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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비행기가 만들고 싶었다.
산간벽지(山間僻地)에서 자라 자동차보다 산 너머 나는 비행기를 먼저 봤다. 보통의 아이였다면 비행기를 "타보고 싶다"고 했을 텐데, 두멧골 열살 소년은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심산유곡(深山幽谷) 간이학교 교장선생님이었다.
교장 회의에 참석하러 시내에 다녀오면 비싼 대나무 우산을 사오곤 했다. 가족 모두가 서로 쓰려고 경쟁했던 귀한 물건이었다. 소년은 그 우산을 망가뜨렸다. 목적은 단 하나였다.
비행기를 만들고 싶었다.
아버지를 졸라 책을 샀다. 프로펠러 모형 비행기부터 만들 생각이었다.
날개를 가볍게 만드는 게 핵심이었는데, 마땅한 재료가 없었다.
마을 강가에서 미루나무를 구해 살을 만들었다. 비행기의 얇은 틀을 만들기 위해 아버지가 사온 우산의 대나무 살을 수십 번 부러뜨렸다. 요즘은 플라스틱 비행기 모형을 어디서나 쉽게 살 수 있다. 하지만 60여년 전 안동 시골소년은 대나무 우산이 최고의 장난감이자 재료였다.
아버지가 우산을 사올 때마다 금새 망가뜨렸다. 칼을 숫돌에 갈아 대나무 우산살을 다듬다가 손등을 크게 다치기도 했다. 어느새 75세 노인이 된 그의 손엔 지금도 그때 흉터가 남았다.
마음만은 20대 청년만큼 젊은 그는 지금도 흉터를 볼 때마다 어린 시절 꿈과 열정을 떠올린다고 한다.
모형기를 100개 정도 만들어 날렸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같은 마을에 살던 친척 어른이 "그렇게 비행기를 만드는데 왜 하나도 날지 못하느냐"고 놀릴 정도였다. 소년은 포기하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도 그를 꾸중하지 않았다. 항상 칭찬하고 격려하는 아버지의 교육법은 아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희망을 품게 했다.
실패는 오히려 꿈을 크게 했다.
그리고 커진 꿈만큼 실패는 계속됐다. 비행기를 만들려면 과학자가 돼야 했고, 과학자가 되려면 공부를 잘 해야 했다. 문제는 성적이었다. 경북 안동의 산골마을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시내에 자리한 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500점 만점에 316점을 받아 꼴찌에서 네 번째로 들어갔다. 입학 후 첫 학기엔 낙제점을 받았다. 그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그의 아버지가 "시골 사람들에게 글이라도 가르쳐야겠다"며 만든 임시학교였다.
하지만 중학교는 정식으로 과정을 거친 학생들이 모였기에 경쟁이 되지 않았다.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던 소년은 여름방학이 되자 상경해 형을 만났다. 서울대에 다니던 형은 그에게 특별 과외를 해줬다. 기하 문제를 중심으로 논리적 사고를 가르쳤고, 소년은 수학에 재미를 붙였다. 수학을 잘 하게 되자 공부가 재미있어졌다. 그 후 수학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다른 과목도 성적이 크게 올랐다. 20년 후, 그는 결국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입성했다.
故 김영길(金泳吉) 전 한동대 총장(1939~2019)의 이야기다.
김 전 총장은 NASA에서 제트엔진과 우주항공 신소재 합금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힘은 어릴 적 대나무 우산으로 만든 모형비행기와 아버지의 인내였다고 했다.
■"어리석어도 좋으니 어질어라"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시조 시인 이호우(爾豪雨)의 시 '달밤'이다.
김영길은 시를 떠올릴 때마다 어김없이 고향 안동 지례가 선연히 그려진다고 했다.
지금은 안동댐 때문에 수몰지구가 됐지만, 낙동강 한 줄기가 동네 앞으로 굽이 흐르던 곳이었다.
