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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푸른 꿈을 찾아서 헤매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1955년)이다. 우리 동네중학교(학생들이 흙벽돌을 찍어서 직접 집을 지어 개교한 어려운 환경에서 만든 면소재지 중학교)에 유명한 사람이 와서 연설한다기에 학교로 달려갔다. 연사는 함석헌 선생님이셨다.
어린이, 학생, 어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셨다. 세계속의 한국은 지금 어디쯤 와있고, 우리나라 농촌이
어떤 형편에 처해있고, 우리가 잘 살자면 어떠한 각오를 하며 어떻게 살아야만 되는가를 진솔하게 말씀 하셨다. 어린마음에도 와 닿는 무엇이 있었다.
그 연설을 듣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우선 훌륭한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어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함석헌 선생님은 잠시 연설을 하고 가셨지만 그 말씀이 내 어린마음에 오래오래 남을 줄은 정말 몰랐다. 내가 걸어가는 길잡이가 될 줄을 그 당시로는 짐작하지 못했다.
일직중학교(안동에서 대구로 가는 쪽으로 30여리 떨어저 있는 국도 옆 학교) 에는 함석헌선생님을 정신적인 스승으로 모시는 최 선생님이 계셨는데 아주 존경할만한 분이어서 자주 찾아뵙고 좋은 말씀과 내 장래를 상의 하게 되었다. 나의 젊은 날의 진정한 정신적인 스승이기도 한 분이다.
최 선생님은 독신으로 고아 2명을 대려다 공부 시키고 있었다. 그때 내 마음도 그분의 하는 일에 감동하여 결의에 차 있었다. 나도 성인이 되어서 성공하면 좋은 일을 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해 보았다.
함석헌선생님, 유달영선생님, 가나안 농장(훗날 가나안 농군학교전신)을 운영하시는 김 용기장로님, 등 훌륭한 많은 분들의 행적을 최 선생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농촌을 살리려면 어떻게 살아야만 되는 것과 발달된 서양기술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 되는지를 최선생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닭과 돼지를 키우는데는 좋은 품종을 선택해야 되고 키우는 방법이 과학적 이어야 된다는 것과, 농사는 특수작물을 재배해야만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양의 발달된 기술로 우리농촌도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나도 농촌이 잘 사는 사회사업을 해야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는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고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하겠다고 막연한 생각을 하며 꿈을 키워나갔다.
사범학교 시절에는 닭 키우는데, 돼지 키우는데 ,농작물 재배하는 데를 찾아다녔다. 학교 공부 보다 더 관심을 갖고 열심히 현장을 찾아다니며 배웠다.
1960년 교사 발령과 동시에 바다가 가까운 농촌학교로 가게 되었다. 시간이 나면 내가 꿈을 펼칠 곳을 찾아 나섰다,
우선은 학교생활을 충실히 하고, 내 나름대로 장래를 설계해나갔다. 1년 군대생활을 마치고 그동안 봐 두 었던 농촌학교로 자원해 들어갔다. 그곳은 몇 만평의 넓은 하천부지가 학교 담장과 붙어있었다.
이것만 내가 소유할 수 있다면 내 꿈을 이룰수 있다는 큰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 김용기 장로님도 못 쓰는 자갈땅을 열심히 노력해서 옥토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하여 나도 언젠가는 그런 꿈을 이룰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노력해야 되겠다고마음을 먹었다.
우선은 돈이 있어야 그 땅을 내가 소유할 수 있기에 돈을 모아야 되겠다고 고민하던 중 포도재배를 하기로 하고 혼자서 책을 사서 공부하고, 현장학습을 하기위해 방학을 이용해 안양에 있는 포도밭에 가서 1주일 머슴 살이도 하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좋은 경험을 하고 모든 준비를 하였다.
다음해 (1964년)이른 봄에 고향 부모님 농장에 어린 포도 묘목을 사와서 심고 어른들 힘으로 시설을 깨끗이 마쳤다. 넓고 좋은 밭에 아주 작은 묘목을 심고 콘크리트 지주를 세우고 그 위에 철사로 가로 세로 포도 넝쿨이 기어나가게 시렁 형 시설을 하였다. 생전 처음 보는 것이라 동네 집안 어른들은 1000여 평이 넘는 큰 밭에 콩크리트 기둥에다 철사로 온 밭을 요란스럽게 해놓으니 객지로 돌아다니는 놈이 농사를 망치게 한다는 충고의 말씀들을 하셨다.
