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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터넷으로 여러 교회 목사님들 설교를 감상(?)하곤 합니다.
그런데 듣다보면 참..여러가지 감정이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어떤 분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해야 한다. ~하라"라는 설교 일색입니다.
도덕과 윤리..그런 거 안 지키면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식의 설교를 합니다.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듣다가 저도 모르게 한 마디 내뱉습니다.
"너나 그렇게 살아라!"
저는 어릴 적 부터 성경을 보고 자랐습니다.
수 십 번 성경을 읽었습니다.
개정개역판,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 성서, 새번역
여러 번역본으로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런데 신학 공부를 하면서 저는 나름 충격적인 진실 하나를 깨달았는데
성경은 원래 한글로 씌어진 말씀이 아니라는 겁니다.
당연한 걸..왜 충격으로 받아들였냐고 묻는다면
성경의 원본은 없고 다 사본만 있는데
이 사본들 역시 지금은 사라진 옛 문명에 속한 아람어나
고대 히브리어 등으로 기록된 것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글자들은 그 시대의 문화와 환경, 상황을 반영합니다.
저는 신학공부를 하고 성경을 보면서 사실 우리는 해석학의 도움 없이
무조건 글자만 읽어왔지 정확히 성서의 배경이 무엇인지
그 시대 사람들만의 도덕이나 윤리나 문화가 무엇인지
정말 모르면서 그것을 우리의 상황에 짜맞춰가며 읽어왔다라는 사실입니다.
고로 성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배경상황이나
문화적 특성, 종교나 윤리, 도덕의 차이점 등을 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성서 시대의 민중들같이 어리석거나
고집센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하고 고졸 대졸자들이 넘쳐납니다.
그런 그들에게 고집세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했던
잔소리 식의 설교를 계속해대고 그런 설교를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아멘하면서 들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고역이 아닐 수 없다는 겁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만
히브리 노예들이 광야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계명을 받았을 적에
신약시대에 새계명으로 주신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을
하나님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차원 높은 의미를 도저히
그 시대로서는 알 수 없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수 천 년이 흐른 후에야 그런 말씀을 예수님을 통해
배우게 된 것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시대 그 상황에 맞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해석학의 렌즈를 통해 그 시대에 주어진 말씀이나 가르침
훈계나 도덕 윤리 등은 반드시 재해석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크게 발견해야 할 것은 절대 ~을 하라 ~을 하지 말라
~을 하면 복을 받고 ~을 안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식의
히브리 사람들만의 도덕과 윤리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하라~말라~만 있는 가르침은 진부하기 짝이 없고
자칫 잔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계시의 말씀에 잔소리가 섞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성경에 절대 잔소리는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자칫 잔소리로 보여질 구절도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크게 발견해야 할 주제 중 하나
즉 인간세계에서는 감히 찾아볼 수도 없는 주제가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역설로서의 은혜 말입니다.
죄인이 의인이 된다는 것
역설입니다.
죽어야 할 죄인이 천국시민이 된다는 것
역설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
역설입니다.
죽은 자가 부활했다는 것
역시 역설입니다
이런 역설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낯설은 계시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희망이요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단 한 주라도 이런 은혜에 대해 소홀하게 전해선 안됩니다.
아무리 다른 말씀 다른 내용이 귀하다고 해도
이런 은혜에서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주를 은혜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 다음 주를 맞이할 교인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게 저의 생각입니다.
또한 이 글의 제목처럼 가급적 잔소리같은 설교는 설교자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당위성을 강조하고자 지옥 설교를 한다는 것도 저는 반대합니다.
말은 성도들의 잠자는 영혼을 깨운다하지만
자기 민족을 향해 통곡했던 예레미야의 심정도 없으면서 전하는
지옥 설교는 솔직히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명분삼아
저지르는 폭력적 언어학대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교인들은 회개에 대한 설교를 싫어한다고 하지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회개한만큼 성도들도 회개합니다.
회개와 후회는 다릅니다.
늘 같은 죄를 짓고도 늘 회개한다고 하는 건
후회해 놓고 회개했다고 말 돌리기를 하는 것 뿐입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설교를 통해
잔소리를 해댑니다.
예를 들어 어두움을 물리치려면 빛이 되면 됩니다.
아무리 어두움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많이 가르치고
많이 안다고 해도 어두움과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냥 빛이 되면 어두움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설교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이 어두움이 무어냐
어두움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느냐..
그런 식의 설교들을 하는 것을 봅니다.
답답합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어두움에 눌려서 교회 문을 나옵니다.
무슨 행동을 해라, 선한 일을 하라
무슨 죄를 짓지 말라, 무슨 일은 죄가 된다..
이런 식의 설교는 유치원생들 앞에서나 해야 합니다.
아니 그 아이들 역시 그런 잔소리 식 설교를 싫어합니다.
사람은 잔소리로 변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진정 감동받아야 변합니다.
그럼 감동받도록 설교자가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본인 스스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한 숨도 쉬고
배꼽도 잡으면서 자기 스스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럼 그 설교는 분명히 그 주에 대박납니다.
그런데 자신도 심각하게 준비한 설교
교인들은 침울하게 듣습니다.
주일 아침 찬양할 적에는 은혜로왔던 기분이 설교를 들으면서
점점 경직됩니다..
설교 시간에는 교인들이 모두 다 흥분의 도가니탕이 되어야 합니다.
졸 수가 없습니다.
그럴려면 설교자 먼저 자신의 틀을 과감하게 깰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은 죄 안지은 자처럼..
얼마 전에 어떤 교회를 갔는데 그 분은 인터넷에
비키니 입은 여자들 사진을 보고 너무 음란한 영을 느껴
컴퓨터를 꺼 버렸다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왜 그리 좋을까요?
가끔은 내사진첩에 저장까지 해 두고 확대까지 해서 보니
저는 음란한 영을 알아보지 못하나 봅니다.
이거 큰 일입니다..
저는..그런 걸 설교 시간에 말하는 그 자체가 우습습니다.
저장까지 해 둔 사진을 매일같이 들여다보면서
침을 질질 흘린다면 그건 좀 이상한 증세입니다.
그러나, 저장해두고도 확대해 본 후에
무심코 안 보고 지나간 사진들
그게 있으나 없으나 내가 주님 사랑하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는데
그로인해 무슨 음란의 영이 있고 없고..
아..정말 유치찬란합니다.
제발..
저는 그런 식의 말들을 설교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냥 자신이 기도하고 받은 은혜만 전달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설교를 듣고 감동적 영화 한 편을 보듯
뭔가 생각할 주제를 가슴에 담고 갈 수 있도록 설교할 수는 없는 걸까요?
도전을 준다는 명분으로 매 주 잔소리식 설교를 하는 게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설교일까요?
사소한 것에 죄다 아니다..
그런 것에 목숨걸라고 하나님이 사람되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건가요?
답답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 특히, 신앙의 지도자들은 본질에 깨어있지 않으면
늘 본질이 아닌 것에 휘둘리고 맙니다.
성경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당위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피흘려 주신 자유함을 당위성으로 잘못 전달할 때
본질은 훼손되는 겁니다.
자유, 은혜, 기쁨, 감격, 생각..
그게 성숙을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목숨걸고 지키고 선포해서 교인들의 삶으로
이어지도록 애써야 할 주제
자유, 은혜, 기쁨, 감격, 생각.
모든 고난, 모든 십자가, 모든 아픔 역시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한 주제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영원을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의 눈, 영적인 안목이 열려지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