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의미
판소리라는 명칭은 판소리가 생길 때부터 붙여진 이름은 아니었다.
판소리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기 이전에는 타령,
창, 잡가, 소리, 광대소리, 창악(唱樂)
극가(劇歌), 가곡(歌曲), 창극조(唱劇調) 등의 명칭이 사용되었다. 판소리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지 자세히 알 길은 없다.
판소리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문헌은, 김제 만경 출신으로 해방 직후
월북한 정노식이라는 사람이 1940년에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낸
『조선창극사』라는 책이다. 그러니까 판소리라는
명칭은 그보다 조금 일찍 생겨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판소리라는 명칭보다는 '창극'이라는 명칭이 자주 쓰이는
것으로 보아
이때만 해도 판소리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판소리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라고 한다.
그런데 판소리가 생겨나 지 200년도 더 지난 다음에야 생긴 이름이
이제는 아주 널리 쓰이게
되고, 다른 명칭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무래도 판소리라는 명칭이 다른 명칭보다 훨씬 더 판소리의 특징을 잘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바로 판소리라는 명칭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판소리'라는 말은 '판'과 '소리'라는 낱말이 합쳐져서 만들어졌다.
'판'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노름판', '씨름판', '굿판'
등에서와 같은 의미.
노름판이나 씨름판, 굿판은 노름이나 씨름, 굿이 벌어지는 장소를 뜻한다.
그리고 '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여기서 '판'이라는 말의 의미는 '많은 사람이 모딘 가운데 특수한 행위가
벌어지는 장소'라는 뜻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씨름 한 판', '바둑 두 판' 등에서 쓰인 것과 같은
의미
. 이 때 '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과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개 승패를 가르는 일의 경우에는 승패가 완전히 결판나는 결과에
이르렀을 때만 '판'을 사용할 수 있다.
셋째, '판놀음', '판굿'에서와 같은 의미.
판놀음이나 판굿은
조선조말 전문 유랑인 집단들이 벌이던 놀이를 가르킨다.
이들은 전문적인 연예인들로 조직돼, 유랑하면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놀이를 벌이고,
구경꾼들로부터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이 때의 '판'이란 전문인들이 벌이는 놀이나 행위를 가리킨다.
이렇듯 '판'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다.
'판'을 첫 번째의 경우와 같은 것으로 보면, '판소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하는 소리'라는 뜻이 될 것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란 당연히 구경꾼이 많이 모인 장소가
될 것이고,
구경꾼을 많이 모아 놓고 벌이는 놀이가 바로 공연 예술이니까
첫 번째 의미 속에는 판소리가 공연 예술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하겠다.
두 번째와 같은 것으로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과정을 이야기하는 소리',
즉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이야기를 노래하는 소리가 된다.
세 번째와 같은 것으로 보면, 판소리는 '전문인들이 하는
소리'가 될 것이다.
판소리는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 전문적인 기능을 습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소리라는 말이다.
'판소리'에서 '판'의 의미는
위의 세 가지 모두의 의미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세 가지 의미가 모두 판소리에 타당한 특징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리'란 무슨 의미일까?
판소리의 '소리'는 '목소리'의
준말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음악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사용하는 분야는 성악이다.
그렇다면 판소리의 '소리'는 판소리가
성악의 일종이라는 것을 뜻한다고 하겠다.
목소리는 인간의 육체의 일부를 사용해서 내는 소리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만큼 인간적인
표현에 뛰어나다. 음악에서 성악을 제일로 친다거나,
인간의 성대를 가장 훌륭한 악기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고,
사용해 온 역사가 깊어서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으며,
다른 악기에 비해 유연해서 표현의 범위가 넓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궁극적으로 인간적인 데 있다고 할 것이다.
2. 발전 과정
판소리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서사무가 기원설'과 '육자배기토리권 기원설'이다.
서사무가 기원설의 근거는, 전통 사회에서 판소리 광대가 단골무와 같은
혈연집단이라는 것, 판소리 광대가 속하여
있는 사회집단의 창우들이 무의식의 연행에
참가하였다는 것, 판소리의 음악과 전라도 무가의 음악이 다같이 육자배기토리가
주축이
된다는 것, 판소리 사설이나 서사무가 사설이 모두 서사 부문에 든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서사무가가
어떻게 분화해서
판소리가 형성되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명쾌한 대답을 얻지 못하고 있고,
특히 판소리 근원 설화와 전라도
단골무의 서사무가 내용이 일치하지 않다는 점은
판소리 발생의 기원이 전라도 단골무의 서사 무가가 아닌
다른 판소리에 선행 공연
부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 육자배기토리권 기원설이다.
만약 판소리 발생에 직접 작용한 공연 부분이 전라도 단골무의 사사무가가
아닌 다른 것이라면, 그것은 판소리에 선행 공연 부문일 것이며,
판소리의 모태로써 구실을 했다면 판소리와 같은 공연적 특성을 전라도 단골무의
서사무가를 포함해서 다른 어떤 공연 부문보다 많이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며,
판소리 발생에 직접적인 작용을 할 수 있는 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판소리 발생에 직접적인 작용을 할 수 있는 공연 부문으로 판소리 창조의
주역인 <화랑이패>라 이르는 창우 집단에 속하는 광대의
공연 부문을
첫째로 꼽을 수 있다.