그러나 나는 확신을 갖고 좋은 쪽으로 마음을 가졌다. 어린 묘목을 심었다고 지금까지 해 오던 작물을 못하는 것도 아니기에 우선은 손해 볼 일이 없다.
1966년부터는 본격적인 수확을 하게 되어서. 정말 재미있는 농사였다. 1년 지나면 갑절의 수확이 되니 그 당시 논 한 평에 200-300원 할 때인데 1년에 15만원 -30만원-60만원 해마다 배씩 수확이 늘어가니 정말 재미를 본 농사였다.
큰돈을 모울 수 있었다. 교사 봉급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큰 돈 이었다. 1969년의 내 교사 봉급이 월1만 6천원 정도였으니 60만원은 큰 목돈이었다.
60년 중반에 안동지방에는 사과 농사는 많았으나 포도 농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서 우리 포도는 대단한 인기를 얻어 수확만 하면 팔로는 문제가 없었다. 주로 강원도 탄광지대로 잘 팔려 나갔다.
고향에 계시는 집안 어른들이 포도농사는 다 지으시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포항에서 근무하니 뒤에서 이론적으로만 도움을 주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학교 옆 하천 부지는 그동안 면소재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개간 사업에 뛰어들어 열심히 하셨는데 잘못되어 포기하고 먼 곳으로 전근가게 되었고, 면장께서 인수하셔서 큰돈을 투자해 운영하게 되었다.
그 분은 영일군 구룡포읍장도 하시고 장교출신이라 씩씩하게 잘하셨다. 그러나 그 땅이 문제인 것 같았다. 땅 밑에 큰 돌이 너무 많이 박혀 있어 작물이 잘되게 하려면 많은 정성을 쏟아 부어야 될 것 같았다.
옆에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는데 그 땅으로는 내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을 내리고 꿈을 찾아 전근하기로 결심했다. 하기야 내 손에 들어 온 다는 보장도 없지만 말이다.
1969년, 새 학기에 7년 동안 근무하던 정든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열과 성을 다하여 진심으로 교육을 한 곳이다. 내 젊음과 내 마음을 몽땅 투자한 시기였으며 이곳에서의 생활은 내 생애에서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시기로 남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근무 하면서 제일 안타까웠던 것은 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제자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고 그들을 돕지 못하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배움이 있어야만 잘 살수가 있을 탠데 하고 말이다. 특히 여학생들은 중학교 진학을 거의 포기 했다. 이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그 들을 만나 보면 내가 그토록 염려 했던것과는 전혀 다르게 모두들 잘 살고 있어 마음이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다. 좁은 고장이지만 이곳에서 만난 많은 제자들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가는 데 큰 의미를 갖게 하고, 또 기쁨을 주고, 끈끈한 정으로 맺어져, 그리움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경주, 청도. 김천등지를 전근 다니며 내 이상향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 72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그동안 보아두었던, 선산 구미 공업단지 옆 낙동강 바로 옆에 5000평의 땅을 구입해서 정착
하게 되었다. 좋은 곳이었다. 넓은 들판에 그림 같은 넓은 농장이었다.
6년생 사과나무가 심어진 땅이 4000평, 3년생 포도나무가 심어진 땅이 1000평, 사과나무에서는 아직 수확은 없고 땅에서 만 간작
(채소)을 하고 포도는 조금은 수확을 볼 수가 있는 농장이었다. 농장 가운데에 방이 3개에다 부엌이 딸려있고, 창고가 따로 있는
집이고, 또 농장 힌쪽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살 수가 있게끔 방하나 부엌하나가 딸린 작은집이 2채 있으니 농사 짖기에는 불편한
점이 없는 이상적인 농장이었다.
