갈릴리 호수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가이샤랴 빌립보입니다. 본래 이곳 주민들은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을, 헬라계 거주민들은 산림과 야수의 신인 판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바니아스라는 지명이 붙었죠.
그런데 헤롯왕은 로마에 아부하면서 로마황제를 위한 신당을 이곳에 세우고, 로마 황제 카이사르에게 이 도시를 바쳤습니다. 결국 이 곳은 세상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곳을 앞에 두고 신앙고백을 들으신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황제의 도시를 보게 될 제자들에게 세상의 영광이 아니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보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신앙고백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은 이 땅의 영광이 아니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게 만드는 힘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나의 입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내 신앙고백이 있는가?입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군들은 두가지 의견을 냈습니다. 한 부류(10명의 다수)는 그 땅은 좋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강해서 우리가 그들을 쫓아내고 그 땅에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앙고백이 없던 그들은 울며 원망하며 모세를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고백위에서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선언합니다. 오늘 세상을 향한 나의 믿음의 자세는 나의 신앙고백이 무엇인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고 물으신 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예신교회 가족 여러분! 다른 사람의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알아도 내 이야기가 없으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나의 고백을 만들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갈수록 우리는 죄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정권실세 8명의 이름이 나왔는데 모두가 상관없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맞소! 나를 벌주시오.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우리도 지도자들에게 정직의 가치가 살아있는 세상을 볼 것 같습니다. 세월호 사건의 본질은 우리 사회의 부정직입니다. 편법과 관행이 참사를 만들어 귀한 생명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정직하지 않습니다. 아니 정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이 고백에 담긴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이 말을 어려움을 풀어주시는 구원자라는 의미로 사용해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는 이 단어는 죄로부터의 구원자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우리의 명성과 쌓아온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에게 준 가장 놀라운 선물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 놀라운 용서의 삶을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습니다. 물론 이 메시지는 오늘 우리의 현실과 다릅니다. 우리는 전과자들을 경계하고, 그들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벽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선 이 벽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죄인이고 하나님의 용서 없이는 새삶이 불가능했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범죄한 사람도 예수안에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죄의 고백과 용서가 있는 세상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속에 정직한 공동체로 서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는 정의만 외치지 않습니다. 정직한 공동체는 용서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거짓과 위선이 생활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속에서 교회만은 그리스도인들만은 세상을 정화하는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감추거나 숨기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님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두려워해서 마귀의 앞잡이로 살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거짓과 위선과 부정직하지 않아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수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이 고백은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는 세상적인 욕심으로부터, 더 높아져야지 하는 권력욕으로부터, 더 좋은 것을 나만 누리고 살아야지 하는 이기심이 만들어내는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고백위에 세워져야할 시대입니다.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은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이 고백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으로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의 의미는 주께서 우리를 다스시리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분의 다스리심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래전에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왕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위에 교회가 서 있음을 안다면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이 주님께 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알면 자기주장을 하지 않게 됩니다. 자기주장과 자기 의를 세우는 대신 하나님의 뜻을 따릅니다. 지금은 사사기 시대와 같은 영적인 어둠의 시대입니다. 사사기가 어둠의 시대가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삿21:25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자기 스스로 왕이 되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했을 때 가장 어둡고 암울한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철저한 개인주의 시대의 한 가운데 놓여져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경험을 성경의 말씀보다 더 위에 놓고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이 세상의 왕이심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꾸는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교회는 이 고백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 고백되는 신앙이 곧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고 사는 신앙고백을 가져야 하고, 교회라는 공동체가 죄의 고백과 용서(허물을 덮고 품는)가 있고,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고 그 분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는 공동체로 세워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는 신앙고백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