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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daum.net/yyj1885/532694 ♡ .. 조롱박 .. ♡
조선시대의 차 종류(2) 중국의 수입차(明淸) ① 용단차(龍團茶) ㉠ 송나라 때 용단, 봉단차에서 유래된 차이름으로 명청시대에도 만들어진 떡차이다. 이름만 같지 차는 송나라 때의 차와 같지 않음. ㉡ 산지 - 복건성 건구현 일대에서 생산(북원공다소) ㉢ 명칭 - 송나라 때 이름, 떡차의 대명사처럼 됨 ㉣ 역사 - 송대 정위가 시작하고 채양이 완성 고려때부터 수입 : 대각국사, 문종, 예종 조선 : 서거정(사가집), 김시습(매월당집) ㉤ 일화 - 초의선사(동다송) : 차의 역사 이상적(은송당답) : 용단승설기 김정희(완당전집) : 용단승설, 서간문, 지리산차 범해각안(범해시초) :다가(茶歌), 덕용산 운흥사, 용단차 ② 봉단차(鳳團茶) ㉠ 송나라 때 봉단차에서 유래된 차이름 ㉡ 산지 - 복건성 건구현 북원공다소에서 생산 ㉢ 명칭 - 송대 어용차, 떡차의 대명사 ㉣ 역사 - 송대에 만들어짐 고려 때 수입. 조선 - 서거정(사가집) 초의선사(초의시고) 정총(복제유고) ③ 건안차(建安茶) ㉠ 복건성 건안. 건구현 일대에서 생산되는 차 ㉡ 산지 - 복건성 ㉢ 명칭 - 중국차, 또는 복건성차의 대명사, 건차, 조선인이 부르는 명칭 ㉣ 역사 - 송대에 유명, 용봉단차로 명성을 얻음. 조선 - 완당전집(김정희) : 이유여가 연경에서 귀국 ④ 용정차(龍井茶) ㉠ 절강성 항주시 용정에서 발원된 차이름으로 녹차이다. 잎차로 모양이 납작한 형태로 만듬. ㉡ 산지 - 항주시, 사봉용정, 서호용정, 영은용정 ㉢ 명칭 - 항주특산, 갈홍이 신선술을 닦던 사자봉 아래 용정에서 따온 이름 ㉣ 역사 - 잎차, 명차로 명성을 얻음. 중국을 대표하는 차 가운데 하나 조선 - 완당전집 - 만허스님(쌍계사) 초의시고 - 운려도인운 : 시회 : 용정차. 영천의 샘물로 용정차 달임. ⑤ 보이차(普洱茶) ㉠ 운남성 보이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떡차로 지명을 따서 붙인 차이름. 운남성의 명차, 오래 묶을수록 좋은 차 ㉡ 산지 - 운남성, 보이현, 서쌍판납주, 맹해다창 ㉢ 명칭 - 보이현에서 유래, 칠자병차, 전차, 방차, 타차, 산차가 있는데 모두 보이차이다. ㉣ 역사 - 한나라 때 부터 생산 명·청대에 명성을 얻음. 수출 - 몽골. 특히 청대에 왕실의 어용차가 됨. 조선 - 홍현주 - 섣달 눈물로 차달이기 : 보이차 홍순학 - 연행가 - 북경차상점 풍경 ⑥ 자순차(紫筍茶) ㉠ 중국 당대 천하 제1의 차. 차잎의 빛깔이 자주색이 나는 죽순과 같다고 해서 생긴 차이름. ㉡ 산지 - 고저자순 : 절강성 장흥현. 의흥자순 : 강소성, 의흥현, 양선차 몽정자순 : 사천성, 명산현 ㉢ 명칭 - 당나라 때 생긴 차이름. 잎차의 대명사. ㉣ 역사 - 육우 다경에 등장 조선 - 서유구(1764~1845) 임원 16지 차 재배 ⑦ 황 차(黃 茶) ㉠ 중국의 8대 다류 가운데 하나로 군산은침, 막간황아 등 명차가 있다. 차의 빛깔이 누렇게 되어서 붙인 이름. ㉡ 산지 - 군산은침 - 호남성 동정호의 군산도 막간황아 - 절강성 막간산 ㉢ 명칭 - 반발효차로서 누렇게 뜬 차 ㉣ 역사 - 명대에 주로 발전, 명차로 됨. 조선 - 대량 수입, 염료로 사용(빙허각이씨- 규합총서) 동다기 - 전의이, 본문 12장 ⑧ 향편차(香片茶) ㉠ 꽃차 또는 화차라고 불리는 차. 자스민차가 대표적인 향편차이다. ㉡ 산지 - 쟈스민차 - 복건성 계화차 - 광서성 계림. 장미차 - 복건성 국화차 - 복건성 ㉢ 명칭 - 꽃의 향기를 흡착시킴. 꽃의 이름을 붙여서 부름. ㉣ 역사 - 명나라 때 성행 조선 - 대량 수입. 최영년 - 해동죽지 : 조선 생산 조선의 대용차 ① 백산차(白山茶) ㉠ 백두산에서 생산되는 차. 철쭉과나 석남과의 나무의 잎을 따서 만듬. 청나라 때(건륭) 어용차로 사용. ㉡ 산지 - 백두산 인근 산간 마을. 함경도, 길주, 무산, 일본 북해도, 캄차카 반도, 만주, 표고 1500m이상 고산지대. ㉢ 명칭 - 백산차 - 백두산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생김. 