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신소설 작가 최찬식(崔瓚植) 출생 1881. 8. 16 경기 광주~1951. 1. 10. 이인직·이해조와 더불어 신소설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호는 동초(東樵)·해동초인(海東樵人). 개화기 언론계의 중진이었던 최영년의 아들이다. 유년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으며, 1897년 아버지가 설립한 시흥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그뒤 서울 관립한성중학교에서 공부했다. 한때 언론계에 관계했으며, 의병장 최익현의 실기를 쓰던 중 1·4후퇴로 피난하다 병으로 죽었다. 중국의 소설집 〈설부총서〉를 번역한 이후 신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추월색〉(1912)을 비롯해 〈해안〉(1914)·〈금강문〉(1914)·〈안(雁)의 성(聲)〉(1914)·〈도화원〉(1916)·〈능라도〉(1918) 등을 발표했다. 작품 대부분이 남녀간의 사랑을 제재로 갑오농민전쟁 이후의 정치부패와 무질서한 사회의 이면을 폭로했고, 신결혼관, 신교육사상 권장 등 근대문학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대표작 〈추월색〉은 당시 널리 애독된 작품이며 작품배경이 일본·만주·영국까지 확대되어 있다. 〈안의 성〉 또한 비슷한 성격을 보이며 지식층 남녀의 삼각관계를 통해 자유연애 사상을 드러냈다.
[1980년] 최규하 대통령 하야
1919. 7. 16 강원 원주~.2006. 10. 22 서울 1980년 오늘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한다. 최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제10대 대통령직을 사임한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한다. 5.18민주화운동 등 사태에 책임을 통감하고 평화적 정권이양을 위한 것이라고 사임 이유를 밝혔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자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그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제10대 대통령이 되었다. 1980년 5월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장을 지냈고, 그해 8월 16일 대통령에 당선된 지 8개월여 만에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81~88년 제5공화국 헌법 제66조 2항에 의거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냈다. 1985년 강원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91~93년 민족사 바로 찾기 국민회의 의장을 지냈다. 한국 헌정사상 정당에 관여하지 않은 직업공무원으로서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 대통령이 된 첫번째 사람이었다. 2006년 10월 노환으로 별세했다. 1979년 10·26사태 이후부터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할 때까지의 역사적 격동기를 이끌었던 그는 당시의 진실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역사의 무대를 떠났다. 일등수교훈장(1970), 수교훈장 광화장(1971), 무궁화대훈장(1979),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80), 벨기에 왕관십자대훈장 등을 받았다.
[1925년]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 개봉
← 본인이 감독ㆍ연출ㆍ주연한 첫 장편영화 `황금광 시대`에서 구두끈과 바늘을 먹고 있는 찰리 채플린. 몸에 꽉 끼는 웃옷과 헐렁한 바지, 우스꽝스런 콧수염과 외모만으로도 보는 이의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초라한 신사 찰리 채플린. 그가 각본ㆍ연출ㆍ주연한 영화 ‘황금광 시대’가 1925년 8월 16일 뉴욕 스트랜드 극장에서 개봉됐다. 채플린에게는 2년전 ‘파리의 여성’에 이어 자신이 직접 제작한 영화로서 첫 장편영화였다. 내용은 금광을 찾아 알래스카에 온 부랑자 채플린이 여러 사건에 조우하면서 결국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는 것이었다. 특히 굶주린 찰리 채플린이 구두를 끓여 먹는 장면은 실로 인상적이었다. 나이프와 포크를 정중하게 사용하면서 볼이 미어지도록 구두끈을 먹고, 바늘 하나 하나를 핥는 장면은 폭소를 유발했을 뿐 아니라, 외곬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이 영화는 흥행면에서도 대성공을 거둬 그 이익이 5백만 달러(그 중 반은 해외시장)에 달했고, 채플린 본인도 2백만 달러이상의 수익을 얻었다.