창우 집단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데 이 집단의 광대 소리의 음악을
살펴보면 전승 지역의 기층 음악 언어로 되어 있어 지역마다 서로 다르게 되어 있다.
판소리 명창을 배출한 창우 집단은 육자배기토리
무악권(시나위권)의 창우 집단이므로
판소리를 창조한 것도 이 집단일 것이다.
판소리는 육자배기토리 무악권 창우 집단의 고사소리, 줄소리,
선증애소리와 같은 광대소리와 공연자 편성, 공연 방식,
소리 장단과 조의 형태, 사설의 율조,
사설 형태와 양식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문법이 같다.
따라서
판소리가 조선말기부터 창우 집단의 倡優戱와 떨어져 독자적으로
공연을 벌이지만 발생기에는 창우희에 끼이어 공연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창우희의 여러 공연 부문이 거의 함께 판을 벌이어 왔었지
단독으로 판을 벌이는 일이 없다는 것과 송만재의 「관우희」에 보이듯,
오늘날 명창들의 말을 통하여 옛날에는 판소리가 창우희 다른 공연 종목과 함께
판을 벌이었다는 말이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결국 판소리는 창우희의 한 공연 종목이며 창우 집단의 여러 광대 소리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오히려 판소리와 육자배기토리 무악권 단골무의 무가와는
그 문법이 다르다. 즉 모두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공연자의 복색, 공연자 편성, 공연 방식, 아니리 말버슴새, 장단, 조 성음 등이 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창우 집단의 광대 소리와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와 비교해 볼 때 오늘날의 판소리는 매우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판소리는 조선후기에 공연 장소, 향수자, 공연 계기 등 공연 상황의 변동과
이런 공연 상황의 변화에 따른
판소리 광대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판소리가
다른 광대 소리와 달리 많이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판소리가 광장이나
數下 庭中에서 서민들을 주도니 향수층으로 하여
의식이나 축제의 부대 음악으로 공연되던 상황에서 數上이나 방중에서 史屬 土豪
사대부를 주로 하는 향수층으로 변동되어 순수 음악으로 공연되던 상황에
광대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광대들이 개성적인 더늠을
창출해 내고
이런 과정에서 발생기 판소리에 없었던 여러 특성들이 판소리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 가운데 여러 가지
새로운
음악적 특성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광대소리가 판소리의 선행 공연 부문이라면
판소리를 창조할 때
광대들은 이들 선행 광대소리 공연 문법을 응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판소리
발생 문제가 풀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조선 중기에 육자배기토리권 창우 집단이 춘향가, 심청가와 같은 설화들
기왕 광대소리 공연
문법으로 엮어 부르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판소리의 선행 공연 부문인 창우 집단의 광대소리 공연 문법이 단골 무가와 다르다면
그 광대소리 공연 문법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이 문제로 남는 것이다.
결국 판소리의 발생 문제는 단골 무가의
서사 무가보다도
일차적으로 창우 집단의 광대소리의 문화와 공연 문법에서 찾아야 할 것이고
그 다음에 광대소리와 관련지어
서사 무가를 포함하는 모든 창우 집단의 공연 문화를
천착하는 데서 풀릴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판소리 발생 문제는 명확하게 해명된 것은 아니지만 판소리 발전 과정을
광대의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야 한다는 중요한 준거를 남기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민중 문화가 크게 일어날 때 민중 문화의 집약적 표현의 하나로서
판소리가 나타났다.
나타난 시기는 18세기초, 숙종 말이나 영조 초쯤으로 보인다.
그 이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며, 판소리가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754년,
영조 30년에 된 만화본(晩華本) 『춘향가』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민중 의식이 각성되면서 무당
신분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도 스스로 무속을 비판할 수 있었으며, 판소리를 요구하는 청중이 나타났다.
상업이 발달되면서 부유한
시민층이 성립되어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예술보다는
흥미롭고 현
실주의적인 예술을 요구하게 되면서,
광대가 판소리를 부르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영·정조 때인
18세기에는 열 두 마당이 모두 이루어졌다.
순조에서 고종 초엽까지인 19세기에는 열 두 마당이 그대로 전승되다가
신재효 때에 이르러 그 중에 우수한 작품인 여섯 마당이 선택되었다.
이때에 판소리 광대는 양반층의 판소리 애호에 힘입어 지위가
상승되었고,
이에 따라서 판소리의 내용도 양반의 기호에 맞게 다듬어졌다.
판소리는 민요나 잡가를 삽입 가요로 수용하기도 하고,
익살에 넘치는 속담이나
관용구를 풍부하게 동원하기도 하는 한편, 한시구(漢詩句)나 고사(古事) 같은 것을 빌려 와
문장을
수식하기도 했다. 양반이 청중에 포함되기도 하면서 양반 좌상객의 기호에 맞도록
점잖은 표현도 갖추고 문장체 소설도 흉내냈다. 이렇게 해서
판소리의 복잡성이 이루어지고,
양반 문학과 상통하는 성격도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판소리의 발전인 동시에
그릇된 변질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재효 같은 아전층 후원자가 나타나서 광대를 이끌고,
판소리 사설을 손질하고, 판소리의 이론을 시도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신재효는 「춘향가」를 남창·여창·동창(童唱)으로 나누어,
여창 광대와 동창 광대가 생겨나게 하기도 했다.
