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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첫사랑
배 수 아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1899년에 태어난 어느 사람의 장례식 날이었다.
그들은 같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입학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서로 얼굴을 마주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소녀는 집안 사정으로 또래들보다 학교를 늦게 들어갔기 때문에 소년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았다. 1899년에 태어났고 그해에 죽은 사람은 소년의 집안 친척이었고 소녀의 어머니는 대대로 소작을 부치던 소년의 친척 집안의 일을 도우러 와 있었다. 소년은 어렸기 때문에 1899년에 태어났고 그해 이른 봄에 죽은 친척의 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가족이 멀리 있었고 집안일을 할 여인네들을 거느리지 못했기 때문에 소년의 어머니는 음식과 손님 대접을 소년의 집에서 치르기로 했다. 아직 섬광처럼 짧기만 한 햇볕이 안타깝고 무덤가 산기슭을 불어 도는 바람이 갈아놓은 작두날처럼 매서운 삼월이었다.
“저 아이는 누구냐.”
소년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당에서 다른 여자들을 도와 설거지를 하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검은 교복 치마 위에 집에서 뜬 올이 굵은 자줏빛 스웨터를 걸치고 푸른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은 작은 달처럼 하얗고 찬물에 담긴 소녀의 손은 십일월 단풍잎같이 붉었다. 그래서 소년은 소녀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들네에 사는 조무실 영감의 외손녀뻘이 되는 아입니다. 외지에서 떠돌다 어찌어찌해 들네에 정착하게 된 그 아비는 주색에 행실이 올바르지 못해 마을에서 추방되다시피 했고 그 어미가 술도가* 일을 해주고 소작을 부치는 외삼촌 집에 얹혀 근근이 살고 있는 아입니다. 처음에는 조무실 영감이 돌봐주기도 했는데 아시다시피 조무실 영감도 상처한* 다음에 이제 정신이 오락가락해서요. 그 영감이 낯선 사람에게 해코지까지 한다더군요. 조무실 영감이 그 어미에겐 오촌이 됩니다. 그 어미는 조실부모해서 일가붙이가 마른 편이죠.”
들네는 가난한 소작인들이 주로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소년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준 사람은 어린 소년을 업어서 길러준 머슴 광복이었다. 광복은 무학이고 문맹이었으나 언제나 경우가 바르고 행동거지가 깍듯해서 소년의 아버지는 그가 커가는 소년의 곁에 수족처럼 머무르는 것을 허용했다. 광복은 추운 날 산길을 걸어 학교에 다녀온 소년의 언 발을 씻어주기 위해서 부엌에서 따뜻한 물을 대야에 퍼 와 소년의 발을 담그게 했다. 차갑게 굳은 발을 따뜻한 물속에 담그고 온몸이 노곤해서 한창 낮잠이라도 밀려와야 할 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이 소년을 엄습했다. 소년이 묻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저 아이의 이름은 뭐냐.”
광복은 소년의 발에 비누질을 하다 말고 소년의 얼굴을 한 번 짧게 쳐다보았다. 소년은 광복이 그런 식으로 상전인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싫었다. 아버지나 삼촌들이나 학교의 선생님이나 그런 식으로 자신을 쳐다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머슴 광복이. 그러나 소년은 이상스럽게 분노를 표현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저 아이의 이름은 뭐냐.”
“연이라 합니다. 나이는 열다섯 살이고 도련님과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광복이 말을 마치고 수건을 가져와 정성스럽게 소년의 발을 닦아줄 때까지 소년은 마루에 앉아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상을 당했기 때문에 집 안은 드나드는 사람이 많고 수선스러웠으나 소년의 공부방이 있는 뒷마당은 참새 한 마리 없이 조용했다. 언제나처럼 소년은 낮잠을 잤다. 소년이 잠들어 있는 사이 광복이 소년의 머리맡에 떡과 집에서 담근 조청과 과일을 놓아두고 갔다. 그해에는 음력 삼월 추위가 유난했다. 이런 날 상을 당해 찬물에 끊임없이 손을 담가야 하는 여인네들의 손등은 실피가 맺히고 거북같이 갈라졌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소년은 희미한 석양빛이 스며드는 마당으로 나가 눈길로 연이를 찾았다. 연이도 다른 여인네들도 보이지 않았다. 부엌 안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숙모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마당에는 상을 치른 뒷물건들을 태우기 위해 구덩이를 파놓았다. 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운동화를 신고 가죽가방을 맨 아이는 마을에서 소년 하나 뿐이었다. 진짜 축구공을 갖고 있는 아이도 소년 하나뿐이었으며 자전거를 가장 먼저 갖게 된 아이도 소년이었다. 학교에는 물론 소년보다 더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소년보다 많은 책을 갖고 있는 아이는 없었다. 소년은 저녁도 먹지 않고 마을길을 쏘다녔다.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들이 비행장에 놀러 가자고 소년을 불렀다. 얼마 전부터 마을은 비행장을 건설 중이었다. 소년들은 틈이 나면 그곳으로 몰려가 황량하고 넓은 활주로가 만들어지는 것을 구경하곤 했다. 다이너마이트로 산이 폭파되고 콘크리트로 포장되는 길은 어른들에게도 구경거리였다.
“이제 비행장 구경은 시시하다. 늘 그 모양이고 정작 비행기도 없잖아.”
소년은 친구들에게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럼 뭐해? 용화 삼촌이 군대 갔다가 휴가 나왔는데 거기 놀러 가서 얘기 들을까?”
친구들은 심심한 토요일 저녁을 어떻게 보낼까 소년에게 물었다.
“들네에 놀러 가자.”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친구들에게 말했다.
“들네? 거긴 뭐 하러. 거긴 아무것도 놀 게 없다.”
“맞다. 온 동네에 구정물만 흐르고. 조무실 영감이: 정신이 반쯤 나가서 낯선 사람만 보면 쫓아낸단다.”
“그러니까 말야, 우리가 가서 조무실 영감을 혼내주는 거야.”