[1977년] 엘비스 프레슬리 사망
← 팝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 ‘팝의 제왕’,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가 1977년 8월 16일 43세로 사망했다. 심장병이 사인이었지만, 지나친 약물 복용으로 그의 몸은 이미 엉망이 된 상태였다. 1933년 미시시피주 이스트튜펠로의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나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는 멤피스시에서 자란 덕에 그는 백인이면서도 흑인의 감성과 음감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끈적하고 격렬한 창법이나 외설적인 무대 매너는 분명 흑인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이전의 스탠더드팝 가수인 빙 크로스비나 프랭크 시내트라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매력적인 목소리와 외모, 무대 매너로 흑인 음악 리듬&블루스와 백인음악 컨트리&웨스턴의 결합으로 태어난 록을 미국과 세계에 알렸다. 1956년 기념비적인 작품 ‘하트브레이크 호텔’과 감미로운 사랑의 테마 ‘러브 미 텐더’가 소개되면서 그는 세계의 우상으로 급부상했다. 그는 또 두차례의 세계 전쟁에서 승리한 뒤 풍요로운 소비생활을 만끽하고 있던 미국 중산층 보수주의자들의 나른함과 자만을 ‘비천하고 야한’ 그의 춤과 노래로 위협했다. 그가 출현하자 당시 청소년이었던 비틀스의 존 레넌은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잘라 말했고, 폴 매카트니는 "구세주가 나타났다"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이날 사망할 때까지 그는 18곡이나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렸고, 앨범과 싱글을 포함해 전세계에서 4억장에 이르는 음반을 팔았다. 지금도 그가 묻혀있는 밀워키에는 하루 1만명의 조문객이 줄을 이으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1788년] 뉴욕의 신문들 연작 논설 <페더럴리스트> 게재 1788년 8월 16일 연작 논설 <페더럴리스트>가 뉴욕 신문들에 게재되었다. <페더럴리스트>는 뉴욕 주 유권자들이 미국 헌법안과 공화정의 성격을 이해하고 헌법 비준을 지지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발표된 85편의 연작 논설이다.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가 필자로 참여했으며 논설 전편은 '퍼블리어스'(Publius)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다. 앞의 77편은 뉴욕 주의 신문들에 연재된 후 다른 대부분의 주에서도 전재되었다가 1788년 5월 28일 책으로 출판되었다. 나머지 8편은 6월 14일부터 8월 16일 사이에 뉴욕 신문들에 게재되었다. <페더럴리스트>의 논설들은 새로운 연방제도 및 중앙정부 내의 주요 부서들에 관한 완벽한 해설을 담고 있다. 또한 1781년의 연맹규약에 따른 기존 정부가 결함이 있으며 새 헌법안은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 없이 그 약점을 해결해 주리라는 점을 강조했다. 공화제에 대해서는,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정의의 추구와 자유의 보호를 위해 최상의 수단이 되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1653년] 하멜, 제주도 표착
1653년(효종 4) 8월 16일 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선원인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漂着)했다. 일행은 타이완[臺灣]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에 상륙한 후 서울로 압송되었다. 조선은 이들의 표류사실을 비밀에 붙이고 훈련도감의 포수로 임명해 살도록 했다. 앞서 표류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한국 이름은 박연)가 이들의 대장이 되었다. 1655년 하멜 일행은 청나라 사신의 행렬에 뛰어들어 구원을 요청했으나 실패했으며, 이 일로 이들은 서울에서 추방되어 전라도 병영으로 이속되었다. 이들은 군사훈련을 받고 병영의 막일에 시달렸으며, 흉년에는 구걸을 하거나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살기도 했다. 1666년(현종 7) 9월 생존자 16명 중 8명이 배를 구해 일본으로 탈출했으며, 2년 뒤 네덜란드의 요청으로 남은 일행도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조선에서 겪은 일들을 <하멜 표류기>(1668)로 엮어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했다. 하멜 일행은 서양세계를 조선의 민간에 소개하는 창구 역할을 했으며, <하멜 표류기>는 한국을 서방에 소개한 최초의 책으로 유럽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하멜과 한국의 인연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네덜란드에서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으나, FIFA 월드컵을 통해 유명해진 거스 히딩크 감독 등이 네덜란드에 소개되면서 하멜도 알려졌다. 그의 고향 호린헴에서는 하멜 동상이 세워졌으며, 하멜이 7년간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전라남도 강진군에도 하멜 기념관이 2007년 12월 30일 개관되었다. 또한 일본의 나가사키 시에도 하멜 기념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언론에서는 한국방송의 다큐멘터리 〈KBS스페셜〉에서 재현극과 네덜란드에서의 취재로 하멜의 조선에서의 억류생활과 귀국 후 생활을 보도하였다. 2003년에는 국립제주박물관에서 하멜이 남긴 표류기의 육필원고원본을 공개[3]하였으며, 남제주군(현재는 서귀포시)에서도 20억 원을 들여 길이 36.6m 높이 11m 규모의 당시 네덜란드 항해용 상선을 85% 규모로 축소 제작하여 하멜의 제주도 표류 350주년을 기념하였다.