대원군은 판소리를
애호하여 광대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판소리의 창법에서 동편과 서편이 나누어진 것도 이때의 일이다.
송흥록의 법제를 표준삼아 섬진강
동쪽에서 부른 것이 동편제이고,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삼아 섬진강 서쪽에서 부른 것이 서편제였다.
편 동편제도 아니고 서편제도 아닌
것은 중고제라고 하는데,
중고제는 염계달·김성옥의 법제를 계승한 것으로서, 경기도·충청도 쪽에서 많이 불렀다.
이와 같이 법제가
나누어진 것은 판소리가 음악적으로 세련되고 다채로워진
발전적인 변화이다.
개화 이후인 20세기에는
김창룡·송만갑·정정렬 등이 활약했으며,
열 두 마당 중에서 다섯 마당을 불렀다. 이때 시민층의 청중이 확
대되고 판소리가 극장의 무대에 진출해서 흥행에서 성공했으며,
한편으로는 창극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판소리 창은 질적으로
전대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창극으로의 전환에는 외국 연극의 자극과 영향이
있었다고 보아진다. 창극으로의 변모는 시대적 요청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지만,
극적 요소의 확대와 관객의 기호에 영합하여야 한다는 제약 때문에
그 예술화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창극의 분창에 따라 연창자는
한 인물의 극적 성격 표출에만 관심을 가지고 판소리 자체가 가지는 인간의 깊이 있는
성찰은
도외시하였다. 창극이 화려한 무대로서 관객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을 때,
전통적인 판소리 형태를 고집하는 연창자들은 지방을 돌아다니며
포장걸립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1938년 이후 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은 모든 문화 활동에 대하여 통제를 하였고,
따라서 민족 문화의 정화인 판소리는 동면기에 들어선다.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판소리는 기존의 판소리를 보존하고 창작 판소리를
만드는 등 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3. 판소리의 내용
송만재의 『관우희』에는 판소리 12마당이 기록되어 있다.
즉
춘향가·심청가·흥부가·수궁가·적벽가·가루지기타령·배비장타령·장끼타령·옹고집타령·
강릉매화타령·무숙이타령·가짜신선타령 등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가운데 다섯 마당 즉, 춘향가·심청가·흥부가·수궁가·적벽가 등이
전해지고 있다.
판소리 한
마당은 전체적인 줄거리는 공통적이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광대에 따라서 다르고 부를 때마다 달라질 수 있다.
<흥부가>나
<수궁가>의 경우 이러한 공통적인 줄거리는 민담에서 가져온 것인데,
민담은 내용이 단순하지만 판소리는 민담적인 단순성을
넘어섰다. 간단한 줄거리에
복잡한 내용을 삽입했는데, 복잡한 내용은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자세한
서술을 하는 이유는 일상생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사회 의식의 차이 때문에 벌어지는 대결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자는 데 있다.
놀부의 심술이나 흥부의 가난을 길게 늘어놓고, 놀부가 켠 박 속에서 왈자·사당패·
상두꾼 등이 쏟아져 나와 놀부를 괴롭힌다고 하는
것 등은 민담에서 물려받지 않고
판소리에서 창작한 내용이다. <수궁가>의 경우에도 용궁에서 무사히 탈출한 후에
계속
벌어지는 토끼의 수난은 줄거리의 전개와는 관계없으면서 토끼를 통해서
서민의 생활을 나타내는 데 긴요한 구실을 한다.
<심청가>나 <춘향가>는 설화적인 기원이 여러 모로
논의되기는 하지만, 어느 한 가지
설화를 판소리화 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전체적인 줄거리는 판소리가 되면서 창작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구성의 원리는
<흥부가>나 <수궁가>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이 다섯 마당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되 단순한 줄거리의
나열이 아닌
줄거리가 지닌 사회적 배경과 현재적 의미를 밝히는데 중점을 두도록 한다.
<춘향가>
「춘향전」 속에서 춘향은 기생으로도 나타나고,
기생이 아닌 것으로도 나타난다. 춘향의 바램
속에서는 춘향은 기생이 아니고,
열녀가 되고 싶어하지만 현실에서 볼 때는 기생이 아닐 수 없는 상황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갈등은 한 작품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작품끼리도 서로 다르다. 「춘향전」은 120여 가지의 이본(異本)이 있는데,
어떤 이본에서는 춘향이가 기생 역할에 충실하여, 양반의 첩이나 되어 호강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사는 모습으로 나온다. 반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춘향전」인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에서는 기어이 기생이기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런 차이는
「춘향전」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각이
그렇게 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적 관습을 존중하는 현실적인 사람이 볼 때는
춘향이는
기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적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보다
진보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춘향이가 기생으로
대접받는 것이 부당하다.
그런 차이 때문에 작품마다 춘향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사회적 제약이 완강할 때는 오히려 이를 돌파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 「춘향전」이 성공적인 이유는 바로 완강한 사회적 제약
속에서도
춘향 주장의 정당성을 잘 표현한 데 있다.