1939년 10월 3일 경북 안동군 길안면 지례동 산골마을의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 김영길은 "어리석어도 좋으니 어질어라"는
부모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이 가르침은 그의 평생을 관통한다. 지나칠 정도로 어진 그의 품성은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 여러 차례 위기를 겪게 했지만, 또한 그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그의 고향은 안동에서도 30리를 더 걸어야 도착하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후에 한 기자가 그의 형에게 "이런 두메산골에서 학자가 많이 배출될 수 있었나"고 질문했을 때 형의 답은 "앞뒤로 산이 꽉꽉 막혀 공부밖에 할 것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의 형은 포항공대(POSTECH) 총장을 역임한 故 김호길(金浩•1933~1994) 박사다.
그는 안동사범병설중학교와 서울대 사대부고를 거쳐 1958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했다.
1964년 도미(渡美)해 미국 미주리주립대에서 석사를 받고 공학분야의 명문인 렌셀러폴리테크닉대학교(RPI)에서 재료공학 박사까지 마쳤다. '잘 나가던' 신진과학자 시절, 그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아내 김영애(金英愛)씨의 강권에 의해서였다.
박사과정 때 중매로 만난 고려대 행동과학연구소 연구원 출신의 아내 김씨는 "같이 교회에 나가야 결혼이 가능하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그는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며 "교회에 나갈 용의도 있다"고 답했다.
아내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표현이었지만, 후에 이 말은 그의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됐다. 3년만에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어릴 적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NASA를 품었다. 비행기를 넘어 우주까지 정복한 NASA에 가기 위해 그는 연구에 더욱 매진했다.
당시 NASA는 워싱턴 D.C에 본부를 두고 10개 도시에 연구소가 있었다. 그의 전공은 클리블랜드에 자리한 '재료에너지 연구소'에 걸맞았다.
1971년 10월 그가 미국 금속학회에 발표한 박사논문 〈제트엔진에 쓰이는 특수합금〉이 NASA의 에쉬부룩(Ashbrook) 박사의 눈에 띄었다. 그는 "NASA에 필요한 연구"라며 젊은 과학자 김영길에게 초빙 의사를 보였다.
문제는 국적이었다. 갖가지 군(軍)기밀을 다루는 곳이라 미국 시민권이 필수였다.
미국연방수사국(FBI)의 신원조회에 1년이 넘게 걸렸다. 당장 갈 곳이 없었던 그는 미국 국방성 산하 '공병금속연구소'에 잠시 적을 뒀다가 1973년에야 NASA 연구원이 될 수 있었다. 꿈을 이룬 것이다.
■NASA에서 만난 기독교 '꿈의 종착점'으로 보였던 NASA에서 그는 열정적으로 연구에 매진했다. 박사과정 때 썼던 논문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가는 것이라 어려울 것이 별로 없었다. 어느 날 미국인 동료 연구원이 그에게 "종교를 갖고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답했다. 당시 그는 한인들의 주요 커뮤니티였던 교회에 출석해 목사의 설교를 열심히 들어왔다. 첫 번째 이유는 아내와의 결혼 조건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도덕과 윤리에 나쁠 게 없다는 것이었다. 별 생각 없이 답한 말인데, 그 연구원은 "화요일 낮 12시에 기도모임이 있으니 꼭 나오라"고 당부했다. 기도 모임에 처음 간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150명이 넘는 NASA의 박사들이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모습이 그에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세계최고의 첨단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열렬한 신앙을 가졌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감명을 받은 그는 화요일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대화를 할 때마다 지식이 부족하다고 여겨졌고,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펼쳤다. 한국어는 딱딱하게 보여 영문 성경을 보기 시작했는데, 신약의 첫 책인 〈마태복음〉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산상수훈은 그에게 도덕적으로 큰 감명을 줬지만,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수천 명을 먹였다는 기적이나 물을 포도주로 바꿨다는 기적은 과학자로서 용납이 되지 않았다. '질량 보존 법칙'에 위배되는 내용을 과학자의 양심으로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가 안 나온다고 실험을 포기할 수는 없다'며 그는 각종 과학과 연관된 기독교 서적을 모조리 사서 읽었다. 대폭발로 인한 우주의 기원에서부터 천지창조, 예수의 부활, 동정녀 마리아 등을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 1975년, 그는 원자와 분자 등 우주의 물질세계보다 고차원인 '영적 세계'가 존재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전적으로 신앙에 의지하게 된다. 보다 현실적인 세계로 나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연구 중심의 NASA보다는 그 연구를 구체적으로 실용화할 곳을 찾았다. 당시 세계 최대의 금속합금회사였던 인코(Inco)의 문을 두드렸다. 마침 NASA를 찾은 인코의 기술담당 부사장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하자 부사장은 뜬금없이 종교가 뭐냐고 물었다. 기독교인이라고 답하니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 그는 부사장에게 "물로 삼위일체를 생각하면 가장 쉽다"고 답했다. "물은 같은 성분이지만 고체, 액체, 기체가 된다"며 "성부, 성자, 성령도 같은 이치"라고 했다.
