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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11월 14일 금요일
[(녹)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주를 알 수 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세상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13,1-9
1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2 오히려 불이나 바람이나 빠른 공기, 별들의 무리나 거친 물,
하늘의 빛물체들을 세상을 통치하는 신들로 여겼다.
3 그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에서 그것들을 신으로 생각하였다면
그 주님께서는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4 또 그것들의 힘과 작용에 감탄하였다면 바로 그것들을 보고
그것들을 만드신 분께서 얼마나 힘이 세신지 알아야 한다.
5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
6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또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는 가운데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7 그들은 그분의 업적을 줄곧 주의 깊게 탐구하다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8 그러나 그들이라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9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26-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31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32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33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6)·37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인 지혜서의 말씀에 마음이 오래도록 머뭅니다. “자연 숭배의 어리석음”이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힘에 압도되어 그것들을 신으로 받들어 섬기는 일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말합니다. 오늘날에도 눈에 보이는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자연 안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즐기면서도, 그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찾지도 알아채지도 못하는 무지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가끔 ‘창조론을 믿느냐 진화론을 믿느냐?’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진화의 법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저와 세상의 온갖 것들을 그저 우연의 산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진화의 법칙과, 그 우연의 뒤에 자리한 숨겨진 섭리와 질서를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실존 철학에서 말하듯 저 자신을 그저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 그래서 냉혹한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고독한 삶을 살아 내야 하는 숨 가쁜 존재로 이해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꽃을 좋아하는 선배 신부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유, 우리 하느님은 참 재미있으신 분이야. 하느님은 엄청 심심하셨나 봐. 요렇게도 만드시고 조렇게도 만드시고 …….” 누가 뭐라 해도 저는 참 재미나신 하느님께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시며 세상의 온갖 것을, 그리고 저를 비롯한 우리를 모두 소중하게 만드셨다고 믿고 고백합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의 아름다움이 마음 깊숙이 다가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김동희 모세 신부)
구원의 산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자비의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은 꽤 의외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아무리 외쳐도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로 여겨집니다. 표현 하나하나가 세상 섬뜩하고 무시무시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 34-36)
‘사람의 아들의 날’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은신처를 떠나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출발점입니다. 그날은 약속에 따라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우리 모든 인류는 하느님께서 주재하시는 법정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정은 어떤 사람에게는 포상과 기쁨의 법정이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징벌과 두려움의 법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야속하게도 그 법정이 언제 벌어질지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인간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인간들은 크게 두 부류로 갈리게 됩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지혜롭고 생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선인들입니다. 구세주의 재림을, 다시 말해서 인류의 마지막 날을 미리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지상에서 열심히 봉사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 때 부류의 사람들, 참으로 불행합니다. 그들은 그날이 결코 오지 않으려니 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저 흥청망청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들, 그들에게는 그날이 번갯불처럼 순식간에 들이닥칠 것입니다.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그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크게 한방 얻어맞을 것입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루카 17,31)
옥상에서 내려오지 마라는 말씀은 영적인 삶에서 육적인 삶에로 내려오지 말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라나선 신앙 여정 안에서 롯의 아내처럼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지 말고, 롯처럼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멸망의 유황불을 피해 안전하게 구원의 산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롯처럼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끝까지 주님만 신뢰하고 그분만 바라보며, 서둘러 그분께로 달려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날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빨리 사라질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쌓아 올린 명예와 재산, 한평생 추구했던 자리와 학벌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 우리 앞에 남게 될 것은 그간 우리가 쌓아왔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작은 선행, 따뜻한 마음뿐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 사제 피정을 마치는 날 성가대 피정이 있었습니다. 교구 사제 피정에서는 강의를 들었다면 성가대 피정에서는 강의했습니다. 성가대 피정은 교구 사제 피정만큼이나 프로그램이 좋았고,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6시에 모여서 준비해 온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묵주기도와 찬양이 있었습니다. 성가대의 찬양이라 소리가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찬양이 끝난 후에는 제가 준비한 강의와 미사가 있었습니다. 강의는 ‘구약에 준비되었던 신약의 예표’와 피정 중에 들었던 ‘영성의 여정’을 정리해서 하였습니다. 구약에 준비된 신약의 예표는 ‘노아의 방주와 예수님의 세례, 모세의 구리뱀과 예수님의 십자가,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구약의 파스카와 죽음을 건너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 예수님의 파스카’였습니다. 영성의 여정은 ‘하느님을 용서한다는 것, 어두운 밤은 은총이라는 것, 성사의 현재성’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전에는 피정이라는 형식을 빌린 성가대의 친교와 단합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피정이라는 그릇에 좋은 것을 많이 담았다고 좋아했습니다. 피정을 준비한 성가대 단장에게 감사드립니다.
