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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복의 노동상담 이야기
[조광복의 노동상담 이야기] 네 번째 이야기, 맹세할 誓(서) 약속할 約(약)
평등사회노동교육원 2024. 11. 5. 14:11
조광복 선생님의 노동상담 이야기 입니다. [편집자주] |
맹세할 誓(서) 약속할 約(약)
- 근로계약의 뒷골목, 서약의 풍경
조광복
(전)청주노동인권센터 상담활동가
1.
사용자가 노동자를 고용하려면 반드시 근로계약을 서면으로 작성해야 합니다. 근로기준법이 강제하고 있어요. ‘계약’이란 뭘까요? 계(契)는 ‘맺다’, ‘합치하다’를 뜻합니다. 즉, 서로의 의견을 합치시켜서 약속을 맺는 것이죠. 계약은 계약 당사자가 수평적 관계에 있을 거라는 걸 전제한 개념입니다. 계약관계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법적 풍경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는 법률의 예상과 달리 전혀 수평적이지 않기 때문이죠. 근로계약에도 잘 보이지 않는 뒷골목이 있습니다. 거기에 ‘서약의 풍경’이 있습니다. ‘서약의 풍경’은 노동조합의 힘이 미치지 않는 많은 사업장에서 벌어지는 현실의 풍경입니다.
‘맺을 계(契), 약속할 약(約)’의 풍경과는 동떨어진 세상, 그러나 사실은 근로계약의 뒷골목에서 생각보다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 ‘맹세할 誓(서) 약속할 約(약)’, 서약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2.
경희 씨는 ‘00코리아’라는 인력파견업체에서 한 달 근무하고 퇴직했습니다. 한 때 인력업체들이 너도나도 ‘아웃소싱 코리아’ 같은 거창한 ‘코리아’를 이름에 붙인 적이 있었죠. 이 회사 ‘코리아’는 원룸을 전세 얻어서 소속 직원들에게 숙소로 제공해 왔어요. 사용료는 무료이지만 대신 보증금 10만 원을 징수했는데요, 회사는 근로계약서를 쓸 때 ‘기숙사입주서약서’도 함께 작성해서 서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구 하나가 찜찜했어요.
“기숙사는 보증금 10만 원 있으며 3개월 전 퇴사 시 기숙사비는 돌려드릴 수 없으며...”
인정머리 없는 이 문구는 왜 넣었을까요? 처우가 박한데다 고용도 불안해서 첫 월급 받자마자 그만 두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숙소를 제공하는 대신 10만 원이라도 3개월 근무의 담보로 잡아두려는 심보지요. 어찌 보면 ‘코리아’답지 않게 쩨쩨해 보이지만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10만 원은 때로 눈에 밟히고 분통 터지게 하는 돈일 수도 있죠. 경희 씨도 첫 월급 받고 그만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장은 입을 싹 닫았습니다.
그렇다면 사장의 처사는 불법일까요 합법일까요? 「근로기준법」 제20조(위약예정의 금지) 조항이 있습니다.
근로기준법 제20조(위약 예정의 금지)
사용자는 근로계약 불이행에 대한 위약금 또는 손해배상액을 예정하는 계약을 체결하지 못한다.
근로기준법이 위약 예정 금지 조항을 둔 이유는 노동자가 퇴직의 자유를 제한받아 부당하게 계속 근로할 것을 강요받는 것을 방지하는데 있습니다. 다만 노동자가 부담해야 할 돈을 사용자가 대신 부담하되 일정한 기간을 근무하면 그 상환을 면제하기로 약정한 경우 그 금액과 의무재직기간이 합리적이라면 법 위반으로 보지 않아요. 경희 씨는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접수해 10만원을 돌려받았는데 10만원의 용도가 ‘보증금’이었기 때문이지요.
3.
홀과 주방에 7명을 고용하고 있는 중국음식점은 급여를 주급으로 지급해 왔어요. 메시, 호날두 같은 대단한 프로들이 주급으로 책정한다지만 최저임금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 주급은 왠지 낯섭니다. 더 희한한 일은 급여를 줄 때 36만 원을 깔고 준다는 겁니다. 즉, 첫 주급에서 36만 원을 제한다는 뜻이에요. 그리고는 근로계약서와 별개의 서약서를 쓰도록 했어요. 홀서빙을 담당하는 명숙 씨도 서약서를 쓰고 입사했습니다. 내용인즉슨
“지각을 하면 36만 원을 지급받지 않겠습니다.”
생산직의 경우 임금을 보통 시급으로 계산하되 매월 일정한 날짜에 지급하는데 이를테면 매월 1일부터 말일까지 계산해서 다음달 10일 지급하는 식입니다. 이때도 ‘열흘 깔고 준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런 경우는 계산의 편의 때문에 생긴 일이므로 법 위반으로 보지 않지요. 하지만 이 ‘빌어먹을’ 중국집을 여기에 비교할 것이 아니지요.
