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박채순의 세상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중계동 신사
아르헨티나 마끄리(Macri)시대를 준비하자 (기뻐하는 마끄리 당선자, 사진 출처: 라 라시온)
아르헨티나의 새 대통령에 야당 연합의 마우리시오 마끄리(Mauricio Macri)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이 당선되었다. 11월 22일 결선 투표 후 최종 마감 결과 야당 연합의 “바꾸자”의 마끄리 후보가 51.40%(12.903.301표)의 지지를 받아, 48.60%(12.198.441)를 얻는 데 그친 집권 여당 페론당 후보 다니엘 시올리(Daniel Scioli)를 제치고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키르츠네르를 이을 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마끄리 후보는 11월 22일 전국에서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진행된 투표 마감 후에, 발표된 출구조사에서 당선을 예고한 바와 같이 줄곧 선두를 유지하여 밤 10시경에 당선을 확정했다. 이에 앞서 9시 조금 지나 66%의 개표를 진행 중인 시점에서, 시올리 후보가 53%를 획득한 마끄리 후보에게 46%의 지지를 받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깨끗하게 승복했다. 시올리는 마끄리의 당선을 축하하고 그의 앞날에 신의 가호 있기를 빈다고 말했다. 이로써 마끄리 후보는 12월 10일 취임하여 4년 동안 아르헨티나호를 이끌 새로운 선장이 된 것이다. 이번 마끄리 후보의 승리는 12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해 온 페론당의 키르츠네르 부부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하겠다. 1983년 민주주의 복원 이후 라디깔 당과 페론 당이 아닌 정당에서 정권을 잡은 것도 처음으로 기록될 것이다.
1. 키르츠네르 시대가 막을 내리다 이번 11월 22일 결선 투표는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하는 결선투표(Balotage)였다. 다니엘 시올리(Daniel Sciloi)와 마우리시오 마끄리(Mauricio Macri)후보가 11월 15일에 실시했던 대선 후보간 토론(Argentina Debate)도 역사상 최초라는 것이다. 결선 투표에 앞서서 19일에 마지막 유세를 한 후, 2일 동안의 휴식 기간을 갖은후 22일에 전국에서 순조롭게 투표를 마쳤다. 19일 시올리 후보는 부에노스나이레스주 마탄사(Matanza)구에서 있었던 마지막 유세를 통해서 “우리 페론주의 자들은 악마와 결탁한 야만적인 자본주의 마끄리 후보에 맞서자”라고 외치고 “페론이 우리에게 제시한 조국이 첫째라는 길을 따라서, 우리가 이제까지 이룬 업적에 대해 당당하게 방어하고, 내일을 준비하자”고 역설했다. 한편 마우리시오 마끄리 후보는 아르헨티나 원주민이 거주했던 북쪽 지방 후후이(JuJuy)주의 꿰브라다 우마우아까(la quebrada de Humahuaca)에서 마지막 선거 유세를 마치면서 “우리 조국의 영웅들은 일부의 작은 그룹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영웅이다”고 전제하고, “나아 갑시다, 아르헨티나, 우리 아르헨티나를 위해 함께 바꿉시다”라고 호소했다.