소년의 말에 친구들은 호기심을 나타냈다.
“내 말을 잘 들어봐.”
소년은 친구들을 가까이 모으고 비밀을 일러주듯이 말했다.
“오늘 낮에 문상하러 온 고모들한테 들었는데 말야, 조무실 영감이 귀신이 들렸나 보대. 아주 이상하게 변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 집에 가서 구경도 하고 우리가 할 수 있으면 놀려주자는 거지. 어때?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
“정말 재미있겠다. 하지만 영감한테 잡히면 뼈도 못 추린다.”
“맞아. 게다가 어른들이 알면 얼마나 혼나겠어.”
친구들은 재미있어하면서도 겁냈다. 아이들은 아직 개구쟁이들이었으나 마을 어른들은 엄격한 편이었다. 특히 소년의 아버지는 더욱 그랬다.
“말 안 하면 되지 뭐. 들네 깡패들의 짓이라고 둘러대는 거야.”
“맞아. 들네에는 깡패가 많다.”
친구들은 소년의 말대로 들네로 가기로 했다. 빠른 걸음으로 가면 한 시간 안에 도착할 것이다. 아이들은 풍선껌을 씹으면서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하늘을 쳐다보고 전신주에 앉은 까치에게 돌을 던지기도 하면서 들네로 갔다. 그들이 들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웠다. 마을에 도착하니 슬레이트집들 사이로 밥 짓는 냄새와 수챗물 고인 냄새가 풍겼다. 조무실 영감의 집은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산기슭에 있었고 곁에는 개 우리가 있어 개 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이들은 열린 대문 안을 삐죽 들여다보았다. 조무실 영감이 있는 방 안은 촉수 낮은 희미한 불이 밝혀져 있었고 기침소리가 들렸다. 마당에는 빨랫줄에 널린 빨래가 치워지지 않은 채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고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개를 풀어 놓으면 어쩌지?”
한 아이가 이렇게 걱정을 했다.
“그 전에 얼른 도망치는 거야.”
“작년에 조무실 영감이 다리를 다쳐서 절거든. 그러니까 빨리 쫓아오지는 못해.”
아이들은 개 우리를 향해서 돌을 던졌다. 우리 밖에 놓인 개 밥그릇에 돌이 맞아 요란한 소리가 났다. 개들이 사슬을 끌며 동시에 짖어대기 시작해서 귀가 다 멍멍할 지경이었다. 조무실 영감에게 특별한 무감이 있거나 미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장난을 치기에 가장 만만한 어름이어서였을 것이다. 처음에 가졌던 막연한 두려움 따위는 사라져버리고, 아이들은 고개를 마주하고 키득키득 웃었다. 영감의 방문이 벌컥 열리고 가래 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시러베 잡놈들이야!”
놋쇠 재떨이가 마당으로 날아왔다. 영감이 핏발 선 눈으로 기우뚱거리며 마당으로 내려서려고 하고 있었다.
“어떤 연놈에 새끼들인지 잡히면 아구창 날아갈 줄 알아라.”
“야, 튀자.”
소년은 돌을 던지기를 멈추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아이들은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아이들이 몸을 돌렸을 때 수챗물이 질척거리는 어두운 길을 연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저녁거리를 가져다주는 길이었나 보다. 그릇이 든 보자기를 양손으로 들고 있었다. 아마도 소년의 집에서 가져온 상갓집 음식인 듯했다. 낮에 입고 있던 검은 교복 치마에 자줏빛 스웨터에 운동화. 시린 듯 빨갛게 튼 손. 소년은 아주 짧은 순간 연이를 스쳐 지나갔다. 연이는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달아나는 소년에게 부딪혀서 비틀거렸다.
“빨리 뛰어. 나온다.”
친구들 중의 누군가가 이렇게 외쳤다. 영감이 한쪽 발을 질질 끌면서 뭐라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연신 외쳐대면서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아이들은 빨리 달렸다. 연이의 손에서 음식을 담은 보자기가 떨어졌다. 다급해진 친구들 중의 하나가 그것을 밟고 달아났다.
집으로 돌아오다가 소년은 제재소에서 일을 마치고 혼자 돌아오는 광복을 만났다. 광복은 우쭐우쭐 걷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어디 갔다 오십니까.”
“친구들하고 놀다 왔어.”
“어디에서요?”
“음, 비행장에.”
“비행장에요? 바람이 추웠을 텐데.”
“그렇다니까.”
“아버님이 아시면 걱정하시조. 이제 중학생이니까 너무 놀지 말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지요.”
“알았어.”
“도련님, 업어드릴까요?”
“싫어.”
광복은 머슴이지만 소년의 집에서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처음에 소년의 아버지가 대구에 사는 먼 친척집에서 데리고 왔다. 그는 그 집의 개구멍받이*로 들어온 존재였다. 소년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제재소에서는 두 사람 몫을 하는 일꾼이고 궂은 일 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형제가 없는 소년은 어린 시절에는 광복을 형이나 막내삼촌쯤으로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조금씩 자라면서 소년은 광복이 어려워졌다. 광복은 머슴이고 그것은 종이나 하인배와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어른들이 그에게 하대하듯이 그렇게 대하기에 소년은 광복과 너무 가까웠다. 광복이 만들어주었던 유리 가루를 입힌 그 수많은 연과 갓 태어난 송아지의 눈동자와 겨울밤의 눈 내리는 산길과 사과를 따러 갔던 과수원. 그들은 같이한 추억이 많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동등한 친구가 되기에 광복은 이미 너무 어른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의 마음에 광복은 인정하기 싫고 불편하면서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허허로운 모순적인 어떤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소년이 그 느낌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지는 못했으나 살다 보면 많을 것이다. 잘생긴 소년이 건달이 되며 여리고 착한 소녀가 쌍욕을 하고 추운 새벽 신문을 돌리던 건강한 아이들이 돈 때문에 심성이 누추해지며 가족을 끔찍이 생각하는 남자들이 골목에 가래를 뱉고 보송보송한 뺨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시장 거리에서 쓰레기통을 뒤지게 된다.