놀란 부사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김영길 박사는 곧 인코의 연구원이 됐다.
문제는 영주권이었다. 미국의 이민법상 정식 연구원이 될 수 없었는데, 회사에서 "김영길 박사가 비자 문제로 한국에 돌아가면 미국이 손해"란 탄원서를 만들어 연구원들의 서명을 받게 했다. 전례 없는 채용이 이뤄졌다. 현실이 된 꿈 앞에서 그는 큰 성과를 거뒀다. 제트엔진에 쓰이는 합금 MA 6000을 발견해 '미국 산업연구발명상(IR100)'을 받았고, NASA의 '제2차 발명연구상'을 차지했다.
■'잘 나가던' 1978년, '잘 나가던' 미국 생활도 다시 한 차례 큰 전환점을 맞았다. 인코연구소 4년차 때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생활환경과 연구활동 모두 가장 만족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언젠가 고국에 돌아가 자신의 연구를 전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아직 기독교를 모르는 부모와 형제들에게 이를 전파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한국행도 결국 '영적인 선택'이었다. 뉴욕의 한 교회에서 기도하던 그에게 설교자는 "가라, 주저하지 말고 가라. 내가 네 길을 예비해 놓았다. 네가 주저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내가 너를 통해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리라"라고 외쳤다. 이를 신의 섭리로 이해한 그는 인코에 사표를 냈다. 놀란 연구소장은 극구 만류했지만, 이미 뜻을 확정한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대신 향수병 때문에 그런 것이라며 6개월간 휴직을 하게 했다. 1978년말, 그는 12년간의 미국생활을 모두 접고 귀국했다. 그는 이후 18년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재료공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때 자신이 배운 과학을 자신이 믿는 종교에 접목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1968년부터 조성된 서울 홍릉의 소규모 과학단지는 그가 한국에 들어오던 1978년엔 이미 300여명의 과학자들이 모인 대규모 단지가 됐다. 과학자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던 점은 그에게 큰 도전이 됐다. 그는 '창조론' 전도사가 됐다. 당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해답이 없었던 〈창세기〉 1장 1절의 "태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란 구절을 우주과학과 물리학을 적용해 해설했다. 그는 현재까지 ▲확실하고 분명한 진화의 예가 없고 ▲반쯤 발달된 형태의 생물이 과거로부터 보존돼온 것이 없으며 ▲중간형태의 화석이 없고 ▲현재 진화가 증명되는 예가 없다는 등의 논리를 펼치며 진화를 비판했다. 1980년 창조론 관련 세미나에 참여한 20여명의 과학자가 주축이 돼 다음해 1월 '한국창조과학회'가 창립됐다. 그는 회장을 맡아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창림 30년을 넘긴 한국창조과학회는 수백명의 과학자가 참여해 세미나와 저술활동을 지원하는 등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하며 과학교과서와 관련 논쟁에서 많은 이슈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창조과학회와 함께 그의 연구도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전자반도체 'PMC102'를 발견해 미국과 일본에 특허를 출원했다. '제1호 대한민국 기술 수출'이 돼 국민훈장 동백장까지 받았다. 그는 이어 초내한강 'CAMI'을 발견해 세종문화상을 받고, 고강도 고인성 텅스텐 'W250'을 발견해 '올해의 과학자상'을 받은 것 등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이뤄졌다며 그 영광을 돌렸다. 그는 "신앙이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란 아인슈타인의 어록을 자주 인용한다. 지구상에 사는 수백만 종의 동물과 식물 등 자연이 오차없이 지속되는 것을 보면 창조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18년간 KAIST 교수로 재직한 그는 또 '잘 나가던' 삶에 큰 변화를 겪었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 두고 1995년 경북 포항의 신생대학인 한동대 총장이 돼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무전공•무학과 입학, 전교생 복수전공, 100% 영어수업, 무감독 양심시험, 사회봉사 의무제도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교육체계 실험을 시도해 큰 관심을 모았다. 그의 과감한 실험은 20여년이 지난 지금 KAIST를 비롯한 국내 주요 대학이 실시하는 교육혁신 사례가 됐다.