10월 25일 본 선거 이후 결선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본선에서 2위를 한 마끄리 후보가 1위를 한 시올리 후보를 각종 여론 조사에서 제치고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다니엘 시올리는 지난 11월 15일 토론회를 통해서 강렬한 K.O펀지를 구사하여 승기를 잡고자 했으나, 토론회 후에 유권자에게 지지의사를 묻는 여론 조사에서도 마끄리에 뒤진 것으로 나타났다.이로써 이변이 없는 한 마끄리 후보가 크리스티나 키르츠네의 후임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매우 커졌었다. 아르헨티나에는 최근에까지도 몇 가지 신화(Mito)같은 것이 전해져 왔다. “페론당은 권력의 화신으로 어떤 경우에도 큰 선거 앞에서는 힘을 모아 선거에 승리한다”는 미신 같은 정서와 더욱이 “페론당 정부가 아니면 당선이 되어도 집권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라는 내용 등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20-30%의 8백여만명의 단단한 기본 지지 기반을 갖고 있는 키르츠네르를 상징한 “K”와 일반 페론당 조직이 힘을 합치면, 여당 페론당의 후보인 시올리가 무난하게 1차 투표에서 당선되거나, 차선으로 결선 투표에서는 반드시 이긴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대선 후보의 토론이 끝난 후 11월 16일자 끌라린(Clarin)지 여론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2.96%가 마끄리 후보를 지지하고,단지 37.04%만이 시올리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즉 그때까지 실시한 여러 여론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약 6-10%차이로 마끄리 후보가 페론당의 시올리 후보에 앞서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번 선거에서 아르헨티나 국민은 12년 동안의 긴 키르츠네르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는 것이며, 뿌리 박힌 페론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도 끝이 난다는 것이다. 결국 아르헨티나 국민이 민주주의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교체한다는 의미다.매스컴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선거 혁명”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 글에서 이번 대선의 이제까지의 경과, 현황 및 향후 전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대선 선거 과정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 제도는 처음 예비선거제도(PASO:Primarias Abiertas Simult?neas y Obligatorias)를 통해서 본선에 오를 후보를 뽑고, 이들 후보자들 중에서 본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을 선출한다. 본선에서 당선의 기준은 1위 후보가 곧 바로 45% 이상을 얻거나, 40% 이상을 득표하여 2위와 10% 이상의 차이를 얻은 후보자가 당선자로 결정된다. 그러나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1위와 2위 후보가 결선투표(Balotaje)을 치러 다수 표를 획득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한국의 선거 제도와 다르게 예선 전을 치르고, 결선에서 당선의 조건에 해당자가 나오지 않으면 결선 투표까지 가서, 전체 국민의 뜻을 물어 당선자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이 선거법에 의해 지난 8월 9일 실시되었던 대선 예비선거(PASO)결과 여섯 명의 후보가 결선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 그러나 여섯 명 중 특별히 세 명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이 가능한 것으로 인식 되었다. 예선에서 38.41%로 1위를 차지한 현 집권 페론당의 승리를 위한 전선(FPV: Frente para Victoria)의 다니엘 시올리(Daniel Scioli) 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그 중 가장 유력한 주자였다. 그 다음이 30.07%를 얻어 2위를 한 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이며, 본인이 창당하여 2005년부터 정치적인 기반이 되고 있는 중도보수 자유주의를 표방한 공화주의 제안당(PRO: Propuesta Republicana)을 중심으로 하여, 야당 세력인 라디깔당과 ARI가 연합하여 만든 바꾸자(Cambiemos)의 마끄리 (Mauricio Nacri)후보다. (좌로부터: 시올리, 마끄리와 마사) 국민의 선택 여하에 따라서 당선이 가능하거나 케스팅 보트를 쥘 세 번째 주자로 20.6%의 지지로 3위를 한 UNA(Unidos por una Nueva Alternativa)후보인 세르히오 마사(Sergio Massa)현 국회의원 등이었다. 위 세 후보 외에 8월 9일 예선을 통과한 후보로는 2001년에 임시 대통령을 역임한 바 있는 로드리게즈 사아(Adolfo Rodr?guez Sa?), 좌파 계열인 마르가리타 스톨비제르 (Margarita Stolbizer)와 니콜라스 델 까뇨(Nicol?s del Ca?o)등 세 후보도 본선 행 티켓을 가졌으나, 지지가 미약하여 선거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결국 이들이 지난 10월 25일 실시한 본선거에서 시올리 후보가37.08%, 마끄리 후보가 34.15% 그리고 마사 후보가 21.39%를 각각 획득하여 누구도 본선에서 충족해야 할 45% 나 2위와의10%차이를 둔 40% 이상을 얻지 못하였다. 결국 1위를 한 여당의 다니엘 시올리와 2위를 한 야당연합의 바꾸자(Cambiemos)의 마우리시오 마끄리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실시될 11월 22일의 결선투표(Balotaje)에서 당선자를 가려서 12월10일에 새 정부가 출범하게 되는 것이다.