연이는 학교에서 말이 없고 조용한 편이었다. 특히 선생님이 칠판 앞으로 나와 수학문제를 풀게 하거나 동사 변화를 외워보게 하거나 할 때 더욱 그랬다. 연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숙제 검사를 하거나 시험 성적표를 나누어줄 때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말해서 연이는 정서적인 열등생이었다. 성적은 중간 정도였으나 그 나이 또래의 명랑함이나 해맑음이 부족했다. 사람을 만나면 먼저 고개부터 숙이는 것이 습관이었다.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은 처음에 아무도 연이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연이가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년이 올라갈수록 연이에게 관심을 갖는 남자애들이 늘어났다. 소년의 친구들은 이제 여학생들을 기웃거리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의 눈에 소년은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을 앉혀놓고 말했다.
“너는 우리 집안의 외아들이다. 나나 삼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네가 어머니와 여동생들에게 어른이 되어야 한다.”
소년은 아버지와 겸상으로 점심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사사로운 일에 감정이 흔들리는 것은 그릇이 큰 남자가 할 일이 아니다. 나는 너에게 반드시 일등을 하라거나 대장이 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일에 얽매이지 말고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된다. 그런 것은 아녀자들에게나 허용되는 것이다. 이제 너도 어른이 아니냐.”
소년은 밥을 먹다가 목이 메었다.
“영순아, 오빠에게 물 안 가져 다주고 뭐하냐.”
어머니가 딴전을 피우고 있는 여동생을 꾸짖었다:
아버지의 이런 선비연하는 가르침이 사춘기에 들어선 소년을 상당히 구속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년이 도시에서 비슷비슷한 환경의 이웃들과 함께 살았다면 좀 더 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소년이 살고 있는 마을은 도시가 아니었고 인구 비율은 중장년과 노년층이 많았고 사람들은 대부분이 농경인구였으며 대체로 그 부모에게서 배운 가난과 가르침에 순응하는 편이었다. 가부장적 사고가 모든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그 마을에서 공교롭게도 소년은 왕자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소년들과 달랐다. 모두가 원하고 있었고 그도 원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연이에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놀라고 부끄러워하였다. 삼월의 어느 추운 날, 아직 시작되지 않은 봄과 마음에 두꺼운 구름으로 내려앉은 겨울이 채 사라지기 전 경계의 어느 날 소년이 처음 소녀를 만났을 때 소년의 핏속에 있는 아버지답지 않은 어떤 것이 감동받았고 그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알고 있었다. 그는 일생 동안 결코 연이에게 가까이 가지 못할 것이다. 마을의 다른 친구들처럼 길을 지나가는 연이에게 휘파람을 불거나 수작을 붙이거나 장난으로 교복 치맛자락을 번쩍 들어 올리거나 빵을 사줄 테니 읍내에서 만나자고 하거나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들네의 수채 냄새 가득한 길에서 연이의 몸에 우연인 듯 부딪히며 가슴을 만지거나 하는 그런 일들. 다른 친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런 일들을 소년은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졸업반으로 올라가면서 소년의 친구들은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도 있었고 수업이 끝난 후 여자애들을 만나는 아이들도 있었다. 얼굴이 반반한 여자애들치고 남자아이들의 입 에서 오르내리지 않는 애는 없었다.
“이번 토요일에 우리 강에 놀러 가기로 했어.”
친구들은 이런 얘기를 했다.
“같이 가지 않을래?”
“토요일은 아버지와 대구 친척 집에 가야 해.”
소년은 거절했다.
“안됐구나. 여자애들도 같이 가기로 했는데.”
“여자애들이라니?”
“우리 학교 애들이랑 시내에 사는 애들 몇 명. 정숙이, 연이, 혜경이 뭐 이런 애들이야.”
“연이라구?”
“그래, 연이.”
“들네에 사는 천연이 말이 니?”
“맞아. 너 걔 아니?”
“아니 몰라. 그냥 걔네 집이 우리 친척의 소작을 부쳐서.”
소년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하긴, 너 같은 공부벌레가 여자애에 게 관심이나 있겠냐.”
소년은 친구들의 입을 통해서 연이에 대해 듣는 일이 많아졌다. 남학생 교실의 아이들은 자기의 경험을 터무니없이 부풀리거나 상상했던 일을 지어내거나 남에게 들은 일을 과장해서 친구들에게 옮기곤 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즐기는 아이들은 대부분이 평범하고 아직 어린 솜틸이 볼에 채 가시지 않은 소년들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가슴이 크고 되바라진 여자애는 문정숙이라고 하는 키가 큰 농구반 아인데 농구반 선배들 일곱 명과 함께 돌림질을 했다는 둥 연이가 읍내 농고 남학생들과 같이 이박삼일 캠핑을 갔다는 둥 혜경이라는 아이는 쭈쭈바의 명수라는 둥 그런 식의 신빙성도 없고 근거도 불확실한 소문들이었다. 그러나 반쯤은 믿지 않으면서도 호기심 강한 아이들은 그런 소문들에 의미를 부여 했고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강했으며 그런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덧 마치 자신이 실제로 겪은 일처럼 생생하고 또렷하게 그런 광경들을 꿈속에서 경험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몽상과 현실을 더욱 의도적으로 혼동했다. 낡아빠진 가방과 먼지투성이 길, 야채뿐인 법상과 대낮부터 술 냄새를 풍기는 무능한 아버지와 벌레 먹은 배추 이파리처럼 시들고 늙어빠진 어머니.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현실은 그런 것뿐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미래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삶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언제나 변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 외에 다른 환상이 있을 수 있다면. 아이들은 갈망했다. 그때 거기에 성적인 관계가 주는 환상이 있었다. 매혹적 인 긴장과 죄의식에 사무친 봄바람. 