둘째 날은 부주임 신부님이 ‘엘리야와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 엘리야와 아합왕의 이야기’를 주제로 강의해 주었습니다. 저는 중남부 꾸르실료 야외 미사가 있어서 새벽에 떠나야 했습니다. 4박 5일 동안의 교구 사제 피정은 제게 영적인 위로가 되었습니다. 1박 2일의 성가대 피정은 제가 가진 사목의 비전과 열정을 나눌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루 일정의 중남부 꾸르실료 야외 미사는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피정 중에 들었던 ‘성사의 현재성’이 생각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찾아온 손님을 극진하게 환대했습니다. 발 씻을 물을 주었고, 빵을 주었고, 맛있는 음식을 드렸습니다. 하느님의 손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마리아의 응답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시메온과 한나는 매일 성전에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을 환대할 수 있다면, 내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할 수 있다면, 내가 매일 기도할 수 있다면 마태오 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은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축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잘살 수 있도록 능력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릇된 방향으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만드는데, 재능을 사용합니다. 사람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마약을 만들어냅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의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는 노아와 롯의 길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길입니다. 권위와 독선의 길입니다. 이웃을 배려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 길의 끝에는 전쟁, 폭력, 기아, 가난, 난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여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말씀을 가슴 속에 담고 산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온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제 목숨을 보전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그날을 향하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30)
믿음의 날을 향하여
지금여기에서 믿음으로
희망의 날을 향하여
지금여기에서 희망으로
사랑의 날을 향하여
지금여기에서 사랑으로
의로움의 날을 향하여
지금여기에서 의로움으로
어울림의 날을 향하여
지금여기에서 어울림으로
새로움의 날을 향하여
지금여기에서 새로움으로
해방의 날을 향하여
지금여기에서 해방으로
기쁨의 날을 향하여
지금여기에서 기쁨으로
살림의 날을 향하여
지금여기에서 살림으로
오늘의 성인
성 라우렌시오 오툴(Lawrence O’Toole)
활동년도 : 1128-1180년
신분 : 주교
지역 : 더블린(Dublin)
같은이름 :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노렌죠, 로렌죠
그는 머레이족의 족장 무르타그의 아들로서, 아일랜드 킬다르의 케슬데르모트 태생이다.
그러나 어릴 때에는 적대시 하던 상대방 가문의 포로로서 지내다가, 후일 수도자가 되었고, 글렌다루그의 원장으로 있던 중에 더블린의 대주교로 피선되었다.
그러나 복잡한 정치 사정으로 인하여 수많은 곤경을 당하다가, 1179년의 로마 회의에 아일랜드의 교황 대사로 임명되자, 국왕은 그의 부임을 거부하고, 또 입국을 금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비밀리에 여행하여 더블린으로 돌아왔으나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자기 양떼를 너무나 사랑하였고, 단순덕이 뛰어났으며, 매우 엄격한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매 사순절마다 글렌다루그로 가서 고요와 적막 속에서 기도와 고행에만 전념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성녀 베네란다 (Veneranda)
활동년도 : +2세기경(143년경)
신분 : 동정 순교자
지역 : 갈리아(Gallia)
같은 이름:
“로마 순교록”은 11월 14일 목록에서 성녀 베네란다가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에 해당하는 갈리아(Gallia) 지방에서 안토니누스 황제가 다스리던 때 아스클레피아데스 총독에 의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지만, 전통적으로는 143년 7월 26일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69년에서 1372년 사이에 기록된 페트루스 데 나탈리부스(Petrus de Natalibus)의 “성인 목록”(The Catalogo Sanctorum)에 따르면, 성녀 베네란다는 2세기 갈리아 지방에서 태어나 안토니누스 황제 치하 때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성녀 베네란다는 소녀 시절부터 열정적으로 복음을 공부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인 갈리아 지방을 떠났다. 그녀는 시칠리아섬의 그로테(Grotte)로 가서 한 동굴에서 지내며 복음을 전했다. 그녀는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병자들을 돌보았다. 그녀가 방문한 뒤에는 장미 향이 풍겼다고 한다. 