(시올리의 마지막 선거 운동: 사진 라 나시온) 처음 본 선거가 실시되었을 때는 집권 여당의 시올리 후보의 승리를 점쳤으나, 예비선거에서 보다 적은 표를 얻었고, 마끄리 후보와 마사 후보가 예선 전 보다 많은 득표를 하여, 최종 선거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다. 비록 3위에 그쳐서 최후 결선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마사가 얻은21.39%의 5백 3십만 표가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서 당선자가 결정되는 상황이 되었다. 선거 이틀 후에 마사 후보가 “시올리 후보는 당선이 되면 안된다”는 뉘앙스의 표현을 하여 예선과 본선에서 2위를 두고 심하게 경쟁하여 앙금을 가졌던 마끄리 후보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마사 후보는 페론당적 보유자로서 크리스티나를 반대하여 독립한 정치인임으로 결선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시올리와 마끄리 후보가 각각 마사와 마사 지지자들의 표를 끌기 위해 각 후보마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본선 이후에 각종 여론 조사에서 대부분이 본선에서 2위를 한 마끄리 후보가 50%대로 1위를 하고, 시올리 후보는 40%대로 뒤쳐져, 마끄리가 시올리를 추월하여 선거운동 기간 내내 1위를 달렸었다.
(마끄리의 마지막 선거운동: 사진 라 나시온) 이 과정에서 지난 15일 밤 9시부터 아르헨티나 토론(Argentina Debate)회에서 시올리와 마끄리가 열띤 토론을 펼쳤으나, 결정적인 한방을 노려 전세를 뒤집고자 했던 시올리가 오히려 차분하고 강력한 공격력을 구사한 마끄리 후보에게서 우위를 빼앗지 못했다는 대체적인 평가다. 3. 페론당 신화의 공방 이번 선거에서 여당인 페론당은 패론당 지지자들을 규합하기 위해 공포(Miedo)정책을 구사했다. 즉 은연 중에 페론당이 아니면 집권이 불가능하고 집권하더라도 정권 유지가 어렵다거나, 마끄리가 집권하며 나라를 팔아 먹고 가난한 국민에게 지급하는 정부 보조금 등이 다 없어진다는 등 페론당의 포퓰리즘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페론당 후보가 당선되어야 된다는 논리다. 아르헨티나 최 근세사에서 후안 도밍고 페론은 1946-1952년과1952-1955년 두 번에 걸쳐서 대통령 직을 수행했고, 1973년10월부터 그가 사망할 때까지인 1974년 7월 1일까지 세 번째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페론이 사망하자 1974년 7월 1일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에 올라1976년 3월 24일 군사 구테타에 의해 물러난 마리아 에스텔라 마르띠네스 페론(Mar?a Estela Mart?nez de Per?n)대통령이 후안 도밍고 페론의 부인이다. 또한 아르헨티나 민중들에 의해 성녀로 추앙 받는 마리아 에바 두아르떼 페론(Mar?a Eva Duarte de Per?n)은 페론의 영부인으로서 젊은 나이로 요절하여, 그녀가 서민에게 베풀었던 자선과 배려 등이 한데 모여 페론의 신화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사벨 페론(Isabel Per?n)대통령을 군인들이 권좌에서 내 쫓고1983년 알폰신 민주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7년 동안 이른바 “더러운 전쟁”으로 명명되는 혹독한 군사정권이 아르헨티나에 유지되었다. 그러나 1983년 선거에서 국민들이 라디깔 당(Uni?n C?vica Radical)의 라울 알폰신(Raul Alfonsin)을 대통령으로 당선 시켜 민주주의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1983년 12월 10일 대통령에 취임한 알폰신이 천정 부지의 인플레이션과 13번 걸친 노조의 총 파업과 국민들의 슈퍼마켓에 대한 약탈 등으로 자리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임기 5개월을 남겨 두고 1989년 대통령에 당선된 까를로스 메넴(Carlos Menem)에게 정권을 조기에 떠 맡기고 퇴임한다. 알폰신 뒤 메넴의 2기 집권 후에, 국민은 역시 라디깔 당 출신으로 다른 야당과 연합(Alianza)를 이룬 델라 루아(De la R?a)부에노스 시장을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1999년 12월 10일 취임한 델라루아는 메넴이 다 탕진한 텅 빈 국고를 떠 안고 국정을 통제하지 못하여 사회 혼란이 가중되자 임기 반을 겨우 채우고 2001년 12월 21일 대통령 궁에서 헬기를 타고 도망한다. 