명숙 씨가 지각했습니다. 그 날부터 사장과 관계가 틀어졌어요.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
쫓겨난 지 한 달이 되도록 36만 원을 못 받았는데, 서약서 때문이었어요. 순진한 명숙 씨는 상담을 받으면서도 “이 돈 받을 수 있는 거예요?” 하며 몇 번을 물었습니다.
이 중국집은 계산의 편의와 상관없이 이미 일한 대가 가운데 일정액의 금액을 공제하여 지급하지 않았으므로 「근로기준법」 제43조(임금 지급)를 위반한 겁니다. 명숙 씨가 지각한 시간만큼의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허용되지만 그 시간을 초과하여 공제하면 당연히 불법이지요.
근로기준법 제43조(임금 지급)
① 임금은 통화(通貨)로 직접 근로자에게 그 전액을 지급하여야 한다. 다만, 법령 또는 단체협약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임금의 일부를 공제하거나 통화 이외의 것으로 지급할 수 있다.
② 임금은 매월 1회 이상 일정한 날짜를 정하여 지급하여야 한다. 다만, 임시로 지급하는 임금, 수당, 그 밖에 이에 준하는 것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임금에 대하여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이런 낯 두꺼운 고용은 학생 알바를 쓰는 사업장에서 더 빈번합니다. 최저임금을 준수하고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사업주들이 늘었지만 여전히 일부 사장들은 ‘알바 학생’을 임금 노동자가 아닌 ‘용돈벌이’취급하고 있어요. 한 카페 사장은 대학생 현수 씨를 하루 4시간 알바로 고용했어요.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것까진 좋았는데요, 눈에 확 들어오는 구절이 있어요.
“수습기간 5일 20시간을 무상으로 근무토록 함”
낯선 일에 채용될 경우 얼마간은 일을 익히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렇더라도 일을 하지 않고 배우기만 하는 건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아요. 고용되어 ‘노동’을 하는 기간이기도 해요. 자그마치 5일 20시간을 무상으로 근무토록 하다니! 불법입니다. 이 카페 사장은 얼굴도 두꺼운데다 질겼습니다. 최저임금도 맞춰 주질 않아 결국 현수 씨가 그만 뒀는데 사장과 여러 번 통화하고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접수할 때까지 임금을 주지 않고 버텼습니다.
4.
구조조정과 노동의 유연화 바람이 휩쓸고 간 시절이 있습니다. 구조조정 바람을 타고 기업들이 너도나도 연봉제를 도입했는데 연봉제 근로계약서에 ‘비밀유지 서약’을 넣는 것이 유행했었죠. 그 후 자연스럽게 관행이 되었어요. 보호해야 할 비밀이 뭐가 그리 많은지 업종과 직종 불문하고 단순 생산직부터 환경 미화직에 이르기까지 비밀유지 서약을 받았습니다. 비밀유지 서약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있어요.
“본인의 임금을 다른 근무자에게 절대 누설하지 않으며 위반 시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본래 ‘임금 비밀 약정’은 개인별 성과급제를 도입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건데요. 실제로 서명을 한 노동자는 그저 최저임금만 받고 일하는 생산직 노동자였어요.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친한 동료 역시 매한가지입니다.
두 사람이 퇴근 후 소주 한 잔 기울이다 서로의 임금을 알게 됐다고 칩시다. 회사는 서약 위반을 이유로 처벌 즉, 징계할 수 있을까요? 징계란 기업질서를 침해한 직원에 대하여 사업주가 취할 수 있는 제재 조치입니다. 그런데 근무자들한테 최저임금만 지급하는 실정을 감추어야 하는 게 딱히 보호받아야 할 기업질서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겠지요?
심지어 이런 서약서도 봤습니다. 제조업체에서 퇴직한 노동자가 갖고 온 ‘비밀유지 서약서’의 내용이에요.
“이 비밀유지 서약을 어길 경우 월급을 환수하며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5.
윤석 씨는 개인 질병으로 두 달 휴직했다가 복직하려고 회사를 찾아갔습니다. 회사 관리자가 일을 해도 좋다는 의사 소견서를 제출하라면서 미리 출력한 서약서를 한 장 내밀었어요. 그 중 한 문구가 가슴에 박혔어요.
“사망해도 회사의 책임은 없다.”
상담 도중 윤석 씨는 어렵게 말을 꺼냈어요. “어쩔 수 없이 서명을 했지만요. 근데 마음이 비참하더라고요.” 물론 회사 입장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닙니다. 일을 시켰다가 덜컥 큰일이라도 생긴다면 난감할 테니 말에요. 그래도 그렇지 가슴에 담을 말과 입 밖에 꺼낼 말을 구분하고 사는 것이 사람 사이의 일이지요.
입에 담기도 조심스럽지만 이 서약에 서명을 하고 일하다 어떤 불행이 닥쳤다고 가정해봅시다. 회사는 책임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질병이 있었더라도 업무와 관련하여 재발했거나 자연경과 이상의 속도로 악화되었다면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어요. 만약 사업주의 고의 또는 과실이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사망에 이르렀다면 그에 상응하는 형사 책임이나 민사 책임 즉, 손해배상 책임도 생길 수 있습니다. 서약서가 사업주한테 만사형통의 부적이 아니라는 거지요.