■계속되는 꿈 그가 2001년 학교 운영 과정에서 예산을 불법으로 전용하고 횡령한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구속됐을 때, 학생 1500여명이 경주 구치소에 찾아가 '스승의 은혜'를 외치며 총장의 결백을 주장한 것은 한국 대학 역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로 남았다. 학생과 교수들의 지지 속에 복귀한 총장은 "Why not change the world", "배워서 남 주자" 등의 가치를 내세우며 대학을 수준급으로 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과학자에서 교육자로 변신한 그는 2011년부터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제17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의 교육 혁신 사례는 많은 대학이 모델로 삼을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현재 한동대는 복수의 전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공연영상 전공과 경제학을 함께 전공해도 학위를 받는 데 무리가 없다. 총장은 "학교엔 박스(전공)만 두고 이를 다 풀어 학생들이 아무거나 선택해 완전 뒤섞도록 함으로써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한다"고 설파했다. 고교 때 문과와 이과를 가르고, 한창 창조적 아이디어가 넘치는 20대 초반에 전공의 틀에 갇히게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2013년 〈동아일보〉와 인터뷰 중 "대학의 전공을 없애야 한다는 말인가"란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석사나 박사 과정이라면 한 분야에 몰두해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 된다. 그러나 학부생은 교수보다 훨씬 창의적이다. 그런 능력을 케케묵은 전공의 틀로 막아놓으면 안 된다. 아직도 1960년대에 만든 전공이 대학마다 버젓이 있다. 대학이 바뀌기 힘든 가장 큰 이유는 교수들 때문이다. 자기 분야의 벽을 높이 쌓아서 다른 것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단절됐다. 지금 사회는 벌써 경계가 없어졌는데 말이다." 6년 전 대학원 과제로 이 글을 정리하며 만났던 그는 여전히 열정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당시 나이 75세, 조용히 여생을 보낼 '연세'에 그는 25세 젊은이의 꿈과 마음을 가졌다.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모든 대한민국 젊은이를 비행기에 태워 전 세계로 누비게 할 기세로 발전해 있었다. 시대의 화두가 된 '융합형 인재 모델'을 완성하기 위해 교육 관련 인사들을 만나 각종 프로그램을 설파하고 있었다.
당시 그가 한 말이다. "대한민국의 인구는 전 세계의 0.8%도 안 된다. GDP는 1.6% 정도다. 국내에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국제화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고 글로벌 시티즌십이 이뤄지는 게 아니다. 영어보다 중요한 게 세계시민의 자질이다. 세계를 꿈꾸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들로 전 세계가 변화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의 꿈은 70년 전 안동 산골 소년의 꿈만큼 여전히 커보였다.
빈 자리가 더욱 크게 다가오는 오늘, 문득 6년 전 짜깁기했던 글이 떠올라 다시 올려본다.
※참고•인용 《묵상하는 사람들》 2013년 2월호 권두언 "교육,희망을 말하다… 릴레이 인터뷰 (22) '산골 출신 세계적 과학자 김영길 한동대 총장'", 《국민일보》, 2009년 12월 4일. "어리석어도 좋으니 어질어라", 《조선일보》, 2009년 10월 27일. 김영길 외, "기적의 수수께끼", 《역경의 열매》, 1992년. "박근혜 정부 이래야 성공한다 (5) '교육정책 김영길 한동대 총장'", 《동아일보》, 2013년 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