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첫째주일/재일동포선교주일/개척선교주일
“잡초를 닮은 예수님”
창세기 1:9-13
오늘은 창조절 첫째주일입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음이 몸으로 느껴집니다. 몸으로 느껴지는 가을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시고, 그분의 숨결을 느끼시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잡초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잡초 일반적으로 ‘특정한 곳에서 자라지 않기를 바라는 식물’로 정의됩니다. 일레인 잉행(Elaine Ingham)은 한 강연에서 다름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귀 기울여 볼 만한 이야기라서 정리해서 말씀드립니다.
■ 잡초(Weeds)란 무엇인가?
잡초는 매우 빠르게 성장·번식하고 엄청난 양의 씨앗을 생산하는 식물인데 산소가 부족하고 불량한 구조를 지닌 딱딱한 토양에서 잘 자랍니다. 잡초가 자라지 않는 흙에서는 다른 식물이 깊게 뿌리를 내리며 자라지만, 뿌리를 깊게 내리기 어려운 흙에서는 잡초가 다른 식물과 경쟁하다가 결국 잡초가 우위를 차지하여 무성하게 됩니다. 잡초는 식물이 자라는데 적합하지 않은 흙을 다시 산소가 풍부한 흙으로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잡초를 가리켜 ‘선구식물’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잡초의 또 다른 정의는 주로 산과 들판에 알아서 번식하는 잡다한 풀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의해 재배되는 식물이 아니라는 뜻이지, 결코 ‘잡초’는 나쁜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잡초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전 세계의 식물은 현재 39만 종에 이르는데, 다섯 종 가운데 한 종인 21%는 멸종 위기에 놓인 것을 추정된다고 영국 BBC 방송과, 영국의 큐 왕립식물원이 밝혔습니다. 이 때문에 먹거리와 치료약물 확보에 위기가 올 것이라고 2016년에 진단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잡초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그 쓰임새를 모를 뿐입니다.
■ 천지창조 셋째 날에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의 말씀은 천지창조 셋째 날에 관한 말씀입니다. 물을 나누시어 육지와 바다를 나누시고, 뭍에는 온갖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창조하셨습니다.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창조의 날들 가운데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2회 반복되는 것은 셋째 날과 사람을 만드신 여섯째 날입니다. 특히, 여섯째 날에는 그냥 “좋았더라”가 아니라 “심히 좋았더라”고 하심으로 인간 창조는 더욱더 특별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행위의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향해 있다는 말씀이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 창세기가 쓰인 시대적인 상황
모세오경 중 하나인 창세기는 기원전 1440년에 쓰였습니다. 출애굽의 연대는 1446년 경이었으므로 모세가 창세기를 쓴 시기는 출애굽한 이후 광야에서 40년 생활을 할 때가 되겠습니다. 광야 초창기를 살아가는 이스라엘은 아직 430년간의 노예생활의 습성이 남아있었을 것이고, 그 당시 고대 근동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영향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회구조는 피라미드구조입니다. 피라미드의 정점에는 신의 현현으로 상징되는 ‘바로’가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그런 체제를 옹호해주는 사제 계급이 있었습니다. 왕과 사제들을 지켜주는 군대조직이 그 아래에 있었고, 군대조직을 통해서 안전을 확보한 대가로 각종 세금을 내며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는 평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민들보다 더 아래에는 ‘합비루’로 통칭하는 떠돌이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물론, 최하위계층에 속하는 합비루입니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시대, 그 시대에 합비루였던 이스라엘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언했을 때,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시대에 ‘태양신으로 자처하는 당신도, 나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선언은 곧 인권선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섬길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는 선언은 신앙고백을 넘어서서 그 당시 당연하게 여겨졌던 사회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도전을 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바로 ‘잡초’와 같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앞에서 ‘잡초’는 선구식물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잡초와 같은 합비루, 노예, 땅의 사람들 이 사람들이 선구자가 되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들에게서 온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가 탄생했으며, 그분으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은 희망을 품게 된 것입니다. 종교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단순히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록한 거룩한 경전입니다.