일을 하다 힘들면 까마득한 강둑길을, 말을 타고 달린다는 멋있는 부푼 꿈도 꾸면서, 농사 준비를 마치고 농사일을 시작했다. 낯선 곳에서의 농사는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사람구하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또 밑천도 많이 들고 노동력이 부족했다.
당장 과수에서 수확을 기대 하지는 못하고 간작에 의존하는 농사였다. 모둔 일이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생각 보다는 어려움을 직접 체험했다. 한번도 직접 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 일이라 너무나 힘든 농사일이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꾸려나가야 되는 아주 힘든 몸부림 이였다.
이젠 고향에서 돈을 가져올 형편도 아니다. 포도농사를 지어서 조카들 교육을 시켜야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울에 있는 집을 당장 팔아 올수도 없고 조금은 고민하면서 한해를 보냈다. 내 꿈인 어려운 사람과 함께하고, 또 고아들을 받아들이기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 뒤로 미루었다.
1973년에는 본격적으로 농사를 잘 지어서 수입을 보고 그 수입으로 생활하고 내 꿈인 사회사업을 해야 되기 때문에 열심을 다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빗만 졌다. 조금은 당황하였지만 서울에 집이 있으니 아주 어렵게 되면 서울 집을 팔아서 농장을 지키면 된다고 마음을 다져먹고 한해를 뒤돌아보며 넓은 들판에서 외롭게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싸락눈이 내리는 어느 겨울밤, 새벽에 방문을 여는 소리에 눈을 뜨니 건장한 청년 두 사람이 잠자는 나를 내려 보고 있지를 않는가? 급하게 일어나 앉으니 칼을 가슴에 대고 돈을 내놓으라고 큰 소리로 위협했다. 겁이 났지만 침착하게 내게는 큰돈이 없고 주머니에 몇 천원이 있고, 방 위쪽에 있는 쌀자루를 가리키며 쌀을 가지고 가라고 했다. 방안을 뒤지며 돈을 찾았으나 돈이 나오지
않으니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이때까지 떨리지 않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자박 자박 싸락눈 밝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방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겁에 질려 한동안 문고리를 잡고 버티고 있다가 농장에 딸린 일꾼들의 집을 향해 단걸음에 내달려 채면도 없이 사람 살려 라고 소리를 치며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동안 정신을 차린 후 그 집 주인과 함께 집으로 와서 밤을 보내고 그 이튼 날 집을 봐 달라고 부탁하고 고향으로 와서 휴식을 취했다.
고향에서 몇 날을 보내고 농장으로 가니 안방이 불에 타서 냄새가 진동하고 벽지가 새까맣게 되어 있었다. 이유를 알아보니, 집보고 공부하던 학생이 저녁에 라디오 위에 촛불을 커고 잠을 자다가 초가 녹아 프라스틱 라디오에 불이 붙어 방안을 태웠다고 하였다. 정말 기가 막히고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화를 내어 보았자 덕 볼 일도 아니고 좋지 않은 마음을 다스려 좋게 마음을 고처 먹고, 평정을 찾아 열심을
다해 쓸고 닦았다. 며칠을 보내며 앞날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때 농촌으로 들어간 젊은이들이 농촌사업에 실패한 소식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내가 근무하던 학교 옆 하천부지를 일구어 가꾸시던 면장님도 그 큰 농장을 포기하고 많은 재산을 날리고 그곳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여기서 농장을 계속 운영할 것인가? 아니면 이 힘든 일을 접고 딴 길을 걸을까를 놓고 한동안 고민을 하게 되었다. 농사란 노동력이 있어야 되겠고 죽을 고생을 하여야만 내게 돌아오는 것이 생긴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너무 싶게 생각 한 것 같고, 마음가짐이 아직 부족한 것 같았다. 내 농장은 아주 싶게 처분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살 때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힘들게 샀지만 팔기는 쉬운 일이었다.
내 농장을 탐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몇 날을 고민하다가 팔기로 마음먹고 농장을 복덕방에 내놓으니 금방
살 사람이 나타나 처분을 하였다. 2년 전 농장을 살때 보다는 돈은 불어 났지만 세월이 흘렀고 고생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한생애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또 좋은 경험을 하였다고 마음을 크게 고처먹고 내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였다.