여기에서 페론당이 아닌 정당의 집권은 임기를 다 채울 수 없다는 또 다른 신화 같은 미신이 나타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믿지 못할 미신은 페론당이 생기기도 전에 출발한 라디깔 당의 이폴리또 이리고젠(1916-1922)과 마르셀로 알베아르 대통령(1922-1928)이 각각의 임기 6년를 잘 마친 역사가 존재하여, 알폰신과 델라 루아의 예를 들어 타 당의 집권을 두려워하게 작용한 경우는 다분히 페론 정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측의 심리전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물론 이 경우에는 모든 국민이 참여했던 것은 아니고 대의원 같이 선출된 자들에 의한 투표여서 현재의 보통 선거와는 좀 결을 다르게 한다.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 페론당이 아니면 정권유지가 어렵다면서,알폰신과 델라 루아의 혼란한 시절인 “과거로 돌아 갈 것인가” 아니면 이 상태를 유지할 것인가가 집권여당의 구호가 지지자들의 마음을 사라잡기도 한 것이다.. 이를 가지고 국민에게 공포와 불안(Miedo)을 주는 선거전을 전개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반면 마끄리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가장 설득력을 주었던 “계속되기를 원하는 가(이 어려움을)아니면 “바꾸자(Cambiemos)”로 표심을 파고 들었다. 4. 키르츠네르 퇴장과 페론주의 쇠퇴의 의미 이번 선거에서 시올리 후보의 대선 가도가 평탄하지 않았다. 알폰신 대통령의 민주 정부 수립 이후에 두 번의 라디깔 당의 실패와 비교되는 페론당 정부의 메넴, 두알데에 이어서 키르츠네르와 크리스티나 정부 등 페론당 정부가 주도를 하고 있다. 메넴 대통령과 크리스티나 대통령은 그들의 재임기간 중에 헌법 개정을 통해서 3선에 도전하고자 했지만, 헌법에서 정한 제한으로 포기하였다. 특히 크리스티나 현 대통령은 3선이 좌절 된 이후에도 후계자를 인정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권력을 붙잡고자 했다. (막을 내라는 키르츠네르 부부 시대: Clarin) 시올리 후보를 완전히 신임하지 않은 크리스티나는 비록 그를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밀어 준 이후에도 선거 과정에서 특별하게 지원하지 않고 자기 정치를 계속했었다. 심지어 크리스티나 측근인 에스텔라 데 까를로토(Estela B. de Carlotto) 5월의 광장 할머니회 회장은 “시올리는 크리스티나 대통령이 복귀할 때까지 임시 대통령 임무를 수행한다”고 말하는가 하면, 또 다른 측근 5월의 광장 어머니회 에베 보나피니(Hebe de Bonafini)회장은 “시올리 후보를 잘 못 선출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이처럼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시올리 후보는 페론당 내부의 친 크리스티나 지지 세력인 깜포라(Campora)와 “K”그룹의 냉대와 푸대접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나무에 올려놓고 흔들듯한 모습을 보인 친 크리스티나 진영에서는 시올리가 대통령 되는 것을 아예 막는 듯한 행동을 보인 적이 많다. 경제 장관 악셀 키시로프(Axel Kicillof)도 시올리 후보가 대외 채무자들에게 더 유화적인 제스쳐를 치면 즉각 반대하여 시올리의 독자적인 길을 걷지 못하도록 방해 하기도 했다. 시올리는 여당의 프레미엄을 갖기는 고사하고 우선 적진 앞에서 아군과의 소모적인 전투가 더 힘들고 어려웠던 선거로 보였다. 물론 매스컴에서는 독선적이고 권위적이며 부패한 징후가 많은 크리스티나가 선거운동을 한다고 나서면 시쳇말로 표 떨어진 소리가 들린다고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올리는 제대로 된 정책을 구상하거나 발표하기도 어려웠고, 최 측근들이 자기 독자적인 노선을 가지고 선거 운동을 하자고 하니, “이제까지 보다 는 더욱 시올리 스타일이 되겠다(Voy a ser m?s Scioli que nunca).” 라고 했지만, 결국 크리스티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선거운동을 했다. 그러니 측근들은 크리스티나 진영의 실체를 파악하고 때 늦은 후회를 한다는 보도다. 선거 후에 양쪽 진영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듯이, 시올리 후보측근에서는 좀 더 과감하게 자기 독자적인 길을 걸었으면 더 나은 결과가 있었지 않았을 가하는 점응 아쉬워한다.