석남차 - 석남과 식물 안춘향 - 약명으로 부름(길림외기) ㉣ 역사 - 기원은 미상, 고조선 사람들이 제천의식에 사용했다고 함. 조선불교통사(이능화) - 청나라 어용차 은송당집(이상적) - 백산다가(박경로) ㉤ 일화 - 니오라쩨(D.G.Nioradze). 폴란드 [시베리아 제민족의 원시종교] : 야쿠르족의 샤아먼 백산차를 향처럼 피웠다 ② 해아차(孩兒茶) ㉠ 살구씨로 만든 차. 약으로 많이 사용. 동의보감에 처방전이 실림 ㉡ 산지 - 미상 ㉢ 효능 - 혀, 처방, 해아차(황백산) 후음, 탈항, 해아차(해아산) 제창, 천포장, 해아차(서성복전환) 제창, 천포창, 해아차(천금산) ③ 국화차(菊花茶) ㉠ 국화꽃으로 만든 차, 약용으로 사용, 동의보감에 처방전이 실림. ㉡ 산지 - 미상, 전국 ㉢ 효능 - 머리, 두풍, 국화차(국화차조산) 면안, 의막, 국화차(국화산) 수부, 논수품, 국화차(국화수) : 장수 ④ 인삼차(人蔘茶) ㉠ 인삼 뿌리로 만든 차, 약용 또는 보신용으로 많이 마심. ㉡ 산지 - 개성, 전국 ㉢ 효능 - 해진, 거담, 인삼차(인삼반하환) 제창, 대풍창, 인삼차(가미고삼환) ㉣ 역사 - 중종실록 34년, 인삼차, 사신 대접 선조실록 31년 6월 인삼차, 양호면담. ⑤ 천궁차(川芎茶) ㉠ 천궁의 뿌리로 만든 차, 약용 ㉡ 산지 - 미상, 전국 ㉢ 효능 - 머리, 두풍, 천궁차(천궁차 조산) 머리, 두목불청리, 천궁차(천궁환) 머리, 두목불청리, 천궁차(천궁산) 머리, 편두통, 천궁차(천궁산) ⑥ 구기차(拘杞茶) ㉠ 구기자 열매로 만든 차, 약용 ㉡ 산지 - 미상, 진도 ㉢ 효능 - 산림경제(홍만선) : 구기차, 보익, 보안 ⑦ 기국차(杞菊茶) ㉠ 구기자와 국화꽃을 섞어서 만든 차 ㉡ 제조법 - 들국화 1냥, 구기차 4냥, 녹차 5냥, 참깨 반근 곱게 갈아서 소금간을 하여 끓는 물에 타서 마심. ㉢ 문헌 - 산림경제 권 2, 다탕, 기국차 ⑧ 우유차(牛乳茶) ㉠ 우유를 차처럼 마심. ㉡ 문헌 - 철종실록 권 15, 14년 5월 : 우유차 ㉢ 이용법 - 다른 대용차에 타서 많이 마심. ⑨ 오과차(五果茶) ㉠ 오갈피 나무로 만든 차 ㉡ 문헌 - 아언각비(정약용) 권 1, 다조 : 오과차 ㉢ 이용법 - 다른 대용차와 동일하게 만들어 마심. ⑩ 송절차(松節茶) ㉠ 소나무 순과 껍질을 벗겨 만든 차 ㉡ 문헌 - 아언각비, 권 1, 다조 ㉢ 이용법 - 대용차로 만들어 마심. 송차, 해남, 강진 일대에서 성행 ⑪ 상지차(桑枝茶) ㉠ 뽕나무의 어린 잎이나 뿌리의 껍질로 만든 차 ㉡ 산지 - 전국 ㉢ 문헌 - 아언각비, 권 1, 다조 ㉣ 이용법 - 대용차로 이용, 고혈압에 효과 ⑫ 귤피차(橘皮茶) ㉠ 귤껍질을 말려서 차로 끓여 마심. ㉡ 산지 - 제주도 ㉢ 문헌 - 아언각비 권1, 다조 조선불교통사, 귤화차 ㉣ 효능 - 감기, 기침에 효과 ⑬ 기타 ㉠ 대용차로 만들어 마신 약재가 많음. ㉡ 생강차, 모과차, 유자차, 감잎차, 당귀차, 두충자, 결명자차, 보리차, 옥수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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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멋과 여유를 즐긴 한국인의 차문화로서, 한국화장문화사(전완길 저)와 Korean Culture(이경희 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전재자 註 : 이하 연한 보라색 문장은 전재자가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자료를 보충한 것임. 조선 시대의 차예 (朝鮮時代의 茶藝) | ||
1. 문인차풍과 선차풍 (文人茶風과 禪茶風)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다풍이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다. 조선 왕실에서는 고려 왕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차례(茶禮)가 빈번히 거행하였고, 문인들이 여전히 차를 즐겨 마셨다. 