서울에 은행에 잡힌 상가주택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다시 이곳으로 와서 내 꿈을 이룬다고 결심하고 농장판돈 일부로 넓은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을 구미 역 근처에 사놓고 나머지 돈을 가지고 서울 집으로 올라왔다.
사도의 길을 걷기 위해 사범학교를 갔고, 그러나 사도의 꿈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대신 사회사업을 하기 위해 농장을 장만해서 농사일을 해보았으나 실패하고, 사회사업이 꿈이었으나 도중하차하고, 지금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는 과연 실패자인가라고
자성의 시간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내 꿈은 허상이고 위선이 아니었나? 하고 반성하며 생각해보기도 했다. 세상을 만만히 본 것은 아닌지? 하고도 생각해보았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결국 30대 중반까지 꿈만 꾸고 살아온 허상의 세월이 되고 말았다.
1955년 중학교 2학년생인 어린 한 소년은 앞서가는 선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목표를 정하고, 남들이 걷지 않는 외길 20여 년을 오직 그 꿈 하나를 잡고 열심히 걸어 왔다. 그러나 신은 그 길을 끝내 허락 해 주지는 않았다.
당분간은 그 꿈을 접지만 먼 훗날에 다시 시도할 것을 다짐하고, 1974년 어느 봄날에, 생존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현실과 싸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 오게 되었다..
동몽 남동완 글
첫댓글 동몽!! 행복의 파랑새. 성공의 파랑새를 찾아 무진장 헤매고 다녔군! 그게 젊은 날의 표상 아닌가? 잘했군 잘 했어... 함석헌 님의 말이 귀 동몽의 마음에 세워진 것. 참일 까? 아닐까? 동몽의 뜻이 참 진리에 세워진 것이라 볼 수 있겠는가?. 내가 부지런히 해서 고아를 돕고. 남을 돕고 하는 것..선한 일. 좋은 일.복되고 행복한 일이 맞기는 맞네만...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오.--젊은 날의 꿈을 이루려다가..실패 했다면- 모두가 허상아닌가? 그렇다면 귀공 동몽은 그 동안 허상의 신기루를 따라간 것 아닐까?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동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나. 동몽의 인생에서--시간이라는 세월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행복의 파랑새가 남았는가? 남을 도운 선한 일의 성공을 붙잡았는가?
동몽!!! 우리는 진리를 만나서 진리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진리 밖에서 행한 모든 일은 다 헛되고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오. 세상사람들이 성공을 향하여 달려 가지만- 성공자는 없다오. 세상사람들은 성공으로 달려가는것 아니고, 실패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오. 마지막 끝자락에 도달하여 보면--실패요. 헛 것이요. 아무것도 남는 장사가 아니었다는 것. 그것을 깨우칠때-다시 길을 바꾸고, 방향을 바꾸어 시간의 끝자락에서 방황하며 헤매다가--길을 바르게 찾는 자도 있고. 그만 깊은 웅덩이에 빠지는 자가 있다오,
동몽!! 어린시절 함석헌 님의 강연을 듣고. 그 깨우침이 마음에 세워진것 좋은 일. 그 좋은 일을 찾아 다닌것. 그동안 행복했겠군!! 사람이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 바른 인도자를 만나는 것.-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좋은 선생님이고. 바른 인도자일까??? --나를 진리안으로 이끌어 주는자가 참 선생님 아닐까!!! .. 다윗은 어릴때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고." 중년에 간음하고,살인죄를지어. 범죄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로부터 죄에서 구원 받는 인도를 받았고. 말년에는 "갓 " 이라는 선지자를 만나서 - 큰 죄악에서 벗어나 .....--영원히 왕권을 누리게 되고,