그래서 그들은 믿었고 몽상 속에서 경험했으며 그러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그들은 가슴과 엉덩이의 살집이 피둥피둥한 농구반 문정숙이 정말로 일곱 명의 남자와 동시에 성관계를 가지고 냄새 나는 사타구니를 닦지도 않고 히히덕거리며 일어나 집으로 간 것을, 하얗고 여린 연이가 읍내 농고의 깡패 남학생들과 캠핑을 가서 텐트 안에서 얼굴을 주먹으로 쥐어 터지면서 강간당한 것을, 눈웃음이 학교에서 가장 예쁜 혜경이가 동네 노총각들의 자지를 빨아준 것을 종교처럼 생각했다. 그건 사실 이전에 그래야만 하는 이 지상의 엄숙하고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들의 세계는 낮과 밤처럼 다른 두 개였다. 순응하는 가난과 반복되는 노동과 놀이와 집단으로 이루어지는 관습과 해야 하는 착한 일. 그러나 동시에 읍내의 만화방이나 금지된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상상 이상의 외설적인 장면들. 다방이나 여인숙의 비닐 장판 위에서 그들 이외의 누군가가 하고 있는 일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도 보통 때는 태연한 표정으로 읍내의 거리와 버스 정류장과 학교와 우체국을 걸어 다닌다. 소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이에 관한 소문들을 들을 때는 믿지 않았다. 소년은 또래의 아이들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들도 소년처럼 문정숙이나 연이나 혜경이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졸업반이 될 때까지 소년은 연이에게 말을 건네본 적도 없었다. 아니 연이와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친 적도 없었다. 소년은 김천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방과 후에 특별수업을 받았다. 고등학교 진학반 인원은 전교생의 반이 되지 않았다. 어쩌다, 정말 어쩌다가 복도나 운동장에서 소년이 연이와 스쳐 지나갈 때 소년의 표정은 더 굳어졌고 눈빛은 더욱 무표정해졌다. 특별하게 굳어지고 특별하게 무표정해지지 않기 위해서 소년은 노력했다. 소년이 연이를 대하는 태도는 겉으로 보기에 다른 여자아이들을 대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는 엉뚱하게도 광복이 등장하기도 했다.
“우리 어젯밤에 기찻길 옆에서 못을 줍다가 광복이를 만났다.”
소년의 친구가 수학문제를 풀고 있는 소년에게 문득 말했다.
“우리 집 광복이를 말하는 거야?”
소년은 도형의 각도를 계산하는 문제에 골몰해 있다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친구들은 고등학교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소년은 수학책을 펼 때마다 좀 고독했다.
“그래, 너희 집 제재소에서 일하는 그 광복이 말야.”
“그게 어 쨌다는 거야?”
“연이랑 같이 기찻길 가운데를 걸어오고 있더라.”
“뭐야?”
“둘이 손을 잡고 걷고 있는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 연이 얼굴이 빨개서.”
“그런 거짓말은 퍼트리지도 마라. 아버지가 알면…….”
“거짓말이 아니다. 나만 본 것도 아냐.”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라.”
“너 왜 화내고 그래?”
“광복이 얘기를 하니 그렇지.”
“우리가 뭐 없는 말 했나.”
그날은 가을이 깊었고 보충수업을 끝내고 소년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었다.
시험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소년은 시험에 합격할 것이다. 하지만 김천고등학교로 간다면 소년은 다른 도시 아이들과 경쟁해야 한다. 도시 아이들의 성적은 이런 시골마을 출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소년은 귀가 닳도록 듣고 또 들었다. 시험에 대한 부담감이 소년의 가슴을 바위처럼 압박했다. 만약 시험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소년을 믿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얼마나 실망할까. 소년을 왕자로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아마도 비웃을 것이다. 친구들은 소년이 실상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은 싫다. 아니 감당해낼 자신이 없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이. 소년이 시험에 합격하든 하지 않든 여전히 연이는 멀리 있을 것이다.
소년이 생각에 잠긴 채 모퉁이를 돌았을 때 연이가 저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혼자였다.
낡은 검은 교복 치마와 푸른 운동화로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들네는 소년의 마을과 반대 방향이었다. 연이는 이 길을 걸을 이유가 없었다. 소년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 창백해졌다. 소년은 아무 말없이 연이를 지나갈 것이다. 다른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연이는 분홍빛 보자기에 싼 것을 무겁게 들고 있었다. 아마 심부름을 가는 듯했다. 소년은 자전거 페달을 밟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냥 지나갈 것이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고 낙엽들이 흩어졌다. 연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소널을 향해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너 현리에 살지?”
소년은 더욱 창백해진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자전거를 멈추었다. 연이는 학교에서 볼 때와는 달랐다. 별로 주눅 들지 않은 듯했고 뭔가를 두려워하는 듯이 왜소하게 어깨를 움츠리지도 않았다.
“나도 엄마 심부름으로 현리에 간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소년은 자전거를 멈춘 자신을 원망했다. 연이가 이렇게 말을 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 어쩌면 학교에서 친구들이 말하는 그 흉한 소문들이 다 정말일지도 모른다. 소년은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듯이 근육 하나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년은 짧게 대답했다. 연이는 소년의 차가운 말투에 놀란 듯이 입을 다물고 눈이 커졌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짐이 무거운데, 자전거에 실어주지 않을래? 광복이 오빠에게 맡겨 놓으면 내가 가져갈게.”
연이의 마지막 목소리는 바람에 꺼지듯이 작게 나왔다. 소년이 화를 내고 있는 듯이 굳은 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광복이 오빠라고?”
소년의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언제부터 우리 집 광복이가 네 오빠가?”
“난 그저.”
“가시나가 겁도 없이 길에서 남자에게 말이나 붙이고.”