다만 불교가 배척되고 유고가 신봉되었는데, 문인 중심의 다풍(茶風)이 융성해짐으로써 선가(禪家)의 다풍과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고려의 다방(茶房)이 조선시대에도 존속되고, 사헌부 관리들은 차를 즐겨 마심으로써 다시(茶時)라는 관용어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또한 중앙과 지방 각 관야에 차모(茶母)가 배치되어 다담상(茶啖床)을 지공(支供)하게 되자 고려의 차가게인 다점(茶店)이 존재가치를 상실, 소멸되고 말았다. 관아에서 손님을 맞아 다담상을 차려 내는 관습은 곧 민간에 전파되었다. 관아와 여염을 막론하고 다담상을 차리는 기준은 주인의 살림형편에 알맞은 정도였다. 그런데 다만 국기(國忌)중에는 다담상 대신에 간소한 다과(茶菓)를 접대해야 하는데, 이 관습은 지금도 여전하여 손님을 맞을 대 으레 다과를 대접한다고 말한다. 신라에서 고려에 전승된 다풍, 즉 차 마시는 법도를 중시하기보다는 차 마시는 행위(차를 달이는 분위기)를 더 좋아하고, 야외 차풍류(茶風流)를 계승시켰다. 따라서 다구(茶具)나 다기(茶器)보다 좋은 차를 더 중시하였다. 차는 기호 음료이지 일본에서처럼 예절을 익혀 왔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 때문에 차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지 않았으며 많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에 의하여 우리나라 처음으로 다서(茶書)가 저술된다.(초의보다 먼저 다산이 「東茶記」를 저술했다고 하나 전하지 않음) 그나마 초의의 저술도 자신의 차생활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부탁을 받아 쓴 것이다. 여하간 초의의 「동다송(東茶記)」은 우리나라 사람이 쓴 유일한 다서(茶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차의 우수성과 차의 이론을 극명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초의는 또 「다신전(茶神傳)」을 저술하였는데,「동다송」이 우리나라 다예(多藝)의 이론서라면 「다신전」은 실기 안내서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해박한 지식과 높은 식견을 지닌 초의는 당대의 고관 및 학자들과 교류함으로써 은연중에 한국 다예를 전파시키는 중추기능을 발휘하였다. 조선시대 때 역시 잎차와 단차, 말차를 고루 음용하였다. | ||
2. 조선 시대의 차구 (朝鮮時代의 茶具) 그러면 조선시대에는 주로 어떠한 다구들이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자.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시 「전다(煎茶)」에는 물병(甁)과 솥(鼎), 잔(椀)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병(甁)이 모두 물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춘일체천잡시(春日棣泉雜詩)」를 보면 은병(銀甁)이 차 달이는 기구이다.
솥도 여러 가지였다. 서거정의 「전다」에 보이는 솥은 다리 달린 솥(鼎)이지만, 이상적(李尙迪)의 「다연(茶煙)」에 나오는 것은 작은 돌솥이다.
한편,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은솥(銀鐺)을 사용하고 있었다. 「은당자명(銀鐺煮茗)」이라는 시가 그 증거이다. 차솥이 사용되었다면 화로가 함께 사용되었을 것이다.
정약용은 다조(茶竈)를 사용하였는데, 신라.고려때의 다조와 같은 형태인지의 여부를 알 수 없으나 같은 기능이었던 것 같다. 즉 찻물을 끓이는 솥과 화로, 다기의 세척 기능을 겸한 것이었다.
정약용의 「다합시첩(茶盒詩帖)」인데, 또 다른 시에는 차광주리 차맷돌이 보인다.
차 대광주리는 다구이긴 하되, 차의 저장용이 아니라 갓 단 차잎을 담고 건조시키기 위한 기구이다. 도 다연(茶碾)은 다마(茶磨)와 마찬가지로 잎차를 말차로 만드는 맷돌이나, 다마가 맷돌임에 반하여 다연은 맷돌 한쪽을 공굴려서 분쇄시키는 약연(藥碾)형태를 가리킨다. 이 밖에 법제된 차를 담아 보관하는 항아리가 필요하다.초의(草衣, 張意恂)의 시「봉화산천도인사다지작(奉和山泉道人謝茶之作)」에는 옥병이 보인다.