우리가 감동하는
춘향의 모습도 바로 신분적 제약을 깨뜨리고
인간적 해방을 이루고자 하는 강한 소망을
가지고 몸부림치는 그런 모습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주위 사람들도
춘향이 기생 대접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데
대해 별로 호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변학도가 춘향을 데려오라고 기생들을 보내자,
춘향을
비꼰다. 이때까지만 해도 춘향의 일은 개인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변학도에게
항거하는 데서부터 상황이 달라진다. 기생으로 대접받을 수
없다면서 모진 매를 맞고
쓰러지는 춘향을 보고 나서는
, 춘향의 주장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되고, 자신들도 춘향의 주장과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기생으로 대접받기를 거부하는 춘향의 주장은,
인간적 해방을 염원하는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고,
마침내 어사출도를 통하여 축복 속에서 실현되게 된다.
그러면 지금은 신분적 제약이 있는 사회도 아니고 춘향이가
추구했던 바는
다 이룰 수 있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춘향이가 우리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의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춘향이가 감당해야 했던 봉건적 질곡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순수한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가
많다.
사랑의 성취에 장애가 있는 한, 봉건적 질곡을 뚫고 마침내 사랑을 달성한 춘향이는
늘 우리 가슴에 아름다운 여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심청가>
사람들은 늙은 아비의 눈을 띄우기 위해 몸을 판
심청의 행위를 거룩한 효행이라고 한다.
그래서 심청을 유고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봉사는 본래 명문거족이었으나, 나중에는
가운이 기울어 가난해지고,
겸하여 눈까지 멀게 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몰락 양반이라는 점에서 흥부나
「양반전」에 나오는 양반과
심봉사는 같은 부류의 인물이다.
그러나 같은 몰락 양반이면서도 흥부가 온갖 궂은 일을 마다 않고 가장으로서
식구들의 생계를
꾸려가려고 노력하는 데 반해,
심봉사는 그렇지 않고 그 일을 곽씨나 심청이가 대신한다.
19세기에는 흥부와 같이 가족마저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하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성들이 양산되어,
여성들이 집안 일에만 전념하지
못하고 생활 현장으로 내몰리는 일이 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성들 중에는 생계를 여성에 의지하여 얹혀 살다시피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심봉사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상황 속에서 여성이 가족 부양의 책임까지
기꺼이 떠맡는 것이
당연시되었다는 점이다. 표면상으로는 심봉사가 눈이 멀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눈이 먼 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곽씨 부인은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도 자식을 낳지 못 하는 것을
자신의 죄악으로 돌리고,
쫓겨나지 않은 것을 남편 되는 심봉사의 넓으신 덕택으로 생각한다.
철저한 가부장제 하에서는 가부장제에서 요구되는 덕목들을
잘 지키며 순종하는 사람은 선인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악인이 된다.
곽씨와 심청이는 가부장제 질서에 순종하며 기꺼이 희생을
선택함으로써 선인이 된다.
이에 비해 뺑덕어미는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가부장제의 윤리에
순종하지 않고 이에
도전하거나 이를 무시하는 인물이다.
놀부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기를 주저하지 않고, 윤리를 정면에서 어기지만,
간악하여 독자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인물은 아니다 따라서
뺑덕어미가 악인이라는 통념은
관습적인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심청이는 봉건체제가 안고
있는 모순을 다 감당하고 있는 인물이다.
'효'라는 유교 이데올로기로 포장을 해놓긴 했지만, 심청이가 몸을 팔아야 할 정도로
피폐해진 유교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 심청의 죽음은 봉건체제 모순의
누적적 결과물이며, 조선조 후기 사회가
도저히 문제 해결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해결의 가능성조차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용궁이 등장한다.
용궁이라는 비현실적인 공간을 설정하지 않고서는
심청이가 살아날 방법이 없다. 심청이가 살아나지 못하면, 심청의 죽음이
효이고,
효를 실현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논리를 펼 수 없다.
이제 심청의 죽음은 용궁에 다녀온 옛날 이야기
정도로 바뀌고,
그 뒤에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행복이 실현된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심청가」는
심청이가 물에 빠져 죽는 데서
끝났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뒷부분만을 본다면
「심청가」가 아니라 「심봉사가」일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심봉사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심청가」를 현실주의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본래 이 이야기는 딸을 팔아먹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가난한 현실을 표현한 것인데,
나중에 이 이야기를 적절히 윤리적으로 포장하면서 뒷부분이 덧붙여졌다고 말한다.
심청이의 죽음을 효로 설명하지 않으면, 이런 죽음을 방치하는 사회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명분이 없어진다.
그래서 서둘러
뒷부분을 만들어 현실의 모순을 감추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의 청중들은 「심청가」를 슬픈 노래로 듣는다.
「심청가」 속에는 가난과 가부장제의 모순만이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라, 인
간의 죽음, 아내의 죽음, 자식의 죽음,
그리고 가난 그 자체의 슬픔과 불구의 한도 같이 표현되어 있어서, 인간의 온갖 슬픔이
그야말로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심청이는 바로 그 모든 인간적 슬픔들의 한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다.
