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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종덕
 
카페 게시글
┃.........좋은글.........┃ 스크랩 항상 낙관적이었던 등소평의 장수 비결
우무환 추천 0 조회 771 15.10.26 09: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SAM_1521.JPG

 

항상 낙관적이었던 등소평

"하늘이 무너져도 키작은 내가 무서워하지 않는 이유는..."

 

중국공산당의 혁명 1세대로서 모택동에 이어 중국을 통치한

등소평(鄧小平·1904-1997)의 건강 장수비결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등소평은 파란만장한 혁명가의 삶을 살았고 피비린내 나는 공산당의 권력 투쟁 속에서 마치 낭떠러지를 외줄로 오르는 듯한 삶을 살았지만 94세까지 건강하게 장수하였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저명한 위인 중 보기 드문 경우인데, 사실 등소평이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건강을 지켰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등소평
등소평
순탄치 못한 삶을 산 오뚝이 인생

등소평은 16세가 되던 해인 1918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칼 마르크스를 알게 되었고, 파리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한 뒤에 모스크바에 가서 공부하다 귀국했습니다. 1927년부터 공산당 지하운동에 참여하고 모택동을 지지하면서 대장정에 참여했는데, 세 차례에 걸쳐 실각과 복권을 거듭하면서 인생의 부침과 고뇌를 제대로 느꼈습니다. 1967년 실각했다가 1973년에 복귀했고, 76년 모택동 사후 문화혁명 때 다시 추방되었다가 77년에 복귀하였기에 ‘오뚝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것이죠. 그가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은 1980년이었는데, 그 때 나이가 무려 77세였습니다.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중국 경제를 일으켜 세웠기에 당, 군, 각 종족 인민에게 가장 숭배를 받는 탁월한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지요. 등소평의 장수는 과학적인 양생법(養生法)을 잘 지킨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장수하는데 한 몫을 한 신체조건

등소평의 장수에 키가 150cm 정도에 불과했던 신체 조건이 한 몫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키가 5cm 커지면 피부 면적이 10%, 체중이 16%, 혈압이 10% 증가되고 심장의 부담도 커진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키가 작은 사람이 큰 사람보다 오래 사는데 유리하다는 것이죠. 1993년 중국의 100세 이상 장수자 중에 절반 이상이 150cm 미만의 키에 40kg 안팎의 체중을 가진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키가 작은 사람일수록 오래 산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미국 하와이 의과대학의 노인의학전문의 브래들리 윌콕스 박사가 하와이 거주 일본계 주민 8006명을 대상으로 1965년부터 거의 50년에 걸쳐 진행한 조사 분석 결과로 밝혀졌습니다. 이들을 신장 기준으로 157cm 이하와 162cm 이상의 두 그룹으로 나누었을 때 157cm 이하 그룹의 수명이 가장 긴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키가 클수록 수명은 짧은 경향을 보였습니다. 유전자 분석에서는 키가 작은 사람이 수명 관련 FOXO-3 유전자의 변이형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 때문에 성장 초기에 체구는 다른 사람보다 작고 수명은 길어지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또 키가 작은 사람들은 혈중 인슐린 수치와 암 발생률이 낮은 경향을 보였습니다. 하와이는 미국에서 주민들의 평균수명이 가장 길고 또 주민들이 오랫동안 거주하기 때문에 이처럼 장기간의 조사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조사 대상자 중 약 1200명은 90~100세까지 살았고, 이 중 250명은 아직 살아있다고 합니다.
등산 중에 기념사진을 촬영중인 중국 정치지도자 등소평.
등산 중에 기념사진을 촬영중인 중국 정치지도자 등소평.
평생 일에 파묻혀 살았지만 망중한을 즐기다

공자(孔子)가 평생을 쉴 새 없이 몸과 마음을 써서 노력한 바람에 장수했듯이 등소평은 직책상 날마다 각종 일을 처리해야만 했기에 장수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죠. 그러나 그 바쁜 중에도 틈을 내어 여러 가지 운동과 취미활동을 즐겼습니다. 등소평 스스로 말하기를 “일은 효율이 중요하니 나는 최소한으로만 일할 뿐이다. 너무 많은 일을 하려 들지 않고 모든 근심 걱정을 떨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고, 무리하지 않는다. 나는 일을 할 수 있는 한 적게 하려고 하며 일이 발생하면 다른 사람을 보내어 처리하게 하니 이는 좀 더 살려고 하기 위함이다. 내 소원은 1997년까지 사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1997년에 사망했지요. 그의 철학 이론은 “유소불위재능소위(有所不爲才能所爲)”인데, 하지 않는 바가 있음으로써 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죠.

