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과학 비판적 수용 최한기가 쓴 '기학' 세계
■ 운화측험
혜강 최한기(1803~1877)는 조선 후기 과학에 대한 이해와 동서양을 아우르는 사고로 독보적인 인물이다. 평생 벼슬하지 않고 글을 읽으면서 저술에만 전념한 철학자인 그는 성리학에 매몰된 조선의 학문 체계에 과학이라는 실증적 학문으로 새 기운을 불어 넣으려 애썼다. 2권 1책의 필사본으로 된 <운화측험>(1860)은 이 같은 그의 자연철학적 사상의 근거가 녹아 있는 책이다. 그가 앞서 지은 <기학> <지구전요> <우주책> 등과 궤를 같이 한다. 19세기 한국 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종란씨가 옮긴 우리말 번역본이 처음 나왔다.

↑ 최한기는 서양 근대 과학을 수용한 대표적인 조선 후기 실학자로 꼽힌다. 그의 저작 <지구전요>에 수록된 지구도. 한길사 제공
19세기 중엽 조선은 세도정치와 삼정 문란으로 정치 혼돈과 민생 도탄에 빠진 시기다. 사상계는 조선 건국이념의 바탕이자 공식 학문으로서 주자성리학 일변도의 획일성을 띠었다. 최한기의 기학(氣學)은 이때 나왔다. 그는 주자성리학과 당시 탄압받던 기독교를 동시에 비판ㆍ극복하고 동서양을 아우르는 새로운 학문을 세우려 했다. 기학의 핵심은 만물의 근원적 존재이자 인간과 만물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이 기운인 운화기(運化氣)의 활동운화(活動運化)다. 활동운화란 살아 있는 기가 항상 움직이고 두루 돌아 크게 변화하는 것이다.
최한기는 이런 기학을 통해 민생의 실용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논리는 주자성리학 극복과 더불어 서양과학과 사상의 비판적 수용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그는 기독교를 서양의 주류 교학으로 보았다. 따라서 두 교학, 주자성리학과 기독교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 운화기이며 이 운화기를 측정하고 증험하는 내용으로 돼 있는 게 바로 이 책이다.
<운화측험>은 최한기 전공자인 역자의 해제와 1, 2권 번역의 세 부분으로 크게 나뉜다. 역자는 특히 해제를 통해 지구과학과 관계되는 2권의 의미를 강조한다. 중국 명나라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알폰소 바뇨니(1566-1640) 신부의 <공제격치>(1633)를 그대로 답습한 책이라는 일부의 지적이 일면적인 편견에 불과하다는 게 역자의 설명이다.
알폰소 바뇨니 신부가 한문으로 쓴 <공제격치>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각종 자연현상과 지구 주위 행성과 별의 운동의 원인을 불, 공기, 물, 흙 등 4원소와 신학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하지만 최한기의 <운화측험>은 4원소적인 자연 이해를 배제하고 자신의 기학적 세계관으로 재구성해 일원화한 주체적 학문 역량이 돋보이는 책이라는 것이다.
성리학과 기독교 동시에 비판한 ‘기학’
문명의 교차로에 놓였던 조선 후기 많은 학자 가운데서도 혜강 최한기(1803~1877)는 특히나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다. 집안이 부유한 편이었던 그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 매달려 많은 저술을 남겼다. 특히 명·청대 중국에서 나온 서학 서적을 깊이 탐독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당시 지배적 사상이었던 주자성리학과 서양 기독교를 동시에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독자적인 학문의 몸부림을 쳤다.
19세기 한국 철학을 파헤치고 당시 전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해온 이종란 박사가 혜강의 저작 <운화측험>을 우리말로 옮겨 펴냈다. 그는 혜강에 대해 “학문의 혁명가를 자임하여 주자성리학과 서양 기독교를 동시에 비판·극복하고 동서를 아우르는 새 학문을 세우려고 했다”고 평가한다. <운화측험>에 앞서 옮긴이는 이탈리아 선교사 알폰소 바뇨니가 쓴 <공제격치>를 먼저 번역했다. <공제격치>는 4원소설, 지구구형설 등 서양의 과학 지식을 한문으로 풀어쓴 책으로, 동양 학자들에게 영향을 줬다. 일각에서 혜강의 <운화측험>이 <공제격치>를 베끼고 답습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두 책을 모두 공부한 옮긴이는 “혜강이 <공제격치>의 틀을 유지하고 참고한 부분이 많지만, 두 책의 우주관 또는 자연관은 완전히 다르다”고 말한다. 두권으로 된 <운화측험> 가운데 1권은 <공제격치>의 내용을 삭제하고 그 목차의 논리에 대응해 혜강이 획득한 새로운 과학 지식과 자신의 이론을 채워넣었고, 2권은 <공제격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과학 관련 내용을 취사선택하여 약간의 수정을 가해 옮겼다고 한다. 곧 <공제격치>에서 주자성리학을 극복할 재료를 찾긴 했지만, 서양의 중세적 과학이론과 기독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는 것이다. 옮긴이는 혜강의 이런 태도가 보편적인 학문을 스스로 세우려는 노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본다. 혜강은 자신의 학문을 ‘기학’이라 불렀는데, 이는 나중에 <기학>이란 책에 집약된다. 혜강은 ‘유형지신’, ‘유형지리’를 기학의 핵심으로 내세웠다. 이는 기독교를 ‘무형지신’이라 비판하고 주자성리학을 ‘무형지리’라고 비판한 것과 대응된다. 검증할 수 없는 기독교의 ‘신’과 존재의 기반이 없는 주자성리학의 ‘이’를 가지고는 존재의 근거에 대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탐구를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대신 그는 온 세계가 ‘측험’(헤아려 검증)할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인 ‘운화기’로 이뤄졌다고 봤고, 운화기가 움직이는 실질적인 자연법칙을 발견해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철학의 고갱이로 삼고자 했다. 이런 혜강의 시도 속에서 옮긴이는 “인간은 자신 속에 내재한 운화기의 메시지를 자각함으로써 타인과, 더 나아가 세계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