연이의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당황해서 눈물이 흐를 듯이 연이의 눈가가 젖어왔다. 소년은 서둘러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소년은 연이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그래도 꿈꾸었다. 연이를 처음에 만나면, 그래서 연이와 눈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연이를 만나게 된다면.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연이와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그런데 소년은 꿈꾸던 것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연이가 광복의 이름만 꺼내지 않았더라면 소년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년은 후회했다. 가슴 아프게 후회하면서 더욱 빨리 달렸다.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소년의 야단을 듣고 붉은 복숭아처럼 색이 변하던 연이의 가느스름한 눈시울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에서와 다른 연이의 자연스러운 태도가 소년에게 미묘한 배신감을 느끼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비포장길의 움푹 팬 굴곡과 자갈길을 지나면서 소년의 몸은 자전거 위에서 사정없이 흔들렸다. 소년의 마음은 더욱 강하게 흔들렸다. 아, 어쩌면 학교에서 친구들이 말하는 그 소문들이 다 정말일지도 모른다. 연이는 학교에서만 소극적이고 수줍음을 타는 열등생일 뿐 학교를 벗어나면 어두워진 읍내 거리를 왈패처럼 패거리 지어 돌아다니는 질 나쁜 요란한 계집아이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른다. 남자라면 농고의 깡패들이든 천한 머슴이든 가리지 않고 같이 빵집을 드나들 것이다. 소년의 가슴은 수천 개의 바늘로 찔리듯이 아팠다. 소년은 생각을 털어버리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번뇌에 빠져 있다는 것은 소년이 다른 사람들과 같다는*것을 의미했다. 대낮부터 술에 취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때리고 글을 모르고 소년을 향해서는 비굴하게 웃고 흙투성이가 되어 일하고 아무데서나 손가락으로 누런 코를 풀어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
아녀자들이나 빠지는 생각이다.
소년이 시험에 합격하고 김천고등학교로 떠나기 전 겨울에 광복이 결혼을 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광복을 결혼시키기 위해 그에게 제재소에서 가까운 집 한 채를 얻어주었다.“
“남의집살이*하는 남자에게 누가 시집오겠나. 너도 이제 보통 제재소 직원이니 하고 생각하고 살아라.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하고.”
광복의 결혼은 어렵게 성사되었다. 시집오겠다는 여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광복이 그 여자들을 탐탁게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전 아직 결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여기서 살고 싶습니다.”
광복은 입버릇처럼 혼처(婚處)를 물리치면서 소년의 아버지에게 사정하다시피 했다.
“넌 이제 스물일곱인데 뭐가 아직이냐. 학교도 안 다닌 네가 도시로 나가 공사판 일을 하겠냐, 장사를 하겠냐. 어차피 여기 정착해 살거면 하루빨리 독립해서 살림을 나야지 서른이 넘어도 남의집 살이를 하겠느냐. 그러니 이번에는 절대로 거역하지 마라.”
소년의 아버지가 하도 추상같아서* 광복은 할 수 없이 선을 보아 일이 진행되었다. 광복과 결혼한 여자는 키가 땅딸막하고 얼굴이 마늘 같이 갸름한데 소년의 외가 쪽으로 일가가 되는 사람이 소개를 해주었다. 여자는 대구에서 양장점 일을 했다고 한다. 아마 재봉사였을 것이다.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두껍고 투박한 여자의 손가락은 바늘구멍투성이었다. 처음 소개를 받은 자리에서 여자는 광복이 맘에 들었다. 여자는 철들면서부터 재봉틀 앞을 떠나지 못했고 버스 종점 앞에 있던 그 양장점과 그곳을 기웃거리던 기름때 절은 남자들을 지겨워했다. 도시의 가장 변두리를 떠도는 그런 남자들은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으며 월급날이면 양장점의 재봉사들에게 돈가스를 사주겠다며 접근했다. 손때가 새까맣게 묻은 레스토랑의 벽은 음란한 낙서로 가득했고 돈가스는 기름투성이에다가 남자들의 바지 주머니에서는 동전이 절렁절렁 소리를 냈다. 베니어판으로 만든 레스토랑의 칸막이 저편에서는 다른 재봉사들이 킥킥 웃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고 바닥은 담배와 음식 찌꺼기로 더러웠다. 여자는 땅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때가 찌든 손들을 한 채 도시의 변두리를 기웃거리지 않는 남자가 있는 곳. 여자는 광복이 자기에게 무심히 대하거나 눈빛이 멀리 있거나 말없이 일만 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도시 남자들은 여자에게 껄떡대니 도무지 참을 수 없었어. 이 남자는 워낙에 대범해서 도리어 자연스럽고 좋아.
광복은 묵묵히 열심히 일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자는 광복을 위해서 밥을 짓고 옷을 깁고(재봉틀은 쓰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낳고 그리고 광복을 대신해 글을 읽어줄 것이다. 여자는 남자답고 튼튼한 광복의 곁에서 오래오래 살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광복에게 얼마간의 땅과 집과 축사(畜舍) 와 송아지 세 마리를 주었다. 결혼을 한 광복은 이제 소년의 집 머슴이 아니었다. 거의 친척처럼 광복을 대했던 집안사람들이 광복의 결혼식 날 소년의 집으로 와서 잔치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들은 찬바람이 부는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술을 마셨다. 머슴이자 제재소 일꾼의 결혼식을 마치 마을 원로의 회갑연처럼 성대하게 치르고 가난한 친척들에게보다 더 많은 살림을 떼어준 것에 대해서 은밀하게 불평하는 소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이 먹고 성격이 진득한 장년의 사내들이 촉새 빠른 그런 입방아들을 묵살했다.
“치아라. 니들이 맨날 놀고먹고 건들거릴 때 제재소를 위해서 광복이 얼마나 일 했는지 아나.”
술에 취하고 불만이 쌓인 어느 건달 하나가 없는 말을 만들어내서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광복이가 왜 결혼 안 할라고 미적댔는지 압니까? 소작 문제 때문에 들네에 들락거리다가 조무실 영감 외손녀하고 눈이 맞은 기라요. 왜 그 부산에 가서 운전한다는 그 천 서방, 천 서방 딸요. 아직 가시나가 어린데 얼굴이 반반해서 침깨나 흘리는 사내들이 많은데 광복이가 그 가시나한테 빠져서 그 어미에게 딸이 크면 혼약을 하자 그랬다가 구정물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쫓겨났다는데요. 아무리 가난해도 그렇지 나이 든 머슴 놈한테 딸을 줄까 보냐고요.”