건강관리

등소평의 신체는 지속적으로 건강하고 정정하였으며 질병에 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젊을 때부터 신체단련을 계속하는 습관을 가졌고 일상생활 속의 보건활동을 중시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렇게 몸 관리를 잘 했기에 1950년대 후반, 즉 40대 후반부터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체중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등소평도 모택동과 마찬가지로 산보를 했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늙어서 행동이 불편해졌을 때도 산보를 계속했는데, 매일 오전에 집안 정원을 18바퀴나 돌아다녔습니다. 1바퀴가 약 140m이니 2.5km를 걸었던 것이죠. 지난 1980년에 가택연금을 당했던 YS도 마당에서 조깅했었죠. 등소평은 걸으면서 어깨와 팔을 펴고 다리를 차며 근골을 움직여 주었습니다. 몇 십 년을 하루같이 멈춘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산보할 때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등산도 즐겼는데, 75세의 고령일 때에도 황산(黃山)을 등산했습니다. 황산은 경관이 매우 뛰어나 이태백이 대지의 꽃이라고 극찬한 산으로서 1,800m의 주봉이 3개인데, 4만 여개의 돌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힘든 곳이죠. 그밖에 당구 등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운동도 즐겼습니다.

냉수욕과 수영을 즐기다

등소평은 냉수욕을 좋아하여 겨울은 물론이고 1년 내내 냉수욕을 하면서 몸을 단련하고 의지를 다졌습니다. 스스로 “나는 10년 동안 감기에도 한 번 걸린 적이 없으니, 몸이 건강한 원인 중 하나가 매일 아침 냉수욕을 하는 것이다”고 말하였죠. 냉수욕은 신체의 한랭(寒冷) 자극에 대한 적응 능력을 높여주고 감기와 기관지염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늙어서 냉수욕을 못하게 되자 온수욕을 하였습니다. 모택동과 마찬가지였죠.
여름휴가 중 북대하(베이다이허) 해수욕장을 찾아 수영을 즐기고 있는 등소평.
여름휴가 중 북대하(베이다이허) 해수욕장을 찾아 수영을 즐기고 있는 등소평.
수영도 역시 좋아하였는데, 수영장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수영을 즐겼습니다. “내가 수영을 할 수 있고 특히 바다수영을 즐기는 것은 내 건강이 아직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고 하여 등소평은 여름이면 중국 지도자들의 휴양지인 북대하(北戴河)나 진황도(秦皇島), 대련(大連) 등의 해변도시로 가서 요양을 하며 매일 수영하고 일광욕을 즐겼는데, 8순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비바람이 불어도 상관없이 매일 같이 바다로 나갔는데, 한 번 나가면 1시간이 넘도록 수영을 즐겼습니다. 때로는 풍랑을 만나도 계속 전진하였는데, 고요한 정원에서 발길가는 대로 걷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수영 후 다리가 튼튼해지는 게 느껴진다”고 하였습니다. 74세 때는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넜다고 합니다.


식생활에도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다

규칙적인 식생활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40대 이후부터인데, 첫 부인과 사별하고 두 번째 부인과 이혼한 뒤 37세에 14세 연하의 세 번째 부인을 만나 55년간 동고동락하며 2남3녀를 낳았습니다. 그 부인 탁림이 등소평의 식단을 책임졌다고 합니다. 탁림은 철저한 식사량 조절을 위해 두꺼운 종이로 76g짜리와 55g짜리 용기를 만들어 끼니마다 쌀을 펐다고 하는데, 그만큼 철저히 식생활 습관을 지켜나갔다는 것이겠죠. 실제로 등소평은 평생 소식을 철칙으로 삼아 동·식물성을 골고루 섭취하며 절대 과식하지 않았습니다.