[1913년] 베긴 Menachem (Wolfovitch) Begin 출생
1913년 8월 16일 태어남 / 1992년 3월 9일 죽음 베긴은 이스라엘 시오니즘의 지도자이며 1977~83년 총리를 지낸 정치가이다. 1930년대 시오니즘 운동에 참가해 활동했으며, 1938년 베타르 청년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다. 1940년 소련 당국에 의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폴란드 군대에 들어갔으며 1942년에 폴란드 군대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베긴은 호전적인 우익지하운동조직인 이르군 즈바이 레우미(Irgun Zvai Leumi)에 가담했고,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뒤 이르군을 이끌고 헤루트당(자유당)을 결성했다. 야당지도자로 활동하던 베긴은 거국내각의 무임소장관을 거쳐 1970년 리쿠드(통일) 연합의 공동의장이 되었다. 1977년 5월 17일의 총선에서 리쿠드당이 승리하자 총리가 되었다. 그는 1967년에 일어난 3번째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을 계속 보유하는 문제에 대해 비타협적인 입장을 취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중동평화협상을 벌인 끝에 1979년 3월 26일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베긴은 사다트와 함께 1978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1980년대초에는 팔레스타인인(人)의 국가 수립을 단호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1983년 공직에서 물러났다.
[1960년] 키프러스공화국 독립 터키 남쪽에 자리한 지중해의 공화국이다. 기원전 3000년 전부터 그리스 지방에서 건너온 사람들에 의해 키프로스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 후 키프로스는 대략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전 600년간에 걸쳐 이집트,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기원전 300년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침략하여 페르시아인을 몰아내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다시 이집트가 300년 정도 키프로스를 지배하였다. 이후 로마 제국이 강대해져 키프로스를 정복하였고, 기원전 58년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애인이었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키프로스를 선물로 주기까지 한다. 45년 예수의 제자 바울과 바나바가 키프로스에 건너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게 되면서, 키프로스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116년, 키프로스 주민들과 유대인들이 동맹하여 로마 제국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수천 명의 유대인이 죽고 나머지 유대인은 키프로스에서 추방당했다. 395년 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나뉘자 키프로스는 동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다. 600년경 마호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하고 무슬림의 세력이 커지자, 키프로스는 아라비아 사람들의 지배를 300년간 받게 된다.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었던 1191년, 제3차 십자군의 지휘자였던 사자심왕 리차드가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키프로스를 점령하였다가 나중에 프랑스의 귀족인 뤼지냥의 기에게 다시 양도한다. 이로 인해 프랑스가 300년간 키프로스를 지배한다. 프랑스 세력이 물러나자 지중해에서 세력을 떨치던 베네치아 공화국이 건너와 약 100년간 키프로스를 지배하고, 1571년에는 다시 오스만 제국이 베네치아 세력을 축출하고 300년간 키프로스를 지배했다. 1878년 터키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세계로 진출하려던 영국이 키프로스 보호 조약을 맺어 사실상 키프로스의 주인이 되었다. 키프로스에서는 영국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을 벌였고, 마침내 1960년 8월 16일 키프로스는 역사상 처음으로 독립국가가 된다. 그런데 이 나라 국민의 80% 가량이 기독교를 믿는 그리스계이고, 18% 정도가 이슬람권인 터키 계통이다. 자연히 그리스계 국민과 터키계 국민의 마찰이 잦았고, 이것이 전쟁으로 번져 끝내 1974년 6월 키프로스 동란이 발발한다. 터키 정부는 즉각 군대를 보내 북부 키프로스를 점령하였다. 이에 국제연합이 전쟁의 확대를 막기 위해 중재에 나섰고, 이리하여 키프로스는 그리스 계통의 남부 키프로스와 터키 계통의 북부 키프로스로 나누어지기에 이른다.