“뭐라고? 저놈이 실성을 했나, 남의 잔치에 찬물을 끼얹기는, 되져서 잠이나 자라.”
“질이 나쁘다, 질이 나빠. 요즘 것들은.”
“광복이가 재산도 생기고 신임을 얻으니 샘이 나서 그러는 게지. 그래도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냐.”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들은 척하지 않자 처음에 말을 꺼낸 건달은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그도 딱히 어떻게 하려는 생각으로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고 악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혼자 구석으로 몰리자 화가 나고 무엇보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시치미에 울분이 났다.
“왜, 내가 없는 말 했나? 왜 다들 나만 보고 그래. 천 서방 마누라한테 기웃거리기도 하고 그 딸내미한테 수작 붙인 놈들을 내가 다 하는데. 그기이 광복이놈 혼자도 아니고. 내가 없는 말 지어내는 것도 아니고. 왜 그리 나만 짐승 보듯 하노 말이다.”
“저놈이 맞아 죽을라고 환장을 했군. 어린애들 들을까 봐 무섭네.”
계속해서 주정을 해대던 건달은 결국 마을 청년들에게 끌려 나가 더 이상 모범적인 사람들을 모욕하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소년은 광복의 결혼식을 보지 못했다. 이미 김천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외삼촌과 함께 김천의 하숙집을 알아보러 떠났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은 소년의 인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그곳에서 소년은 더 이상 마을의 왕자가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아니었고 선생님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모범생도 아니었다. 소년은 그저 그런 비슷비슷한 아이들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소년이 그것을 인정하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소년의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았고 불량한 아이들이 예전처럼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주말이나 방학이 되어 소년이 집으로 내려가서 만나게 되는 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다르지 않았다. 초라하고 고지식하며 아집이 대단한 시골 중늙은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소년은 알게 되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나이보다 늙어 보였고 집안의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땅이 뭉텅이로 팔려나갔으며 목재 경기의 불황으로 제재소의 수익은 매년 엄청난 속도로 줄어들었고 일꾼들의 임금은 흉년의 쌀값처럼 뛰어올랐지만 쓸 만한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시골 구석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의 집에는 지내야 할 제사와 치러야 할 노인들의 생신이 있었고 이리저리 가난한 친척들에게 쌀가마를 보내주어야 했고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막내삼촌이 있었고 소년의 학비와 하숙비를 내야 했으며 아직 공부해야 할 여동생들이 세 명이나 있었다. 소년이 외지에 나가서 바라보게 된 집안 형편은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소값 파동이 일어나 소년의 집에서 기르던 수십 마리의 소를 사료값도 건지지 못하고 도살해야할 형편이었다.
“너는 공부만 하면 된다. 어른들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소년이 집에 오는 주말이면 언제나 사골국을 꿇여내는 어머니는 변함없이 따뜻하기만 했다. 그러나 소년은 보았다. 도무지 화장한 것을 본 기억이 없는 어머니의 얼굴. 언제나 작업복 차림으로 대가족 집안일에 아침부터 밤까지 시달리고 노인들의 시중에 긴장을 한 번도 완전히 풀지 못하고 살았던 어머니. 에나멜칠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거친 손톱. 소년의 어머니는 그때 서른여덟 살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큰 집에 살며 세 끼 밥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그들은 언제나 여유 있는 삶을 누린다고 마을 사람들은 생각했었고 소년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년이 본 도시의 생활은 많이 달랐다. 김천 고등학교에는 대구에서 온 아이들도 있었고 아이들의 아버지들의 직업은 의사나 공무원, 학원 강사와 택시 운전사, 슈퍼마켓 주인이나 자영업자 등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소년은 시골에서 온 촌놈에 불과했다. 김천고등학교에는 들네 출신의 일 년 선배가 있었다. 들네 출신의 아이는 그곳 출신답게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이고 아주 힘겹게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뛰어난 우등생이기도 했다. 소년의 성적이 신통치 않은 것을 야단치면서 소년의 담임 이 꾸짖었다.
“이 학년의 학이 선배를 좀 봐라. 형편이 그렇게 어려워도 공부를 열심히 하잖니. 같은 마을 선배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아?”
“학이 선배는 같은 마을 출신이 아닙니다. 우리 집은 현리고 학이 선배는 들네 예요.”
“거기가 거 기 아냐.”
들네는 소작인 마을입니다. 학이 선배의 아버지는 우리 집의 소작인이었어요. 소년은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는 이제 알았다. 그런 내용은 이제 아무런 변명이나 명분이 되지 못한다. 소년은 성적이 좋지 못한 농촌 출신의 학생일 뿐이었다. 소년은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학교에 있을 때나 집에 있을 때나 이질감에 시달렸다.
연이는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못했다. 시험에 붙기는 했지만 그 어머니는 연이를 진학시킬 힘이 없었기 때문에 연이는 구미에 있는 섬유공장에 취직했다. 연이뿐 아니라 그런 식으로 인생의 방향을 잡은 아이들은 많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년은 자신이 연이를 정말로 좋아했던가, 단지 멀리서 그 아이의 이미지만 좋아한 것은 아니었던가, 가까이 갈 수 없는 세상이었기에 사랑한 것은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끔 정말 미칠 듯이 연이가 보고 싶기도 했다. 소년이 미래의 어느 날 대학생이 되어 연이에게 나타난다면, 연이는 감동할까, 연이의 소식을 듣기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소년의 마을 친구들 중에는 들네에 사는 아이들도 있었고 그중에는 연이의 친척이 되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소년은 더러운 교복을 입고 거리의 뒷골목을 떠돌았다. 소년의 어머니가 보면 질색할 일이었다. 비가 내려도 달리지 않았다. 오락실과 만화가게를 서성거렸으며 이학년이 끝나갈 무렵 친구들의 자취방에서 처음으로 소주를 마셨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라면을 끓여 먹고 소주를 마시고 잠들었다. 한밤중에 소년은 생전 처음 느끼는 두통과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맡의 주전자를 더듬던 소년의 손에 여자아이의 단발 머리칼이 잡혔다. 소년은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뭐 야.”