등소평의 식단에는 3가지 원칙이 있었다고 하는데, 첫째, 동물성과 식물성 단백질의 비율을 1대 1로 한다. 둘째, 점심과 저녁에는 반드시 채식 위주 식단을 마련한다. 셋째, 주식과 부식을 균형 있게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등소평은 손님을 초대할 때 외에는 스스로 음식을 주문하지 않고 주방장이 주는 대로 먹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저녁식사는 시간이 아무리 늦어도 손자들이 모두 돌아와야 먹었다고 합니다. 모두 모여앉아 웃고 떠드는 것을 한쪽에서 흥미롭게 들으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천륜의 즐거움을 즐기려 한 것이죠.

등소평이 즐겨 먹었던 음식

등소평은 음식영양을 강조하였는데 음식이 보약이지 따로 보약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중국 13억 인구의 최고 지도자였지만 음식은 사치하지 않았고 간단하였는데, 음식의 배합, 즉 음식 궁합을 중요시하였습니다. 아침식사는 계란, 만두, 묽은 밥, 김치를 즐겼고, 점심과 저녁식사도 항상 평상의 음식을 먹었는데, 채소 2가지에 고기요리 하나, 탕국 하나였습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고향음식인 사천식 요리였는데, 훠궈로우(火鍋: 샤브샤브), 펀졍로우(米粉肉: 고기에 쌀가루를 묻혀 찌는 요리), 커로우(?肉: 저민 고기를 쪄서 접시에 담은 요리) 등이 있습니다. 또 집에서 만든 두부와 절인 당근채 등의 반찬은 하루도 빠짐없이 먹었으며, 때때로 스스로 만든 두부를 먹기도 했습니다.
중국식 샤브샤브 훠궈.
중국식 샤브샤브 훠궈.
건강을 위해 먹었던 약이 되는 음식

등소평이 평소 건강식으로 즐긴 것으로 충초전압탕(蟲草煎鴨湯)이 있습니다. 충초전압탕은 청나라 황궁에서 먹었던 약선(藥膳) 요리로서 오리에 동충하초(冬蟲夏草)와 10여 가지의 귀한 약재를 넣어서 만든 최고의 보양식이죠. 오리고기는 청나라 말기의 최고 권력자였던 서태후가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려고 미용식품으로 매일같이 즐겨 먹었던 음식인데, 음기(陰氣)를 보충하는 효능이 있는데다 껍질에 리놀렌산 같은 피부노화방지 물질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동충하초는 곤충이나 절지동물의 애벌레에 기생하는 버섯으로서 대단한 효능을 가진 보약이죠. 중국의 황제들이 먹었던 것이고, 등소평과 중국의 육상선수들이 먹어서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1993년 세계 육상 선수권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중국 육상 파워의 비밀이 바로 동충하초로 만든 드링크를 마신 것이었죠.
죽은 매미를 양분으로 삼아 성장한 큰매미 동충하초
죽은 매미를 양분으로 삼아 성장한 큰매미 동충하초
등소평의 술

등소평은 이름난 술꾼이지만 과하게 마신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장수 비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의 반주 습관인데, 매 식사 때마다 곡식으로 만든 술을 한두 잔씩 마셨습니다. 그가 즐겨 마신 술은 마오타이주, 즉 귀주 모태주(貴州 茅台酒)였는데, 마오타이는 중국 귀주성의 작은 마을 이름으로서 최상품의 수수가 많이 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오타이주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1915년 파나마 만국 술 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면서부터인데, 처음에는 관심을 끌지 못해 평가 대상에도 들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술병을 바닥에 떨어뜨려 깨어지는 바람에 술 향기가 사방에 진동하여 평가 품목에 들게 되었다는 얘기가 있지요. 맛과 향이 아주 좋아 1949년 중국 건국을 축하하는 축배주로 사용되었고,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공식만찬의 건배주로 사용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던 겁니다.