옥담(玉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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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좌전다(夜座煎茶) / 정희량(鄭 希 良) 夜如何其千欲雪 靑燈古屋寒無眠 야여하기천욕설 청등고옥한무면 受取床頭苔蘇腹 瀉下碧海冷冷泉 수취상두태소복 사하벽해냉냉천 撥開文武火力均 壁月浮動生晴煙 발개문무화력균 벽월부동생청연 松風颼颼響空谷 飛流激激鳴長川 송풍수수향공곡 비류격격명장천 雷驚電走怒未已 急輪轉越幰轅巓 뇌경전주노미이 급륜전월헌원전 須臾雲捲風復止 波濤不起淸而連 수유운권풍복지 파도불기청이연 밤이 얼마나 되었는 지 눈이 오려네. 푸른 등 속의 고옥에 잠이 안와 상머리 이끼 낀 병 손수 들어다 벽해처럼 맑고 찬 샘물 부어 조심스레 고르게 불을 피우네. 벽위로 달 오르고 연기 맑게 피네. 솔바람 우수수 빈 골짜기 울리듯 쏟아져 내리는 폭포 긴 강 울리듯 천둥 번개 기세 그치지 않더니 급히 달리던 수레 고개 넘어 떨어지 듯 이윽고 구름 걷히고 바람 멎으니 파도일지 않아 맑고도 잔잔하네. 정희량(鄭希良, 1469~?) 호가 허암(虛庵). 1492년(성종 23) 1등으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495년(연산군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2년 후 1497년 대교(待敎) 때 왕에게 경연(經筵)에 충실할 것과 신하들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일 것을 상소하여 왕의 미움을 샀다. | ||
3.조선 시대의 찻잔 (朝鮮時代의 찻잔) 서거정이 작설차를 보낸 준 설잠상인(雪岑上人)에게 감사하면서 쓴 다음 시는 음다(飮茶)의 운치와 아울러 여러 가지 다구를 엿보게 한다.
서거정은 설잠상인으로부터 잎차(鳳凰舌)를 선물받아 말차로 만들었는데 말차를 마신 잔에 배(杯)라고 표현하였다. 이 밖에 소완(小碗).완(椀).구(甌).화구(花甌) 등이 있었다.
이상적(李尙迪)은 소완(小盌)을 이용하였다. 차를 따르며 읊은 「읍다(挹茶)」에서 '찻잔에 차를 따르노라니(小盌挹茶水) / 이다지도 많은 거품이 일어나는지(千漚何蕩發)'라고 하였다. 이 밖에 표주박과 물그릇이 다구로 사용되었다. 조선 말기에 조대비(趙大妃)의 수연(壽宴)인 차례(茶禮)에 사용된 다기는 모두 은제였다. 이제까지 다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다문화 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즉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국시대 초기에 일찌기 음다(飮茶)생활을 영위하였으며, 높은 차지식을 향유하고 있었다. 또한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가지 잎차와 말차, 단차를 음용하였고, 차의 음용은 특수층에 한정된 사치행위가 아니라 멋스러운 생활의 일부였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차를 마시되, 목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차를 달이거나 미시는 그 자체에 깊은 의미를 부여한 바, 이것은 한국인의 특별한 다풍(茶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음다속(飮茶俗)이 소멸하였다거나 단절했다고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이는 한국인이 사용한 다구와 다기의 종류와 활용 사실로 충분히 입증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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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형 조회 51 추천 0 2010.03.04. 17:46
조선시대의 차문화 고려 시대까지 그렇듯 풍성하던 차 문화가 조선조로 접어들면서 갑작스럽게 쇠퇴하는 현상을 보인다. 주자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을 펴자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걸었고 차의 수요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이유만으로 온 나라 온 백성이 생활속에서 즐기던 차가 갑작스럽게 쇠퇴하였다 는 데에는 의문이 남는다. 조선 시대에 새로 국교로 등장한 유교의 경전, 곧 주자학이 차 문화의 직접적인 쇠퇴 원인이라고 단정 하는 것은 무리이다. 주자의 사상이 바로 차 생활을 통해 닦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주자는 중국 안징성 자원현이 고향으로 그곳은 지금도 차의 본고장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복건성 무이 산에 있는 문공서원 (文公書院)에서 그의 철학을 완성했는데 그곳의 다풍은 매우 검소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주자는 스스로 제정한 「가례」(家禮)속에 차례 (茶禮)로써 조상께 제를 올릴 때의 의례를 담 았다. 말하자면 주자학의 도입이 차의 쇠퇴 동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쇠 퇴와 함께 차도 쇠퇴하였다는 사실은 차의 생산이 사원의 주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 다. 차 문화가 단절되었다고는 하나 고려 때에 성행했던 음차 풍습의 흔적은 곳곳에 많았다.