자손대대로 복을 받는 은혜를 입게되었다오. .동몽!! 귀공을 진리로 인도할 선생님을 만났는가? 귀공의 죄를 지적하고, 씻음 받은 길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을 언제 만낫는가? . .동몽!! 어릴 때는 함 선생님을 만났고. 젊을 때는 -과수언이나 땅의 인도를 받아 헤매였고, 말년에 진리로 인도 할 참 선생님이요. 인도자를 만날수 있기를 바라오. 그 참 선생님과의 만난 자가 바로 성공 자요. 행복의 파랑새, 성공의 파랑새를 잡은 거라오....인생 실천의 선배님께 사족을 달아 미안하오........... === 산파 윤 형 선 올림===
동몽!!! 들을 귀 있는 자가 되기를 바라오. 인생이 스처 지나가는 바람이 되어서는 --너무 억울하지 않는가! .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하는 것 같이,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전10;1). 우리의 마음의 과녁을 어디에다 촛점을 맞추고 있느냐?..동몽!! 우리는 듣지 못하는 귀. 보지 못하는 눈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 때.. 지혜자의 우편에 설 수 있다오. 동몽!!! 대기권을 보는 눈에서 성층권을 보는 눈을 가진 자되어
동몽! 점심- 부폐 잘 먹었네. 다음에는 포도원에서 포도 판 돈. 땅 판 돈으로 점심을 한 번 더 먹었으면,.......내가 음식-욕심을 내고 있으니, 내가 악한 자 일세!! 동몽 고맙네!!! ===산파 윤 형 선 올림===
설교 말씀 가슴에 삭여 간직하겠습니다. 밥은 입에 맞아 는 지 ?
그 후 1974년 이후 서울에서의 새 인생 살이는 ? 그 게 너무 길게 말고 간략하게나마 전해 주구려?
날려버린 안용진의 댓글, 한편의 소설보다 진솔하고 참신한 글이네 형이나 나나 일찍이 외도한 사람은 말하지 않으면 속네를 잘 몰라 젊은 우리들이같이 걸엇던 아픔과 꿈이 크게 다르지 않네.나도 고향모교에서4H운동에꽤나 열심이었지 시대의 흐름에 같이 호흡한 결과 긍지를 느낄뿐 한편의 자서전이 시작되었네.천천히 더듬에 잘 다듬으면 그것이 바로 역사가 아니겠나 깊은 감명 받았네 계속이어주게 하이팅 동몽의 자서전 탄생을 위하여 건배
돈키호테는 역시 센스가 있어 그 이후가 궁금하지?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 결혼하고 자식낳고 서울이라는 곳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알지않나. 힘든 생활 18년 하고,52살때 그 성격 어디 가나 또 때려치웠지. 원상복구 할려고 하지만 이젠 세상이변했어 내 손길이 필요치 않았어 사회의 안전 장치가 잘되어가더군 그래서 방랑의 길을 걸었지 배낭하나 메고꿈을 찾으면서, 어린 시절 꿈꾸던 꿈은 절대로 포기하지않고 있지. 아마 죽을 때 까지일꺼다. 앞으로 계속 터트릴 꺼니까? 지켜 보게 돈키호테 자꾸 친해지고 싶어. 옆에 같이 있는 것같이 느껴지네.
동몽! 죽을 때까지 방랑길을 걸어간다면- 억울하지. 어린시절 꿈은 개꿈이야! 허상의 고집 꺽고, 새로운 꿈을 꾸어봐! -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너희가 육신으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 이로되,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8;13) . 동몽! 육신 좋아하는 것 따라가면. 멸망이야.. 눈에 보이는 것 좋다고 따라가면 사망이야. 동몽! 삶의 기준이 내 가 아니야 ! 내 뜻. 내 생각. 내고집은 은 꺽어야하고. 내 사상은 깨어져야 한다오.-여리고성이 무너지듯 내 생각의 틀을 깨어야해요!! 산파
동몽!! 누가 뭐라해도 나는 내 뜻대로 산다. 이거지.--영적 지혜를 얻는 자가 생명을 얻는다오. 어리석은 자는 지혜가 불러도 듣지 못하고, 대답 할 줄 모른다오. 지혜를 얻는자와 명철을 얻는자는 복이 있나니, 지혜는 진주 보다 귀하니,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있고.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지혜는 그 얻은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자는 복되도다. 동몽!! 어리석은 자의 말이나, 들을 귀가 세워지기를 바라오. ===산파 윤 형 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