[1996년] 동서울우편집중국 개국 우편물이 배달되기 위해서는 지역별로 구분이 되어서 해당 지역으로 발송되어야 한다. 이전까지는 그러한 작업이 각 우체국에서 이루어지고, 우체국들 사이에서 교환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점차 개별 우체국들의 우편물을 권역별로 모아서, 각 집중국에서 우편물들을 기계 시설 등을 이용하여 대규모로 처리하게 되었다. 1990년 7월 4일 서울우편집중국이, 1996년 8월 16일에는 동서울우편집중국이 개국하였다.
[1949년] 한국 세계보건기구(WHO)가입 세계보건기구의 약칭은 WHO이다. 1946년 61개국의 세계보건기구헌장 서명 후 1948년 26개 회원국의 비준을 거쳐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1923년에 설립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산하 보건기구와 1909년 파리에서 개설한 국제공중보건사무소에서는 약물을 표준화하고, 전염병을 통제하며 격리 조치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WHO에서는 이 업무를 이어받아 세계 인류가 신체적·정신적으로 최고의 건강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한다. 이를 위해 중앙검역소 업무와 연구자료 제공, 유행성 질병 및 전염병 대책 후원, 회원국의 공중보건 관련 행정 강화와 확장 지원 등의 일을 맡아 본다. 2000년 현재 가맹국은 191개국이며 한국은 1949년 제2차 로마 총회에서, 북한은 1973년에 가입하였다.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다.
[1948년] 미국의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Ruth, Babe, 1895.2.6~1948) 사망
괴력의 홈런포로 메이저리그를 미국의 국민적인 스포츠로 자리잡게한 1등공신 베이브 루스의 원래 포지션은 투수였다. 1914년 볼티모어를 거쳐 둥지를 튼 보스턴 레드삭스는 이미 메이저리그 최강의 팀이었지만, 루스의 가세는 월드시리즈 3회 우승이라는 위업을 보스턴에 안겨준다. 44년 후 깨지긴 했어도 월드시리즈 29이닝 1/3 연속 무실점 기록(1916년∼1918년)을 세운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간간히 타자로 나와 터뜨린 그의 한방을 보고싶어했다. 타자로 전업했어도 첫 해 타율이 0.484나 될 정도로 루스의 야구재능은 천부적이었다. 1920년 뉴욕 양키스로 이적하면서 루스는 야구인생의 화려한 꽃을 피우지만 그를 떠나보낸 보스턴은 이른바 ‘밤비노(루스의 애칭)의 저주’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 이후 한번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적 첫 해 54개, 이듬해 59개. 루스의 홈런 행진으로 야구사도 매년 새롭게 씌어졌다. 지금은 추억의 기록이 됐지만 한 시즌 60홈런(1927년)과 통산 홈런 714개(1935년)는 당시로서는 어느선수도 감히 넘볼수 없는 대기록이었다. 외야의 센터 뒤를 가리킨 뒤 그 곳으로 홈런을 날렸다는 ‘예고홈런’의 전설도 루스였기에 회자됐던 가십거리였다. 통산 94승 46패에 방어율 2.27, 17시즌 동안 12번이나 오른 홈런왕. 1935년 현역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가 수립한 기록들은 루스가 왜 20세기 최고의 야구선수로 추앙받아야하는지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1948년 8월 16일, 야구영웅 베이브 루스가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49년] 미국의 여류소설가 미첼(Mitchell, Margaret, 1900.11.8~1949) 사망
조지아주 애틀랜타 출생. 아버지가 법률가 겸 역사학자였으므로 온 집안이 역사에 흥미를 가졌고, 미첼 역시 남북전쟁 때의 일화(逸話)를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처음에는 의학을 지망하여 매사추세츠주의 스미스칼리지에 다녔으나, 어머니의 사망으로 귀향하여, 몇 해 동안은 고향의 《애틀랜타 저널》지(誌)에 관계하였다. 1925년 결혼 후부터는 남북전쟁과 전후의 재건시대(再建時代)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1936)를 10년이 넘도록 계속 집필하였다. 어렸을 때 가정에서 들었던 전쟁일화와, 장시일에 걸쳐서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지은 이 1,037페이지짜리 대작은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의 남부 여인 스칼렛 오하라와 야성의 암상인(闇商人) 레트 버틀러를 중심으로, 인간 애욕(愛慾)의 파노라마가 펼져지는 화려한 대형 로맨스인데 세밀한 시대 묘사, 애욕문제의 능숙한 처리 등으로 호평을 받아, 그 해에 100만부를 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국내외에서 기록적인 독자를 획득하였다. 