반면에 마끄리는 2년 전만 하더라도 대선 후보의 여론조사에서 시올리와 마사에 이어 늘 3위를 차지하였다. 그는 이번 선거에 앞서서 아르헨티나 지방에 조직이 없어서 전국적인 선거에서 당선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를 제치고, 전국에 조직을 갖춘 라디깔당(대표Ernesto Sanz)과 2003, 2007년과 2011년 대선 후보로 출마하였고2007년 대선에서는 23,04 %의 득표로 440만표를 얻었던, 무시 못할 조직을 갖고 있는 시민연합 ARI(Coalici?n C?vica ARI)의 엘리사 까리오(Elisa Mar?a Avelina Carri?)등과 연합하여 이제는 바꾸어 보자는 국민들의 표를 한데 모았다. 키르츠네르와 연임에 성공한 크리스티나 부부가 12년 동안 페론당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8백만 빈곤층의 든든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정부에, 일반 국민들이 이 현상에 자각하고 포퓰리즘 정책을 외면하는 투표로써 반기를 들었다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야당 성향의 일반 지식인들은 페론당을 아주 싫어하고, 늘 하던 대로 반대 측에 표를 주지만, 야당은 기우러 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는 것처럼 힘이 부치고 세력이 부족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세르히오 마사(Segio Massa)의 제 3의 길에도 5백만명 이상이 투표를 하였고,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극빈 층 에서도 사탕 보다는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일부가 마끄리를 지원했다는 여론이다. 정부 여당과 일부 노조에서는 1989년과 2001년의 라디깔 당 집권시의 국가 사회적인 혼란에 대하여 은연중에 국민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암시하는 시올리 진영에 맞서 마끄리는 “두려움은 당신들이 절대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국민들의 희망과 기대에 넘쳐 있다”고 주장했다. 시올리의 이제까지 정치 인생은 메넴, 두알데, 키르츠네르와 키르스티나 등 페론당과 지도자들과 함께 양지에서 정치를 하면서 무난하게 성장해오고 대통령까지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키르츠네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식상함과 페론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가 차츰 줄어든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것 또한 아르헨티나 정치의 현주소이다. 마끄리 진영에서는 이제까지 국민 속에 자리잡고 있는 페론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를 커버할 수 있을 정도의 확실한 지지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는 해석이다. 결선 투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1983년 10월 30일 민주정부 회복을 위한 대선 투표에서 라디깔 당의 라울 알폰신(Ra?l Alfons?n) 후보가 페론당의 이탈로 루데르(?talo Luder) 후보에게 51.75%대40.16%로 승리했던 선거와 2011년 10월 23일 선거에서 재선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키르츠네르(Cristina Fern?ndez de Kirchner )가 사회당 계열의 에르난 비네르(Hermes Binner)후보를 상대로 승리한 54.11%대 16.81%의 선거가 50%이상을 획득한 것처럼, 마끄리 진영도 확실한 승리를 기대한다는 것이었다. 11월 22일 아르헨티나 대선은 시올리나 마끄리 중 누가 승리하든지 아르헨티나에서 권주의적인 키르츠네르 부부의 12년 장기 정권이 막을 내린다는 의미다. 여기에 국민의 손으로 페론주의에 대한 신화가 함께 깨질 것인가를 가름하는 중요한 선거가 되었다. 5. 