등소평과 담배

등소평은 열렬한 담배 예찬론자였습니다. 영국의 처칠 수상도 파이프 담배를 즐겼고, 조선의 정조대왕도 대단한 애연가였듯이 세계적인 유명정치가 중에는 골초가 많았습니다. 등소평의 흡연 역사는 매우 긴데, 중요하고 복잡한 일들을 처리해야 하느라 무려 하루에 5갑 정도의 담배를 피웠다고 합니다. 그러니 건강하게 장수하는데 큰 장애가 될 수 있었는데, 85세 때에 담배를 끊은 것이 94세까지 건강하게 해 준 요인의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등소평.
담배를 피우고 있는 등소평.
등소평은 워낙 담배를 즐겼는데, 80세 때 흡연의 10대 장점론을 제창하였습니다. 로이 수상에게 담배를 한 대 권하자 사양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등소평은 흡연이 어느 면에서 일부 나쁜 면도 있지만 좋은 점이 10가지나 된다며 진지하게 설명했다는 것이죠.

첫째, 담배를 피우면 사고력을 키울 수 있다. 만약 모택동이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면 모택동사상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데, 지나친 비약인 것 같습니다. 둘째, 흡연은 인내를 키운다. 담배를 처음 피기 시작할 때 참을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흡연 말고도 인내심 키울 일은 많습니다. 셋째, 흡연은 일종의 오락이다. 흡연마저 없었더라면 오락이 별로 없는 중국에서는 잠자는 일밖에 없으니 인구만 더 늘어났을 것이랍니다. 흡연 말고도 건강에도 좋은 오락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넷째, 흡연은 사교에 도움을 준다. 사교적인 인간일수록 담배를 즐겨 피운다는 것인데, 요즘은 담배를 피우면 사교장에 낄 수 없죠. 다섯째, 흡연은 국가 재정에 큰 공헌을 한다. 담배 재배농민들에게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고 하였는데, 담배 대신 재배할 작물은 많습니다.

여섯째, 흡연은 어려운 일이 발생하였을 때 일이 순조롭게 풀리도록 해 준다. 어려운 문제에 당면했을 때일수록 담배를 피우면서 해결한다는 것인데, 예전에는 바둑을 두는 도중에 줄담배를 피우는 프로 바둑기사들이 많았지만 요즘은 대부분 끊었죠. 일곱째, 흡연은 젊은이에게 낭만을, 늙은이에게는 위엄을 갖추도록 해 준다. 젊은이의 흡연 모습에서는 발랄함을, 늙은이의 흡연 모습에서는 조용함을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담배 피우는 모습보다 훨씬 더 좋은 모습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덟째, 흡연은 남과의 계약 등 흥정할 때 불을 붙이는 순간에도 묘책을 찾아내는 시간적 여유를 주어 비흡연자보다 흥정에 이기는 확률이 많다. 담배 대신 차를 천천히 마셔도 됩니다. 아홉째, 흡연은 정서에 도움을 준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예술인들은 거의가 담배를 즐겼다고 하는데, 담배가 주는 해독이 널리 알려진 요즘에는 얘기가 다르죠. 열 번째, 흡연가는 국가에도 큰 몫을 기여하고 있다. 담배사업을 통해 생긴 이익금이 국가 발전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인데, 흡연 때문에 생기는 질병으로 인한 건강 재정 부담이 훨씬 더 클 겁니다.

등소평이 어떻게 해서 담배를 끊게 되었나?