무엇보다 고 려 시대의 차공 (茶貢)이 조선 중엽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사실은 성종 때의 문신 김종직의 글에 나온다. "함양에 부임하여 보니 함양군에서는 나지도 않는 차를 해마다 백성들에게 부과하여 백성들은 멀리 전라도에 가서 비싼 값에 차를 구해온다. 쌀 한 말에 차 한 홉의 비율로 사온다. 그 폐단을 알고는 백성 들을 몰아치지 않고 관에서 구해 상공 (上供)하였다. 내 일찍이 삼국사를 읽었으되 신라 때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얻어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기록을 보았는데 함양이 지리산 아래이니 어찌 신라 때의 것이 남아 있지 않으랴 생각되어 늙은이를 만날 때 마다 물어 보았다.
그결과 엄천사 (嚴川寺)북쪽 대나무 숲에서 차나무 몇 그루를 얻었다 나는 몹시 기뻐서 곧 그곳에다 다원을 설치하고 근방에 있는 백성들의 밭을 다 사서 관전 (官田)으로 보상해 주었다. 몇 해가 안 가 차나무는 잘 번식해서 다원 안에 가득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차의 부세가 함양군에까지 있었으니 그 아래 지역에는 모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특히 호남 지방에 가면 값이 비싸기는 해도 얼마든지 차를 구할 수 있었다. 조선의 숭유 정책 에 밀려 불교와 함께 스러졌다기 보다는 조정에서 생산을 장려하지 않고 착취만을 일삼았기 때문에 차 문화가 쇠퇴하였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다시 (茶時)를 지키는 풍속도 있었다. 사헌부 관원들이 공정한 판결을 위해 매일 매일 일정한 시간에 모여 차를 마시며 의논하였는데 그것을 다시라고 했다.이러한 풍속은 관리 사회뿐만이 아닌 선비 사회에도 있었다. 조선 사회에는 또 야다시 (夜茶時)라는 은어가 있었다. 재상 이하 누구든지 간사하거나 부세를 많이 거두고 백성을 해치거나 재물을 탐내는 사람이 있으면 여러 감찰들이 야다시 를 이용하여 그 사람의 집 근처에 가서 죄를 논하고 흰 판자에다 한 내용을 적어서 그 집 문위에 걸었 는데 이 야다시를 당한 사람은 다시는 의관 반열에 들지 못하는 기물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이 때 차 생활사에 일대 혼돈을 주는 기록이 있으니 명나라 장수 양호에 얽힌 일화이다. 임진 왜란 때에 원군을 이끌고 온 그는 남원에 주둔할 당시 토산차를 발견하고 선조대왕께 진정했는데 그 일문 일답에서 당시의 조선 왕실에 음차 풍습이 없었음을 알려준다. 남원에서 차 두 포를 구한 양호가 그것을 선조대왕께 보이며 진정을 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차는 남원에서 난 것으로 그 품질이 상품입니다. 귀국에서 이와같이 좋은 차가 있는데 어찌 마시지 않습니까 ? 이 차를 요동에 가져다 팔면 열 근에 은 1전을 받을 수 있으니 차를 팔아서 일 년이면 만여 필의 전마 ( 戰馬 )를 남깁니다." 양호의 진정에 선조대왕은 "조선의 습속이 본래 차를 마시지 않소.
남원의 것은 육안차 (陸安茶)의 종류가 아닌 작설차요." "이것도 차입니다. 귀국에서는 인삼을 즙을내어 마시는 데 그것은 약이지 차가 아닙니다. 인삼차를 마시면 가슴이 답답해져 차를 마셔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만 못합니다. 귀국의 신하들에게 차를 마시게 하면 몸과 마음이 열기고 기운이 나서 모든일을 절 해낼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에 선조는 여러 신하를 별전에 불러 양호와의 다담을 옮기며 신하들의 의견을 물 었는데 정탁이란 신하가 " 이는 참으로 모욕적인 말입니다.
차를 위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일을 잘 경영하지 않는다고 빗대서 하는 말입니다. 태만한 성질이 어찌 차 마시는 것으로 고쳐질 수 있겠습 니까 ?' 라고 했다. "이는 「조선 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에 있는 이야기이다. 당시 남원에서 차가 생산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남쪽 지방 일대에 차세 (茶稅)가 있었다는 것과 다시 유속과는 상반되는 기록이다. 차나무가 야생하는 남방 지역의 백성들이 고려 후기와는 또 다른 특별한 고초를 겪는 것은 임진 왜란 때에 비롯되어 병자호란 직후에 절정을 이룬다. 전쟁에 패한 뒤 청나라가 요구한 세폐에는 조선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양의 차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차가 조직적으로 생산되기는커녕 거의 잊혀져 가던 때에 차를 마련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백성들이 차밭을 불질러 버리는 사태가 곳곳에서 빚어 졌다. ☞ 남방 차의 전래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 BACK 바로 이즈음에 인삼즙,쌍화탕,결명자,구기자,같은 그 때까지 약으로 전래되던 탕과 즙이 「동의보감」 에 힘입어 차의 대용품으로 민간에 퍼졌고 차는 종적을 감춰 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고려조에 비해 조선 시대에 차 생활이 비록 쇠퇴하였다고는 해도 완전히 단절되었 던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차는 전래적인 성격으로나마 민간에 이어져 내려왔고, 그래서 차를 마시지 않으면 대화도 생활도 건 조해지는 타성이 대용차 시대를 열게 했던 것이다. 임진 왜란. 이후 1805년에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인 강진에서 차 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까지 가야,신라 시대부터 민족이 애음하던 차는 깊이 숨어 그 맥조차 끊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1806년 신유사옥으로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된 지 네 해째 되는 을축년 가을 정약용은 혜장선사를 만난 다. 갇힌 생활에서 조금 자유로워진 정약용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마을 노인 한 분을 앞 세우고 삼십리 쯤 떨어진 도암리에 있는 만덕산 백련사를 찾아간다.