마끄리의 당선과 향후 전망 선거에는 언제나 이변이 따르고 또한 페론당은 집권 욕이 매우 강한 집단이며, 평소에 분파가 있더라도 선거 때만 되면 힘을 합쳐서 승리한다는 의식을 패론당과 반대당에서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선거가 끝난 현재 국민은 페론당 지지자들과 노조의 반격에 다소 우려를 하지만, 마끄리의 당선으로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아르헨티나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 더욱 많아진 상황이다.. 마끄리 당선자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여러 가지 공약을 하였다. 그는 경제를 개방하여 성장을 통해 모든 국민이 배고프지 않게 하고(Pobreza cero), 한 사람이 아닌 조직을 통해서 대화로 정부를 운영하고, 마약을 근절하고 치안을 유지하며,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부정 부패를 없애고, 아르헨티나에 더 나은 민주주의를 발전 시키겠다는 등 일반적인 청사진을 선 보였다. 마끄리 당선자는 당선 후에도 시올리와 마사 그리고 페론당 주 지사들과 협력하여 이러한 우선적인 과제를 풀겠다고도 밝혔다. 그는 22일 밤 당선이 확정 된 후인 23일 아침 일찍 첫 기자회견을 예고하고, 시내 보까지역(Av. Don Pedro de Mendoza 501)의 예술 본부(Usina del Arte)에서 아침 9시부터 실시한 내. 외신 기자회견에서 그의 정부 청사진 일부를 밝혔다. (23일 기자 간담회를 갖는 당선자 마끄리)
기자회견장에는 수석장관 내정자인 마르꼬스 뻬냐(Marcos Pe?a)현 시장 비서실장,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지사 당선자인 마리아 에우헤니아 비달(Maria Eugenia Vidal) 그리고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장 당선자인 오라시오 로드리게스 라레따(Horacio Rodriguez Larreta) 등 중요한 측근 세명를 동행하고 당선자로서 계획을 차분하게 밝혔다. 그의 기조 발표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형식으로 2시간 여 동안 진행된 자리에서, 우선 자신를 믿고 지지해 준 국민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새로운 시대를 국민과 함께 열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여러 가지 발표 중에서 경제 장관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재정, 노동, 에너지, 생산, 농업과 운송 등 6명으로 대폭 늘여서 경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표시했다. 또한 정부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등 순조롭게 정권을 이양 받아 바로 국정과제를 수행하겠다고 했다. 크리스티나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과, 다음날(24일 오후 7시) 올리보스 관저에서 대통령이 초대한 당선자로서 대통령과의 여러 가지 문제를 숙의하겠다고 소개했다. 마끄리 대통령은 특히 경제 문제에 대해 아르헨티나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는 환율제도(Cepo)는 당장 12월 11일에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관심이 가는 이른바 부이트레 채권(fondos buitre)으로 불리는 홀드아웃(Holdouts)에 대해서는 전 정부와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의 주권과 권리를 손상하지 않은 범위에서 점차적으로 해결 할 것이라고 했다. 선거 운동 기간에 상대당에서 강조했던 쉽고 값싸게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방했다. 마끄리의 대 전제는 경제 문제를 풀기 위해 전문가들을 동원하고 장관을 늘려서 각 분야에서 문제점을 파악하여 인플레이션을 잡고, 자국 화폐를 강하게 하여 신뢰를 바탕으로 외부 자금을 유치하여 경제가 정상적으로 제대로 작동하여, 4년 동안 사실상 경제 성장이 중지된 이 현상을 풀겠다는 강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특히 한 사람의 독선에 의하지 않고, 기업 경영이나, 축구 구단 보까 구단주로서 활동 했던 것처럼, 국가 운용도 조직과 제도에 의해 대회와 타협으로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국가 운영을 강조했다. 