<흥부가>
늘 우리는 「흥부가」는 흥부는 착해서 복을 받고,
놀부는 악해서 벌을 받은 이야기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의미만을
「흥부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겉만 언뜻 보면
흥부와
놀부는 형제로 되어 있지만, 세부를 찬찬히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우선 흥부는 분명히 양반으로 되어 있으며, 학식도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놀부는 흥부의 형으로 나오면서도 무식하다. '놀부 박타는 대목'에서는
놀부를 도망 노비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분이 이렇게 판이한 두 사람이 형제간으로 볼 수는 없다.
두 명의 상반되는 인물을 그리되, 형제간으로 설정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형제라는 것은 인간 관계의 사실적인 면에서 형제간이라는 뜻이 아니고,
형제간처럼 동시대를 살아간 두 가지 유형의
인물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흥부는 양반이라고는 하지만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아서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 몰락 양반이다. 몰락 양반은 조선조 후기에 많이 생겼다.
양반의 숫자가 늘어나다 보니
그런 양반도 생겼던 것이다.
한편 놀부는 천민이면서도 돈이 많다. 그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는
온갖 구두쇠 짓을
다하고, 때로는 비윤리적인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조선 후기에 새로이 생겨난 인간형이다.
조선조 후기에는
농업기술과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 중에서도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새로 생겨난 부자들은
돈,
즉 경제적 가치를 제일로 생각하는 세속적 인간형이다.
놀부는 바로 그러한 인간형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흥부는 전래적인 윤리적 인간형이라면, 놀부는 새로운 경제적 인간형이다.
이 두 인간형은 조선조 후기의 가장
전형적이고 특징적인 인간형이다.
「흥부가」는 무엇보다도 당대의 두 가지 전형적인 인물을 생동감 있게
표현해 냈다는 데 그 가치가 있다.
최근에 와서는 도덕적이지만 무능한 흥부보다는,
도덕적으로는 다소
문제가 있다고 할지라도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놀부를 옹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투기를 통해서
갑자기 부자가 된 이른바 졸부나 천부(賤富)들이
현대판 놀부들이고, 한평생 뼈빠지게 일만 하며 착하게 살았지만,
끝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현대판 흥부라고 할 때,
이들 중에서 놀부를 옹호해야 한다는 논리는 납득하기
어렵다.
<수궁가>
「수궁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토끼이다.
그리고 토끼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은 자라이다.
자라인 별주부의 '주부'라는 벼슬은 종6품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이는 봉건체제에서 위기에 당하여 고관대작들이
전혀 위기 해결 능력이 없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하찮은 벼슬을 하고 있는 자라가 뽑힌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라는 봉건체제의 무능한 지배계급의 하수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자라는 체제 속에서 별다른 혜택도 받지 못하고 이용만
당하면서도
그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충'이라고 하는 봉건적 윤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답답한 인물이다. 그러기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을 앞장서서 맡는다.
한편 토끼는 나약한 짐승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그야말로 날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간신히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현실은 조선조 후기 민중들의 삶의 모습을
여실하게
표현한 것이다.
결국 늘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 살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을 떠나,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허황된 꿈을 갖게 된 토끼는 자라의 등에 업혀 수궁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토끼의 꿈이 허황된 것이었음이 드러나고,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민중들의 어리석은
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
토끼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하여 기지를 발휘한다.
한 꾀를 얼른 생각해 낸 것이다. 여기서 '꾀'란 토끼가 용왕을 속이고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택한 거짓말이다. 이를 달리 하면
약자가 강자를 이기기 위한 지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토끼가 하는 거짓말은 용납이 된다. 바로 이 약자의 자기방어적인
지혜인
'꾀'로 민중은 험난한 세파를 헤치며 끈질기게 생명력을 키워 왔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토끼는 거듭되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를 여러 가지 방어적인 지헤로 극복하고
생명을 이어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토끼의 모습은 온갖 간난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온 민중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토끼는 나약하기만 하고, 때로는 허황된 욕심으로 위기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를 잘 극복하며 살아남아, 내일의
희망을 열어간다.
「수궁가」가 아직도 살아 있는 예술일 수 있는 이유는 토끼의 모습 속에서
바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적벽가>
판소리 중에서도 「적벽가」는 특이하다.
다른 판소리는 모두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 졌는데
비해
「적벽가」는 소설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게다가 그 소설은 중국 소설인 『삼국지연의』이다.
「적벽가」는 또
여자가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전쟁 상황을 노래했기 때문에 수많은 장수와 군사들만 나온다.
또 「적벽가」는 호령하는 부분이
많아서 창자들이 부르기에 훨씬 힘이 든다.
「적벽가」는 『삼국지연의』와 전체적인 이야기 줄거리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세부
내용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르다.
예컨대 적벽대전을 앞두고 조조의 군사들이 고향과 가족들을 그리며 탄식하는
이른바
'군사설움타령'이나, 패주하던 조조가 군사들을 점검하는 '군사 점고 대목',
'장승타령' 등은 원전에는 없는 완전히 창작된 부분이다.
그리고 등장인물의 성격을
바꾸어 놓은 예도 있다.
조조를 아주 비겁하게 그려 놓았다든지, 정욱이라는 장수가 조조를 조롱하는
역할을 하도록 한 것 등은 「적벽가」에서 바꾸어 놓은 것들이다.
이렇게 보면 「적벽가」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완전히
재창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적벽가」의 주제는 간웅(奸雄, 간사한
영웅)에 대한
징계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당연히 조조가 부정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였다.
