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언박(洪彦博)의 자(字)는 중용(仲容)이고,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독서하기를 좋아하였고 글을 잘 지었다.
충숙왕(忠肅王) 17년(1330)에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왕이 구마(廐馬) 1필(匹)을 하사하였다. 충목왕(忠穆王) 4년(1348)에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제수(除授)하였다가 이내 지신사(知申事)로 옮겼다.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임명되었고, 추성양절좌리공신(推誠亮節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다. 그때 6시(寺) 판사(判事)의 관계(官階)를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정하였는데 성랑(省郞)이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송천봉(宋天鳳)을 가두고 장차 죄를 주려고 하자 홍언박이 홍빈(洪彬)과 더불어 힘써 구제하여 면제받았다. 〈공민왕〉 3년(1354)에 좌정승(左政丞)에 임명되었다가 우정승(右政丞)으로 옮겼으며, 단성양절보리안사공신(端城亮節輔理安社功臣)의 칭호를 더하였고 곧이어 남양후(南陽侯)에 봉해졌다.
기철(奇轍)을 벤 공으로 1등에 녹선(錄選)되었고, 〈공민왕〉 10년(1361)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고쳐 임명되었다. 홍건적(紅巾賊)이 경성(京城) 가까이까지 침략하자 대부분의 의논이 피난하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홍언박이 홀로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터전은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왕에게 스스로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민(民)과 함께 죽음을 같이 해야 할 것이라고 권하였다. 갑자기 서경(西京)의 군사가 패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왕이 남행(南幸)하였으며 홍언박이 호종(扈從)하였다. 이듬해(1362)에 경성(京城)을 수복하였는데, 승리를 거둔 방책에는 홍언박의 계획이 많았다.
판밀직사(判密直事) 송경(宋卿)이 홍언박에게 말하기를, “백성[蒼生]들은 공(公)께서 다시 재상(宰相)이 되기를 바란지 오래였는데 이제 으뜸 재상이 되시었건만 어찌 한 가지 일도 여망(輿望)에 부응하지 않습니까? 지난해의 파천(播遷) 때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적에게 함락되고 주상(主上)께서 몽진(蒙塵)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공께서 일찍 계책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공의 아들은 부병(府兵)을 장악하였고, 사위는 헌사(憲司)의 우두머리가 되어 부귀가 이미 지극한데 어찌 국가(國家)를 걱정하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홍언박이 이를 꺼려서 송경을 파직시켰다. 그때 홍언박의 사위 유연(柳淵)이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었기 때문에 송경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행궁(行宮)에서 조달하는 금은(金銀)이 너무 적은데 비해 왕의 씀씀이에 절제함이 없으므로 홍언박이 왕께 아뢰기를, “내탕(內帑)의 저축이 어떻다고 여기십니까? 국도(國都)에 계실 때의 경비(經費)보다 마땅히 더욱 절약하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오래도록 보기만 하고 응답을 하지 않자, 홍언박이 물러나며 말하기를, “말을 해도 따르지 않으시니 이 어찌 자만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내가 재상이 되었을 때에 매양 말해도 이와 같았으므로 내가 일찍이 왕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왕이 강화(江華)로 천도(遷都)하고자 하여 개태사(開泰寺)의 태조진전(太祖眞殿)에서 점을 칠 것을 명령하자 사람들이 흉흉해 하였다. 태후(太后) 홍씨(洪氏)는 홍언박의 고모였는데 홍언박을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외척(外戚)의 큰 집안으로서 지위가 총재(冡宰)이며 중외(中外)의 촉망(囑望)을 받고 있다. 지금 왕께서 천도하려고 하지만 나라 사람들은 모두 원하지 않은데, 너는 어찌 그만두게 하기를 간언하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홍언박이 왕에게 보고하였더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천도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 길흉(吉凶)을 알고자 할 뿐이었네. 점(占)의 결과가 불길(不吉)이오.”라고 하자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때 홍건적이 다시 온다는 와설(訛說)이 있어서 군사를 지휘할 총수[大帥] 선발을 의논하였는데, 홍언박이 국사(國事)를 돌보지 않는다고 하여 좌정승(左政丞) 유탁(柳濯)을 도통사(都統使)로 삼도록 명령하였다. 홍언박이 유숙(柳淑)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게 되자 재추(宰樞)들이 잔치를 성대하게 열어 위로하였다. 홍언박은 훈척(勳戚)이자 으뜸 재상이며, 유숙은 왕의 측근[帷幄]이자 총신(寵臣)이었기 때문에 비록 마땅히 피난 가야할 때를 당해도 여러 신하들이 우대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공민왕〉 12년(1363)에 왕이 장차 환도(還都)하고자 하면서도 시일을 끌면서 출발하지 않자 홍언박이 말하기를, “떠날 준비가 이미 갖추어졌는데 만일 이 시기를 늦추면 농사를 방해하여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더니, 왕이 이를 따랐다. 남천(南遷)한 후에 제사의 절차와 의식이[祀典] 무너지고 빠진 것이 많았으며, 문선왕(文宣王, 공자)에게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제사 또한 폐지되었다. 성균관(成均館)과 12도(徒)에서 다시 거행하기를 요청하였지만, 홍언박이 중외(中外)에 일이 많다는 핑계로 그대로 두었다.
흥왕사(興王寺)의 변란 때 아들 홍사범(洪師範)이 사람을 보내어 달려가 알려 피하게 하였다. 때가 아직 일렀는데 홍언박이 바야흐로 첩(妾)과 함께 누워 있다가 이를 듣고 태연하게 말하기를, “먹지도 않고 어려움에 나아갈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죽(粥)을 쑤게 하였다. 적이 그 일당을 보내어 홍언박의 처소로 달려가게 하였더니, 문객(門客)이 급히 보고하기를, “적(賊)이 장차 이르는데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였다. 조금 있다가 적이 와서 말하기를, “나와서 황제의 명령을 맞이하라.”고 하였다. 집안사람이 알리기를, “적이 문(門)에 있으니 의당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더니, 홍언박이 말하기를, “내가 적을 만나보고 그 까닭을 물으리라.”라고 하면서 끝내 피하지 않았다. 아들과 아내가 피하기를 권했지만 오히려 기꺼워하지 않고 말하기를, “어찌 으뜸 재상이 되어서 죽음을 피하는 자가 있겠는가?”라 하고, 천천히 의관(衣冠)을 차려입고 집을 나서며 말하기를, “너는 도적인 주제에 어찌 황제의 명령이라 하느냐?”라고 하자, 적이 그의 목을 베어 피가 집의 서까래에 흩뿌려졌다. 나이가 55세였다. 적이 흥왕사에 있다가 이를 듣고 모두 만세(萬歲)를 불렀다. 시호(諡號)를 문정(文正)이라 하였고, 예(禮)로서 장사하였다.
아들은 홍사보(洪師普)·홍사범·홍사우(洪師禹)·홍사원(洪師瑗)이다. 홍사보는 벼슬이 판합문사(判閤門事)에 이르렀으나 아들 홍관(洪寬)의 시역(弑逆) 때 함께 처형되었다. 홍사범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명(明)의〉 경사(京師)에 가서 촉(蜀)을 평정한 것을 하례하고 돌아오다가 바다 가운데 허산(許山)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물에 빠져 죽었다. 공민왕이 이를 애도하여 특별히 시호를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