무슨 일이 있었던가. 소년은 기억하려고 애썼다. 시험이 끝났고 아이들은 곧 졸업반이 될 것이다. 졸업반이 되면 대학 입학을 위해서 타이트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을 핑계로 아이들은 나태해지고 싶어 했다. 그래서 소주를 마시고 어느 순간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잠이 든 것은 알겠는데 그다음은 생각나지 않았다. 어둠 속을 둘러보니 다른 친구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여자아이가 도대체 몇 명이 있는 것일까. 소년은 잠이 달아났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겉옷을 찾았다. 그때 곁에서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여자아이의 손이 소년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뭐 하는 거야.”
소년은 감히 큰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여자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여자아이의 손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촉촉했다. 여자아이는 소년의 눈을 쳐다보면서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소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자아이는 소년의 바지 지펴를 내리기 시작했다. 연이 이후에도 소년은 여자아이들과 가까이 지내본 일이 없었다. 좁은 방에 여러 명의 아이들이 자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아이의 입은 소년의 귓가에 바싹붙어 있었다. 따뜻한 입김이 소년의 귀를 통해서 머릿속을 휘감아 폭풍이 불게 했다.
“그만 해라.”
소년은 여자아이를 뿌리치고 일어섰다. 그는 겉옷도 찾아 입지 않고 방을 나섰다. 여자아이는 눈이 동그래져서 소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년은 시간도 짐작할 수 없게 칠흑같이 어두운 골목길을 달려갔다. 찬바람 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누군가가 김천여고 아이들을 불렀을 것 이다. 소년이 잠이 들었을 때 여자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방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소년이 잠이 들었을 때 여자아이들은 소주를 마시고 소년의 곁에 누웠을 것이다. 소년의 친구들 중 몇몇은 누운 여자아이의 가슴을 만졌을 것이다.
연이도 이랬을까. 연이도 다른 남자애들과 이렇게 했을까. 그 소문들은 다 사실이었을까.
소년은 밤을 달려갔다.
다음 해 명절이었을까. 소년은 버스 안에 있었다. 집으로 다니러가는 길이었다. 버스는 읍내를 거쳐 현리로 들어갔다. 읍내의 정류장을 막 벗어났을 때 소년은 연이를 보았다. 연이는 버스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소년은 연이를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갔던 것이다. 소년은 연이를 인식하기 전에 먼저 느낄 수 있었다. 연이는 많이 성숙해졌다. 다른 또래의 여고생들처럼 짧은 단발머리가 아니라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몸에 달라붙는 스웨터, 흰색 머플러를 하고 있었다. 연하게 파우더를 바른 듯한 뺨이 연이의 얼굴을 더욱 하얗게 빛나게 했다. 연이는 모습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소년은 연이를 정면으로 보았지만 그 순간에는 금방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연이가 단풍잎 같은 손으로 추운 듯 두 뺨을 감쌌을 때 소년은 마음에 잊고 있던 통증이 먼저 느껴졌고 그리고 버스가 연이를 스쳐 지나갈 때 알았다. 소년은 버스의 먼지투성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연이를 자세히 바라보려고 애썼다. 낡은 버스는 심한 매연을 뿜으면서 좁은 길을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많은 눈이 내린 지 며칠 지나자 않아서 거리의 곳곳에는 눈이 쌓여 있고 응달은 아직 빙판길이었다. 연이는 앞을 보고 걷고 있었다. 들네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가고 있는 듯했다. 버스가 경적을 울렸고 연이는 문득 버스를 올려다보았다. 소년의 눈과 연이의 눈이 마주쳤다. 연이는 소년을 알아보았을까. 연이의 얼굴에 아주 작은 파문이 일 듯하다가 사라져버렸다. 아마 그것은 소년의 지레짐작일지도 모른다. 소년의 눈앞이 안개가 서린 듯이 뿌옇게 변했다. 추운 날이었고 낡은 버스는 난방이 되지 않았다. 소년은 추위를 느끼고 눈을 감았다.
“성적이 도대체 이게 뭐냐.”
소년의 아버지는 잔소리를 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소년에게 한마디 해야겠다고 결심한 듯했다.
“대학을 갈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소년은 말없이 아버지 앞에 앉아 있었다. 쉰 살이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소년의 아버지는 흰머리가 반이 넘었고 간간이 기침을 했다.
“기억해라. 너는 우리 집안의 기둥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소년은 고개를 숙였다. 부엌에는 어머니가 끓이는 사골국 냄새가 구수했다. 그새 아이를 낳은 광복이 소년을 보러 왔다. 광복은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마당에 서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방에서 나와 마당에 선 광복을 내려다보았다. 광복은 몰라보게 몸이 불었다. 세월의 더께가 낀 누렇고 핏발이 선 눈동자였다.
“도련님 많이 자라셨군요.”
반년마다 바지 밑단이 껑충해질 정도로 키가 큰 소년을 광복이 올려다보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광복은 낡은 혁대를 매고 있었는데 그 위로 뱃살이 밀려 올라갈 정도로 살이 쪘다. 깨끗한 셔츠를 찾아입고 새 구두를 신었지만 광복에게는 늙어가는 시간이 숨겨지지 않았다. 머리카락 사이에는 톱밥이 서캐*처럼 고여 있었다. 광복은 다시 한 번 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이제 자라서 대학생이 되겠군요.”
“음.”
소년은 광복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적당한 호칭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어물거렸다. 옛날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하대를 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그를 대하는 것이 어쩐지 어색 했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짓물러버린 광복의 모습을 보기가 불편해서 그를 피하고 싶었다. 뒤돌아서는 소년의 모습을 광복은 오래 오래 바라보고 서 있었다.
“도련님 이제 어른이시군요. 어른이 돼서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가겠군요. 그러면 이제 뭐든지 다 하시겠군요.”