조조는 천하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하면 천하를 무력으로 평정하고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를 위해 수많은 싸움을 하고, 온갖 계교를 다 동원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조조와 비슷한
욕망으로 뭉쳐져 있다고 보면 조조는
리들 모두의 그 팽창된 욕망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부귀와 향락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지만,
그것만을 추구하다 보면 반드시 패가망신할 수밖에 없다.
'화공 대목' 이후는 조조의 처참한 패주의 과정이다.
이제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하여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견디며 도망가는 조조의
모습에서
헛된 욕망의 끝이 어떠한 것인가를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이제는 천하대업을 꿈꾸던 승상 조조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
전직하 추락하여 버린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조조는 서서히 인간성을 회복한다.
그곳이 바로 '장승타령'
어름이다. '장승타령'은 장승의 입을 빌어 민중들의 억울함을
호소한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 억울한 사정을 다 듣고 난 조조는 장승을
살려준다.
자신이 비참한 지경에 빠지자 이제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원한과 슬픔을 동정하고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조조는 관우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된다.
모든 것을 잃은 조조는 관우에게 목숨을 애걸한다.
관우에게 사로잡혀 처량하게
살려주기를 비는 조조를 보면서 우리는 살아 있음의 안도감, 그 감사함에 젖어들 수 있다.
목숨을
애걸하는 처량한 조조를 관우는 놓아준다.
그리고는 관우의 그 넉넉한 마음씨를 칭송하면서 「적벽가」는 끝을 맺는다.
옛부터 양반 귀족들이 「적벽가」를 즐겨 들은 이유는
「적벽가」각 권력을 놓고 다투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양반 귀족들은
자신들이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권력의 의로움과 의롭지 않음에 관해 생각하게 하는 「적벽가」에
큰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들 또한 「적벽가」를 통해 헛된 욕망의 말로를 보고,
살아 있음의 감격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4. 연주 형태
노래하는 한 사람이 고수의 북 장단에 맞추어 이야기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1인 음악극의 한 형태이다. 노래하는 사람이 북
장단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을 '소리'라고 하고, 북 장단이 없이 말로만 대사를 읊어 나가는 것을
'아니리'라고 한다. 그리고
노래를 하면서 이야기의 내용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부채를 들고 갖가지 몸짓을 하는데, 이것을 '발림'이라고 한다.
노래를 할 때, 옆에서 고수는 북 장단을 치면서 때로는 노래하는 사람의 흥을 돋우기도 하고,
때로는 소리꾼의 상대역이 되어 주면서
판소리를 더욱 흥미롭게 해준다.
이와 같이 고수가 노래하는 사람의 흥을 돋우기 위하여 하는 짧은 말을 '추임새'라고
한다.
5. 음악적 특징
판소리는 한국의 전통음악에서 유일한
극음악이다.
서양음악의 오페라, 중국의 唱戱, 일본의 가부기 같은 극음악이 다수의 가수에 의하여
연출되며 반주 음악 또한 다수의
악사에 의하여 연주되고 있으나
판소리는 한 사람의 가수에 의하여 연출되고 한 사람의 고수에 의한 북 장단으로 반주된다.
다수인의 가수와 다수인의 관현악사로 상연되는 타 극음악과 맞먹는
극적 표현을 하기 위하여 판소리는 가수와 고수의
기능이 최대한의 표현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판소리에는 가수와 고수의 기능이 크게 발달된 것이다.
<목과 성음>
판소리는 성악의 일종이다.
따라서 당연히 목소리 자체의 음악성이 중요하게 생각된다.
'성음(聲音)'이란 목소리이다.
목소리를 가지고 즐긴다는 말은 목소리의 질, 곧 목소리의 음질을 즐긴다는 뜻이다.
판소리에서 사용하는 목소리는 일단 보통의 목소리가 아니라
거칠고 탁한 목쉰 소리이다. 맑고 깨끗한 소리를 거칠고 탁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성대를 무리하게 사용하는 방법이 사용된다. 이 과정은 오랜 시간과 초인적인 노력이
수반되는 어려운 과정이다.
하지만 판소리에서 요구되는 소리가 일차적으로 거친 소리라고 해서
무조건 거칠고 탁하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탁하면서도 맑은 맛이 있어야 하고,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데가 있어야 한다. 그러한 소리를 판소리에서는 '곰삭은 소리',
즉 충분히 삭은 소리라고 한다.
곰삭은 소리에는 슬픔이 깃들이게 된다.
그러나 그 슬픔은 슬픔이면서도 그런
슬픔을 야기한 대상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다 가셔진, 그래서 그러한 상대마저도 이제는 용서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함께
껴안을 수
있는 너그러움이 깃들인 슬픔이다. 이러한 슬픔이 배인 소리를 판소리에서는
'애원성'이라고 하여,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애원성으로만 소리를 한다면
좋은 소리가 될 수 없다. 애원성이 참맛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씩씩하고 웅장한
우조 성음이 있어야만 한다. 씩씩하고 웅장한 우조 성음과 대조적으로 어울릴 수 있을 때
애원성은 참으로
애원성으로서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판소리에서는 또 낮은 소리를 중요시한다. 판소리 용어로는 무겁다고 한다.