그곳 주지인 젊은 스님이 학식이 높은 선비가 있 다는 소식을 듣고 한번 보고 싶다는 기별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백련사에서 혜장을 만난 정약용은 목례를 나눈 뒤 스님이 권하는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두 사람의 화제는 불교에서 주역으로 옮겨지며 날이 저물도록 계속된다. 밤이 늦어 못내 아쉬워하며 헤어질 때 정약용은 말한다. "차 맛이 너무 좋습니다. 다시 스님을 찾아오면 그 때도 차를 주시겠습니까.? "역 (易) 에 밝으시니 내일 일을 익히 아시겠지요.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밤길을 걸어 처소로 돌아온 정약용은 혜장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시 혜장의 나이는 34세로 정약용보다 꼭 십년이 아래였지만 유배 생활에서 벗 없이 오랜세월을 지내 왔던 그에게 말벗이 될 수 있는 혜장의 등장은 반가움을 넘어 충격이었다. 뜨거운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고 잠을 뒤척이고 있을 때 자정이 넘 어 인기척이 났다.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보니 뜻밖에도 손님은 혜장스님이었다. 둘은 서로 껴안고 눈 물 까지 흘렸다.
이 이야기는 강진에서 구전되고 있는데 정약용이 처음 차를 접하게 되는 것은 이 때로서 이것이 조선 역사에 차가 재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해 겨울 정약용은 혜장의 도움으로 동문 밖 주막을 떠나 강 진읍 뒤 고성사 (高聲寺)로 옮기고 그 거처를 보은산방 (寶恩山房) 이라 이름 지었다. 혜장은 이 곳에 자신의 제자를 보내 주었다.그는 늘 정약용에게 차를 달여 주었고 잔심부름도 하였다. 그의 이름은 索性 이었는데 그 때 이미 방대한 화엄경 공부를 모두 마치고, 겸하여 두보의 시를 통독했 을 정도로 학식이 있었다. 정약용이 하루는 색성에게 차 한 잔 마시기를 원했으나 보은산방의 차는 동 나 버리고 없었다. 그는 붓을 들어 소 (疏) 한 편을 단숨에 써내렸다.
소란 흔히 임금에게 써올리는 글 을 말하거니와 불가에서 죽은 사람을 위하여 부처 앞에 명부에 적는 글을 말하는데 정약용은 혜장에게 걸명소 ( 乞茗疏 )를 보낸 것이다. 나그네는 근래 차버러지가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 차의 묘한 법은 육우의 다경 3편을 모두 통달케 했고, 병든 큰 누에는 마침내 다인 노동조차 마시지 못했던 일곱 잔째를 마르게 했소 . 비록 정력이 쇠퇴했다 하나 기모경 (基母炅)의 말은 잊지 않았고, 막힘을 풀고 흉터를 없애기 위해 이찬황 (李贊皇, 李德裕)의 차 마시는 버릇을 얻었소. 윤택할진저 ! 아침에 달이는 차 에 화 (華) 가 일어나니 뜬 구름이 맑은 하늘에 희고 흰 듯하며 낮잠에 서 깨어나 달이는 차는 밝은 달이 푸른 시내에 잔잔하게 부서지는 듯하오.
다연 (茶硯)에서 차를 갈 때 잔 구슬인지 흩날리는 벽성인지 산골의 등잔불에서는 가리기 아득한데 자주뱇 어린 차순의 향내는 그 윽하고 불을 일어 새 샘물 길어다.들에서 달이는 차의 맛은 신령께 바치는 백포 (白袍) 의 맛과 같소 꽃청자 홍옥 (紅玉)의 차완을 쓰던 노동의 호사스러움을 따를 길없고 돌솥 푸른 연기의 검소함은 한비 자 (韓非子)에게 미치지 못하나 물 끓이는 홍취를 게눈, 고기눈에 비기던 옛 선비들의 취미만을 부질 없이 즐기는 사이 용단 (龍團) 봉단 (鳳團) 등 왕실에서 보내주신 진귀한 차는 이미 바닥이 났소. 이에 나물캐기와 땔감을 채취할 수 없는 병이 들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차 보내 주시는 정다움을 비는 바이오 듣건데 . 죽은 뒤 고해 (苦海)를 건너는 다리로서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 (膏液)이 뭏친 차를 몰 래 보내 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말고 베풀어 주소서. 정약용의 " 소 "는 물론 장난이다 .