그렇게 골초였던 등소평이 마침내 담배를 끊었던 것은 85세 때인 1988년 3월이었습니다. 북경에서 개최된 제7계 전인대 제1차회의의 어느 날 오후 습관적으로 담뱃불을 붙였는데, 마침 그날이 ‘세계 금연의 날’의 2일째였습니다. 한 대표가 그 모습을 보고 ‘등소평 동지여, 주석 자리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말아주세요’ 라는 글귀 하나를 적어 보냈습니다. 등소평이 보고 나서 웃으며 담뱃불을 껐는데, 이후 담배를 끊었다고 합니다.
등소평의 취미와 오락

등소평이 즐긴 것으로 브리지(橋牌)라는 카드게임이 있습니다. 16세에 떠난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시작된 취미로서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어 북경에 있든 외지로 시찰을 나가든 시간만 나면 동료들과 브리지를 했습니다. 나라의 큰일을 관리하다가 생긴 여가 시간을 소비하는데 가장 이상적인 활동이 브리지라고 하였는데, 홀로 브리지를 즐길 때는 다른 생각은 안하고 패에만 집중하여 두뇌를 충분히 쉬게 해주었습니다. “내가 브리지를 하는 것은 내 머리가 아직 맑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고 하였답니다.

만년의 등소평은 매일 신문, 잡지, TV를 보는 것 외에 각종 운동경기를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때로는 중국의 유명한 소설가 김용(金庸)의 무협소설을 보기도 하면서 머리를 식히고 정서를 조절하기도 하였죠.
브리지 게임 실력이 수준급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등소평.
브리지 게임 실력이 수준급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등소평.
일상생활에서의 장수비결

등소평은 규칙적인 생활을 했는데,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서 8시 정각에 일을 시작하기를 계절에 상관없이 몇 십 년을 지속했습니다. 손자를 매우 사랑하였는데, 매일 오전 10시 전후에 각종 중요한 문건처리를 마친 뒤에는 손자손녀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등소평은 젊고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방법으로 안마를 받았는데, 안마를 통해 건강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등소평과 손자.
등소평과 손자.
등소평의 가장 중요한 장수비결은?

낙관적인 사고를 가진 것입니다. 등소평은 세 번이나 쫓겨났다가 복귀한 ‘삼기삼락(三起三落)’을 제외하고도 자신과 가족들의 불행을 자주 겪었는데, 그러한 역경 속에서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시종일관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하였고, 무슨 일을 당해도 화내지 말라는 원칙을 가장 잘 실천하였습니다. 종종 주변사람에게 말하길 “인생은 마음에 거슬리는 일을 피하기 어렵지만 우수(憂愁)와 화해하고 태연한 마음을 가지며 유쾌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면 신체 건강에 매우 큰 유익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1984년에 독일의 총리가 그의 ‘장수비결’에 대해 묻자 “나는 원래 낙관적이니 하늘이 무너져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키 큰 사람들이 머리로 받치고 있기 때문이죠”라고 했답니다. 일본 산케이 신문기자가 등소평에게 건강비결이 무엇인지 질문하였더니 그가 맨 먼저 드는 비결로서 "나는 모든 일을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북한의 김일성도 그랬다고 하지요. 세계 4대 장수촌인 히말라야의 훈자. 에콰도르의 빌카밤바, 캅카스의 그루지야, 일본의 오키나와의 장수자들은 모두 정신적으로 안정된 낙천적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등소평의 장수비결

등소평의 양생지도(養生之道)는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게 했습니다. 인생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때 유쾌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건강에 매우 유익한데, 태연한 자세를 유지하고 큰일을 작게 만들고 작은 일을 끝난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양생보건의 지식을 알고, 신체 단련을 지속하며 폭음폭식을 하지 않고, 조리에 맞게 하며 조절을 잘 하고 꾸준한 마음을 중시하는 것이 노인의 건강장수비결이라고 하였습니다.

등소평의 얘기를 들어보면 건강관리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수영을 할 수 있고 특히 바다수영을 즐기는 것은 내 건강이 아직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브리지를 하는 것은 내 머리가 아직 맑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의 중국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에 성이 22개나 되므로 각 성의 성장들은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애를 쓰는데, 북경에 와서 당 서기나 총리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장들은 자기 성의 유명한 명의를 함께 데려가서 면담을 신청하는데, 서기나 총리는 명의가 함께 왔다면 선뜻 만나준다고 합니다. 물론 진찰과 그에 따른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건강 컨설팅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인데, 명의는 중의사, 즉 한의사이죠. 조선의 왕들도 닷새마다 한 번씩 의원의 정기진찰을 받았었는데, 그 자리에서 한의학의 전통진찰인 망문문절(望聞問切)의 4가지 종합진찰을 받았던 겁니다.

