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삿날이 되면 남편은 제주가 되어 아들에게 제사에 대하여 가르친다. 아들은 조상
을 받드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잘 따른다. 그러나 제사상에 놓아야
할 음식이나 놓아서는 안 되는 음식을 구분하고 놓는 자리와 놓는 방향까지 가르치
려 하면 고리타분하다며 건성으로 듣는다. 그래도 제사를 지낼 때마다 반복하여 가르
친 보람이 있어 이제는 제사에 대한 기본상식과 원칙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날 모임에서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느 신세대 아들은 제사상에 고
기 산적 대신에 LA갈비를, 약과 대신에 초콜릿을, 빈대떡 대신에 피자를 놓고 ‘아버
지 사망 1년 주년 기념식’이라고 써 붙였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모두 박장대소했다.
한참동안 웃고 나서는 남의 집안일 같지 않다며 걱정도 했다. 또한, 제사는 형식이 너무
엄격하고 복잡하여 제대로 지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뜻도 알 수 없어서 어려움이 많다고
한탄도 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제사에 대한생각도 변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나도 제사는 쉽고 편한 마음으로 지내고 싶다. 돌아가신 분이 평소에 즐겨 드시던
음식으로 소박하지만 정성이 깃든 상차림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조
상 대대로 이어져 온 제사를 쉽게 바꾸지는 못하고 있다. 과일을 제사상에 올릴 때
만 해도 그렇다. 싱싱한 제철 과일을 제쳐놓고 ‘홍동백서’나 ‘조율이시‘라 하여 정해
진 과일을 순서대로 놓으려고 말리거나 냉장한 과일도 놓곤 한다.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나의 아들은 유독 할머니 제사를 기다린다. 할머
니 제삿날이 다가오면 나에게 할머니가 좋아하신 음식을 맛있게 많이 차리라고 부탁
한다. 지난번 시어머니 제사 준비는 아들이 함께 하자고 자청하고 나섰다. 우선 백화
점 슈퍼에 가서 제수를 사기로 했다. 나는 실하고 보기 좋은 것으로 고르고 있는데
옆에서 보고만 있던 아들이 어디론가 가더니 덩치 큰 바나나 한 다발을 가슴 가득 안
고 왔다. 나는 바나나는 제사상에 놓지 않는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아들은 아무렇
지도 않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할머니가 바나나를 무척 좋아하셨잖아요.”
나는 제사상에 놓는 과일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아들에게 더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들은 할머니가 좋아하신 과일을 찾았다는 듯이 기뻐하며 바나나를 쇼핑카
트에도 넣지 않고 애지중지 가슴에 안고 가서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날따라 다 큰
아들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대견스러웠다.
어머니 제삿날이 되자 딸과 나는 음식을 만들고 남편은 밤을 쳤다. 아들은 약간 들
뜬 기분으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나도 시어머니 생전에 좋아하신 고기와
나물을 제대로 해드리지 못하고 제삿날이 되어서야 해 드리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아들은 할머니에 대한 추억담이 이어지고 나도 대꾸를 하다 보면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손자를 두신 시어머니가 부럽기도 했다.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옮기는 일은 아들 나섰다. 맨 먼저 바나나를 제사상 한가운데
에 놓고 나서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하며 제사 음식을 척척 옮겨 놓는다.
장손인 아들이 신이 나서 분주하게 움직이니 모두 덩달아 즐거워했다. 빨간 사과 옆
에 놓인 노란 바나나가 엄숙하기만 했던 제사 분위기를 일시에 밝게 바꾸어 놓았다.
'남의 제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한다.’는 속담처럼 지난번 모임에서 나눈 제사
이야기가 생각나 애써 웃음을 참아 가며 제사를 지냈다. 하기야 지금 우리가 지내는
제사도 고향에 계신 고지식한 어른들이 알게 된다면 무어라 하실 것인가 생각하니 마
음은 조금 편치 않았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고 음복을 하면서 아들과 바나나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
다. 서울에 있는 형제들은 아들의 생각을 오히려 참신하게 받아들이며 할머니를 그리
워하는 마음이 바나나로 전해지는 것 같아 감동하였다고 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한자
리에 모임 형제들은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나는 제사를 지낼 때마다 변화를 원하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
들은 이 문제를 유연하게 행동으로 옮겨 내심 고맙기까지 했다. 제사는 죽은 조상을
섬기고 추모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서야 산 사람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댓글 한 편의 좋은 수필을 얻으셨습니다.
팥고물처럼 중간중간 글자에 색깔을 입힌 것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
'팥고물'은 '한국어 맞춤법 검사기 V 5.5'에서
검사를 받었더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모두 검정색으로 하려면 어찌햐야 되는지요.
@이정희 내용을 모두 한글로 옮겨 팥고물을 죄다 흑임자 고물로 입혀 다시 옮겨 놓았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생각이 유연하게 바뀌면 좋겠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날로, 식구들 모여 좋아하시던 음식 나누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아요.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제사는
가족이 모여 형식보다는 내용에 의견을 모아야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