하지만 그는 혜장에게서 얻은 차를 송나라 때의 황실에서 쓰던 용단 봉단에 비유했다. 그는 혜장을 차의 임금으로 장난삼아 부르면서 소를 통해 차 보내주기를 간청 했던 것이다. 실학의 대가 정약용의 글과 시는 언제나 다분히 현실적이지만 이 걸명소에는 그러한 리얼리즘이 없 다. 이 때 이미 정약용은 차의 세계에서 풍류를 즐겼던 것이다. 얼마 뒤 마을 사람들은 차나무가 많아 다산 (茶山)이라 부르는 마을 뒷산에 초당을 마련하고 그곳에 정약용을 모셨다. 마을 사람들은 다산에 사는 정 ( 丁 ) 씨라 하여 정다산 이라 불렀고 이 때부터 아예 다산을 자신의 아호로 쓰기 시작했다.
1818년 정약용의 강진 생활이 마무리되던 해에 그의 제자들이 다신계 (茶信契)를 조직한다. 귀하다는 사람들은 신의가 있다. 만약 떼지어 모여 서로 즐기다가도 흩어진 뒤에 서로 잊어 버린다면 이는 금수의 짓이다. 우리들 여나믄 사람은 1808년의 봄부터 오늘까지 형제처럼 모여 살면서 글을 읽 었다. 이제 스승께서는 북녘으로 돌아가시고 우리들은 별처럼 흩어지니 이것이 서로를 막연히 잊고 생각치 않는 이별이 된다면 이 또 한 방정맞지 않을손가.
지난해 봄 우리들은 이 일을 미리 염려하고 계 (契) 를 세워서 돈을 모았다. 사람마다 돈 한 냥을 두 해 동안 내었는데 근심되는 것은 출납이 뜻대로 바르고 쉽게 되지 않았다는 것 이다 , 스승께서는 보암의 서촌에 몇 구역의 메마른 밭을 방매 하려고 하였으나 많이 팔 수가 없었다. 이에 우리들은 서른 다섯 냥의 돈을 여행장비에 넣어 드렸다, 이에 스승께서는 서촌의 밭을 다신계라 는 이름의 계를 만드는 데 쓰도록 둠으로써 훗날 믿음을 꾀하라는 밑천으로 삼게 하셨다.
다신계절목에는 모두 18명의 제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후미에는 다산이 직접 기술한 대목도 있다. 다산은 약조에 이르기를 "매년 청명,한식 일에 오든 계원이 다산초당에 모여 계사 (契事)를 치 르는데 운을 내서 시를 짓고 연명으로 작서하여 유산 (酉山,정약용의 아들) 에게 보내라.또 곡우 때 딴 어린 차는 볶아서 엽차 한 근을 만들고 입하 때 딴 늦은 차로서 병차 (餠茶) 두 근을 만들어 시와 서찰 을 함께 동봉하여라 했고 " "가을 국화가 피는 시절에도 초당에 모여 시를 지어 보내라"고 하였으며 "봄 에 차를 따는 노역에 빠지는 계원은 돈 5전을 내서 마을 아이에게 차를 따도록 하라" 고 했다.
그리고 다산은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갔다.18명의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자상한 훈도를 잊지 않았다. 고향에서도 다산은 저술에만 전념하다가 75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제자들의 정성은 한 해도 거름이 없 었다. 다산과 혜장 이후 조선 시대 차 생활의 맥은 추사와 초의로 이어진다. 1809년 24세 생원이 된 김정희 (金正喜)는 그 해에 동지사로 청나라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가서 당대의 큰 유학자들과 교유 하면서 경학 (經學),금석학 (金石學),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 때에 차 생활의 진수를 몸에 익히고 돌아온다. 귀국 후 그는 고증학의 도입을 시도하면서 많은 친구들에게 차 마시기를 권하며 스스로를 승설학인 (勝雪學人) 이라 칭하기도 했다. 초의가 다산의 아들인 유산의 소개로 추사를 만난 것은 이 때로서 한 양에 초대 받은 초의는 두 해 동안을 장안에 머물면서 유산과 추사를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과 교분을 맺었다.