■ 간토대진재 95주기/재일동포주일
그런데 이런 ‘잡초’와도 같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창조절 첫째 주일이자 ‘재일동포선교주일’이기도 합니다. 재일동포 선교주일은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에서 발생한 대규모 지진과 관련이 있습니다. ‘관동대진재’ 혹은 ‘간토대지진’으로 불려지는 사건으로, 대지진으로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을 학살의 대상으로 삼아 일본인들의 대단결을 꾀했던 사건입니다. 조선인들이 지진을 틈타 일본인을 죽이려고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부터 다양한 유언비어로 일본 군인과 경찰뿐 아니라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만들어 조선인을 자그마치 6,000명이나 학살했습니다. 국가에 의한 제노사이드로 올해 95주기를 맞이했습니다. 이때 일본인은 조선인을 색출하는 방법으로 ‘15엔’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일본어로 ‘쥬고엔’이라 하는데, 이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조선인이라며 죽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인들도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자국민의 독특한 발음으로 외국인을 골라내는 방법을 ‘십볼렛Shibboleth 검증’이라고 합니다. ‘십볼렛’은 ‘시냇가’ 혹는 ‘식물’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인데, 고대 이스라엘의 길르앗지파와 에브라임 지파간의 전쟁이 있을 때 길르앗 병사들이 에브라임 사람들을 식별하기 위해 ‘십볼레’라는 발음을 하도록 했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씹볼렛’이라고 발음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4만 2천 명을 죽였습니다. 이 역시도 국가폭력에 의한 살해인 제노사이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 ‘십볼레 검증’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 말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픈 역사를 기억하자는 의미로 총회에는 9월 첫주를 ‘재일동포선교주일’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 잡초와 같은 사람들
많은 시인이 ‘이름 모를’ 혹은 ‘이름 없는’이라는 수식어로 자신의 게으름이나 무지함을 포장합니다. 사실, ‘이름없는 꽃’도 없고 ‘이름 없는 풀’도 없습니다. 그냥 ‘잡초’라고 하대하는 것들조차도 저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사람 중에서도 ‘잡초’와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유명하지 않은, 그러나 잡초처럼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감으로 그 척박한 땅을 비옥한 땅으로 만들어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요즘 3D업종(Dirty, Difficult, Dangerous)은 다들 외국인노동자들에게 맡기고 있지만, 천박하게 여겨지는 일들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맨날 농사를 지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농민과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없다면 우리는 먹고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무시합니다. 고마움을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이들은 선구식물인 잡초처럼 선구자입니다. 잡초와 같은 이들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 잡초를 닮은 예수님
예수님의 삶을 묵상해 보면 그의 삶은 ‘잡초’와도 같았습니다. 척박한 광야에 피어난 잡초와도 같은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물 없는 광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오셔서 생명수가 되셨습니다. 딱딱하게 굳어서 아무런 생명을 품을 수 없는 죽음의 땅에 오시어, 보혈의 피로 적셔주시고 새 생명의 싹을 움트게 하신 분이십니다. 영생의 소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부활의 주로 오셔서 영생의 길을 열어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싹텄고, 그가 전해주신 기쁜 소식 복음은 수많은 이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선구식물이 잡초처럼 가히 선구자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너무도 놀라우신 예수님의 사랑에 우리는 말문이 막힙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경험을 ‘무스테리온’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비로움’을 영어로 ‘미스테리’라고 하는데 헬라어 ‘무스테리온’에서 온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 하나님의 신비를 깨달은 순간 ‘너무 놀라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말에 ‘말문이 막힌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무스테리온’입니다. 다 알 수 없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신비, 예수님을 통해서 그 신비가 드러나기는 했지만, 그 본질을 다 알 수 없으므로 언제나 그리스도는 신비요, 비밀입니다. 만일, 누군가 그 본질을 다 알 수 있는 분이시라면 그는 그리스도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다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만큼 그의 신비를 깨우쳐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흔하디흔한 들풀조차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보시기에 좋았던 것을 하나님께서 사랑해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보내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한껏 느끼며, 그 사랑을 힘입어 창조절에 여러분의 삶을 재창조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