그러나 박해자에게 납치되어 아치레알레(Acireale)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끓는 기름에 집어넣기도 했으나 죽지 않자 결국 참수형을 받고 순교해 성녀 도미틸라(Domitilla)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그녀의 부모는 귀족 출신으로, 그녀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그녀를 베네라(Venera)로 부르려 했으나, 아버지는 그리스어 파라스케베(Parasceve, 성금요일 또는 준비일이란 뜻)의 라틴식 표현인 베네란다로 바꾸길 원했다. 성녀 베네란다는 어려서부터 성경과 동정 순교자들의 생애를 즐겨 보았고,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물려받은 재산으로 시칠리아 전역에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돕는데 헌신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본토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안토니우스 총독에 의해 체포되어 로마로 가는 길에 배교를 강요당하기도 하고 결혼으로 회유를 당하기도 했다. 성녀 베네란다는 여러 가지 끔찍한 고문을 당했지만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고, 오히려 박해자들의 개종을 이끌었다. 그 후 갈리아 지방까지 가서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순교 후 성녀 베네란다의 유해는 아스콜리 피체노(Ascoli Piceno)로 옮겨져 4세기까지 공경을 받았고, 그 후 한 사제가 11월 14일에 로마로 이장해 모셨다. 중세 말 시칠리아섬의 아치레알레에서 성녀 베네란다의 유해를 요청하면서, 그녀의 유해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여러 곳으로 분배되었다. 1668년 교황청에 의해 그녀에 대한 공경이 승인되었다. 성녀 베네란다는 베네라, 베네리아(Veneria), 베네리나(Venerina) 등으로도 불린다.
성 그레고리오 팔라마스 (Gregory Palamas)
활동년도 : 1296-1359년
신분 : 주교, 신비가, 신학자
지역 : 테살로니카(Thessalonica)
같은 이름 :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빨라마스
성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Gregorius Palamas, 또는 그레고리오)는 금욕과 신비 신학의 뛰어난 이론가로서 14세기의 그리스 정교회에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는 1296년 11월 11일 또는 14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황실과 관계된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나 왕립 대학교에서 고전 철학을 배웠다. 하지만 1316년에 그는 쉽게 진출할 수 있는 정계를 포기하고, 두 동생과 함께 그리스 정교회의 영적 중심지인 아토스산(Mount Athos)의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는 존경받는 수도자이자 스승으로서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들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다가 한 영적 스승에게서 관상 방법을 배웠다. 1325년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아토스 산에서 나와 테살로니카와 마케도니아(Macedonia)로 피신한 그는 같은 해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이후 10명의 동료들과 함께 마케도니아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1331년 아토스 산의 성 사바스(Sabas)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는 1335년경 인접한 한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수도생활 지침 때문에 수사들의 반발을 사서 다시 성 사바스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1347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교회의 전통을 유지, 보존하려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테살로니카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주교직을 수행하면서 인문주의 비판자들에게 맞서는 저술을 계속하며 여생을 보냈다. 1354년 그는 투르크인들에 의해 투옥되었지만, 석방금을 내고 테살로니카로 돌아온 후 1359년 11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망한 지 9년 뒤인 1368년 콘스탄티노플 시노드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정교회의 아버지요 박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성 세라피온 (Serapion)
활동년도 : +1240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알제(Algiers)
같은 이름 : 세라피언, 쎄라피온
영국 태생인 성 세라피온은 에스파냐 카스티야(Castilla)에서 알폰소 9세 휘하의 군인이 되었다가 포로 석방을 목적으로 하는 메르체다리오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브리티시 섬들을 찾아가 은둔소를 세우려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는 무르시아의 무어인들에게 가서 그리스도인 노예 몇 명을 완전히 석방시켰고, 알제(알제리의 수도)에 가서는 더욱 많은 성과를 얻었다. 여기서 그는 포로 몸값 때문에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에 마호메트 교도들에게 설교했으며, 몇 사람의 개종자를 얻기도 하였다. 이것이 무어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성 세라피온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지가 절단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에스파냐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