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는 과연 무엇일까?
道의 움직임과 특징을 이해했으니 이쯤에서 멈추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생기를 부여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양면성을 가졌기에 선악이 공존하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존재다. 그래도 道의 정체가 궁금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너무도 적극적이고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극히 피동적이고 내성적이고 수줍어하고 뒤로만 숨으려는 老子의 神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그런 존재를 원자, 時空間, 熱과 중력, 無와 對稱으로 규정하고 살펴보았다. 이 중 하나이거나 모두를 합하여 놓은 존재라 느껴진다. 老子는 이런 존재들을 설명하지 않았지만 道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여러분은 이들 중에서 무엇을 道라고 규정하고 싶은가?
2. 道德經의 교훈 – 나는 누구인가?
천지창조 이전에 有物混成, 先天地生이라는 老子의 표현은 종교, 철학에 깊은 의미가 있다. 잘라 말하면, 세상에 천국도 지옥도 없다는 의미다. 마구 섞여서 정신없이 회오리치는데 천국, 지옥이 있을 겨를이 없다. 善을 베풀어 德을 쌓아서 다시 세상에 올 때 혜택을 받으려 했던 계획이 다 틀어졌다. 아무리 착하게 굴어도, 도를 닦아도 그런 혜택은 주어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움직임과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무리 樸, 谷神, 大象이 무거워서 겉으로는 움직임이 없어 보이지만 그 속에서는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다. 따라서 수양을 통하여 쉬지 않고 움직이는 번뇌와 잡념을 없애려고 노력해도 소용없다. 내려놓았다고 확신하고 돌아서는 순간 다시 번뇌에 빠진다. 우리는 끊임없이 時間을 평가하고 고통 받는다. 이 시간은 좋고, 저 시간은 나쁘다. 熱과 重力으로 만들어진 물질이 좋다 나쁘다 평가하기 바쁘다. 無의 대칭과 균형이 깨지면 불균형이 좋은지 나쁜지 간택하기 바쁘다.
하지만 어쩌랴! 生氣의 본질이 그러하다. 절대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여 어디로 튈지 모른다. 원자의 움직임과 다를 게 무엇인가? 이런 세상을 살면서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주가 팽창하는 이유는 冲氣의 접촉면이 계속 증가하기 때문이다. 충돌 면이 확장한다. 우리 마음도 그러하다. 충돌하면 할수록 잡념은 배가된다. 불확실하고 무의미한 상상이 끝없이 이어진다.
왜 나는 이런 모양인가? 우주법도가 그렇다. 有物混成이자 周行不殆다. 마구 섞여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죽어야 멈춘다. 아니 죽어서도 멈추지 않는다. 육체만 낡아서 버릴 뿐 그 영혼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언제 다시 탄생할까를 궁리하면서. 움직임과 변화가 본질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촐싹거림은 죄악이 아니다. 잡념과 번뇌는 문제가 아니다. 원자구조를 이해하면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멈출 것이다.
그렇다면,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육체를 얻고, 에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번뇌에 시달려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움직임과 변화를 인정하고 멈추려는 시도들이 부질없음을 이해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차분하게 나의 움직임을 따르며 관찰하면 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 움직임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바로 丁壬癸 회오리다. 중력과 척력이 충돌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壬은 계속 균형을 맞춘다. 노자가 주장하는 復, 反, 순환이다. 老子는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꿈꾸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기준이 樸이다.
충돌하여 폭력과 파괴를 통하여 새롭게 창조하려는 움직임과 변화가 우주본성임을 이해하면, 내 번뇌를 멈출 수 있다는 생각으로 움직임을 멈추려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멈출 수 없는데 멈추어서 무엇 할 것인가? 멈추면 죽는다. 丁壬癸로 회오리치는 것이 본성임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모르면 내가 왜 방황하는지 모른다. 방황은 본능이다.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움직임이다.
인간의 눈이 없을 때에는 번뇌는 극히 작았다. 色界에 빠지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淡하고 無味한 세상을 살았다. 눈을 뜨고 화려한 색채에 취하고 빛이 확장하고 열이 만들어낸 열매를 탐하기 시작한다. 學으로 물질을 축적하려는 욕망을 기르고 知와 智를 통하여 賢을 기른다. 이 모든 움직임은 色 때문이다. 老子가 극도로 미워하는 것이다. 생기를 퍼트리고 만물을 이롭게 하려는 道는 빛에 반하여 본성을 잃고 물질을 탐한다. 인간의 탐욕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대가로 죽음을 재촉하는 단점이 있을 뿐.
老子는 道德經 여러 곳에서 길을 인도하고 있다. 23章에서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道는 우리 곁에 머무른다. 同於道者 道亦樂得之, 道와 함께 살라고 한다. 또 38章에서 學을 쌓지 말라고 한다. 죽음을 재촉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이 내 생각을 변화시키는지 이해했다.
冲氣다. 빅뱅 이전도, 이후도 살아도 죽어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老子는 명확하게 이 정체를 설명했다. 신비로운 점은, 冲氣는 절대로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반드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또한 우리의 본능이다. 균형을 유지하려는 神의 의지를 물려받았다. 선도 악도 없다. 선이 악으로 악이 선으로 계속 변한다. 우리는 그 변화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1초에 수만 번을 움직이는데 무슨 재주로 따라잡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따라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善惡을 분별하려는 노력에 적극적으로 게을러지는 것이다. 좋다, 나쁘다를 평가하지 말고 기다리는 것이다. 사람과 사물은 좋다가 나쁘기를 반복하면서 결과적으로 좋다가 나쁘고, 나쁘다가 좋다. 평가를 멈추면 분별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 壬이요 樸이고 深不可識의 상태다. 본질은 절대로 쪼개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평가를 멈추면 움직임이 아무리 빨라도 무의하다. 평가하지 않는데 善惡이 무슨 소용이람?
조금 더 현명하게 관찰하는 방법도 있다. 내가 善惡 사이를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관조하는 것이다. 원자들이 마구잡이로 움직이듯 어지러운 내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 해보는 것이다. 老子의 주장이 맞는다고 할지도 모른다. 樸은 나뉘지 않는다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분리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아름다움과 추함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노라고 외칠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랜 세월 나를 찾으려 해도 찾지 못했다. 움직임과 변화가 우주어미의 본성이기에 고정된 체성을 찾을 수 없었다. 변덕이 본성이었다. 無의 대칭이 깨지고 불균형으로 色界에 나와 중력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바라는 것이 너무 많은데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없다고 투덜거렸다. 이루고 얻어 봐야 시간방망이에게 금방 빼앗길 것을 알면서도 그 집념을 놓지 못한다. 그래도 우리는 生氣를 퍼트리려는 神의 의지를 내면 깊은 곳에 품었다. 만물을 이롭게 하려는 그의 뜻을 따르려는 욕망이 매우 강하다. 우리가 神을 찾는 이유다. 그를 따르고 싶은 것이다. 그가 되고픈 것이다. 내 생각이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나는 神이다.
나는 움직이고 변하는 본성을 품은 불멸의 時間이다. - 時間관찰자.
그대의 삶에서 선과 악을 마주치더라도
괴로움과 고통 혹은 행복과 평화를 맛보더라도
운명의 바퀴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 세상의 바퀴는 그대보다 그 힘이 천 배나 약하도다.
《시간의 탄생》 알렉산더 데만트 지음❘이덕임 옮김