6.
노동조합을 좋아하는 사업주를 찾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직원을 채용하는 조건으로 노조에 가입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지요. 범죄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노동조합에 가입할 권리는 「대한민국 헌법」이 ‘단결권’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33조
①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ㆍ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②~③ (생략)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현실’이라는 대지 위에서 꽃피우려면 법률을 제정해 구체적인 보호 규정을 마련해야 해요. 그래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일체의 행위를 ‘부당노동행위’라고 규정하여 금지하고 있어요.
하지만 헌법과 법률이 보장한다 해서 노동자들이 언제나 어디서나 자유롭게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가입했다는 이유로 일터에서 핍박받고 또 쫓겨나고 있습니다.
요양보호사가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일이 몇 년 동안 부쩍 늘었어요. 그러자 한 요양시설에서 요양보호사들에게 서약서를 나눠주며 답변 내용을 적고 서명하라 했어요.
“현재 노조(한국노총, 민주노총 등)에 가입하였거나 앞으로 가입할 계획이 있습니까?( )” “위 사실에 대하여 위반한 사실이 있는 경우 그 사실을 안 즉시 퇴사 처리함을 동의하고 인지하였습니까?( )”
어느 택시 회사가 같은 지역에 있는 다른 택시 회사를 인수했어요. 고용불안을 느낀 택시 기사 대다수가 산업별노조인 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에 가입했어요. 며칠 지나 인수한 회사의 책임자가 나타났어요. 3개월짜리‘시용각서’를 내밀며 여기에 사인한 사람만 채용하겠다고 합니다. 그 ‘시용각서’의 내용입니다.
“시용기간(수습기간) 중에는 어떠한 단체도 가입하지 않는다.(단, 회사 승인 시 예외)”
회사는 그 각서에 서명하고 노동조합을 탈퇴한 사람만 일을 주고 서명을 거부한 조합원들은 고용승계에서 배제했어요. 즉, 해고한 겁니다. 노동관계기관들(고용노동부, 노동위원회)이 회사의 고용승계 배제 조치가 부당한 해고에 해당하고 노조 탄압행위인 부당노동행위라고 판정하자 이 회사는 아예 폐업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 또 다른 택시 회사를 차렸지요.
7.
읽는 내 낯이 뜨겁고 창피했던 서약서를 소개합니다. 중국요리점에서 중국인 요리사를 채용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근로계약서는 같은 내용으로 한글과 한자를 병기합니다. 한 중국요리점에서 근로계약서에 첨부한, 역시 한글과 한자를 병기한 서약서의 내용입니다.
"▶나는 계약서에 명시된 근무조건에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 ▶나는 다른 식당에 있는 중국인들과 비교해서 월급을 올려달라고 하지 않는다. ▶나는 한국에서 요구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한다. 설거지, 청소, 양파 까기 등등. ▶회사 사장님께서 보너스를 주거나 그 이외에 잘 해주시는 부분에 대해서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바쁠 때 조금 늦게 퇴근하거나 일이 많아도 묵묵히 열심히 일한다. 다른 날 분명 보상받게 될 것이다. ▶불법 체류자와 연락하지 않겠다. ▶문제가 있을 때 먼저 사장님과 의논한다. 절대 중국으로 먼저 전화하지 않는다. ▶1년에 한 번 중국으로 휴가 가는 것은 회사 사정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절대 다른 식당과 비교하지 않는다. ▶월급은 한국인들도 1년에 한번 올라간다. 절대 자주 올려달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받은 월급은 중국에서는 벌 수 없는 돈이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8.
근로계약이란 것도 실상은 사업주의 일방적인 의사가 반영된 것이긴 하지요. 하지만 적어도 근로계약은 법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요. 그래선지 근로계약서의 형식은 각 회사마다 대동소이합니다.
반면 ‘서약의 풍경’은 오로지 사업주의 힘이 지배하는 ‘날것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서 법의 감시와 통제라는 건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서약서’를 쓰고 나면 그것이 불법인지 합법인지는 먼 훗날의 이야기이고 서명을 한 노동자가 심리적인 압박부터 받아요. 서약을 위반하면 마치 큰일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말이지요.
즉, 근로계약의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서약의 가장 큰 문제는 사업주가 노동자의 내면까지 복종시키려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모든 서약서가 다 그런 것은 아니라도 말에요.
서약서를 많이 쓰는 사업장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어요.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노동자들은 개별화되어 있지요. 노동조합의 사각지대는 당연하게도 중소영세사업장, 인력파견업체 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주노동자, 아르바이트 학생을 고용한 사업장도 있군요.
이들 사업장에선 힘의 크기가 사업주 쪽으로 현저하게 쏠려 있습니다. 그래서 사업주가 주도하는 ‘뒷골목’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