망진(望診)은 눈으로 보는 진찰로서 얼굴을 비롯하여 눈, 코, 귀, 손톱, 혀를 살펴봅니다. 문진(聞診)은 병자의 소리를 듣고 냄새맡는 진찰로서 말소리, 숨소리, 기침 소리 등을 듣고 환자 특유의 냄새를 맡습니다. 문진(問診)은 병자나 보호자로부터 질병과 관계있는 사항을 아주 자세히 질문하는 것입니다. 절진(切診)은 맥을 짚어보는 맥진(脈診), 그리고 피부와 통증부위 등을 직접 만져보는 촉진(觸診), 두드려보는 ‘타진(打診)’의 3가지입니다.

건강이 악화되어 협상에서 손해를 본 최고지도자

1945년 2월, 소련의 얄타에서 연합국 수뇌인 미국, 영국, 소련의 3개국 정상의 비밀회담이 열렸습니다. 소련에서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회담이 열리는 러시아 황제의 궁전 1층에 있는 니콜라이 2세의 서재를 숙소로 제공하면서 그가 좋아하는 푸른색으로 꾸며주었지만, 스탈린과 처칠은 각각 다른 궁전을 배정받아 매일 출퇴근을 했습니다. 장소를 얄타로 선정한 것도 소련에서는 2월에 따뜻한 곳이기 때문이었는데, 모든 것이 몸이 불편했던 루즈벨트에 대한 스탈린의 극진한 대접이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루즈벨트는 동유럽의 지배권과 사할린, 쿠릴열도의 영유권을 소련에게 넘겨주는 등 스탈린에게 많이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 뿐이 아니고 우리나라에도 엄청난 손실을 주었습니다.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몸이 불편했던 루즈벨트 대통령 때문에 우리나라가 입은 피해

얄타회담에서 한국을 남북으로 분할하여 신탁통치할 것도 결정하고 38도선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그 때까지 소련은 일본전에 참전하지도 않은 상태여서 39도선 정도로 분할 받으면 만족할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소련은 연합국의 대일 참전권고를 무시하고 있다가 그 해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일본의 패망이 확실해지던 8월 8일에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군대를 만주에 진격시켰습니다. 이미 관동군의 전투능력이 상실된 때였으므로 소련군은 8월9일에 쉽게 북한에 진공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38도선으로 결정된 것은 협상이 길어지면서 피로해진 루즈벨트가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쉬고 싶어 서둘러 합의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루즈벨트의 건강이 나쁜 바람에 우리나라도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이죠.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6.25때 서울이 빨리 함락되지 않는 등 전쟁의 양상도 달랐을 수 있었죠. 루즈벨트는 얄타회담 후 불과 두 달이 지난 1945년 4월에 현직 대통령으로 사망했습니다. 64세였죠.

최고지도자의 건강 문제는 특급 비밀

루즈벨트 대통령의 건강 악화는 완벽한 비밀이어야 하는데 소련 정보당국에 간파당해 버린 것이 안타까웠죠.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05년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심한 요통으로 몇 시간 앉아 회의하기도 불편하다는 것을 당시 이해찬 총리가 기자들에게 공표하여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청와대에서 급히 노 대통령의 허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반박자료를 냈습니다. 물론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최근 허리 컨디션이 안 좋아져 부처 보고를 해주시고 제가 먼저 실례할 수 있게 진행해 달라”고 양해를 구했고, 청와대는 “대통령의 허리가 조금 불편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노 대통령의 허리는 취임 전부터 문제였는데, 취임 직전인 2003년 1월 30일에 서울의 개인병원에서 허리수술을 받았습니다. 대통령 당선자였으니 서울대병원이나 국군지구병원에서 받을 수 있지만 개인병원에서 수술 받았던 것인데, 그 병원은 노 대통령의 '동지'이자 후원자가 운영하는 병원이었습니다. 그러면 외부에 알려지기 쉽겠죠.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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