1937년에는 퓰리처상(賞)을 받았다. 또, 발간 후 즉시 영화화되어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 8개 오스카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미첼은 그 후의 작품은 없으며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1958년] 팝의 여왕 마돈나(Madonna Louise Ciccone Ritchie) 출생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팝 가수중 한명"으로 기록된, 그녀는 뉴스 미디어에 의하여 "팝의 여왕"으로 불려졌다. 어렸을때, 마돈나는 발레를 열망했고 무용가 앨빈 에일리스의 지도로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패트릭 헤르난데즈의 댄스팀 맴버로 엔터테이먼트 산업에 대뷔한 그녀는 댄 길로이와 브렉퍼스트 클럽 (밴드)으로 알려진 팝 듀오를 결성했다. 초반에 밴드의 드럼을 연주한 마돈나는 브렉퍼스트 클럽이 해체되기 전까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마돈나는 드럼머 스티븐 브레이와 두번째 음악 그룹 에미를 결성하였다. 결국에 이러한 경력은 그룹에 홀로 남은 마돈나가 솔로 음악가로 출발하게 되었다. 마돈나는 낮은 예산으로 제작된 1979년 영화 《상처 뿐인 과거》로 연기를 데뷔했고, 1985년에 처음 주연으로 연기한, 《수잔을 찾아서》가 흥행에 성공하여 스타가 되었다. 그후에 연기한 (1986년 영화) 《상하이 유혹》, (1993년 영화) 《육체의 증거》, (2000년 영화) 《넥스트 베스트 씽》과 (여러번 조연과 카메오 출연을 한 2002년 영화) 《스웹트 어웨이》는 상대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성공한 (1990년 영화) 《딕 트레이시》, (1992년 영화) 《그들만의 리그》와 뮤지컬 《에비타》을 기반으로 제작된 (1996년 영화) 《에비타》에 출연한다. 마돈나는 《에비타》의 연기로 골든 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마돈나는 미국 레코딩 산업회에 의하여 20세기에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락 여가수로 선정되었고, 미국에서 인증된 앨범이 6,300만장 팔려서 두번째로 많은 음반을 판매한 여가수이다. 기네스 세계 기록에 의하면, 마돈나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여가수로 등록되어 있고, 전세계에 판매한 앨범은 2억장을 넘었으며, 순자산이 4억 달러이상으로 평가되는 고소득 여가수이다. 2008년 3월 10일에, 마돈나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2008년 제50회 그래미시상식 장편뮤직비디오상 2007년 제49회 그래미어워드 최우수 댄스 앨범상
그 밖에 2004년 미국 전설적 사진작가 칼 마이단스 별세 1999년 대우그룹 채권단, 대우그룹과 재무구조개선 수정약정 체결(사실상의 그룹해체) 1995년 경제학자 박현채 별세 1992년 남북예술단, 제1회 통일예술제 사할린서 개최 1986년 민중민주당 창당 1982년 전두환 대통령 아프리카 4국 순방 등정 1972년 문교부, 기초한자 1800자 확정 1968년 미국 최초의 다핵탄두미사일 포세이돈과 대륙간탄도탄 미니트맨3 발사에 성공 1966년 전쟁 희생자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한 제네바협약 국내에서 발효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 전신) 창립 1960년 국회, 장면 국무총리 인준 1948년 미군정청(美軍政廳) 대한민국정부에 정권이양 1946년 서울시, '서울자유시'로 경기도로부터 독립 1946년 일본 경제단체총연합(경단련) 창립 1929년 블라디보스톡서 제2회 범태평양노동조합회의 개최 1924년 런던회의, 도즈안 조인 1918년 일제, 곡류수용령 공포 1914년 경원선(용산~원산) 개통 1913년 메나햄 베긴 이스라엘 수상 출생 1910년 데라우치 일본 통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한일합병 조약안 제시하고 수락 독촉 1904년 이용구, 진보회 조직 1895년 나가사키, 부산간 해저전선완성 1845년 1908년 최초로 컬러 사진 감광판을 만든 프랑스의 물리학자 리프만 출생 1657년 송시열, 시정18조 상소 1645년 프랑스의 모랄리스트 장 드 라브뤼예르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