무거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통찰이 요구되지만,
잠정적으로 말하면 낮음·성량이 큼·느림·굵음 등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판소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우리 예술에서는 '무겁게' 해야 잘 한다고 한다
. 그러므로 '무겁다'는 말은 '예술적으로 훌륭하다'는 말과 같다.
판소리의 예술성은 성음의 다양한 변화에서
최고로 발휘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 혹은 '목'이라고 하여도,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가 없다면
이는 좋은 소리라고 할 수 없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으로 청중에게 제시될 때
참다운 가치가 발휘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
장단이나 조·가락·리듬은 말할 것도 없고, '목' 혹은 '목재치'라고 부르는 발성 기교와
이에 따른 음색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장단>
장단이라는 용어는
한국음악의
박자·속도·고법·리듬·강약 등에 관련되어 쓰이는 것이다.
동양음악에서는 鼓法·拍法이란 용어를 쓰고 서양음악에서는 meter(박자)라는
용어를 쓰지만 장단이라는 말에 합당한 외국 음악용어를 찾기 힘들다.
장단은 우선 박자라는 뜻으로 쓰인다. 즉
보통 속도의 12박은 중모리이고,
6박은 엇중모리이다.
장단은 또 속도를 뜻한다.
같은 박자이지만 속도가
다르면 장단이 다르다. 4박 장단이지만 보통 속도는 중모리,
조금 빠르면 중중모리, 매우 빠르면 자진모리가 된다.
다 같은 박자와
속도를 가져도 액센트가 다르면 장단이 다르다.
즉 굿거리와 중중모리, 느린 타령과 빠른 중중모리는 모두 조금 빠른 속도의 4박이나
강약이 달라서 장단이 서로 구별된다. 또 다 같은 속도·박자·강약을 가져도 고법
혹은 용도의 차이로 장단명칭이 달리 되기도 한다.
즉 도드리와 엇중모리는
모두 보통 속도·6박·'강 약 약 중강 약 약'으로 속도·박자·강약이 같으나
주법과 용도가 다르다. 즉
도드리 주법은 '덩 궁 기덕 궁 떠르르 궁'이고
엇중모리 주법은 '덩 궁 딱 궁 딱 궁'으로
서로 약간 주법이 다르고, 도드리는
삼현도드리·염불·가사·경기12잡가에 쓰이고
엇중모리는 판소리에 쓰여 용도가 달라 다른 장단 명칭을 가진다.
판소리에 사용되는 장단은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
중모리 등이다. 장단은 특히 음악의
분위기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매우 평화스럽고 여유가 있는 분위기에는 진양조 장단,
길게 서술하거나 많은 것을
나열할 때는 자진모리 장단,
그리고 매우 긴박하거나 분주한 상황에서는 휘모리 장단이 흔히 사용된다.
<조>
판소리에는 평조·우조·계면조·평계면조·경드름·
설렁제·추천목·강산제·석화제·메나리조
등 다양한 조가 사용된다.
이 중에서 기본이 되는 것은 평조·우조·계면조 세 가지이다.
계면조는 판소리의 가장
기본이 되는 조로서, 「육자배기」나 「남도 흥타령」
같은 전라도 민요의 가락을 판소리화한 것이다. 슬프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슬픈 장면이나 여자의 거동을 묘사하는 데 흔히 쓰인다.
우조는 가곡,
시조와 같은 정악의 가락을 판소리화한
것이다.
웅장하고 씩씩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장엄한 장면, 남성다운 장면, 유유한 장면 등에 쓰이다.
평조는 우조와 마찬가지로 가곡, 시조와 같은 노래의 가락을
판소리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명랑하고 화창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기쁜 장면,
흥겨운 장면에 주로 쓰인다.
이외에 석화제, 강산제는 평우조로, 평계면조는 계면조에 묶어 다룰 수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조에 따라 소리의 느낌이 달라지고,
장단의 변화에 따라 음악의 분위기가
바뀌며, 사설의 내용에 따라 다양한 극적인 연출이
가능하여, 듣는 이들로 하여금 그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힘을 가진 것이 판소리이다.
<반주>
가수와 마찬가지로 고수 또한 각 장단의 원 박 외에
여러 가지 변주 가락을 연주하여 선율의
기복에 응해야 하고 사설 및 음악성에 따른
극적 표현에 맞추어 나가야 한다.
가객이 부르는 소리의 생사맥에 따라
고수 또한 북 장단 가락의 변화로 起, 景, 結, 解의 고법을 써야 하는데 정해진 악보도 없고
소리 또한 즉흥적인 요소가 있으므로
고수는 소리의 생사맥을 미리 앞질러 옳게 판단하고
즉석에서 기민하게 가락을 짜서 이에 배합이 되는 고법을 연주해야 한다.
고수의
이러한 기능의 여하에 따라 가객의 소리가 죽고 산다 하여 옛부터 일러 오는 말인즉
「일고수 이명창」이라 한다.
판소리에서 북이 주로 쓰이는 것은
판소리 음악성에 의한 것 같다. 장고의 복판 소리는 '땅'하고 양성으로 높은 소리가 나고
열채로
치는 변죽은 '다르륵'하는 소리가 선 굵지 못하다.
