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다빈치 코드>와 전인형 인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르네상스 시대
<모나리자>는 1503~1506년에 제작되어 1519년 다빈치가 그의 죽음과 함께 미완성인 채로 남긴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부유한 상인 조콘드의 부인의 초상화임을 먼저 밝힌다.
'모나'는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이고 '리자'는 그녀의 이름이다. 결국 모나리자는 리자부인이라는 뜻이고, 이미 작품 속 주인공이 여자라는 것을 그 제목에서부터 시원히 드러내놓고 있다. 따라서 '모나리자는 여인이 아니다'라는 <다빈치 코드>속 이야기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임이 명백히 드러나는, 댄 브라운의 허구인 것이다!
025.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성애로 인해 모나리자의 미소에는 강한 동성애가 나타난다는 설들이 난무하다.
027. 댄 브라운이 그런 요한(사도 요한은 12명의 제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미소년이었다)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 것 또한 레오나르도의 동성애 사실 때문일 것이다.
2.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세계 최초의 자유미술경제시장
049.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중세 기독교를 위한 미술이나 르네상스의 상류층만을 위한 예술이 아닌 평범한 이들의 일상에서, 꾸밈없는 삶의 위대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끌어내려 함으로써 17세기 이후 듬직한 교훈을 준 것이다.
050. 17세기 돈이 넘쳐나던 네덜란드의 부유함으로 보통의 사람도 그림을 가질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자유미술경제시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태리,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이 아닌 네덜란드에서 최초의 미술경제시장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일까?
053. 유럽 다른 나라 화가들이 궁정, 귀족, 교회의 수요에 거의 90%이상 의존하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네덜란드 화가들은 81%이상을 중간계급 즉 시민의 수요에 의존했다. 이렇게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중간계급 구성원으로 미술 수요자가 확대되면서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근대 미술시장이 형성되었다. 미술 수요자가 중간계급으로 구성되면서 미술가들은 더 이상 수요자보다 낮은 신분이 아니었다. 상호 대등한 관계였다.
3. 영화 <카미유 클로델>과 불운의 연인 카미유가 흠모한 로댕의 조각 사랑
063. 로댕이 얻어낸 '예술을 위한 예술의 기법'을 19살 어린 카미유 클로델은 그녀의 작품에서 이미 표현하고 있었다. 로댕은 클로델이 배우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고 표현할 줄 아는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임을 첫 만남에서 단번에 알아 보았다. 로댕이 갖지 않은 재주를 갖고도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064. 카미유와 로댕이 처음 만났을 때 카미유는 19살의 생일이 되기 전이었고 로댕은 43살이었다.
067. 카미유 클로델은 작품을 통해 남성 위주의 전통적인 사회에서 여성인 자신을 역사화시킴으로써 영원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시대의 여성의식을 보여준 것이다.
069. 힘겹게 얻은 조각가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 로댕에게는 무엇보다도 예술, 즉 작품 활동이 우선 순위였다.
071. 로댕의 <칼레의 시민>은 용어 'Noblesse Oblige'의 탄생 어원이 된 칼레의 시민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로댕의 유명한 작품이다. 1884년 칼레 시가 1347년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 의해 포위된 되시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한, 인류애와 신앙심이 돈독한 칼레 시민을 기념하기 위해 로댕에게 제작 의뢰한 것이다. 프랑스 해안 도시 칼레는 영국군의 좋은 공격 대상지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초기에 칼레의 사람들은 기근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1여년 간 영국군에게 대항했다. 그러나 결국 에드워드 3세에 의해 항복한다. 칼레인들의 오랫동안 지속된 저항에 노하여 칼레 시민들을 전원 몰살하려고 했으나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해 6명만 처형하기로 했다. 그때 상류층 한 사람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죽음을 자처하고 나서게 된다.
칼레에서 제일 부자인 '외스티슈 드 생 피에르'가 선뜻 나서자 시장인 '장 데르'가 나섰고, 이어 부자상인인 '피에르 드 위쌍'이 나섰다. 게다가 '드 위쌍'의 아들마저 아버지의 위대한 정신을 따르겠다며 나서는 바람에 이에 감격한 시민 3명이 또 나타나 필요한 인원보다 한 명이 더 많은 7명이 되었다.
'외스티슈'는 제비를 뽑으면 인간이 이상 행운을 바라기 때문에 내일 아침 처형장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자고 제의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6명이 처형장에 모였을 때 '외스티슈'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시민들이 그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 '외스티슈'는 이미 자살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처형을 자원한 7명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살아 남으면 순교자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자신이 먼저 죽음을 택한 것이다.
6명의 가장 명망이 높은 시민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기로 하고, 왕이 말한 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셔츠 바람에 맨발로 걸어 나왔다.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 6명은 그러나 극적으로 살아난다. 당시 잉글랜드 왕비였던 에노의 필리파가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 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왕을 설득한 것이다. 결국 이들 상류층 시민 6명의 희생을 감수하려는 용기는 자신과 모든 칼레 시민들의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러나 2002년 역사학자 장 마리 뫠글랑은 이 이야기의 실제 의미가 왜곡 과장되었다고 발표했다. 민족주의 시대인 19세기 역사학 교과서들이 칼레의 시민을 외세에 저항하며 동료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 애국적인 영웅으로 크게 부각시켰고, 문학과 예술이 그것을 뒷받침했다는 것이다.
4. 영화 <누드모델>과 마네의 누드 스캔들
082. <비너스의 탄생>은 그 아름다움만으로도 유명세를 떨칠 만 하지만 중세를 벗어나 '인간성 자각'이라는 관점에서 새로이 누드를 꺼내 든 보티첼리의 용기가 한몫하기 때문이다.
보티첼리는 오랜 기독교 지배 하에서 신의 권위에 눌려 있던 인간들이 자아에 눈 뜨고 내면적 본성을 인식하던 때에 이 새로운 누드를 창조해 낸 것이다.
5. 영화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와 만인의 연인 인상주의
101. 인상주의는 그 이전의 그림들이 요구하는 틀에 박힌 형태를 벗어나 대상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 작가의 주관적 경험을 매우 중요시했다. 대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색조를 위해서 대상을 그리는 것이 인상주의자들을 다른 화가들과 구별짓는 커다란 특징이다.
7. 영화 <타이타닉>과 스티브 잡스가 반한 피카소
130. 휴학 중 어느 날 잡스는 리트칼리지 캠퍼스를 거닐다가 화려한 서체로 가득한 포스터 한 장을 발견했다. 캘리그라피 미술 강의를 알리는 포스터였다. 잡스는 즉시 그 미술 강좌를 신청했다. 그가 매킨토시 개발에 이용해 컴퓨터 역사를 만든 캘리그라피 미술은 이제는 미술작품을 넘어서 특히 현대 디자인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최근의 진로 '처음처럼',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의 '한글 패션', '갤럭시 노트' 등이 그 예이다. 차가운 디지털 시대의 디자인에서 글자에 따뜻한 감성을 입힌 아날로그적 손 글씨, 캘리그라피가 각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