특히 부정 부패에 대해서는 자기의 공직자들이 솔선수범하여 부정 부패를 완전히 근절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6. 이 글을 맺으면서 마끄리와 마끄리 진영에서 가장 강조하는 말은 “새 시대의 막이 올랐다(Nueva epoca)”라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페론주의에 의지해서 통치했던 키르츠네르의 12년이 지나고 마끄리의 새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마끄리 진영은 물론 시중의 많은 여론도 새 희망을 갖고 새 시대를 맞자는 데 동의한다. 예선을 거쳐서 본선과 결선에 이르는 동안 마끄리 후보는 예선에서 국민의 30.07%를얻은 후 본선에서 34.15%를 얻고, 결선에서51.40%의 지지를 해 주어 결국 국민은 선거를 진행해 가는 과정에서 마끄리 후보와 그의 정책에 과반이상이 지지를 해 준 것이다. 사진: 마끄리 후보 시절 마우리시오 마끄리(Mauricio Macri 와 필자) 이제 아르헨티나 정국은 아르헨티나 전통의 페론당이나 라디깔 당이 아니 제 3당의 PRO와 그의 연합 세력인 Cambiemos가 주도하여 정국을 끌고 갈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의 독재와 폭정에 식상한 국민이 “못 살겠다 갈아보자”를 외친 신익희 후보를 전적으로 밀었으나, 신익희 선생의 서거로 국민의 듯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60여년 전의 역사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는 말 없는 국민이 키르츠네르와 추종 세력인 K와 Campora그리 고 기존 페론당 세력이 합쳐서 지원한 시올리 후보를 외면하고 “바꾸자”를 외친 정치인으로서 더 참신한 마끄리 후보를 지지한 것이다. 정치인에게는 양면이 있고, 자기가 처한 입장이나 환경에 따라서 지지하는 정치인과 반대하는 정치인이 있겠지만, 사실 키르츠네르와 크리스티나 부부시대의 아르헨티나 정치는 상당한 문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포퓰리즘, 대외와의 고립주의, 독선과 권위주의 그리고 본인 가족을 포함한 관료들의 부정 부패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 반면에 마끄리 당선자는 우선 경제 문제를 풀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하고, 법과 제도에 의한 대화와 타협으로 국가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물론 모든 정치인이 처음에 공약하거나 준비했던 실제적으로 운용할 때는 완전히 무시해 버리거나 반대로 진행하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당선자 마끄리는 한국을 잘 알고, 보까 구단주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으로서도 한국을 방문한 바 있고, 박원순 서울 시장과도 대화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시장 재직 시에 한국인에 대한 관심을 많이 표방하였으며, 부통령으로 당선된 가브리엘라 미체티(Gabriela Michetti)는 한인들의 관심이 많은 노점상의 문제도 심각하게 생각하게 생각했던 적도 있다. 선거운동 기간 몇 차례 조우도 하고 한국과 아르헨티나 한인 문제도 대화의 상대로 삼아 보았던 필자도 마끄리 후보의 진정 성과 능력을 믿어보고 싶다. 이는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새 시대를 외치는 마끄리 호와의 관계를 한국 정부는 물론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적극적으로 준비하여,한국과 아르헨티나 그리고 아르헨티나 현지인과 현지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상호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사진: 마끄리 당선자가 수석 장관에 내정한 마르꼬스 페냐(Marcos Pe?a)와 필자 |
|
출처: 박채순의 세상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중계동 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