다시 해남으로 돌아온 초의는 그 후 해마다 봄이면 정성들여 차를 만들어 추사에게 올려 보냈다. 어쩌다 한 해 차를 올리지 못하면 추사는 다그치는 편지를 썼다. "행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과천 (果川) 과 열수 ,용호 백로정 (蓉湖白露亭)으로 새 차를 보내더니 금년 에는 벌써 곡우가 지나고 단오가 가까워졌는데도 두륜산의 한 납자 (衲者)는 소식조차 없으니 어찌 된 일인가. 말꼬리에 매달아 보낸 것이 도중에 떨어진 것인가 아니면 유마병 (維摩病),중생의 아픔으 보고 부처가 앓았다는 병 )이라도 앓고 있는 것인가. 만약 더 지체하면 마조할 (馬祖할 욕질)이나 덕산봉 德山棒.몽둥이질,)으로 그 몹쓸 버릇을 징계하고 그 원인을 다스릴 터이니 그대는 깊이깊이 깨닫게나." 한 뒤에 추사는 "거듭 거듭 차 빨리 보내기를 당부하네"라고 썼다.
그렇게 추사에게 보내진 차는 한양의 지체높은 선비들에게 널리 퍼졌고 차를 마시는 자리마다 초의의 이야기가 전해 졌다. 초의는 이를 계기로 중국의 「만보전서」(萬寶全書)에서 차에 관한 기록을 뽑아 「다신전 (茶 神 傳) 을 썼다. 차나무는 적당한 곳에 종식해야 하고, 그 성질에 알맞는 자양을 주며,차를 딸 때에는 묘 (妙)를 다해 야 하고, 차를 저장할 때에는 습기가 스미지 않도록 유의하고, 물은 진수 (眞水)를 쓰고, 끓는 물은 중정 (中正)을 얻고, 수체 (水體)와 다신 (茶神)은 상화 (相和) 하고 , 신건 (神健)과 수령 (水靈)은 상 병 (相倂) 해야 한다. 이럴 때 다도는 완수되는 것이다.- 무자년 (1828년) 어느 비 오는 날 스승을 따라 지리산 칠불아원 (七佛亞院 )에 이르러 이 책자를 등초 하여 내려왔다.
곧바로 정서하여 한 권의 책으로 짜고자 하였으나 몸이 괴로워 오늘 내일 뜻을 이루 지 못하던 차에 사미승 수홍 (修洪)이 시자방에서 노스님의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그가 다도를 배우고 자 하여 정초 (正抄) 하려 하였으나 역시 몸이 편치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등초를 그대로 놓아 두 었다. 그러다.좌선하는 도중 틈틈이 짬을 내어 완성한 것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음은 어찌 군자의 일이기난 하겠는가. 총림 (叢林.승려들이 모여 좌선.경학을 수도하는 선원 )에도 조주풍 (趙州風) 도의 깊은 뜻을 널리 편 당나라 때 고승) 이 있어 이제껏 알지 못했던 다도를 탐구하고자 외람되지만 이에 초시 (初示)하는 바이다. 병인년 (1830) 중춘 (中春) 눈서린 창가에서 화로를 안고 삼가 씀 위의 기록은 초의가 「다신전」의 말미에 적어 놓은 것인데 초의는 이 「다신전」을 쓸 때쯤 더욱 차 의 깊이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6년 후 추사 김정희를 통해 알게된 홍현주 (洪顯周 정조대왕의 사위) 의 부탁으로 "동차"(東茶) 곧 "한국의 차"를 찬미하는「 동다송 」(東茶頌) 을 저술하여 다서의 불모지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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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조회 96 추천 0 2009.06.10. 15:58 1. 조선시대의 차 문화
1. 조선시대 차문화 특징 (1) 음다풍속 쇠퇴 원인 -숭유억불정책 -차세의 과중 -백성들의 가난
(2) 궁궐에서 관례적인 제전에 쓰인 차 조선왕조 500년동안 궁중내의 다례의식은 조선후기까지 계속 행해졌다.
(3) 茶房(다방) 고려때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궁중에서 차례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기관. 외국사신 맞이 다례와 왕실 다례를 중시했다.
(4) 茶時(다시) 사원부와 혜민서에서 茶時가 행해졌다.
(5) 차시장(茶市)과 찻집이 있었다.
(6) 茶母(다모) 각 관청의 차심부름을 하는 서민층 여성. 조선 중엽에는 비밀형사 역할을 했다.
2. 조선인의 생생활 (1) 문인들의 차생활 대자연속에서 소박한 차생활을 즐겼다.
(2) 백성들의 차생활 일반 백성들은 차를 藥用(약용)과 음료로 사용하였다.
(3) 승려들의 차생활 억불숭유정책으로 佛家의 茶禮(다례)는 다분히 유고적으로 행해졌다.
3. 차의 종류 잎차나 떡차를 끓여 마시는 방법과 고급 단차를 가루내어 뜨거운 물에 넣고 휘저어 마시는 방법이 있었다.
4. 조선시대의 차인들 김종직, 김시습, 서산대사, 영수각 서씨, 초의선사, 정약용, 김정희 등.
참고문헌 류건집, 한국차문화사, 이른아침, 2007 석용운, 한국다예, 보림사, 1991 정영선, 한국차문화, 너럭바위, 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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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가네 ( cheong familly ) 원문보기▶ 글쓴이 : 옥스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