광복의 마지막 말은 쉬어 나왔다. 마치 한숨과 같았다. 소년은 걸음을 빨리 했다. 그러면 너는 왜 안 갔나. 뭘 바라고 여기 주저앉아 몇 마리의 송아지와 집과 땅과 함께 몰락해가는 시골 제재소의 노동자로 남았던가. 광복은 소년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끝까지 바라보고 서 있었다.
소년의 고등학교 시절 마지막 일 년은 비참했다. 소년은 당구장에서 패싸움을 하고 입술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왜 싸우게 되었는지 소년은 모른다.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다. 김천여고 여자아이가 소년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넌 나를 거부한 첫 번째 남자아이야. 내 자존심을 회복시켜주지 못하면 복수하겠어. 소년은 편지를 구겨버리고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담배를 피웠다. 학교에 나가지 않은 지는 일주일이 되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볼 생각이었다. 학교는 싫었다. 학교는 이제 각목으로 당하는 린치*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비가 왔다.
소년은 버스 정류장을 배회하다가 구미공단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들네에 사는 친구를 통해서 소년은 연이의 연락처를 갖게 되었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더럽혀지지 않은 페이지로 연이는 거기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당연하게 연이는 아무것도 몰라야 했다. 소년은 연이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이에게 소년은 그냥 왕자로 남아 있고 먼 서울로 가서 대학생이 될 존재일 것이므로 마당에 서서 소년을 올려다보면서 연이는 작은 소리로 말할 것이다.
“도련님 이제 어른이시군요. 대학생이 돼서 이제 뭐든지 다 하시겠군요.”
구미공단에 도착해서 소년은 연이에게 전화를 했다. 연이는 오후 근무라서 한밤중에 일이 끝난다고 했다. 소년은 연이의 근무가 끝나는 시간까지 연이의 집 근처 개천가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매캐한 바람이 불고 버릇없는 개들은 함부로 짖어대고 풀잎에서도 화공약품 냄새가 났다. 개천가를 따라서 공원들이 살고 있는 벌집같이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셋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소년을 만났을 때 연이는 놀라지 않았다.
“너였어?”
그냥 그렇게 말했다.
“너였어?”
그들은 포장마차에서 꼬치구이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난 다음 달에 공장을 그만두고 미용학원에 다니려고 해.”
연이가 말했다.
그다음에 그들은 별말 없이 개천가 길을 걸었다. 자전거가 지나가고 야채가 썩는 밤이었다.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울고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와 개수대에서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손을 잡고 걸었다.
“넌 학교생활이 어때? 나는 그런 것들이 궁금해.”
“음, 뭐 별거 없어. 선생들이 각목으로 아이들을 때리지.”
“맞을 때는 기분이 어떠니?”
“나쁜 일을 해서 맞는 거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소년은 쿡쿡 웃었다. 연이도 따라서 미소 지었다.
“늦었다.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아득한 뒷날 어느 때에 누군가가 소년에게 묻는다. 그때 우리는 참 아름다웠다. 그때는 몰랐으나. 왜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을까. 이제는 다시 돌아가려 해도 그 시간은 지상의 어느 곳에도 없다. 없다. 그렇지? 그렇지?
그들이 처음 입술을 마주했을 때 연이의 입술에서는 많은 침이 흘러내렸다. 소년은 그것을 의식 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 했으나 멈출 수 없었다. 소년은 침을 뱉고 싶었다. 연이의 팔이 소년의 머리를 감싸고 연이의 단풍잎 같은, 그 변하지 않은 손이 소년의 얼굴을 감쌌다.
“옛날부터 넌 날 좋아했지? 다 알 수 있었어.”
연이의 방은 너무나 작아 둘이 누우면 머리가 옷장의 바닥에 닿고 발은 문에 닿았다. 얇은 벽은 소년이 돌아누울 때마다 진동했다. 둘은 얼굴을 마주 대고 누웠다. 그토록 긴 시간 동안 꿈꾸던 순간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런데 소년은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연이가 불을 끄고 소년을 향해 돌아누운 그 순간부터 소년은 어쩌면 후회하고 있었다. 소년은 이를 악물고 연이의 얼굴을 외면했다. 소년의 등과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연이가 하아하아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들은 교접했다. 연이의 몸에서는 냄새가 많이 났다. 소년은 한 손을 뻗어 창문을 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옆방에서 자명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가까운 곳에서는 공장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소음이었다. 마치 전쟁이 난 것 같았다. 오전 팀 공원둘이 일하러 가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연이가 수건에 물을 적셔가지고 와 소년의 몸을 닦아주었다. 그들은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다.
“미안해.”
연이가 소년의 손가락을 만지면서 말했다.
“미안해. 처녀가 아니어서.”
소년은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참았던 침을 뱉었다. 왜 이렇게 더러운 기분이 드는지 알 수가 없다. 왜. 처음은 누구나 다 이런 것인가.
“너,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거지?”
연이가 물었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년은 자신에게서 무엇인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몽환에 가득 찬 고전주의가, 창가에 놓인 꽃과 과일의 정물이, 전쟁 이전에 찍은 듯한 희미한 사진들이, 책에는 없는 이야기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지?”
소년은 연이를 쳐다보지 않고 물었다.
“왜냐하면 부잣집 남자아이들은 다 그러니까.”
연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그 담담함은 일 분을 채 가지 못했다. 소년은 연이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연이는 두 손을 눈에 가져다 대고 눈물 없이 울었다.
“난 이제 어떻게 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 소년은 있었다. 한가한 시간이었고 버스는 빠르게 달렸다. 소년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고 학교로 돌아가 사흘 정도를 화장실에서 대걸레와 각목으로 두들겨 맞은 다음에 교실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은 쓸쓸하겠지만 소년은 더욱 쓸쓸할 것이다. 어쩌면 소년은 다시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은 버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식어갔지만 그는 결정적인 것을 상실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불행했으나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것을 모른다.
『한국문학』 (1999년 봄호); 『소설집 No. 4』 (생각의 나무 2005)
* 2006년 6월 작가가 부분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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