이에 비하여 북의 소가죽 복판 소리는 '쿵'하고 저성으로 깊이가 있고,
굵은
막대기로 된 채로 치는 북통 소리는 '따닥'하여 굵은 소리가 나기 때문에
판소리에서 여러 가지 극적 표현에 따른 폭 넓은 음악성에 북이
주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봐진다.
<제>
판소리 '제'의 쓰임새를 보면 그 범위가 상당히 넓지만,
일반적으로는 유파의 개념으로 쓰인다.
판소리에서 유파의 구분이 생기게 된 것은
일단 판소리가 발전하여 다양해지고, 이 다양한 판소리를 간추려서 이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다양한 판소리를 유형화하여, 비슷한 양식끼리 한 데
묶어 구분을 해본 것이 '제'라는 개념으로 형성되었다는
말이다.
'제'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나는 문헌은 1940년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나온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이다. 『조선창극사』는 90명에 이르는 명창과 명고수의
간략한 전기와 더늠들을 모아 놓은 책인데, 책의 앞부분에서 판소리에
관한
몇 가지 사항을 언급하는 가운데, '대가닥(전승의 큰 줄기라는 의미)'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제'를 설명하고 있으며, 각
명창의 이름 아래 '동편'이니,
'서편'이니, '중고'니 하여 '제'의 구분을 했다.
그 이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에 관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은, '제'의 구분을 최초로 시도했던
『조선창극사』에서는 모든 소리꾼들을 다 동편, 서편, 중고 등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제'라는 것이 애초부터 있어서 '나는 이런 소리를 한다'고
표방한 것이 아니고, 나중에 판소리가 다양해지고 복잡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제'라는 관념이 생겨나 구분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라는 말과 개념은 후대에 생겨나 점점 발달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제'에 관해 논의된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편제 : 섬진강
동쪽 지역인 남원·순창·곡성·구례 등지에 전승된 소리로서
歌王으로 일컬어지는 운봉 출신의 송흥록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는다.
우조(씩씩한 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감정을 가능한 절제하며,
장단은 '대마디 대장단'을 사용하
여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발성은 통성을 사용하여 엄하게 하며,
구절 끝마침을 되게 끊어 낸다.
서편제
: 섬진강 서쪽 지역인 광주·나주·담양·화순·보성 등지에 전승된 소리로
순창 출신이며 보성에서 말년을 보낸 박유전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는다.
계면조(슬픈 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며, 발성의 기교를 중시하여 다양한 기교를 부린다.
소리가 늘어지는 특징을 지니며,
장단의 운용 면에서는 엇부침이라 하여
매우 기교적인 리듬을 구사한다. 또한 발림(육체적인 표현. 동작)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
중고제 :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에 전승된 소리로, 송흥록과
동시대 사람인 강경 출신 김성옥으로부터 출발되었다. 음악적
특색은 비동비서(非東非西),
혹은 동·서편의 중간인데, 일제강점기 이후 전승이 끊어졌다.
6. 판소리 향유 계층
판소리의 향유 계층은 판소리 발전 과정에서 보면 분리되어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초기에 판소리가 광장이나 數下
庭中에서 의식이나
축제의 부대 음악으로 공연되던 상황에서 서민층을 주요 향유층으로 하였던 시기와,
후기에 數上이나 방중에서 史屬
土豪 사대부를 주로 하는 향유층으로 하였던
시기에 따라 달리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판소리는
모든 계층이 같이 즐겼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판소리에는 서민들의 의식과
사대부들의 이해 관계가 함께 반영되어 있고,
반대로 일방적으로 어느 계층의 이해만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고도 할 수도 있다
긍정적으로 보면, 판소리는 탈춤과
같이 갈등을 통해서 사회의 문제를
심각하게 드러내는 양식이 아니라, 화합과 화해를 통해서 사회 통합적인 기능을
수행하던 양식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7. 판소리 기보법
판소리는 구두 전승되는 음악이기 때문에 악보가 없다.
그러나 악보의 유무는 창작과 전파, 그리고 음악이 존재하는 방식의
차이를 유발할 뿐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악보가 있는 음악에서는 악보에 의해 이루어지는 반면에,
악보가 없는 음악은 인간의
기억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차이에 의해 두 음악의 특성이 달라진다. 가령 서양 고전음악에서와 같은 화음은
악보가 없는
음악에서는 만들어 내기가 어렵다. 대규모 관현악 편성에 의한 연주에도
어려움이 있다. 악기마다 개인마다 다른 선율을 연주할 수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음악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관습과 규범이 적용되면 된다.
예컨대 시나위 같은 음악이 그렇다. 시나위
연주에서는 여러 가지의 악기가 동원되면서도
장단만 같을 뿐 각기 다른 선율을 연주한다.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종류의 악기 소리가
조화되는 음악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이를 '부조화의 조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요컨대 '조화'라는 의미가 서양 음악에서와는
다른 기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판소리를 오선보로 채보한 것도 있고,
새로운 국악 창작곡을 쓰거나 연주할
때 오선보를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현대의 음악 활동이 악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판소리를 악보화 하면
다소 편리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되면 손상되는 부분도 생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판소리는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동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구전 과정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의 공동 창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 작자를 알 수 없으며, 예술 음악에서 내세우는 개성이라는 것도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해서 판소리 속에는 집단의 정서와 가치가
담겨지게 된다.
우리가 판소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