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회의 십이(12)신조 채택에 대한 고찰 2.
신원균 교수(분당한마음개혁교회, 웨스트민스터 신학회 회장,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조직신학)
2. 12신조 채택의 의의와 배경
독노회를 위한 신경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1905년의 공의회에서 이 신경 채용을 결의할 때 행한 위원 보고는 새로운 신경을 작성하지 않고 전통적인 신경과 선교 각 지방에서 쓰고 있는 신경을 비교해 보고 그 중에서 조선교회의 형편에 맞는 것을 택해서 채용하려 했다고 하며 그래서 우리처럼 바로 그 얼마 전에 새로이 조직한 선교지 교회인 인도자유장로교회가 채용한 신경을 택했다고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신경이 이 두 나라뿐만이 아니라 아시아 모든 선교지 교회들의 신경이 되어 이것을 통해 각 교회들이 연결케 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끝맺고 있다.13) 그리고 곽안련은 이 신경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해 주고 있다.
조선교회를 설립한 본교회의 가르친 바 취지와 표준을 버림이 아니요 찬성함 이니라.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성경요리문답 대소책자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인 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의당히 교수할 것으로 알며
이 부분을 두고 그는 이 신경 채택이 고대 장로회 모든 신경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히 증거하는 것이요, 미국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경을 페지한 것이 아니라 그 신경과 기타 유명한 일곱 신경을 참고 건으로 둔다고 확대 해석하고 있다.14) 그리고 그 당시(이 글은 1919년에 쓰여진 것이다) 신경과 헌법의 개정을 묻는 이들을 의식하면서 이 십이신조의 우수성을 변론하고 있다.15)
먼저 그는 이 십이신조가 간단하고 명백하여 알기가 용이한 점에서 만국장로회 신경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말하며,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기타 유명한 일곱 신경 보다 낫다고 한다. 전통적 신경이 유아의 택하심과 예정에 대한 것과 같은 명백치 못한 교리로 논쟁을 야기시킴에 비해 십이신조는 그런 꼬투리 잡힐 내용은 아예 없다는 것이다.16) 다음으로 동서양 형편의 차를 언급하며 이 십이신조가 그러한 상황에 적절하면서도 성경에 부합한 신조임을 말한다.17)
그렇다면 우리가 이 신경채택이 엄격한 칼빈주의를 지향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그것이 장감연합의 단일한 한국교회를 의식한 에큐메니칼한 동기에서 되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김양선이 이 신경이 “오늘날까지 한국 장로교의 신조로 준수되어 왔으므로 한국 장로교인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근본주의(Fundamentalism)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 십이개조의 신경은 ....일련의 엄격한 칼빈주의적 신앙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18)고 지적하는 것처럼 칼빈주의적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선교초기의 선교지 교회를 위한 선교사들의 배려에서 되어진 것이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형편에 대해서 김영재는 선교사들이 그들의 본국 교회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교백을 한국 장로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칠 것으로 인정하도록 했으나 특정한 문화와 시대적인 요소가 담겨있는 그것을 그대로 우리나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도록 하지 않고 그 대신에 십이신조를 택하게 한 것은 선교지의 문화적인 상황을 감안하고 선교지 교회의 신앙적인 자율성을 배려한 데서 온 고마운 조처였다고 본다.
그러나 십이신조의 채택과 관련하여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신조나 교리중심으로 세워진 한국장로교회의 초기모습을 매우 비판적 관점으로 해석한다. 우선 백낙준은19)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이 신앙고백을 채택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규범을 제정하여 주었으므로 신자들은 자기의 신앙체험의 표현을 기다릴 것도 없이, 다 제정하여 준 신앙고백을 받게 되었다. 한국교회를 위하여 한국인의 손으로 쓰여진 신앙고백은 아직없다.
이 비판은 민경배에 오면 그 강도가 훨씬 높아진다. 그는 1905년 공의회시에 행한 신경 준비위원의 보고를 언급하면 서, 우리 자신의 신앙고백의 부재를 야기시킨 선교사들의 처사를 비판한다. 즉 ‘조선야소교 장로회 형편에 적합한 신앙을 택하는 것이 가한 줄로 인정하노라’하면서도, 우리의 정서가 배인 우리 한국인의 것을 만들지 못하고 말았던 점을 지적하며 “그때 마침 충천하듯 솟고 거기다 맑기까지 한 한국인의 신앙의 결정을 다듬지 않고 하필 인도의 신경을 차용한 까닭과 명분을 알 수 없다”고 어조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20)
그는 또 다른 글에서 그 보고의 이어지는 부분에 대해 언급하며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즉 “이 신경이 장차 아시아의 모든 장로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으면 하는 것이 선교사들의 희망이었다.” “인도와 한국 그 신경이 같을 수 없지는 않다” 그리고 “인도의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경보다 ‘간단하여도 요긴한 것은 개유’하기 때문에만 그대로 적용하였다면, 문제는 커질 것이 없었다. 하지만 역시 여기 심각한 문제는 토착 고백 신도의 형성에 대한 관심과 의의의 부재를 먼저 탓하지 않을 수 없다21)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에 비해 남북감리교회가 합해서 단일한 조선 감리교회가 되던 1930년 12월에 감리교회는 조선적 교리 형성에 관심을 갖고 토착적 고백 성립에 거보를 내딛었다고 언급한다.22) 더 나아가 서정민은 “선교부의 결정에 따라 채용한 신경은 한국인의 고백이 부재한 사실만으로써도 창립 노회의 불명예가 아닐 수 없다”고 개탄한다.23)
이런 비판들은 신조를 싫어하는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관점이다. 물론 우리는 신조의 채택 뿐 아니라 교회의 조직과 정치에 관한 문제 등 교회의 제반 사항에 관한 것을 선교사들의 지도를 따라 결정해야 했던24) 한국교회 초기의 모습에는 많은 부분에서 미흡함이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선교초기 모든 것이 부족했던 현실을 감안하면 진보적 입장의 비판은 지나치다. 또한 장로교회는 모(母)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선교지에 동일한 신앙고백과 장로정치를 세워가며 보편적인 공교회를 가장 성경적인 교회의 원리로 생각한다. 따라서 모교회와 같은 신앙고백과 정치를 표방하려고 노력한 선교초기의 12신조 채택은 신조중심의 장로교회 모습을 잘 계승한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결국 간명하게 쓰였으면서도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포괄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십이신조는 선교 초창기였던 한국교회에서 그 나름의 역할과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장점이 정작 교회가 자라면서 여러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에 대해 어떤 성숙한 지침이 될 만한 내용을 주지 못한다는 단점이 되어버린 것도 지적해야 한다.25) 십이신조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보다는 선교초기에 우리에게 맞는 한국교회의 것이지만, 장로교회를 표방하는 장로교인의 것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다.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